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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
21년 9.29
육체
에테르체 - 에너지로 구성, 영을 구성하는 주관적 경험의 자리, 감정체 포함, 두뇌에 정보를 전달,
유체이탈시 육체에서 분리되는 에너지 체.
멘탈체 - 하위멘탈체(사고, 언어, 학습 -> 지적장애), 상위멘탈체(추상적 사고 -> 천재)
영적정보 저장 -> 높은 에너지 장이 활성화되어야 경험적인 것이 됨. 스승-무언의 전달-은총
멘탈체 너머에 영체가 있음. 의식이 진화함에 따라 상위영체의 출현
선형적 세계
기억 - 장기기억, 단기기억, 해마, 편도체, 기억, 인출
비선형적 세계
참나 vs 에고의 나
에고중독, 내적쾌락중독, 나르시시즘
이 과정에서 기억은 정보저장, 자기애적 과대평가, 환상의 창고역할
'기억에 대한 평가를 낮추고 거기서 에너지와 관심을 거두세요'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에고해체의 길
기억, 환상의 창고 -> 에고중독, 내적쾌락 -> 감정의 증폭
겸손함으로 신에 내맡김
오직 신에게 기쁨, 쾌락, 행복을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엄격한 자기반성과 겸손함이 요구됨
'에고의 단물을 포기할 때 내면의 평화가 들어선다'
호모 스피리투스 18 무심
서론
육체와 부합하는 것은
에너지로만 구성된 에테르체다.
에테르체는
'영을 구성하며 주관적 경험의 자리'이다.
그것은
'두뇌에 정보를 전달하고
뇌신경 회로를 활성화'시킨다.
유체이탈 체험에서
에테르체는
육체에서 분리된다.
유체이탈 상태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움직이고
듣고 보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면에
육체는
그때 완전히 휴면상태에 들어가
기능하지 않는다.
인간에게서 에테르체
또는 상위 에스트럴체(구체적 사고)는
물론 감정체를 포함한다.
(여기서 체란 사실 육체가 아닌 에너지 장).
멘탈체 너머에는
'영체'들이 있는데,
이 영체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이름(원인체, 붓다체, 크리스트체, 아트마체 등)을 얻었다.
'상위 영체'의 출현은
의식진화와 병행하며
지상의 시간으로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다.
초기 인류는
사고 형태와 언어생성을 동반하는
하위 멘탈체의 개발과
구체적 학습을 나타낸다.
호모사피엔스는
상위 멘탈체가 진화했는데,
이는 의미의 미묘한 차이들 및
종류 및 범주와의 상호관련을 동반한
추상적 사고능력을 나타냈다.
전체 인구에서
멘탈체가 개발된 정도는
지적장애에서 천재에 이르기까지
편차가 크다.
또한
'영적 에너지 체계의 개발정도'는
사람마다 격차가 크고
유전적/카르마적 소질을 반영한다.
많은 개인에게
영적 능력은 미숙하고
잠복해 있거나
혹은 기능적으로 발생기에 있다.
이러한
영적 능력은
영적관심을 통해 그리고
영적으로 봉헌했거나
동기부여가 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활성화된다.
그러므로 역사상 위대한 스승들은 수행자들에게
"성스러운 벗을 구하라
그리고 온전치 못한 이들을 피하라"
라고 충고했다.
영적 정보는
'멘탈체에 저장'되며
교육적이고 유용하지만
그것은 앞선 영적 스승의 현존에서 발산되는
고주파에 의해
높은 영적 에너지 장이 활성화되기까지는
경험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고주파 에너지 장의 전달은
말없이 비언어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고전적으로 은총으로 일컬어진다).
'은총'은
카르마적으로 각인되며
상위 영체에 에너지를 불어넣음으로써
내면의 주관적, 경험적 인식으로부터 이해가 비롯되도록
빛을 비춰준다.
붓다의 역사적인 말없는 전달은
따라서 '무심의 전달'이었다.
(역설적으로 불교 문헌에서는 마음을 대문자 M을 넣어 한 마음 Mind으로 쓴다). 이는 의식혁명에서 묘사한 동승현상을 실증한다. 동승현상은 익명의 알콜중독자회와 같은 12단게 회복모임에서 유명한데, 입회자는 꾸준히 모임에 나가기만 하면 삼투가 일어나 저절로 알게 된다는 조언을 받는다. 이 단체의 오라(540)에 노출되면 기적적인 회복이 이루어진다.
