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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계(慶南道界) 19구간
2016. 4. 11(월)
산길 : 산주리~지릿재
사람 : 객꾼 학봉 가을남 조은산
거리 : 11.2km / 05:00
산주리~녹대산~수도지맥 분기~만대산~노태산~지릿재
중앙처리장치(CPU)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했다.
하드웨어(손가락)는 CPU의 명령대로 움직이는데, CPU가 꼬이니 하드웨어는 따라 놀 수밖에 없다. 스맛폰 알람을 04:30으로 입력해야 하는데 05:30으로 설정을 한 것이라.
06:00 내서에서 학봉
07:00 합천군청에서 객꾼
08:00 산주리에서 가을남 만나 산행시작.
이런 일정을 하달해 놓고, 그 시작인 나부터 1시간 늦게 일어났다.
늘 여유롭게 움직이자. 약속시간에 늦는 일을 인생사의 엄청난 비극으로 여기는 신조를 갖고 살아왔는데, 내가 1시간 늦어지니 줄줄이 자동으로 밀린다. 그것도 학봉이로부터 “도착했음” 카톡을 받고서야 눈치를 챘으니, 내 맘대로 따라주지 않는 이 고장난 CPU를 우찌해야 된단 말이고?
만 60년째 썼으니 그럴만도 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써먹을 날이 쏠찮게 남았는데 말이다. 그나마 다들 동생들이라, ‘나이 탓’이라는 핑계를 대며 넘어갔지만, 나보다 더 오랜 연식이라도 있었으면 무슨 변명을 했겠노?
합천 시내에서 아침을 사 먹기로 한 계획을 수정하고, ‘각자 아침밥’ 통보에 따라 지릿재로 바로 올라가기로 했다. 다행히(?) 1시간의 여유가 생긴 학봉이는 도로 들어가서 아침밥을 먹고 내꺼는 행동식으로 준비를 해줬다. 기다란 빵을 배를 갈라 속에다 둥글고 긴 소세지 하나에 샐러드를 끼워 넣은거였는데, 영 내 입맛은 아니더라만 지금 내 상황이 쓰다 달다 말할 입장도 아니더라.
지릿재에서 만나기로 한 객꾼은 역시나 객꾼답게(!) 지릿재를 못 찾고 방황한다. 아래로 터널을 뚫고 4차선 새 도로가 났는데, 옛길로 올라가는 길을 못찾는거라. 몇 번이나 터널을 왕복하다가 포기하고는 ‘율곡치안센터’ 앞에서 기다린단다. 그 치안센터 앞 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지릿재가 나오는 것을...
15년 묵은 내 차, 한계치가 넘도록 마구쎄리 밟았더니 늘어진 시간이 절반은 단축이 된다. 지릿재에 차 한 대 대놓고 산주리로 넘어가니 가을남은 한밤중이다. 이 친구는 약속시간보다 1시간을 먼저 왔다하니 도합 2시간을 기다릴뻔 했다. 지 차를 가져왔기 다행이지 택시나 다른거로 왔더라면 우얄뻔했노?
꽃같은 남자 (#&%_^*?>$_@.@)
08:10 산주리 (85m)
08:50 녹대산 (△377.6m)
10:22 매화재 (530m)
10:38 만대산 (△688.4m)
11:38 노태산 (498.4m)
13:03 △307.6
13:12 지릿재 (230m)
야간근무 들어가는 친구가 있어 일찍 마치기 위해 짧게 끊었다. 1시간 늦게 출발하고도 13시에 마쳤으니 여유로와 좋다. 점심은 내려와서 먹기로 하고 간식으로 대체했다.
녹대산 오름길과 뒤편 내림길이 다소 어수선 했고, 이후는 지맥급으로 별 무리없이 나가다가, 매화재부터는 산주리 마을에서 올라 온 만대산 일반등산로가 양팔을 벌리고도 남을만치 활짝 열렸다. 만대산 여기저기 물들인 진달래를 내세워 고령군에서 등산로를 새로 손을 본 모양이더라. 이 길은 노태산 덜 가서 마을로 내려가 버리고, 이 후는 수도지맥과 겹치는데 잡목에 옆구리 제법 쓸렸다만 그리 나쁘지는 않더라.
