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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八正道, 빠알리어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팔정도(八正道)는 빠알리어로
‘아리요 앗땅기꼬 막고(Ariyo aṭṭhaṅgiko maggo)’라 한다.
즉, “Ariyo-성스러운, aṭṭhaṅgiko-8지, maggo-길”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팔정도는 초기불교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에 제시된
근본교리 가운데 하나로서 사성제(四聖諦) 가운데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밝힌 도성제(道聖諦)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자,
중도(中道)를 실천하는 방법이 바로 팔정도이다.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서 말했듯이,
중도가 곧 팔정도이고, 팔정도를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열반이 성취된다.
그리고 열반은 중도에 대한 이해로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중도를 지켜라’는 말은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말라”는 이론적 의미로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팔정도를 실천하라’는 말이 내포돼 있다.
중도는 팔정도의 실천이며, 이는 곧 올바르게 살아가는 실천의 길이다.
따라서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진(瞋)⋅치(癡)의 번뇌를 제거하고,
열반⋅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실천 수행해야 하는
여덟 가지 실천 항목 혹은 여덟 가지 길 또는 그 방법을 말한다.
팔성도(八聖道), 팔정도분(八正道分), 팔지성도(八支聖道),
팔성도지(八聖道支)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모두 여덟 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道)라는 의미이다.
그 여덟 가지 항목은 아래와 같다.
① 정견(正見) - 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 - 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 - 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 - 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 - 올바로 직업을 선택하는 것.
⑥ 정정진(正精進) - 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 - 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고 마음 챙기는 것.
⑧ 정정(正定) - 올바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덟 가지는 단계적인 것이 아니고
상호관련 속에서 동시통합적(同時統合的)으로 이루어지며,
불교적 이상세계에 이른 사람의 삶은
이 여덟 가지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볼 때 불교의 교육목표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팔정도에 의해 수행하고 생활하도록 해야 한다.
빠알리어에서 길(道)은 막고(maggo)라는 단수형으로 표시돼 있는데,
이것은 여덟 개의 길이 전체로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길은 나머지 일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덟 개의 길 가운데 어느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일곱 개의 길이 그 하나에 포함돼서 동시에 행해지는,
서로 포섭하는 관계[상섭관계(相攝關係)]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팔정도의 영어 번역어도
‘Noble Eightfold Path’라고 해서 길(path)을
복수가 아닌 단수로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도 단순한 여덟(eight)이 아닌
팔중(八重, eightfold)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팔정도에서 정(正)자에 해당하는 Samma는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알아차림, 혹은 바르다는 뜻이지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뜻하기도 하며,
이 정(正)에는 세 가지 의미가 포함돼 있다.
첫째 진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흐릿한 생각으로
현상을 잘못 보는 망령됨을 떠난 명석하고 여실(如實)함을 뜻한다.
둘째 전도(顚倒)를 떠나는 일이다. 전도란 관찰과 판단에 임해서
그 순서가 엇바뀌고 진상을 놓치는 일이다.
대(大)와 소(小)를 거꾸로 아는 것, 미(美)와 추(醜)를 잘못 판단하는 것,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마치 영원불변한 듯 착각하는 것 등의 4전도가 있다.
• 상전도(常顚倒)---무상한 존재를 영원한 것인 양 잘못 생각하는 것.
• 낙전도(樂顚倒)---고(苦)라고 봐야 할 인생을 즐거운 것으로 잘못 아는 것.
• 정전도(淨顚倒)---부정한 인간 존재를 청정한 것인 듯 잘못 아는 것.
• 아전도(我顚倒)---무아인 존재를 자아가 있는 것처럼 잘못 아는 것.
셋째 극단을 떠나는 일이다. 즉, 중도에 설 때
바른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팔정도는 욕락과 고행 등의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 빠알리어 majjhima patipada)이며,
올바른 깨침으로 인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올바른 방법이다.
이 팔정도는 중정(中正) ‧ 중도(中道)의 완전한 수행법이므로
정도(正道)라 하고, 8종으로 나눴으므로 지(支), 또는 분(分)이라 한다.
그 하나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정견(正見, 빠알리어 Samma ditthi) = 바른 견해, 바른 안목
정견이란 바른 견해로서 불교의 바른 세계관과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이라 할 수 있고, 사성제(四聖諦)를 바로 아는 지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견은 팔정도의 기체(基體)로서 나머지 일곱 가지 정도의 기초가 된다.