중독이라는
대단히 강력한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아주 강한 에너지 장이 필요하다.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로 그 에너지 장의 보호안에 머물면 금주상태가 지속되지만 자신의 의식수준이 필요한 수준인 540까지 발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장을 떠나면 알콜중독이 재발한다.
의식발전 및
영적 깨어남을 향한 문은
'겸손함'이다.
우리는
온전함 바로 아래의 의식수준이
자부심(고전적 의미에서 에고)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자부심은
장애이며
내맡김을 통해 제거된다.
참나 찾기
사건(생각을 포함하는)은
의도 및 우세한 조건의 귀결로서
나타남속으로 들어온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일으키는
인과관계와 같은
그러한 과정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정신작용은 예외가 아니다.
이원적 지각은
프로그램된 시간 궤도를 포함하는데,
시간궤도는
사고과정 자체를 포함하는
보통의 경험함 위에 포개져 있다.
마음은
그 다음에 생각의 행렬이
다음과 같이 발전한다고 추정한다.
개가--> 고양이를 --> 쫒아서 --> 나무 --> 위로 --> 올라간다
------------------------------------------------------>
시간
사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것이 가장 낫다
개가 고양이를 쫒아서 나무 위로 올라간다
<------------------------------------->
무시간
모든 생각은
비언어적 침묵의 공간에서 일어나는데,
이 공간은
생각 형태가 출현하기
직전의 식별가능한 찰나이다.
이 관찰결과는
생각자체의 내용 대신에
생각이 일어나는 에너지 장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포착할 수 있다.
관상이나 명상중에
이러한 연습을 하면
내용 대신 불변의 맥락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것은
목격자/관찰자로 불리는
의식의 장이며,
이것이 없다면
사람은 생각나고 있는 것을
알거나 등록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장은
자율적이고 의지적인 것이 아니며
의식의 한 성질이다.
붓다는
불심(무심)의 영원한 비언어적 공(비어있음)을
생각과 생각사이의 틈에서
식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들 사이의 간격(만분의 1초로 측정되는)을
식별하려는 시도는
그 속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침묵의 모체에 대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상을 식별하는 것만큼이나
성공 가능성이 낮다.
붓다는
동일한 현상을 그저 다르게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지껄이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다 포괄적이고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으며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침묵의 앎 또한 있음을 관찰'하는 것은 간단하다.
내용보다는
맥락에 주의를 집중하는
관상이나 명상은
사람의 정체를
일시적이고 의지적인 것(그래서 개인적으로 되는)에서
앎이라는 불변의 성질자체로
이동하는 일을 용이하게 해준다.
이는
사람이 내용의 세부가 아닌
장이라는 발견을 이끌어 준다.
이러한
비약적 각성은
매우 갑작스러울 수 있는데
이는 사토리 수준이다.
'의식적 앎의 장(사토리)'은
시간 궤도를 갖지 않으며
침묵하고 자율적이고
수월하고 평화롭고
전부를 둘러싸며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자유롭고 속박되어 있지 않고
자연발생적이고 고요하며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다.
이 장을
발견하는 것은
간단하고 쉽고 편안하다.
사토리 각성은
노력이 아닌 허락의 귀결이다.
그것은
얻어냄이라기 보다는
내맡김이다.
각성에 대한 욕망과
통제하려는 에고의 강박관념을 포기할때
장은 저절로 인지된다.
전통적으로
에고 프로그램의 포기는
여러 생에 걸리는 힘겹고 험난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사실은
일체를
신에게 깊이 내맡기는 것은
깊은 겸손함과 자발성 있다면
이행은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음의 길은
느린 과정으로도 혹은
갑작스러운 과정으로도 보일 수 있다.
각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가 의식자체임이 밝혀질때
이원적 지각의 지배는 사라지고
드러남에 이르는
최후의 문이 가까이 있다.
토론
마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주관적 앎에는
생각, 감정, 혹은
이미지(침묵하는, 멎어있는, 움직이지 않는, 온전히 현존하는)와 같은
내용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에고가 제거될때 실상은 저절로 드러납니다. 어떻게 그러한 상태를 이룰 수 있을까요?