산주리
경북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
마을입구에 [고령신씨 시조묘역] 표석이 서 있다. 오늘구간 최고봉인 만대산 이름도 그렇고 또, 우리같이 마루금을 타는 사람들이 교훈처럼 받드는 산경표와도 연관이 있어 짚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신숙주, 신경준, 신경수. 고령신씨 세 분이다.
신숙주 (申叔舟 1417~1475)
숙주나물의 유래에 등장하는 신숙주는 수양대군을 도와 단종의 폐위에 동참하므로써 절개를 버리고 영달을 도모했다 하여 쉽게 상해버리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전해온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신숙주는 하찮은 나물 하나로 덮어버릴 위인이 아니다. 단종폐위에 주도적인 인물은 한명회(韓明澮)였고, 당시 신숙주는 외직에 나가있을 때라 계유정란(단종폐위)에 직접적인 역할은 한 바가 없다. 자신의 출세영달을 위해 주인을 배신하는 행위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不事二君을 외치며 사육신에 추가하여 혹은 사칠신(死七臣)으로 기록되었을 신숙주 보다는 그가 남긴 업적이 국가발전에 기여한 바가 더 크기 때문이다.
네이버 인물사전 기록을 요약해 보면,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생원ㆍ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해 벼슬에 나가, 집현전 학자로, 중국어, 여진어, 몽골어, 일본어, 인도어, 아라비아어 등 7개의 언어를 구사했다 한다. 이런 언어적 재질이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기량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성삼문과 같은 해에 과거급제 했는데, 요즘말로 고시동기생인 것이다.
요동과 명나라를 13차례 다니면서 조선초 외교(外交)를 주도했고, 26세 때(세종 25)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 사행에 동참했다. 일본 본토와 대마도를 거치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했다. 특히 대마도주를 설득해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확정한 것은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세종 32년 중국에서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 등 중국사신들을 접대하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1454년(단종 2) 도승지를 시작으로 병조판서, 좌우찬성, 대사성을 거쳐 40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으며(세조 3) 5년 뒤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영의정이 되었다.
예종 때 한명회, 구치관(具致寬)과 함께 원상(院相)에 임명되었고, 성종이 등극하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어 4년간 재직했다. 이처럼 화려한 관력 외에도 그는 정난(2등), 좌익, 익대, 좌리(1등)공신에 책봉되는 유례없는 훈력(勳歷)을 누렸다. 이런 관력과 훈력은 당시 그와 함께 가장 중요한 대신이었던 한명회와 더불어, 아마도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화려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신숙주의 다섯 형제 중 막내인 신말주(申末舟)는 세조가 즉위하자 처가인 순창으로 낙향했는데 (이후 진주목사 등을 역임) 그 신말주의 11대손이 바로 山徑票의 저자(?)로 알려진 신경준이고, 현시대에 “살아있는 산경표” 신경수님이 바로 고령신씨 후손이라.
신경준 (申景濬 1712~1781) 자 순민(舜民), 호 여암(旅菴)
대표관직(경력) 종부시정, 동부승지,·병조참지, 제주목사
영조의 명으로 ≪여지승람 輿地勝覽≫을 감수하고, 1770년에는 문학지사(文學之士) 8인과 함께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여지고 輿地考>를 담당하였으며, 이어서 그 해 6월 6일부터 8월 14일까지 ≪동국여지도 東國輿地圖≫의 감수를 맡았다.
산경표의 저자에 대해서, 『한글산경표』(현진상. 풀빛 발행)의 결론 부분만 발췌하면,
『산경표』는 영조 46년(1770)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집필한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순조 즉위년(1800) 경에 누군가 만든 것이며, 편자는 알 수 없다.
옛 문헌의 제작시기와 저자를 확실히 하는 일은 중요하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고 들어가야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산경표를 따르는 우리(산꾼들)의 관심사는 특정인의 업적을 논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다.
산경표가 세상에 알려지고서야 백두대간을 알았고 정맥, 기맥, 지맥을 이야기하게 되었음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만큼 산경표는 우리 산꾼들에게 있어서는 경전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세부적인 사항에 있어서는 보다 더 넓고 깊은 이해가 필요하리라 본다.
어쨌든 신경준은 산경표를 태동하게 한 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고,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산경표를 쓴 이는 그 말미 참고문헌 목록에 ‘신경준의 여지고’를 기록해야만 하는 것이다.
