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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그가 남긴 유산
들어가는 말 / 루이 14세가 남긴 유산들 (1) 베르사이유 궁전 건축 (2) 낭트칙령의 폐지 (3)국제 전쟁 1)플랑드르전쟁(1667-68)과 네덜란드전쟁(1672-78) 2)팔츠계승전쟁(Pfalzischer Erbfolgekrieg / 1689-1697) 3)스페인 계승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 1701-1714) (4) 신과 태양과 국왕/ 권력을 온몸으로 말한 루이 14세의 숨겨진 이야기
들어가는 말
이번 성균관대 인문학부 교양과목인 탁명식 교수님의 서양 역사와 문명 수업을 들으면서 참 인상 깊은 이름이 있었다. 바로 루이14세이다. 그는 참 알 수 없었다. 그의 환경 때문이었을까? 그는 개인적 고뇌가 나름대로 맡은 것 같았지만 어찌됐건 그의 행동 하나 하나의 결과는 역사를 장식하였다. 이제부터 루이 14세가 남긴 유산들을 정리해 보겠다. 아쉬운 점은 너무 역사적인 부분이 많아 여기 저기서 옮겨 적은 글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우선 조사한 내용을 정리하고 마지막에 루이14세를 다룬 최근 영화 "왕의 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겠다. 이 영화는 루이14세의 숨겨진 이야기라고 봐도 될 것이다.
루이 14세가 남긴 유산들
(1) 베르사이유 궁전 건축
"짐은 곧 국가다‥‥‥이 말을 루이 14세의 대명사처럼 쓰고 있으나,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회상록을 비롯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다만 전설처럼 전해진 그에 대한 많은 일화 가운데 한 가지, 1655년 4월 어느날, 파리고등법원에서는 안 도트리슈의 섭정 정부에서 제출한 법안에 항의하기 위해서 회의 중에 있었는데, 이 자리에 열 일곱 살의 국왕 루이14세가 승마복 차림에 채찍을 들고 사냥 길에서 들아 온 듯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나 법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짐이 내놓은 법안을 과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검토하고 있는가? 여러분들은 너무 오해하고 있다. 짐을 떠나서는 국가가 없다. 국가 그것은 곧 짐이다. "
이런 이야기도 있다. 수염까지 허옇게 쉬어버린 어떤 궁정 문지기가, 그 앞을 지나가는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자 젊은 국왕은 고에게 "경의 나이가 얼마인고?‥‥‥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나이가 소신의 나이입니다‥‥‥
자기의 나이조차도 국왕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비록 늙은 문지기의 생각만은 아니었고,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프랑스 절대왕정의 모습이다‥‥‥파리의 남서쪽 1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베르사유는 이 궁전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숲이 우거진 여느 한촌과 다름 없었다. 1624년 루이 13세가 사냥 중의 쉼 터로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지었는데, 그 뒤를 이은 소년 왕 루이 14세는 정치를 모후와 마자랭에게 맡기고, 가끔 그의 애인 라 발리에르)와 함께 이곳에 와서 머물다 가곤 했었다고 한다.
여기에 궁전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1661년 9월, 앞서 이야기한 루이 14세가 저문제의 푸케의 보의 성관을 다녀온 뒤, 푸케를 공금횡령죄로 구속하고, “국왕의 궁전이 조신의 저택보다 초라해서야 되겠는가? 즉시 베르사유에 새로운 궁전을 세우라"라고 착공을 명령했다. 사소한 명성까지도 독점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로서는 화려한 푸케의 성관을 보고 시기와 질투와 더불어 오기가 발동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친정을 시작한지 채 6개월도 되지 알았을 때 일이고 보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파리를 몹시 싫어했다. 프롱드의 난 등으로 숱한 고난을 겪었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파리보다는 아늑하고 조용한 베르사유를 몹시 좋아해서 이곳에 궁전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평소에도 애첩과 자주 드나들던 이곳에는 루이 13세 때 지은 작은 집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신축이 아니고 개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어쨌든 저 화려한 베르사유궁전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새로운 궁전 착공의 명령이 내리자, 푸케의 성관을 드나들던 예술가들은 모두 이 새로운 궁전공사에 동원되었다.