몇가지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진짜 나'는
마음도 아니고
마음이 믿는 바나
느끼는 바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그런 것은
진짜 내가 아니라
인상적인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직시함으로써 벗어나세요.
마음을
나 대신
그것으로 부르세요.
진짜 나는
마음에 대해
선험적으로 존재합니다.
진짜 나는
맥락이지요.
개인용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기억은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있고
그로 인해 자기애적으로 과대평가됩니다.
하지만
기억은
사실 다량의 지각 프로그램을 저장하고 있을 뿐
그중 어느 것도 실상은 아닙니다.
기억은
환상의 창고입니다
기억에 대한 평가를 낮추고
거기서 에너지와 관심을 거두세요.
그러면 개인적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정말 나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오래된 금언은
사람을 오도하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저 에고의 내용을 더욱 자세히 아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에고는 왜 그렇게 극복하기가 어려울까요?
사람은
에고에 중독되고
에고의 내용에 푹 빠지게 됩니다.
에고는
사람의 관심 전부를 끌어당기고
그래서 사람은 마음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만일
사람이
마음과 마음의 내용을
진짜 나로 믿는다면
그러한 집중은 확실히 이해할만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오류는
순진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마음은
흥분과 스릴, 신기한 것으로 가득한
유원지 입니다.
또한
감정의 드라마와
사회적 동일시가 펼쳐지는
부조리극 극장이기도 하지요.
마음은
그것이 개인적 성격화, 극화,
표현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연기입니다.
에고에서 벗어난다고 했을때 사람들은 대개 부정성이나 자부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들 그렇습니다.
영적 추구를 시작할 때
사람들은 부정적 기질과 반응을 발견하고
당황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동물 반응성이
인간적으로 정교하게 지속되는 것일 뿐임을 알고
초연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지요.
원숭이 섬에서 관찰되는 영토전쟁은
나라들 간의 영토전쟁과 똑같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원숭이들이 더 똑똑해서
전쟁을 계속할 경우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할때는
후퇴한다는 것입니다.
코끼리 무리는 190으로, 팬더는 185로, 기린은 180으로, 원숭이 집단은 125로 측정되지만 현재의 중동은 75라는 사실에 주목하세요.
에고를 해소하는 단순한 방법이 있습니까?
예,
내적 정직함에 전념함을 통해
에고 반응의 기초가
그러한 반응에서 얻어지는
쾌락임이 명확해질 것입니다.
자기 연민, 분노, 격노, 증오,
자부심, 죄책감, 두려움 등이
가져다주는 대가는
내적만족감이지요.
병적인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적 쾌락이
그 모든 감정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감정을 증식시킵니다.
감정의 영향력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수상쩍은 내면의 은밀한 쾌락을
기꺼이 포기하고
신에게 내맡기는 것과
오직 신에게
기쁨, 쾌락, 행복을 구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마음은
처음에는
괴로움에서 은밀한 쾌락을 얻는다는 것을
부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엄격한 자기반성이 있을때
마음이 자신의 내용에 달라붙는 것은
자신이 위치성에서 짜내는
단물 때문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약간의 자기 정직성만 있어도
이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상당히 쉽지요.
모든 사람이
분개에서 순교자나 희생자가 되는데서
오해를 받았거나 감시받지 못했다는 느낌 등에서
은밀한 쾌락을 얻습니다.
사회와 법률은
법적, 금전적 보상을 통해
그러한 이득을 강화시켜주기까지 해서
사람들은 감정을 다친데 대해,
일터에서 무시 당한데 대해
스트레스를 견딘데 대해
불편감을 느낀 것 등에 대해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대가에
더이상 가치가 부여되지 않을 때
감정은 사라집니다.
감정은
목표에 기여하는 동안에만
지속되지요.
이 에고의 단물을 포기할 때
그 자리에 내면의 평화가 들어섭니다.
사람은
또한 이러한 에고 게임과 관련된
은밀한 허영심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에고는
자신이 얼마나 괴로운지
그리고 자신이 불의와
공정성의 얼마나 가엾은 피해자인지를
선언함으로서 강화되는 듯합니다.
사실상
에고는
이 은밀한 자기-극화와
개인적, 사회적 대가를 통해
은밀히 전통을 찬양합니다.
