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정벌을 마친 카이사르가 공화 정부 원로원과 대립하다가 결국 원로원의 명령에 불복하기로 결정하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여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폼페이우스와 다퉈 승리하고 로마에 입성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 되기 3년 전에 중동지역 젤라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한 후 승리를 기념하여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왔노라(Veni), 보았노라(Vidi), 이겼노라(Vici) 고 적었다. 이 글귀의 일부는 육군사관학교 응원구호 무락카로 인용되고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한 것은 기원전 44년 2월이었다. 종신 독재관이란 '공화정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카이사르가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로마에는 원로원이나 호민관, 시민회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종신 독재관이 등장하면서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본래 독재관이란 로마 공화정에서 위기관리 시스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존망의 유사시에 두 명의 집정관이 독재관을 지명하면 그 순간부터 집정관이나 호민관 그리고 입법권을 가진 시민회도 무력해진다. 독재관이 결정한 정책은 시민회를 통하지도 않아도 정식 법이 되고 호민관 최강의 무기인 거부권 발동 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즉, 이것은 독재관 재임 중에는 로마의 공화정이 정지된다는 것과 같았다. 카이사르는 독재관에 '종신' 이란 한 마디를 붙임으로써 로마의 정치체제를 사실상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카이사르는 대공화정을 폐지하고 새로운 정치체제인 제정 로마로 이행시킨 것은 바로 '로마의 혼미'였다. 로마의 혼미는 원로원 주도 체제가 초래한 것이었다. 어떤 제도라도 그것을 인간이 만든 이상 '규모의 한계'를 면할 수 없다. 포에니 전쟁에 의해 로마의 영토가 급성장한 시점에서 이미 공화정의 수명은 다했다. 로마의 세력권이 이탈리아 반도의 안쪽에 머물고 있던 단계에서는 공화정은 실로 잘 기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가 우리의 바다' 된 시점에서 원로원은 기능 저하를 일으키게 되었다.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려면 스피드가 필요하다. 원로원 체제하에서는 반란을 제압할 군대를 파견하는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원로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지지 않으면 집정관은 군단을 파견하는 일조차 할 수 없다. 정책 하나를 결정하는데도 훨씬 시간이 많이 걸렸고 논의만 분분한 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을 때도 많았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해 실행하려고 했던 개혁은 '재구축'이었다.
개혁이란 우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질이나 특징 중에서 어떤 것을 살리고 어떤 것을 버려 조합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서 재구축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는 '패자도 동화 시킨다.'는 로마의 전통에 충실했다. 카이사르는 개혁의 첫 단계로 식민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카이사르가 '식민 도시'를 각지에 건설한 것은 로마 시민을 늘림과 동시에 실업대책, 로마 병사의 재취직 대책이라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로마의 속주는 '운명 공동체'의 길을 확실히 걷기 시작했다. 그밖에도 통화를 개혁하고 율리우스력도 제정했다.
로마는 건국 이후 500년 가까이 자신이 만든 통화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가 최초 통화를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난 후 기원전 267년이다. 카이사르는 동맹국 이집트에서는 천문학자, 그리스에서는 수학자를 초빙하여 달력 제작에 착수한다. 1년이 365일로 4년에 한 번 윤년이 오는 태양력이었다. 이것이 율리우스력이다. 율리우스력은 16세기 그레고리오력이 나오기까지 유럽의 표준 달력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랫동안 유럽과 지중해 세계 그리고 중동까지도 널리 사용되었다. 카이사르는 속주 통치 방식에 대해서도 분권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카이사르는 공화정 시대부터 원로원 의원 중에 뽑아 임명하던 '속주 총독'은 그대로 이어나간다. 본국에서 파견되는 속주 총독은 속주의 군사, 징세, 사법, 행정의 총책임자라 할 수 있다. 카이사르는 속주마다 지방 조직을 만들게 하고 그 기관에 일부를 맡겼다. 광대한 로마 영토를 통제하기 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면 통치가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경우에 따라 시행했다. 카이사르가 로마와 속주의 일체화를 도모하고 로마 국가 정체를 운명공동체로 이끈 것은 로마를 고도성장에서 안정 성장 노선으로 이끌기 위해서 였다.