건축 담당은 L. 르보, 정원 담당은 르노트르, 전체의 장식 담당은 르브룅 진행은 꼴베르, 총지휘는 국왕 자신, 사람과 돈의 힘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연을 개량하고 정복하는 것이 루이 14세에게는 몹시 즐거운 일이었다. 따라서 돌 하나 옳기고 나무하나 심는 것도 일일이 국왕 자신이 결정했다.
1662년경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된 베르사유궁전은 대정원을 시작으로, 1668년에는 중앙부가 증축되고, 1680년대에는 남북으로 뻗는 일부가 추가되었다. 이런 외형에서부터, 왕의 거실을 비롯하여 궁정예배당, 거울의 방, 전쟁의 방 등이 갖추어지기 까지 2O 수년간의 공사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성급한 루이 14세는 착공 3년 뒤인 1664년 봄, 정원의 일부가 완성되자 이곳에서 그의 애첩 라 발리에르를 위하여 "마법의 섬의 환락"이라는 이름의 대축제를 1 주일간 열었는데, 이곳에 가기 위해 루이 14세가 길을 나서자,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의 연도에는 국왕의 행렬을 보기 위한 인파로 가득 차고, 미완성의 정원에는 조신들을 비롯한 귀족, 군인, 의장대 등이 입추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축제는 기마경기를 비롯해서, 음악, 연극, 무용 등 매우 다양했다. 음악과 무용은 이탈리아 피렌체 태생의 륄리가, 연극은 극작가 몰리에르가 각각 맡았는데, 특히 몰리에르는 그의 유명한 운문희극 "타르튀프"를 여기에서 첫 번째로 공연할 행운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는 이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참석한 귀부인들에게는 평균300 리브르 상당의 고급 보석이나, 금 ․은 세공품의 선물도 빠짐없이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5막짜리 운문희극 타르튀프가 당시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 ․타락을 고발하고, 위선을 풍자한 대담한 희극이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물론, 일반 신자들까지 외면, 시중에서의 공연은 중지 당하였고, 세 차례의 개작을 거친 후 허용되었다고 한다.
몰리에르가 그의 연극이 공연 중지당하여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루이14세는그 를 국왕전속극단으로 임명하고 1만 5000리브르의 연금을 주어 보상하였다고 하는데, 한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으나, 이런 한 번의 행사에 들어가는 이런 저런 엄청난 비용은 왕실의 재정에도 타격을 주었지만, 보다 더 큰 타격은 국민들에게 돌아갔다는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었다.
애첩을 위한 "마법의 섬의 환락"이라는 이름의 축제를 시작으로 루이 14세의 화려한 궁정생활은 계속된다. 왕의 궁전에는 귀족들이 줄을 이어 드나들고, 이미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 물질적으로도 과거의 기반을 다 잃어버린 귀족들에게는 국창 한 사람의 은혜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힘을 잃고 있었다.
귀족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면 몸과 마음은 자유롭지만 먹을 것이 없고, 궁정에 출입하면 먹을 걱정은 없으나 종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리고 국왕의 총애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늘 긴장하고 자리를 지켜 국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반역의 혐의를 뒤집어 써야 했다.
누구도 믿지 못했던 루이 14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방 저 방을 돌아다니면서,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당장 의혹을 품었다. 궁정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국왕에게 눈도장이 찍혀야 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장기적일 때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낄 것이다. 왕이 몸 져 눕기라도 기대해 보지만, 왕성한 체력을 가진 국왕은 지칠 줄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궁정의 하찮은 시중꾼에 불과하다 해도 3만에서 10만 리브르를 내고 사야 하는 당시로서는 이것도 특권이었다. 눈 도장? 지금도 윗 사람에게 그 눈도장 하나를 찍기 위해서 스스로 찾아가 교언영색으로 치장하고 줄을 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래도 출세하는 것을 보면 이것 또한 사회생활에서는 필요악일까? 그래도 루이 14세는 자신이 아랫사람들을 찾아 다녔다니 아랫사람들로서는 어떻게 찾아가야 할 수고는 면해 준 셈이다.
베르사유궁전의 화려한 영화만큼이나 그 영욕의 역사도 가지가지다. 1783년에는 영국 대표를 불러들여 이곳에서 영국으로 하여금 미국독립을 승인케 하였고, 1789년 프랑스 대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분노한 파리시민들에게 타도의 표적이 되어 베르사유로 가자고 외쳤고, 이때 많은 유물들이 흩어졌다. 1871년 파리를 점령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이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 황제의 즉위식을 가짐으로서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가했으나. 1919년에는 다시 이곳에서 독일의 대표를 불러들여 저 유명한 베르사유체제에 굴복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고궁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지금은 세계의 관광객을 이곳으로 모으고 있다.