에고는
스스로 자급자족하여
자신의 내적대화에
스스로를 전파하게 되지요.
에고를 해소하려면
이 보상게임과 함께
감정의 과시적 표출 및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데이터와 이야기의 반복적 개작을
기꺼이 포기해야만 합니다.
사람은
에고는 모두 부당함에서 젖을 짠다는 것
그리고 에고에게 의분에 탐닉하는 것보다
더한 쾌락은 없다는 것에 주목할 것입니다.
에고는
그토록 굉장한 대가를 지불하는
저 달콤한 위치성을 사랑할 뿐입니다.
에고가
상처받은 쪽의 위치에 서는 것의
두번째 이득은
이제 에고가 아무리 극단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고는
교활합니다.
에고는
고통과 괴로움과
온갖 부정적 감정위에서 번창합니다.
하지만
에고가 이 모든 내적인
온전치 못한 은밀한
이득을 얻는데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한가지 귀결이 있지요.
그것은
전반적 죄책감, 수치심, 낮은 자존감입니다.
사람들이
긍정적 행동을 취하기를
습관적으로 거부하는
그 완강함에 주목하세요.
사람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될
모든 노력에 고집스럽게 저항합니다.
심지어
그러한 도움이 무료로 제공되고
그것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가장 흔한 방어는
'어설픈 구실을 대는 것'이지요.
문제가 심각할 때
그러한 저항은
가족이나 사회가 거친 사랑으로
개입하게 만듭니다.
에고의 중독과 생존은
부정성의 은밀한 쾌락을 바탕으로 하는데,
그것을 먼저 인정하고 확인하고
수치심이나 죄책감없이
고백해야만 비로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만인이 상속받은 에고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고
그것이 정말로
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동기부여가 그토록 끈질겨지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왜냐하면
그것은 진짜 사랑에 대한
왜곡된 대용품이자
신의 대용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본다면
이 자기보상체계는
사실상 자기애적이고
간접적인 자기사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저자임을 인정하는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하지요.
비록 에고가
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사회에서 펼쳐지는
이 에고게임은
모든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는
임의적이며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경계선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 게임은
유년기의 놀이터에서 시작되지만
유행 및 대중매체의 증폭과 함께
재정적 이득에 대한 욕망에 의해
현재화되지요.
예를들어 주시면 요점이 명확해지겠습니다.
종내는
자멸하는 메커니즘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단순하게 묘사했습니다.
에고가
일시적으로 팽창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온전성을 잃고
따라서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지는 게임이지요.
네가 나한테 무슨짓을 했는지 봐라는 대결 게임은
자존감을 복구시켜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복수하려는 동기로 인해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전망에서 볼때
게임 전체는
그저 "그래서 어쨌다고" 입니다.
그런 자멸적인 행동이 그토록 끈질기게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에고는
자급자족의 그 비밀의 근원이 노출되면
분노로 반응합니다.
에고는
자신의 지배를 위협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격하게 화를 내거나
살인을 부르는 흉포한 분노로
반응할 수조차 있습니다.
에고는
은밀한 신의 대용품위에서
번영을 누렸고
사랑을 차단함으로써 생존했습니다.
그러므로
씁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에고는
내밀히 스스로를 먹고 사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에고는
겉으로는 괴로움이 이의를 제기해도
속으로는 그것을 즐거이 맞아들입니다.
그것이 참나를 각성하기 위해 사람이 치러야 하는 희생입니까?
자기보상 역동을 버리는 것은
에고에게 손해로 보이지요.
에고는
신을 신뢰하지 않으므로
지속, 생존, 쾌락을 위해 기댈 곳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에고는
자신의 메커니즘을 믿지
신을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때문에
에고를 비난해서는 안되는데
왜냐하면
에고에게는
비교할 수 있는
경험적 기초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고의 유일한 출구는
더 나은 길이 있다는 믿음이지요.
마음이
자신의 오류 및 행복을 이루는데서의 실패로 인해
환상에서 깨어나게 될 때
에고는
영적 진실에 관해 듣고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에고는
자신이 고통에서 짜내는
끔찍한 만족감이
기쁨의 형편없는 대용품이라는 것을 마침내 각성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관심의 무르익음'이라고 할만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인생 길에서
그것은 전환점이 됩니다.