로물루스 시대로부터 포에니 전쟁에 이르는 약 600년의 세월은 한결같이 확대 노선을 진전시켜 왔다. 그러나 이러한 확대 노선도 정점을 맞는다. 그것이 포에니 전쟁이었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 후에도 로마의 정치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성공 체험이 너무나도 화려했기 때문에 진로 변경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승자의 혼미' 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로마 연합'이다.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로마 연합은 사실상 존재 의미가 없어진다. 이미 로마나 이탈리아 반도를 적이 침략해 오지 않게 되어 방위를 위한 동맹을 맺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로마는 전과같이 연합을 유지해려 했다. 그리고 이 모순 때문에 일어난 것이 동맹자 전쟁이었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이른바 공격의 시대에서 방비의 시대로 접어든 것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카이사르는 장래의 로마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이 필요하며 더 이상의 영토확장은 필요 없다고 인식하였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세력 범위는 라인강 까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확대가 필요없다고 판단했다. 게르만인은 원래 수렵민족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어 그들을 로마화 하려면 굉장히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라인강의 방위체제를 확립해 게르만인을 봉쇄하는데 전념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렇게 되면 갈리아 땅은 저절로 평온해지고 로마도 반란이나 침입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판단하였다. 그런 까닭에 우선 갈리아 땅에 군사를 이끌고 원정에 나선 것이다.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방위선은 라인강과 도나우 강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라인강 방위선 확립을 위해 갈리아 전쟁을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동방의 파르티아에도 원정을 나가 유프라테스 강 방위선을 확립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나우 강 방위선을 구축할 예정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대원정은 그가 암살 당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방위 구상은 제정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계승 되었고 로마 제국의 안전보장 시스템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진정 카이사르야말로 로마 제국을 위한 '그랜드 디자인'의 설계자였다. 카이사르에 의한 로마 제국의 안전 보장 구상은 로마사 뿐만 아니라 후대의 유럽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실 현재 서 유럽 도시의 상당수는 카이사르 이후의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군단 기지나 식민 도시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단적으로 유럽은 고대 로마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도 대영제국의 역사는 기원전 55년 8월20일에 시작되었다라고 했다. 카이사르와 군단이 영국에 상륙한 날로부터 영국사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갈리아 원정을 구상한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를 타도하지 않고서 갈리아 원정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직접 원정길에 나선다. 당시 브리타니아는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을 지원하는 거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원정을 시도했지만 브리타니아를 완전 제패해 속주로 만들지는 못했다. 브리타니아가 로마에 편입된 것은 1세기 후인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가 되어서 이다.
카이사르의 관용은 너무나도 철저했다 반대 세력들을 결코 탄압하지 않았다. 적군도 아군도 없는 일치단결한 로마의 탄생을 바랐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자 자신의 호위대를 해산시켜 버리고 무방비 상태로 돌아다녔다. '신변 안전을 걱정하며 사는 것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내가 자유를 준 사람들이 다시 나에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번민하고 싶지 않네. 나 스스로 다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 생각에 충실하며 사는 것이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네.' 라고 편지를 썼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안녕을 위해 원로원 의원들을 모아놓고 '카이사르를 적대시 하는 사람은 원로원에게도 적이다. 그 적으로부터 카이사르의 몸을 지켜줄 것을 맹세한다'고 하였다. 원로원에서 행한 이 맹세가 있고 불과 2개월 후인 기원전 44년 3월15일 카이사르는 BC 53년에 크라수스 파르티아인들에게 당했던 비참한 패배를 앙갚음하고 만회하기 위해 새로운 군사 원정을 떠나려던 참에 '카이사르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고 확신한 마르쿠스 브루투스 이하 14명의 원로원 의원들에 의하여 암살 당한다. 이 때 카이사르의 나이 55세였다.
암살자들의 칼에 찔려 원로원 회의장 바닥에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카이사르가 한 것은 스스로의 유해를 보기 흉하지 않게 하려고 토가의 옷자락으로 몸을 감싼 일이었다. 암살자들은 로마의 장래를 걱정해 카이사르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화정체제는 로마의 자랑이며 로마 영광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는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가 이미 실행하고 앞으로도 실행하려는 개혁이 로마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카이사르 스스로 왕이되어 로마를 다른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브루투스 동지들은 로마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카이사르 암살을 결의한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라는 전대미문의 지위에 취임하면서까지 행하려고 한 것은 로마라는 국가를 지키는 것이었다. 로마를 지키려면 공화정을 폐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카이사르의 각오이며 우국의 정이었다. 지성을 높이 평가한 키케로 마저 카이사르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이란 어차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밖에 보지않는 존재'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진심을 완벽하게 이해한 단 한 사람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옥타비아누스, 나중에 초대 로마 황제가 되는 아우구스투스였다. 카이사르 사후에 공개된 유언장에 자신의 후계자로서 당시 18세 밖에 안된 여동생의 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지명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아 카이사르의 성을 잇도록 지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으며 군인로서나 정치가로서의 실적이 전무였다. 카이사르 만큼 지식이나 군사적인 면으로 뛰어나지 않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카이사르에 필적할 만한 정치적 감각과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은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그의 사후 공식 명칭은 신격 카이사르(Divus Caesar)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