베르사유궁전을 17세기에 나타난 화려하고 장엄한 바로크 풍의 건축물이라고 한다. 16세기 르네상스 고전양식에 이어 등장한 화려하고 웅장한 새로운 기법의 회화와 조각을 고전미술과 구분해서 바로크라고 했고, 이 말에는 변칙, 이상, 기묘 등의 뜻을 가진 모멸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건축 등 다른 모든 분야로 확대되었고, 그 해석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초엽까지를 화려하고 장엄한 바로크시대‥‥18세기는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지금은 세계의 이름 있는 건축물들이 관광자원화되면서 대부분 공개되고 있다. 베이징의 자금성 만리장성, 로마의 베드로 성당, 인도의 타지마할, 이집트의 피라미드. 보는 사람들에 따라 평가는 다르겠지만, 내가 본 베르사이유는 정원을 제외하면 듣던 것만큼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몇 년 전 페키지 관광단에 어울려 정신없이 돌아본 후, 지금까지 나의 기억에 남아있는 여운이다.
(2) 낭트칙령의 폐지
낭트칙령 이것은 부르봉왕조를 연 앙리 4세가 지루한 위그노전쟁을 끝내고, 신교도들 간의 화해를 목적으로 내린 결단으로서, 구교의 나라 프랑스에서 신교도들도 인정한다는 것이 그 요지라고 할 수 있다. 1685년 루이 14세는 이 낭트칙령을 폐지하였다. 자기의 통치를 위해서는 종교는 하나라야 되고, 그것은 구교, 즉 카톨릭으로 단일화 시켜야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조부 앙리 4세가 이 칙령을 발표한 것은 내란 수습을 위한 일시적인 것이었다는 구차한 설명도 덧 붙였다. 그 결과 카톨릭교도가 아닌 자는 모든 공직과 자유업에서 추방당하는 종교적인 박해가 다시 일어났다. 이런 틈을 비집고 날뛰기 시작한 것이 이른바 용기병들이었다.
용기병이란 16세기에 프랑스에서 생겨난 기병으로서, 이들은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일반기병과는 달리, 이동시에만 말을 타고 실제 전투시에는 말에서 내려 보병전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을 용기병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항상 드래건이라는 이름의 소총을 장비하고 말을 탄데서 비롯된 명칭이라고 한다. 오늘날 기갑 또는 기계화부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들이 신교도를 개종시킨다는 전리를 확보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들 용기병들은 개종을 빌미로 신교도들의 집에 난입, 16세기 신대륙으로 건너간 스페인 병사들이 원주민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약탈과 폭행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결국 장화 신은 선교사란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을 했지만, 공인된 강도단에 불과했다.
이런 핍박을 피해서 수많은 신교도들이 프랑스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숙련공들이었고, 이들이 찾아간 곳은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 그 숫자는 대충 20만명에서 30만명‥‥‥이러한 인력의 손실은 프랑스 국부의 손실이 되었고, 반대로 이를 받아들인 쪽에서는 그만큼 나라를 살찌게 만들었다. 이때의 사실을 대 귀족이면서도 그의 교만함 때문에 루이 14세로부터 버림 받았던 대귀족 생시몽은 그의 회상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고향에서 쫓겨나 입을 것 먹을 것이 없어 우는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은 제각기 뛰어난 기술을 몸에 익힌 채 다른 나라로 갔다. 그만큼 프랑스는 손해를 입었고, 다른 나라를 살찌게 했다‥‥‥‥‥”
이보다 조금 앞서 독일의 뉘른베르크예서는 30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구가 줄고, 많은 전쟁 고아와 미망인이 생겨나자, 10년을 한시적으로 정해서 일부이처제를 허용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1649년을 기점으로 앞으로 10년 동안, 모든 남자들은 두 사람의 아내를 가지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에서 일부다처‥‥그것도 10년이라는 기한을 정해서‥‥‥
같은 시기 영국에서는 심사율이라는 것을 만들어(1673) 카톨릭 교도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을 공직에서 추방했고, 같은 이유 때문에 제임스 2세는 명예혁명으로 왕위까지 잃고 초라한 몰골로 프랑스로 망명했다(1685).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그반대로 카톨릭교도가 아니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직에서 추방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3)국제 전쟁
1)플랑드르전쟁(1667-68)과 네덜란드전쟁(1672-78)
루이 14세는 재위기간 중 플랑드르전쟁(1667-68). 네덜란드전쟁(1672-78),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1689 - 97), 그리고 스페인계승전쟁(1701 - 13) 이라고 부르는4차례의 국제전을 일으켰다. 전쟁의 시작에서 강화조약의 체결까지, 그 기간을 전부 합하면 32년 간, 그가 친정을 한 54년의 2/3를 전쟁으로 보낸 셈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모랜 기간 전쟁의 소용돌이로 왕실과 국민들 모두를 피로하게 만들었을까?
