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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입니다.
혹시 신앙의 열정, 처음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이다. 만일 단 하루라도 기도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열정을 잃을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이 식어지고 처음 사랑을 잃게 된 이유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기도하면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기도의 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기도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힘입어 감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밤중에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고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제자들과 떨어져 혼자 남아 기도하셨고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고 골방에서 기도하셨고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습니다. 시시때때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도 겟셋마네 동산에 올라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일곱 번 말씀을 하셨는데(가상칠언) 그중에 세 번이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것을 저들이 알지 못하오니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기도가 습관이요 생활이었습니다. 기도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1.그러면 기도가 무엇이기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기도는 소통입니다. 누구와의 소통입니까? 하나님과 소통입니다. 한나가 자식이 없어 서러움에 받쳐 성전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엘리 제사장이 보니까 음성은 안 들리는데 입술만 중얼중얼하는 것을 보고 포도주를 끊으라고 했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삼상1:15). 기도는 하나님과 심정이 통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소통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것!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것입니다. 한나만 아니라 그 아들 사무엘도 하나님과 소통했습니다. 사무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통합니다. 그런데 엘리와 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어떠합니까? 불통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음성도 듣지 못하니 당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삼상3:1). 예수님도 아버지와 얼마나 심정이 통하는지, 소통하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과 심정이 통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내 말을 항상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소통하시길 바랍니다. 세상과만 소통하지 마시고!
오늘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즉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를 내려놓는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제목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본문 41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복종의 의미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당신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닌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되길 축복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으면 사람에게 무릎 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항상 무릎 꿇는 자는 사람에게 무릎 꿇을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어 자신의 뜻을 온전히 내려놓았는데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또 하나의 의식이 구약에서 신발을 벗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과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신발을 벗으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룻4:7).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원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겟셋마네 동산에서 신발을 벗어놓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네 발의 신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네가 계획하고 전략을 세운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계획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할 수 있었고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먼저 우리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바른 자세요, 바른 의미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심정이 통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 신발을 벗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2.그리고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본문 44절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예수님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예수님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그러니 땀이 핏방울처럼, 비오듯 흘러내렸습니다.
혹시 기도하다 땀을 흘려보셨습니까. 흘러내리지는 않더라도 혹시 땀이 나도록 기도해보셨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땀을 흘리는 때는 언제입니까? 찜질방에서만 땀이 납니까? 열심히 일할 때만 땀이 납니까? 살 빼느라 운동하면서 땀 흘리십니까? 이제는 기도하다 땀을 흘려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힘쓰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기도할 때 떠나려는 천사를 붙잡고 씨름하느라 땀을 흘렸을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비 오기를 일곱 번이나 기도했는데, 이때 엎드린 채 머리를 무릎에 넣고 기도했다고 했으니 분명 등에 땀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한 과부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을 분주히 찾아가서 부탁하느라 아마 발에 땀이 났을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땀이 납니다. 눈물도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땀과 눈물을 병에 담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56:8). 우리도 이런 기도가 회복되길 축복합니다.
3.왜 우리가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지만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40절입니다.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또 46절에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유혹에 넘어집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사방에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데 밤낮이 없습니다. 장소와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불뱀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많은 유혹과 시험을, 불뱀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기도해야 이깁니다. 기도로 막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이 유혹인지, 시험인지, 불뱀인지도 모릅니다. 피아식별이 안 됩니다. 군인이 야간 보초서다 졸리면 저 앞에 있는 물체가 사람인지 돌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것 같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하는 것인지, 넘어지게 유혹하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 있도록, 깨어 있어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시험도 유혹도 받으셨습니다. 광야에서 금식한 후에 마귀가 찾아와 시험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찾아와 수없이 시험하고 올무를 만들어 걸려들게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많은 시험과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기도로 이기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도 유혹을 받았습니다. 외부에서 온 유혹이 아니라 내면에서, 마음에서 일어난 유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지나가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앞두고 이러한 번민을 갖고 기도드린 것은 당연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것을 감당해야 할 육신의 고통이 너무도 크기에 그리 안하고 싶은 육신의 유혹이 왜 없었겠습니까. 예수님도 이러한 유혹이 있음을 숨기지 않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바람과 생각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인 십자가의 죽음도 순종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신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대로라면 예수님이야말로 몸만 쳐서 복종시킨 것이 아니라 내면의 유혹도 쳐서 복종시킨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도 외부에서 오는 시험도 많고 내면의 유혹도 언제나 있습니다. 조금 바람만 불어도 바다에 물결이 일어나듯 우리 마음에도 수시로 유혹이 일어납니다. 그 유혹을 이기셔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마음 빼앗기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기도함으로써!
4.끝으로 제자들은 왜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한 번 찾아와서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세 번이나 찾아와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했습니다(마26:43,44). 본문 45절에 보면 제자들이 잠든 이유가 나옵니다. 너무 슬퍼서 잠들었답니다. 너무 슬프면 잠이 잘 듭니까? 너무 괴롭고 무거운 일이 있으면 잠이 잘 옵니까? 믿음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솔직히 반대입니다. 너무 염려 근심이 많으면 잠이 안 옵니다. 잠을 못 이룹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정말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리고 저들의 눈이 피곤함이더라고 했습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제자들이 왜 잠들었습니까? 눈이 피곤해서, 육신이 연약해서, 마음이 너무 슬퍼서입니다. 그 밤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음이 울적해서 길을 나선 것이 아니라 산에서 그만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잠 든 이유를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39절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제자들은 어떻게 갔습니까? 따라 갔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라 갔다는 것 자체의 의미는 좋은 것이고 잘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따라 가야지 마귀를 따라 가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즉 적극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거저 따라 갔다는 의미입니다. 친구가 시장엘 가니까 따라 가듯이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니까 그냥 따라 간 것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러 산에 오른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거저 따라 간 제자들의 차이입니다. 그러니 잠이 안 오겠습니까. 철야기도 가자해서 한 번 따라 갔더니, 새벽기도 가자해서 한 번 따라 갔더니 잠이 와서 죽는 줄 알았다고 하는 분! 잠이 오면 그냥 오는 거지, 죽기는 왜 죽습니까마는... 이런 경험이 혹시 있으십니까? 영화를 보러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재미있다는 것을 알고 보러 간 사람은 잠이 어떻게 옵니까, 대사 하나 놓칠 까봐 마음과 귀를 집중합니다. 그런데 따라 온 사람은 십 분도 안 돼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립니다. 잘 자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재미 하나도 없더라”라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기도생활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따라 가는 신앙이 되지 말고 이끄는 신앙이 되길 축복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따라 하고, 남이 드리니까 나도 드리고 남이 안 하니까 나도 안 하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이끄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심정이 통하고 신을 벗고 무릎을 꿇으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시험과 유혹도 능히 이기고 달려가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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