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 오셨네.”(루카 7,16)
기후 환경의 위기 탓인지 장마가 장마답지 못하고 소나기성 폭우와 이어지는 폭염이 계속 반복되는 7월의 넷째 주일인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 제 17 주일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조부모와 노인의 날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신앙의 전수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며 그들의 소명을 격려하고자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하셨습니다. 이에 한국천주교회는 보편 교회와 함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7월 26일)과 가까운 7월 넷째 주일을 ‘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지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같은 오늘 이 미사 안에서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작은 나눔의 실천으로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열왕기 하권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언자 엘리사를 통해 이루신 빵의 기적을 전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이 소출한 맏물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 하느님의 사람인 예언자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경작한 수확의 첫 결실인 맏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한 해의 농사를 지켜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의 표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바친 맏물은 그리 대단할 것이 없는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새 누룩을 넣어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을 담은 자루 하나가 그 맏물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대단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극히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작은 맏물을 받은 엘리사는 당시 율법 규정상 맏물로 바친 제물은 사제인 자신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그 제물을 그곳에 모인 군중들이 먹을 양식으로 나누어주라고 명령합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2열왕 4,42ㄷ)
이 말은 들은 시종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제인 엘리사의 몫인 맏물로 바친 제물을 군중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한 것도 어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 네 사람이 먹기에도 충분치 않은 이 작은 양의 음식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은 더욱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시종의 마음이 엘리사를 향한 다음의 말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시종은 엘리사에게 이렇게 항의하듯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2열왕 4,43)
그러나 엘리사는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이루어 주시는 일이라는 굳은 믿음을 드러내며 시종의 항의를 무시합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대로 제물을 나누어 주자 엘리사가 말한 그대로 그 자리에 있던 군중 백 명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을 전하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빵의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복음의 기적 이야기의 구조와 내용이 오늘 제 1 독서가 전하는 엘리사의 빵의 기적 이야기와 거의 일치한다할 정도로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표징들,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병자들이 낫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많은 군중들이 모여 들자 예수님은 산 위로 자리를 옮기시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식사시간이 가까워지자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예수님의 이 질문은 오늘 복음의 요한 사가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필립보에게 그 답을 얻기 위한 물음으로서의 질문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인 필립보를 시험하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정말 군중들을 먹일 빵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많은 군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지 제자인 너희들은 과연 그 답을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필립보는 마치 오늘 제 1 독서의 엘리사의 시종의 대답을 연상시키는, 아니 시종의 대답과 거의 일치하는 다음의 말로 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 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요한 6,7)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라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 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보통 노동자의 일 년치 연봉 정도의 액수라는 점에서 필립보의 대답 속에 언급된 돈의 액수는 어마어마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많은 군중들을 배불리도 아닌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기 위해서 그만큼의 큰 액수의 돈으로도 충분치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필립보의 말 속에서 그가 예수님의 질문에서 느낀 어이없음과 그를 넘어선 그의 짜증 섞인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이 시간까지 이 많은 군중들을 데리고 이야기를 하시면 어쩌자는 것인가, 해가 지기 전에 이들이 각자 먹을 것을 찾아 먹을 수 있도록 그들을 떠나 보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놓고 이제서 묻는 질문이 이들을 배불리 먹일 빵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냐니, 이 분이 과연 제 정신인가라는 이런 저런 생각들로 필립보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 때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소개시켜 준 안드레아가 이번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온 한 아이를 예수님께 인도해 줍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 하는 말 속에서 그 역시 필립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제게 와 이것을 주기에 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긴 하였지만, 이 보잘 것 없는 빵과 물고기가 이 많은 군중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마음으로 안드레아는 예수님께 말씀을 건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 1 독서의 엘리사의 시종이 엘리사에게 보인 반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제자들의 이 같은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엘리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시고 아이가 가져온 빵과 물고기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그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먹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자 그제야 그곳에 모인 모든 군중과 제자들은 이 분이야말로 약속된 메시아임을 확신합니다.
이처럼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한 목소리로 하느님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이루어진 빵의 기적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이 기적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풍성한 사랑의 기적에 앞서 아주 작고도 보잘 것 없는 나눔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사가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기적을 행하기에 앞서 하느님께 드릴 제물로 바칠 작은 양식, 곧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담은 자루가 있었습니다. 또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오천 명이 넘는 허기진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행하기에 앞서 한 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작은 나눔, 겉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보리 빵과 물고기 조금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눔을 통해 큰 사랑의 기적, 곧 배고픔에 시달리는 모든 이들의 허기를 없애주시고 그것을 넘어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신다는 사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빵의 기적 이야기는 이 같은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빵의 기적 이야기 안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루시는 성체성사의 기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육적으로 배고픈 군중들을 빵으로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께서 이제 곧 이루어질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당신 자신을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제물로 바치시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성체성사, 곧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모든 허기짐을 채워주시는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로 우리를 초대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성사가 우리 모두를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의 끈이 되어 우리를 성령 안에서의 평화로 이끌어 준다는 진리,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 진리를 오늘 제 2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서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사랑하는 송동 교우 여러분, 오늘 화답송의 시편저자의 외침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손을 펼치시어 우리를 당신의 은혜로 가득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은총으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나의 희망을 주시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 주시고, 그렇게 하나가 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화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과 평화가 매일의 미사 안에서 재현되는 예수님이 이루시는 빵의 기적, 곧 성체 성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매일의 미사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육신의 허기짐뿐만 아니라 영혼의 온갖 굶주림마저도 채워주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초대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생명의 빵인 성체를 모시고 오늘 독서의 소박하지만 자신이 소출한 맏물을 하느님께 바친 이름 모를 농부처럼, 그리고 오늘 복음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어린 아이와 같이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한다면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그리고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드린 작은 예물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기쁨과 평화 속에서 언제나 희망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당신 손을 펼치시어 저희를 은혜로 채워 주소서.”(시편 145(14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