수많은 생이 걸릴지라도
그것은 절망과 패배의 바닥을 친 것이고,
또한 사람을 희망없음에서 건져내는
내면의 빛이지요.
일단 그 지점에 도달하면
에고의 시간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어떤 희생이 요구됩니까?
주된 단계는
에고의 외부에,
에고 너머에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있다는 각성입니다.
그런 다음
어떻게 영적 목표에 도달할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신념이 솟아나는데
이것은 그 다음에 믿음을 통해
그리고 결국에는 경험을 통해 강화됩니다.
그 다음에는
교육 및 정보의 획득과
또 배운 바의 실행이 따르지요.
초대에 따라
영적 에너지는 증가하고
그 다음에는
봉헌과 모든 장애를 내맡기려는
자발성이 뒤따릅니다.
자신의 삶을
신에게 양도하겠다는 결정조차
기쁨을 가져오고
삶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고양시키고
더욱 커진 맥락은
삶에 대한 의의와 보상을 가져다주지요.
사람은
결국 자기 안팎의 부정성을
옹호하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그것은
부정성이나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무익하기 때문이지요.
비록
신을 향한 여정이
실패와 의심으로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성 속으로 나아갑니다.
길은 정말이지
아주 단순합니다.
"신에게 내맡긴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통제를 내맡기고
에고 위치성의 은밀한 만족감을
내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과 기쁨의 근원으로서의
사랑과 신을 향해
오로지 돌아서세요.
이 선택은
매 순간 가능합니다.
마침내 선택했을때
보상은 크지요.
초대에 따라
영적 앎이
길을 비춰줍니다.
비결은
자발성입니다.
사람이 이미 길을 잘 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신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신의 현존의 일차적 증거는
영적 문제에 대한
깨어나는 호기심 혹은 관심입니다.
그것은
에고라는 둑의
갈라진 틈이지요.
사람이
영적 목표를 원하거나
실행하기 시작할 때
혹은 영적 정보를 추구하기 시작할 때
현존은
이미 그의 삶을 붙든 것입니다.
모든 장애를
신과 사랑에 내맡기려는 욕구가 올라온다면
신은 이미 자발성의 형태로 현존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헌신에 이르면
거기에는 이미 에고를 녹이고
길을 비춰주는 상당히 발전된 현존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 진보와
발견에 동반되는 것이
기쁨인데,
기쁨은
참나의 광휘이며
내맡겨진 에고 위치성을
재빨리 대체합니다.
길을 따라
한걸음씩 나아갈때마다
영적 영감의 강도가 증가하지요.
자기가
세상이나 에고를 바라보기를 그칠 때
자기는 자신의 근원이 그
동안 줄곳 참나였음을 발견합니다.
에고가 취하는 은밀한 대가 외에 또 어떤 것을 내맡겨야 할까요?
사람은
무엇이든 알고 있다는
마음의 환상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겸손함이라 하는데,
겸손함은
각성, 드러냄, 직관적 인식으로 향한 문을
열어주는 가치를 갖습니다.
마음은
의미를 추구하고
따라서 의미에 대한
자신의 정의에만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은 우회적입니다.
실상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실상에는
식별할 만한 속성이
없기 때문이지요.
일체는
그저 창조된 대로 완전하고
완벽하게 존재할 뿐입니다.
일체는
그것이 그것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합니다.
일체는
자신의 본질과 잠재성의 실현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유일한 요구는
'그저 있는 것'이지요.
그 어떤 순간의 조건하에서든
일체의 운명은
이미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것인 것은
바로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과거 모든 가능성의 완성을 나타냅니다.
일체는
존재하게 되어 있는대로
존재합니다.
본질이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동안
그것은 그와 상응하는
의식수준에 의해 목격되지요.
나노 초의
그 어떤 관찰에서도
실제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변하는 것은
목격자의 위치와
관찰점이지요.
변화는
연쇄적 지각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은
정지화면의 연속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삶은
수수께끼를 냅니다.
움직이는 것은
세계인가?
마음인가?
그렇다면 완벽하지 않다는 건 불가능하군요.
일체는
그 절대적 자기정체로
있을 뿐이지만
이는 지각과 위치성을 갖는
에고의 성향으로 인해
포착하기 어려운 관찰결과입니다.
그래서
깡통에 슨 녹은
산화과정의 성공과
완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철이 습기에 노출되면
산화철이 형성되는데
그것은 철이 존재하는 방식이지요.