즉, 정견으로부터 바른 행위가 흘러나오고, 바른 생활태도가 선택되며,
바른 수행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계(戒)를 강조하는 정어, 정업, 정명을 앞에 내세우지 않고,
혜(慧)에 해당되는 정견을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우선돼야 하겠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 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정사(正思, Samma sankappa) = 바른 생각
정사유(正思惟)라고도 한다. 몸과 말에 의한 행위를 하기 전의
바른 생각, 바른 의사, 바른 결의, 바른 마음가짐 등
바른 의업(意業)을 가리킨다. 즉,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가지지 말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있어서 바깥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와 갈등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고,
나의 삶을 바로 세우고, 내 마음을 정화하고,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주위에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이 정사유이다.
따라서 출가자라면 출가자다운 유화(柔和:부드러운 조화)와
자비와 충정의 마음으로 사유(思惟)하는 일이다.
(3) 정어(正語, Samma vaca) = 바른 말
바른 어업(語業), 즉 정사유 뒤에 생기는 바른 언어적 행위로서
바른 말을 하는 것이며,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說],
나쁜 말, 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 속이는 말[綺語]을 하지 않고,
진실하고 남을 사랑하며, 융화시키는 유익한 말,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당나라시대 무착(無着) 스님의 게송에,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面上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미묘한 향이로다(口裏無瞋吐妙香).」라는
말과 같이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남을 위하는 공양이요,
사회를 부드럽게 하는 향기가 된다.
(4) 정업(正業, Samma kammanta) = 바른 행위
정사유 뒤에 생기는 바른 신체적 행위, 바른 행동이 정업(正業)이다.
원래 업이란 말은 신(身), 구(口), 의(意)의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모든 행위의 원인이 되며, 그에 따라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란 말이다.
헌데 의업(意業)으로서의 정사(正思)와 구업(口業)으로서의
정어(正語)가 이미 앞에 나왔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정업이란 주로 신업(身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른 행위란 바로 몸의 행동(身業)을 바르게 함을
가리키는 말로서, 살생, 도둑질, 음란한 짓을 하지 말고,
다른 존재들의 생명을 애호하고, 곤궁한 자에게
시여자선(施與慈善:자비로 베풂)하며, 술, 담배, 마약과 같은
중독성 물질을 복용하거나 보관하지 않는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정업, 즉 바른 행위이다.
(5) 정명(正命, Samma ajiva) = 올바른 직업
그릇된 생계수단을 버리고 바른 생계수단으로 살아가기,
바른 직업에 의해 바르게 생활하는 것,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도박이나 도둑질, 남을 속이는 일, 바가지를 씌우는 등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생활하면 안 된다.
그리고 출가 수행자의 경우에는 재가 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팔정도는 도덕적 기준을 초월하고 있다.
예컨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정명의 입장에서는
사형수의 목을 치는 망나니는 온당한 직업이다.
또한 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정명이기도 하다.
수면⋅식사⋅업무⋅운동⋅휴식 등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건강이 증진되고, 일의 능률도 향상되며, 경제생활과
가정생활을 건전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6) 정정진(正精進, Samma vayama) = 진지한 노력
정근(正勤)이라고도 하며, 용기를 가지고 바르게 노력하는 것,
이상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이른다.
종교⋅윤리⋅정치⋅경제⋅건강의 모든 면에서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으로,
바로 사정근(四正勤)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정근은 아래 네 가지이다.
•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隨護斷),
•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며(修斷),
• 이미 생긴 악은 끊도록 노력하고(斷斷),
•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律儀斷).
(7) 정념(正念, Samma sati) = 바른 마음 챙김
사념(邪念)을 버린 올바른 마음챙김(mindfulness)과 올바른 알아차림(awareness)으로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이나 정신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의 행위
혹은 마음작용(심소/心所)을 말한다.
즉, 자기 자신이나 주변의 것을 올바르게 알아차려서
탐⋅진⋅치 3독심에 휘둘리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이른다.
팔정도에서 한국인에게 가장 잘못 알려진 것이
바로 "정념(正念: Samma-sati)"이다.
염(念)을 글자그대로 단순하게 '생각'으로 직역한데 기인한다.
빠알리어 'sati'는 결코 생각이 아니다.
영어 'mindfulness'은 가장 무난한 번역어라고 본다.
