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이야기
한 번에 다 하기 어려움으로 여러 번에 나누어 이야기 하기로 한다
구룡포 행
지난 토요일
월요일부터 휴가이니 사실상 오늘부터 휴가다.
최근들어 역류성식도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친구가 답답해 하기에 그를 데리고 대구를 벗어났다.
그도 나도 정해둔 갈곳을 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망서리다가 가급적 피서객을 피하여 구룡포에 가기로 결정했다
오후 2시경 쯤 구룡포 도착
이른 봄에 과메기축제로 떠들석하던 드넓은 주차장에는 폭양만 내려 쬘뿐 인적조차 없다.
다들 조금 북쪽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간 모양이다
그래도 도로변 식당 앞에는 집집마다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는 길손 그림자에다 대고 굽신이며 호객한다. 그 전에는 아주머니들이였는데 풍속도가 조금 바뀌었다
나와 친구는 호객녀로부터의 민망함을 덜 받으려고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마치 식당을 찾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며 어느집으로 갈까를 상의했다.
식당을 점 찍고는 마치 아는 사람 집 찾아가는 것 처럼 불이 나게 들어간 다음, 철지난 러시아 산 게 한 마리와 회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는데 역류성 식도염을 앓는 친구가 맵고 짠 자극성 있는 음식과 술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게는 친구 차지가 되고 술과 회는 거의 내 차지가 되었다.
내 입에는 술 안주로는 역시 게보다 회가 나았다.
음식점 사장은 자연산 회라고 하지만
먹는 나는 항상 자연산 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먹을 뿐이다.
그러는 것이 마음 편하다.

일본가옥 거리
점심을 먹고 나니 갈 데가 없다
그런데 구룡포를 여러번 지나 다닐 때마다 주차장에 서서 마을 언덕을 쳐다 보면 숲이 욱어진 한 곳이 있다.
저런 곳이면 의례 절 이거나 신당 이거나 아니면 누구네 제실 이거나 뭐 그런 것 들이기 마련이므로 궁금해 했었는데 이참에 가보기로 했다.
식당 주인에게 저 곳을 어떻게 찾아가느냐고 물었더니 공원인데 거기 가면 아주 시원할 것이라며 식당 뒷골목 "일본집 거리"를 가다 보면 올라 가는 계단이 나온단다
일본집 거리?
무슨 말이지?
갈챠주는 데로 가니 정말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건축한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 곳에 살았던 일본인들 후세들이 이따금 찾아온단다.
구룡포에서는 이 골목을 보존하여 일본인 관광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란다.
300여미터를 따라들어가니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는데 계단 입구 좌측에는 "용왕당입구" 우측에는 "구룡포충혼탑입구"라고 새겨진 석조 기둥을 위시하여 계단 양 옆으로 약 1미터의 간격으로 공원을 다 오를 때까지 공원 조성을 위한 유지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이 열립해 있다



구룡포 공원
공원에 올라서니 구룡포항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공원 내의 시설물
공원 안에는 풍어제를 지내는 용왕당 건물과 시원한 솔바람 아래 8각정 쉼터와 충혼탑이 있고, 탑의 기단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받침대 시설물이 쇠줄로 보호 되고 있었다
충혼탑의 내력
이곳 충혼탑은 6.25사변으로 포항(당시 영일)지역 전몰군경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0년에 세운 것인데, 당시 재정이 열악하여 지금의 충혼탑 우측후방 약 2미터의 거리에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세운 일인들의 충혼탑의 상단 비석을 제거하고 그 받침대 위에 비석을 바꾼 다음, 받침대에 새겨진 일본인들의 글을 시멘트로 발라 메우고 그 위에 다시 우리글을 새겨 세운 것인데 2007년 9월에야 비로소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지금의 위치로 새로 건립하였단다.
그래서 그 받침대를 보면 발라메운 시멘트가 풍화작용으로 떨어져 나가자 인인들이 새긴 글과 우리가 새긴 글이 겹쳐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각하니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를 착잡한 감정이 일었다


일인들이 세웟던 충혼탑의 받침대
1960년에 우리의 충혼탑을 세울 때 이 위에 비석만 바꿔치기하여 세웠단다

겹쳐 새겨진 글자

또 하나 이상한 탑
충혼탑 앞에서 바다쪽을 바라보는데
아래 쪽에 충혼 탑보다 훨씬 큰 또 하나의 거대한 비석이 보이고 비석 뒷면에는 무었이 쓰였던 것 같은데 허여케 되어 도무지 알아볼 수 없다

내려 가 전면을 보니 가운데 부분 역시 자연석이 아니라 무언가 쓰여졌던 것을 시멘트로 발라 가려 놓은 것이 분명하다.
이 곳 노인장에게 물어보았으나 일인들이 세웟다는 것만 알 뿐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데 잠시 후 "일본인 가옥거리 홍보전시관"에 가서야 의문이 풀렸다
일제시대 일본에서 가난에 굶주리다가 삶을 찾아 황금어장 구룡포를 찾아와 정착하면서 부를 누리게 된 일인 어부들은 가가와 출신의 하시모도 젠키치 패와 오키야마 출신의 도가와 야스브로 패로 둘로 나뉘어 극심한 알력과 세력다툼을 하였단다.
그렇게 세력다툼을 하던 두 세력은 구룡포에서 계속 부를 누리려면 방파제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같이 하게 되었고 그래서 두 세력은 제휴를 결심하고 "구룡포축항기성동맹회"를 조직한 다음, 1935년에 방파제 축조를 마치고 새운 비가 바로 이 비라는 것이다. 지금의 구룡포항 모습은 그 때 형성된 것이란다
남의 나라에 와서 주인을 밀어내고 주인처럼 행세하며 자기들 끼리 다투다가도 항만걸설이란 공동목표를 세우고 서로 화해하여 목표를 이루었다니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이 본 받을 만한 교훈이 아닐까 한다.

타버린 불심
내가 카매라를 들고 이것 저것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본 마을 노인장 한분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더니 충혼탑 옆의 작은 집을 가리키며 저 접에는 90노인이 독거하면서 일출사진을 찍으러 다닌다며 마을 뒷동산에 가보라며 일인들이 세운 절도 있단다.
이 곳 한 낮에 일출 볼일이야 없겠지만 10여 분이면 올라간다기에 뒷동산을 찾아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 불에 타버린 작은 절터가 보여 올라가보았다
송덕비석는 내무부장관님으로부터 학교장님에 이르기 까지 각계 기관장님들로부터 감사장을 받은 어느 스님의 송덕비로서 두마리의 석사자가 지키고 있는데 비석에 입석년월일의 기재가 없는 이유와 건물이 불타버비린 까닭은 알 수 없다.
석상이 되어 버린 스님의 뒷모습은 인간세상을 등진 것 같기도 하고 인간세상으로부터 왕따 당한 것 같기도 하다



일인들이 창건했다는 절
지금은 어느 종파의 누가 관리할까?
저기까지는 10여 분을 걸으면 될 것 같으나
폭염 때문에 이 쯤에서 멈추면서
여기서 보는 동해나 뒷동산에 올라서 보는 동해나 그게 그거 일 것이라고 자위했다

사찰과 그 마을에서 내려다 본 동해바다
해수욕장은 크지는 아니 한가보다

일본인 찻집
녹차를 마셨는데 특이한 점 모르겠다

일본인 가옥거리 홍보전시관
1층은 현재 수리중이어서 관람불가다

2층 복도

2층 실내
전시장으로 꾸며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