첫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콜베르식 중상주의의 추진, 둘째로 루이 14세의 개인적인 영광추구, 셋째는 국제적인 고립에서의 살아남기 위한 방법 등으로 요약 설명 되고 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절대우위에 있었던 무역에서, 한정된 다량의 화폐를 얻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힘의 우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영토확장이야 말로 군주로서의 권위와 영광을 얻는 가장 매력적인 사업(?)이었다. 프랑스 동쪽인 오스트리아와 남쪽인 스페인에서는 양 합스부르크분가 버티고 있었고, 서북쪽 도버해혐 건너 영국은 스튜어트왕조가 의회와의 충돌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며, 네덜란드와 덴마크, 스웨덴은 신교 국가들이었다. 프랑스는 이들로부터 포위당한 상태에 있었고, 이런 위기감이 전쟁으로 이어 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들 나라들의 군사력은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패자로서 군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강국이라면 단연 영국. 그래서 루이 14세는 고종제인 영국왕 찰스 2세와 도버 협약을 체결하여(1670) 국제적으로 고립을 면하고, 나아가서는 주변을 통합, 유럽에서의 왕 중의 왕이라는 부푼 꿈을 키워 가고자 했다. 이런 것들이 전쟁을 하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못지않은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이미 리슐리외 때부터 싹트기 시작해서 마자랭을 거쳐 루이 14세 때 권리회복 사상과 연계된 자연국경설이라는게 그것이다. 프랑스를 방어해 주는 자연적인 지형, 남쪽의 험준한 알프스와 피레네 두 산맥, 그 사이에 있는 지중해, 서쪽은 대서양이라는 넓은 바다, 동북 쪽으로는 라인강의 물줄기, 이런 자연 울타리가 프랑스의 영역이고, 이곳에는 어떤 외국 세력이 들어와서도 안 되고, 들어와 있는 것과는 싸워서 몰아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전쟁의 당위성을 뒤 바침 하는 또 다른 명분이었다.
이런 일련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군사력의 증강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666년 7만 2천의 병력이 1678년에는 28만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영국의 제임스 2세가 3만의 상비군 육성을 서들다가 의회로부터 냉대를 받은 것에 비교하면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다. 이런 루이 14세의 야망은 플랑드르 전쟁을 유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의 집요한 방해를 받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네덜란드와 직접 전쟁, 이른바 네덜란드전쟁(Dutch Wars)을 유발 시켰다. 네덜란드가 해상무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데 대한 개인적 적개심과, 라인강까지 국경을 넓히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프랑스의 침략을 받은 네덜란드 국민들은 고질적인 계층간 분열을 종식시키고, 오라네가의 빌렘 3세를 중심으로 일치단결, 생명 줄이나 다름 없는 제방을 허물어 홍수작전을 전개하는 등 필사의 저항을 하였고, 한편 프랑스의 팽창을 두려워 한 브란덴부르크 및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양 합스부르크왕가와 손을 잡고 영국과도 화해하여 프랑스를 포위하였으며, 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루이 14세는 더 이상 네덜란드와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와 네이메겐화약(Treaties of Nijmegen)을 체결(1678), 악간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콜베르식 중상주의는 실패했다.
2)팔츠계승전쟁(Pfalzischer Erbfolgekrieg / 1689-1697)
알사스의 북부에 자리잡은 작은 도시 하이델베르크는 황태자의 첫사랑이라는 영화와 마리오 란차(Lanza, Mario)의 이 영화 주제 음악을 통하여, 대학과 맥주와 낭만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중세 이래 독일의 유력한 선제후 팔츠가의 성곽이 자리잡고 있었고. 종교개혁 후에는 프로테스탄트의 거점도시의 하나로서 30년 전쟁 때는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다.