그리고 옛날 중국에서 'sati'를 '염(念)'이라 한 것은
매우 의미 깊은 번역인 것 같다. ‘念’을 파자해 보면
금(今: 지금 바로 이 순간) + 심(心:의식, 마음) 으로 나뉘는데,
"의식이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깨어있음"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북방 대승불교에서
정념(正念)을 '과거의 생각을 올바로 기억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지만 원래 의미는 현재 남방불교에서
의미하는바와 같이 '현재의 마음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정념 수행은 남방에서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을
정착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최근 서구심리학자들은
'sati - mindfulness'수행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명상치료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즉, ‘염(念)’은 들숨 날숨의 호흡을 통해
‘들뜨거나 산란하지 않은 마음 상태’에서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anupassī) 따라가
마음을 멈추게 해 본래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sati(mindfulness)’는 마음을 집중해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글에서는 ‘마음 챙김’으로 많이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바른 의식을 가지고 이상과 목적을 언제나 잊지 않는 일이고,
사념처관(四念處觀)을 확립하는 일이다. 사념처관은 아래와 같다.
• 마음은 늘 대상에 따라 변화하고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라는
제법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 - 심념처관(心念處觀).
• 자아라고 할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으므로 소유도 없다는 진리를 파악하는 것,
즉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 - 법념처관(法念處觀).
• 모든 것은 괴롭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
즉 자녀⋅재물 등이 즐겁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실은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것은 불완전하며 고통[苦]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 수념처관(受念處觀).
• 이 몸은 부정하다(身不淨)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에서 일어나는 탐욕을 극복하고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고는 것. - 신념처관(身念處觀).
이상과 같은 내용들이 모두 정념 속에 포함될 정도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8) 정정(正定, Samma samadhi) = 바른 선정
팔정도의 마지막 목표는 정정(正定)이다. 정정은 산란한 생각을 여의고,
마음을 가라앉혀 고요하고 평정되게 바른 정신 집중을 하는 것,
즉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해서 정신통일을 하는 삼매(三昧)
혹은 선정(禪定)을 가리킨다. 정(定, samadhi)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 dhyana)이기 때문에 이를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마음이 산란하다는 말은 번뇌가 많다는 말이기도 하므로
정정은 번뇌를 소멸시켜 열반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팔정도의 앞 7항목은 모두 정정을 이루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정정을 닦아야 지혜(prajna)를 얻게 되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번뇌를 털어버리고 열반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 항목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성도를 이루는 각 부분이며,
여덟 가지는 일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기 때문에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이 이야기 되고 있는
사마타(奢摩他, śamatha)는 고요함, 적멸,
사마디(삼매)를 목표로 하는 명상이다.
그리고 사마타는 계(戒)⋅정(定)⋅혜(慧) 삼학의 정(定)에 해당하며,
지관(止觀)에서 지(止)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마타는 정정(正定)에 이르는 기초라 하겠다.
깊은 선정은 일반인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바른 지혜를 얻거나 지혜를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 필요하다.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심지어 들에 나가 일을 해도
정신집중이 안 되고, 마음이 산란하면 능률이 오르지 않고 발전이 없다.
이상의 팔정도야말로 실천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깨달음이나 해탈⋅열반의 실현을 위해서 반드시 닦아야할 덕목이다.
그리고 팔정도는 순서대로 실천해야 하다.
정견을 닦아야 정사가 생기고, 정사를 닦아야 정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이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 항목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성도를 이루는 각 부분이며,
여덟 가지는 일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기 때문에 별개의 것이 아니다.
또한 팔정도를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과 관계 지어 보면,
정견 ‧ 정사유---→ 혜학,
정어 ‧ 정업 ‧ 정명---→ 계학,
정정진---→ 삼학에 공통되고,
정념 ‧ 정정---→ 정학.
또 팔정도를 정진과 수행의 측면에서 분류를 하면,
정견---바르게 보는 것,
정사 ‧ 정어 ‧ 정업---바른 행위,
정명---바른 생활,
정정진 ‧ 정념 ‧ 정정---바른 수행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곧 팔정도는 사성제⋅12연기와 함께 불교의 기본적인
근본 교의가 되는 것이고, 중생을 미혹의 세계인
이곳(차안)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으로 건네주는 힘을 가지고 있어
배(船)나 뗏목(筏)에 비유되기도 한다.
참고로, 과연 부처님께서 직접 팔정도를 설계해서 가르치신 것일까?
초기에 부처님은 무아론이니 윤회가 없다느니 하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초기의 경전인 <숫따니빠타(Suttanipata)>와 함께
가장 오래된 경전 가운데 하나인 <법구경>을 보면,
무아론이 중심이 아니라 내세에의 믿음과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한 올바른 실천윤리였다.
부처님은 초기에 인연에 따라 상대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었을 뿐이다.
학자도 아닌 부처님이 ‘론(論)’ 중심의 법을 설하지 않았다.
무아론, 12연기, 사성제, 팔정도라는 명제는
부처님이 평소에 하신 말씀들을 학자들이 나중에
그러한 말들을 모아 이론체계를 세운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