신경수
윗 분들과 달리 현재 살아계시는 분에 대해 어떻게 언급을 하겠나. 내 짐작으로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두 발로 걸은 순위로 치면 1번이 아닐까 싶다. 또, 선조님의 산경표를 세상에 전하고 후세에 잇기 위해 혼신의 정열을 불태우는 그런 분이다.
"살아있는 산경표" 신경수님
밑에서 쳐다본 비석의 글은, 고령신씨 제실은 아닌모양이더라.
녹대산 들머리
녹대산으로 오르는 길이 예상외로, 영 없지는 않더라. 잡목이 걸리긴 하지만 크게 성가시지는 않고, 대신 해발 300을 한순간에 발딱 쳐 올리는 급비탈이 더 밉더라. 낙엽이 두텁게 깔린 비탈이라 죽죽 미끌린다.
녹대산 377.6m (△합천415)
좁은 공간에 굳이 산 이름을 달만한 봉우리도 아니겠더라만, 삼각점이 있고 설치한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녹대산] 팻말이 걸려있다. 한 눈에 딱 보니, 대구사람 김문암님 작품이네. 다들 한 숨 돌리는 막간을 이용하여 오름길 내내 붕붕거리던 시름도 들어냈다.
녹대산에서 넘어 가는 길은, 정면으로 그대로 가는 길은 산주리 마을에서 올라 온 일반등산로이고, 도계는 약간 우측 2시방향으로 내려간다.. 아직 숲이 들어차지도 않았는데 능선을 가늠하기 어려우니, 숲이 다 들어차면 방향 잡기가 더 어렵겠다. 너무 오른쪽으로 쏠렸나. 가시덤불에 빠졌다가 탈출하고, 안부에 내려서고부터 뚜렷한 길이 나온다.
매화말발도리
×570.1
왼쪽에 보상사에서 올라 온 길과 만난다. 10시방향에 보이는 만대산 북쪽 벼랑에 진달래군락이 여기저기 뭉쳐져 불그스레한 빛을 낸다. 가을남이 그 장면 하나 잡아볼려고 카메라를 들고 내려갔다 온다만, 기대한 조망처는 없더란다.
진달래 향연이 시작된다
수도지맥 분기봉 (560m)
우측 토곡산을 거쳐 온 수도지맥 마루금을 만난다. 합천군 묘산면과 합천읍, 고령군 쌍림면이 갈라지는 삼면봉이다. 가을남은 얼마전 여기까지 끊으며 달아놓은 지 리본을 보고 반가워 죽을라 한다.
경남도계 = 경북도계, 고령군계 = 합천군계
수도지맥 분기봉인 560봉을 내려오면 당산나무가 있고 좌우로 흐릿한 고갯길이 있어 매화재인가 싶었는데 작은 봉 하나 살짝 넘으니 더 넓은 고갯길이 나온다. 여기가 매화재다. 산주리에서 올라오는 길은 계단이 설치되었고 등산로는 활짝 열린다. 만대산 일대 진달래 군락지를 살려 고령군에서 등산로를 확장한 모양이다.
매화재 (540m)
매화재는 고령군 쌍림면과 합천군 합천읍 용계리를 이어주는 교통로 역할을 하였으나 현재는 등산로로만 이용되고 있다.
산주리 등산로
미숭산, 가야산이 보일 장면인데
만대산
만대산 (萬代山 688.4m △합천24)
고령신씨가 이 산에 시조 묘를 쓰면서 만대(萬代)에 영화(榮華)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만대산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북쪽 자락 산주리 만대산 등산로 입구에는 고령신씨(高靈申氏) 시조이자 신숙주(申叔舟)의 선조인 신성용의 시조 비와 묘가 있다.