철은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라
그렇게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일시적인 외관의 형상일 뿐입니다.
실상은
항구적입니다.
그것은
나의 눈에는
자명한데
그러나
이 나는
사적인 에고의 나가 아닙니다.
관찰이 이루어지는
모든 순간에
일체는 이미 완전하고
완벽하지요.
가치와 의미란
마음이 투사시킨 장식물이며
이는 선별된 일정한 속성이나
특징의 바람직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야생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원한다면
구부러진 나무가 곧은 나무보다 훨씬 낫습니다.
사람은 환상을 초월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실상은
허구입니다.
그러한
각성과 더불어
마음은 실상의 권위자로서
권세를 상실하지요.
에고의 눈으로 보면
삶은 매력과 혐오,
두려움과 일시적 쾌락이
변화무쌍한 만화경입니다.
에고는
과대평가된 위치성을 발판으로 삼고 있지만
성숙해지면서 의지할만한
영속적 성질을 찾아
점차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에고는
영적 지시나 정보가 없다면
어느쪽으로 보아야 할지 모르고
그저 실용적 가치를 갖는
기본적 생존기술에
안주하고 말수도 있습니다.
사람한테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습니까?
'생각하는 마음과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앎은
자동적이며
삶의 상황 전체를 포괄합니다.
앎은
생각하거나 계산하기 보다는
인식에 의지합니다.
앎의 기능은
자연발생적이며
따지기 보다는 침묵합니다.
앎은
다른 작용원리를 반영하며
그 반응이 보다 온건하고
포괄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앎은
그림 전체를 보고
그것에 맞게 반응하지요.
아는 마음은
진부한 위치성을 갖거나
분별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또 열광적인 노력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아는 마음은
태평스럽고 부드러우며
세상의 드라마에 관여하기 보다
관찰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것은
이득이나 손해에 대한
세속적 정의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상과 관계하는 것을 두고
느긋하다거나 철학적이라고 합니다.
에고의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끔찍하지 않아?라고 말할 때
앎은 그것이
인생의 부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결국에는 다 똑같다는 것을 압니다.
그건 수동적 태도로 보입니다.
에고에게
평화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에고는
뭔가를 하는 측면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차량들 사이를 지그재그로 달리고 속도제한을 무시하며 경찰차가 어디 있는지를 살핍니다. 에고는 교통자체에 대해 멍청한 운전자들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지요. 그리고 앞차에 바짝 따라붙은 채 속도가 느리다며 속으로 욕을 합니다. 에고는 경적을 울려대고 커브길에서 추월합니다. 에고는 박자를 맞추고 새치기를 하려는 바람에 쫒기지요. 에고는 앞줄로 끼어드는 운전자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끔찍한 복수를 맹세합니다.
에고는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동시에 사업전략을 짜고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라디오를 듣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는 마음'은
차량의 흐름을 따라가며
정중하게 해동하고
어떤 가엾은 친구를
앞에 끼워주는 일을 즐깁니다.
한번 봐주는 것은
앎의 편안한 전망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지요.
그렇게 느긋한 태도가 비효율적인 것은 아닙니까?
아는 마음은
행위가 아니라
전체적 시야에 의존합니다.
에고는
낮은 힘에 의존하지요.
하지만
영의 영향력은
힘에서 나옵니다.
앎은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뭘하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라는 점이라는 걸압니다.
어떤 이들은
상황을 자극하지만
반면 어떤 이들은 상황을 진정시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성공은 어떻게 하고요?
에고는
이득과 통제를
성공으로 봅니다.
아는 마음은
그 대신 실현, 완성, 평정을 지향하고
평화와 사랑임의 쾌락을 지향합니다.
에고에게 이득은
외부에 놓여있습니다.
영에게 이득이란
내용이나 형상에서 독립한
항시 존재하는 존재의 기쁨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것이지요.
영에게는
화창한 날이나 비오는 날이나
다 똑같습니다.
앎은
형상을 붙잡으려하기 보다는
성질을 즐기지요.
그리하여
앎은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않고도
더불어 있음을
즐길 수 있습니다.
앎은
목표에 쫒기지 않으며
그 대신 모든 상황에서
동등한 줄거움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소중히 여깁니다.