사방을 적으로 만든 루이 14세가 이번에는 독일의 팔츠가에서 남자 후계자가 없어지자 그의 제수가 팔츠가의 출신임을 이유로 그 영토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이에른, 작센 선제후, 스페인,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 아우크스동맹을 결성(1686)하고 여기에 대항하였다.
결국 루이14세는 이들을 상대로 싸우기로 하고, 팔츠령을 침입하여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는데, 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 War of the League of Augsburg) 이라고도 부르는 이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철저한 파괴로 팔츠령 내는 물론, 전장 터가 된 여타 독일과 네덜란드도 그 폐해가 극심하였다.
팔츠가의 왕비가 영국 왕실 출신이었으나, 프랑스와의 정치적인 혹은 종교적인 관계로 용단을 내리지 못했던 영국의 제임스 2세가 명예혁명으로 물러나고, 월리엄 3세가 뒤를 이어면서 영국이 참가하였고(1689), 사보이도 합세하였다. 이 전쟁에서 부분적으로는 루이 14세의 영광을 더해주는 승리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패배한 전쟁이었다.
1597년 스웨덴의 중재로 헤이그 근처에 있는 도시 라이스바이크에서 독일을 비롯한 전쟁 당사국과 각각의 라이스바이크 조약을 체결하였는데(Treaty of Rijswijk), 영국에 대해서는 월리엄 3세의 영국왕위 계승을 승인하였고, 네이메겐조약 이후 획득한 영토는 원래의 주인에게 반환할 것, 독일에 대해서는 라인강 우안으로부터 철병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루이 14세의 패배였고, 영국왕 윌리엄3세의 승리였다.
3)스페인 계승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 1701-1714)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Caries ll / 1665-1700)는 병약한데다가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 앙주공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 필리프가 펠리페 5세(Felipe V/ 1700-46)로서 에스파냐 국왕으로 즉위하였다(1700)
루이 14세로서는 그의 모후 및 첫째 왕비가 스페인 왕녀 출신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스페인의 왕위는 그의 가계에서 이어야 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왕실의 친가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서도 당연히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왔다. 여기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해상무역, 특히 신대륙무역 확보라는 관점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이 통합하여 유럽에서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세 나라는 서로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초기 전세는 프랑스군이 우세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역전되어 육, 해군 모두오스트리아, 영국, 네덜란드의 동맹군에게 연전 연패를 당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공세에서 수세로 입장이 바꿔 가운데, 1713년 영국 네덜란드와는 위트레흐트조약(Treaty of Utrecht)을, 1714년에는 영국의 중재로 오스트리아와는 라슈타트조약(Traite do Rastatt)을, 독일의 제후들과는 바덴조약을 각각 체결하여 전쟁은 겨우 마무리 되 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루이 14세의 베르사유궁전에는 짙은 먹구름이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스페인과 통합하지 않는 다는 전제 조건하에 펠리페 5세의 왕위계승권은 확보하였으나, 신대륙에서 허드슨만 ․ 아케디아 등 식민지 일부와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령 지브롤터와 미노르크섬을 영국에게 할양하여야만 했다.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상업상의 특권을, 프로이센에게는 게르데른 및 스위스의 토지 일부를, 사보이에게는 시칠리아 지배를 승인하는 등, 영국이 가장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잃은 프랑스는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신대륙지배라는 꿈도 좌절되었고, 동시에 영국의 우위를 확정 지었다.
(4) 신과 태양과 국왕
루이 14세가 대외전쟁에서 영광과 치욕이라는 희비가 교차했다면, 국내에서는 그를 둘러싼 아부경쟁이 도를 더하고 있었다. 절대권력자의 그늘에 기생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실제로는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얻기 위해 아첨으로 얼룩진 군상들의 모습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다를 것이 별로 없었다. 원수급의 장군 라 파이아트공이라는 인물은 1688년 제 돈으로 국왕의 기마상을 만들어 빅토리아 광장에 세웠는데, 청동제 바탕에 황금을 입힌 이 금동 기마상의 제막식 날 부하 1개 연대를 동원, 기마상 주위를 세 번씩이나 행진하였고, 매일 밤 그의 아들을 시켜 기마상 앞에 예배용 횃불을 밝히게 했다.