1배, 국~태~민~안
2배, 구~구~팔~팔
3배, 마~눌~수~호
4배. 로~또~당~첨
산 사람에게는 1배, 죽은 사람에게 2배, 부처님께 3배, 산신령께는 4배가 원칙이라~
만대산 얼레지
헬기장을 지나 10여분 고도를 낮춘 안부에서 다시 올라가면 ×545.5봉이고 넘어가면 넓은 등산로는 정면으로 계속가는데, 앞선 이들이 다 멈춰있다. 우측에 길도 없는데로 리본이 잔뜩 걸려있기 때문이라. 만대산 등산로는 정면으로 해서 산주리 보상사로 내려가고 경남도계(수도지맥)은 우측 인데 뚜렷한 능선도 아닌 급비탈에 길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따르라, 우틀이다"
만대산 일반등산로는 직진, 경남도계(수도지맥)은 우틀,
우측비탈로 미끄러지듯 내려가면서도 다들 이길이 도대체 맞기는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흔적이 없다가 순식간에 고도 130m가 떨어진 안부에 이르니 길흔적이 다시 살아난다. 노태산은 다시 100m를 올라가야 되는데, 그나마 전위봉격인 직전봉은 왼쪽 사면으로 살짝 질러간다.
노태산 498.4m
경상대 최원석교수는 경향신문에 연재한 [우리 산의 인문학]에서 노태산을 공자의 노(魯)나라와 태산(泰山)을 조합하여 붙인 이름이고, 조선시대에 공자를 숭모하는 유교지식인이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 본다. 노태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개실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 1651년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5세손이 은거하면서 세거지를 이룬 유가(유교)집단의 정체성이 뚜렷한 마을이라는 근거를 들었다. 또 산주리의 녹대산도 발음이 변하면서 노태산의 잔영으로 보인다고 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282117215&code=210100&s_code=af147
왕령지맥의 끝자락 현풍 도동서원 뒷산인 대니산(戴尼山)도 공자(尼)를 받드는(戴) 산이라는 유래도 그렇고, 전국적으로 공자와 관련된 산이름이 많다. 태산도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중국으로부터 신문물이 수입되면서 당시의 지식인이자 지도층을 형성한 유교학자들은 중국따라잡기에 서슴없이 앞장 섰을 것이다. 어디 산 이름만 그렇나. 우리 제례의식 전부가 중국산 아닌가.
준희님 팻말 줄이 풀려 아슬하게 달려있다. 팻말 보수하청을 받은 몸이라 그냥 갈 수 있나.
더 높은곳에 야무지게 달았다.
소나무가 밀림을 이룬다
이제 이름 있는 산은 다 지났으니 내려만 가면 지릿잰가, 기분은 앞서지만 산길은 자꾸 늘어난다. 지저분한 산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트이고 넓은 길이 나와 좋다했더니, 송전탑을 설치하면서 낸 길이고 그 길도 잠시 밟고는 다시 덤불길이다. 지릿재 도로가 보이고 차소리도 크게 들린다. 새로 난 지릿재 터널 윗쪽을 지나면서도 아직 산길은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이어지고, 마지막 삼각점봉은 또 한번 땀을 빼게 한다.
307.6m (△합천307)
지릿재 (230m)
경남 합천과 경북 고령을 잇는 옛 33번국도. 새로 4차선 도로가 뚫리면서 우리같은 산꾼 아니면 올라올 일도 없는 도로가 되버렸다. 고갯마루를 지키는 우람한 당산나무와 건너편의 [내고향 율곡면] 표석이 수도지맥의 잔상을 되살려준다.
북쪽으로 내려가 안림천을 건너면 쌍림면 귀원리다. 지난구간 미숭산에서 내려올 때 [귀원]을 가리키는 팻말이 있더만 이 마을을 안내하는거였다. 쌍림면 소재지인 귀원 삼거리에 들어오니 院이 들어간 마을이름에서부터, 예전부터 주요한 길목이었음이 보인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貴院里)
조선시대에 안림역에 딸린 구생원(救生院)이 있어 구생원·귀손·귀빈·귀원이라 하였다. 고을 원이 살던 집이 있었으므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귀원 식당
돼지고기 1인분 더 넣어달라 했더니 푸짐하기가 넘쳐난다.
첫댓글 제 블로그 글을 카피해 오다보니 경어체가 아닌점 양해하시고요
혹, 선배님께 결례가 되지 않을까 염려도 됩니다.
ㅎㅎ조은산님께서 산기를 올려주시니 카페가 빛을 발합니다
아울러 산경표이야기까지 해주시며 널리 알려주시어 무어라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 옛날 마눌과 같이 가야기맥을 답사하면서
만대산 아래 시조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뵙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리곤 합니다
내년 시제떼는 찾아보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주 찾아주십시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