정신작용이 없다면 아는 마음은 어떻게 정보를 얻습니까?
아는 마음은
'논리보다는 직관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아는 마음은
또한 위치를 갖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교정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위치를 바꾸거나
물러서는 일을 꺼리지 않습니다.
느긋한 태도는
변화를 허용하는데,
그것은 특정 관점에 대해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난 그점에 대해 틀렸던 것 같다'는
이 말은 위치성을 갖지 않는데서 나오는
편안한 진술입니다.
수많은 에고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죽으려고 할 것입니다.
아는 마음은
그림 전체를 보고
선택지를 아는 일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므로
아는 마음은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습니다.
에고는
세부에 집중하지만
앎은 일반성과 본질에 관심이 있지요.
에고는 독점하지만
영은 포괄합니다.
아는 모드의 인식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참나로서의 현존이
실상의 전부임을 비춰줍니다.
일체는
모든 존재와 창조가
그 속에서 솟아나는
무한한 지고로서의
자신의 존재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동등합니다.
거기에는
취사선택이나
분할이 없습니다.
전부가
동등한 가치와
중요성을 갖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에고의 초점은
의도로 인해 협소하고 제한적이며
따라서 선별적이지요.
에고는
끊임없이 문제를 찾습니다.
에고에게는
모든 게 다 문제로 보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에고의 상황평가는
아주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거나
계산착오를 일으키기 일쑤고
이는 많은 사람에게 심지어는 인구 전체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지요.
오류를 저지르기 쉬운
이 성향은
에고/마음에 내재된 결함입니다.
왜냐하면
에고/마음은
'자신의 추측과 위치성을 지지하는 데이터를 선별'하고
'반대의 결론을 암시할 데이터는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경직되어 있는데
사회의 집단에고는
그보다 한층 더 합니다.
앎이란
왕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순진하게 알아차린
어린아이의 무구함과 같은 것이지요.
에고의 경직성과
교정에 대한 저항은
자기애적 자만심, 자부심,
허영심을 기초로하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의 집단에고는
몰락과 파멸을 불러옵니다.
민족주의적 허영심과 구호는
수십년 혹은 수백년간
전 인구를 집어삼킨 정치열이나
정당한 종교열로 부풀어 오릅니다.
이렇게
격앙되고 팽창되고 자기애적 에고 위치성은
수백만명의 살육을 낳고
선동적 지도자들과
심지어는 전 인구의 몰락으로 끝나지요.
국가적 사안에서 에고의 영향력은 파멸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사는
자만한 위치성들에 대해 치른
비용의 기록입니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이미 졌다는 것이 분명해진 다음에도
전쟁은 한참동안 계속되지요.
마침내
정직함이 대세를 이루어
무의미한 살육에 종지부를 찍기 전까지
수백만의 사람들이 더 죽어갑니다.
2차 대전의 마지막 나날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잘 아는
고전적 사례임에 틀림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망상에 눈이 먼 한나라를 깨우기 위해
두번째 원자폭탄이 필요하기 조차 했습니다.
그 나라는 또 하나의 폭탄을 자초한 것입니다.
에고는
치명적 상황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을 뿐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희생시키기조차 합니다.
그러므로
에고는
치명성이 내재되어 있고
에고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느니
"너죽고 나 죽자"고 합니다.
에고는
엄청난 무지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지요.
불행히도
1980년대 후반까지 그것은
인류의 행동을 지배한 우세한 에너지였습니다.
에고는
자신의 실수에서
배우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완고합니다.
실패한 정책들이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당화는
거의 항상 어떤 도덕주의적 구호에 의존하는데,
이는 순진한 대중의 잘 속는 성질을 악용하는
선전가들의 정치적 이득에 봉사합니다.
그렇게 자명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적 오류가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에고는
정당해보이는 것에 관심이 있고
결과야 어떻든 간에
뭔가를 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에고는
해결책이 없는
사회적 상황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해결책이 없는 상황은
그저 견디며 살 수 밖에 없고
인간 조건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요.
에고는
낮은 힘에 의존하지만
반면에 어려운 문제들은
오직 좋다와 나쁘다의 위치성을 초월하는 힘
그리고
이른바 문제라는 것을
투사된 것으로 보는 힘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는 마음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다른 전망입니까?
에고는
은폐하는 반면
앎은 드러냅니다.