대귀족 생시몽은 그의 회상록에서 이를 빗대여 저열하고 거짓된 이교적인 행위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미 그 자신도 국왕에 대한 갖은 아첨으로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고, 궁정 속의 방 하나를 얻어 거기서 무위도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떤 자는 루이 14세의 애인으로 국왕과 가까웠던 멩트농 부인이 생 시르 학원에 나가는 것을 알고는, 그를 통해서 국왕을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매일 아침 7시가 되면 예배당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과는 허탕, 이렇게 되자 그는 그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소인은 두달 째나 아무리 애를 써도 국왕 폐하를 뵙지 못하였으므로, 차라리 이대로 죽을까합니다‥‥‥‥” 이런 애원 겸 협박조의 편지를 받은 멩트농 부인은 후일 루이 14세와 결혼, 제2 왕비가 되었다.
대사교 보쉬에(Bo$suet, Jacques Banigne / 1627 "1704)는 프랑스교회의 독립과 절대왕정을 변호하는 4개조로 된 왕권신수설을 발표하고, 국왕이야 말로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있는 신이라고 말 했으며, 그 자신 그렇게 믿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고 보니, 루이 14세가 임석한 미사체는 조신을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이 성직자와 제단으로부터는 등을 돌리고 모든 시선은 국왕에게 향하는 기막힌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었다.
국왕은 살아있는 신이었고 궁전은 그를 위한 신전이였다. 루이 14세를 태양왕(Roi Soleil)이라고 부른다. 루이 14세 자신이 위대한 군주를 태양에 비교했고 베르사유궁전 정원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조형물도 세웠다. 카톨릭 국가에서 태양숭배라면 조금은 이상한 일이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다신교 사회에서는 gms한 일이지만, 이 시기 이미 유럽에서는 지동설이 식자들 간에는 일반화되는 추세에 있었고 사상의 발전도 하루가 달라지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보다 조금 전인 15-16 세기 르네상스 시기로서, 이때 크리스트의 이미지는 "인간으로 된 신". 태양은 크리스트교의 최고 전위의 상징적 존재, 국왕은 그들을 합한 신적 인간으로 광범하게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궁정에서 벌어지는 축제나 연극에서도 국왕은 신인으로 표현되고, 그 축제나 연극은 국왕에 대한 예배나 다름없었다.
대개의 구조물이 그러하듯 이 베르사유 궁전 건축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20 수년간 지속된 공사기간 중, 동원된 노동자가 과로, 사고, 질병 등으로 매일 밤 짐차에 시체로 가득 실려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이제 영화 "왕의 춤"에 대한 글이다. 이 영화는 루이14세를 보는 관점이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권력을 온몸으로 말한 루이 14세의 숨겨진 이야기
예술과 권력 사이에는 묘한 함수가 있다. 예술적 힘은 매혹적인 대신 마수와 같고 권력은 그런 힘과 원리 속에서 존재한다. "왕의 춤" 은 그 함수관계를 역사속에서 찾은 영화다. 시대는 17세기 프랑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가 주인공이다. 실질적인 권력은 어머니와 재상에게 있고 루이 14세에게 주어진 것은 음악과 춤뿐이다.
영화는 재상이 죽은 후 권력을 행사하게 된 루이 14세가 예술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예술과 권력의 관계가 흥미롭듯 그 두 가지를 모두 소유한 루이 14세 역시 매력적이다. 루이 14세가 그런 위치가 되기까지는 왕실의 작곡가 륄리의 도움이 컸다. 륄리는 혼신을 다해 작곡한 음악과 사랑을 왕에게 바친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왕과 춤 "의 또 다른 테마는 루이 14세와 륄 리가 가졌던 동성애적 성향이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관계가 동성애였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둘이 공유한 음악과 춤은 그들의 관계가 동성애일 수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굳이 동성애를 언급하지 안차도 그 둘은 서로의 삶에 너무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에 동반자 이상의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루이 14세는 륄리의 음악으로 태앙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자리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었기에 시기와 미움이 뒤따른다. 하지만 왕을 향한 륄리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 영화를 보기 전 루이14세에 대해 조사했던 것은 행운이었다. 영화가 다가오는 느낌이 매우 웅장하고 서글펐던 이유는 아마 그가 남긴 유산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그의 배경 덕이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