많은 결함있는 에고 위치에 대한 대답은
일반적으로 간과되는
건전한 상식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에고는
그 허세에도 불구하고 순진합니다.
에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명백한 것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고
그렇게 하면서 교활하게 온전치 못하지요.
에고의 손쉬운 해결책과 자기 중요성에 대해서는
건방지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에고는
상식에서 위협을 느끼며
사회가 과거에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경건하게 읊조립니다.
하지만 에고는
그렇게 하면서
상식을 드러내는 사례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 대신 결함있는 집단적 에고위치의
역사적 사례를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무심은 전부를 둘러싸는 전망입니까?
그래서
그것은 큰 가치를 갖습니다.
영적 제자는
에고를 변형시키고 극복하고
혹은 처단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필요한 것은 오직 단순히 에고를 버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신이라는 실상에 대한
신뢰, 믿음, 확신의 발달을 요구하지요.
이득추구를
포기할 때
삶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고 평화로워집니다.
아는 마음의 직관을 따르는 것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에고에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에고의 두려움과 의심을
누그러뜨릴 믿음직한 도구가 있습니다.
진실을 가리는 근육테스트는
쉽게 이용할 수 있고
진실과 오류의 차이를 단 몇초만에 드러냅니다.
근육테스트는
정신작용을 요구하지 않으며
사실상 마음을 전적으로 우회하지요.
반응은
피험자의 마음에서
전적으로 독립해있습니다.
사실 진술을 말로 할 필요조차 없지요.
진술이나 이미지를 마음속에 떠올리고만 있어도 됩니다.
본질적으로
현상 전체는
오직 에너지 수준에서 일어납니다.
진술은
진실의 현존에 자동적으로 응답하는 의식장에 대해
하나의 에너지 패턴으로 제시됩니다.
실험자와 피험자 모두가
자신의 개인적 신념에 완전히 반하는 답에 이르는 것은
대단히 흔한 경험입니다.
근육 테스트는
발전된 의식수준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진귀한 선물이며,
이것이 없다면
영적 식별력이 동일한 답을 드러내줄 지점에 이르기 위해
개인적으로 긴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입니다.
근육테스트는
실용적이고 귀중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직관에 대한
교차확인으로서
검증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학습도구임은
물론 망설임과 의심의 시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도구지요.
하지만
근육테스트법의 한계에 대해서
재차 말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험자와 피험자가 모두
200수준 이상으로 측정되고
질문의 동기 또한 온전한 경우에만 신뢰할 수 있지요.
이는
자만심이나 이기심에서
근육테스트를 이용하는 일을 자동적으로 배제하여
현재 인구의 약 20%에게만
그 이용이 제한됩니다.
생각하는 마음과 아는 마음사이에는 갈등이 있는 듯합니다.
이득이나 손해는
지각의 반영일뿐
타고난 실상이 없습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영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적어도 처음에는
에고에게 손해로 비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지요.
에고는
기꺼이 용서하고
잊으려는 자발성에 내맡기는 대신
증오와 앙갚음의 쾌락과 만족감을 붙듭니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매달립니다.
설령
그것이
그들을 죽이더라도 말이지요.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개별적, 집단적 에고에
사실상 자진해서 참여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남보다 낫다거나
더 중요하다거나
혹은 더 우월하다고
으스대는 느낌이 가져다주는
대가를 거절하는데 저항하지요.
앙심, 복수, 앙갚음,
혹은 값을 치르게 만드는 일의 만족감은
중독을 일으키고
자기이익에 봉사하며
그리하여
끝없는 갈등을 통해
세계의 전 국가와 지역을 지배합니다.
성전이라는 모든 독선적 악몽의 기초에 있는 것이 그것입니까?
성전이라는 에고위치는
그러한 것의 중단없는 보급과 지속을 보증하기 위해
제도화되었습니다.
대중의 강요된 무지에 영합하는 것은
위신과 타인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져다주고
무기상인들의 은행계좌를 불러주지요.
슬프고도 희극적인 사실은
이른바 성지라는 곳들이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성스럽지 못한 곳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그 전설적 땅들은
아주 낮게 측정됩니다(150).
성인들의 발자취는
수세기에 걸친 유혈과 증오, 잔인함,
괴로움으로 지워져 버렸습니다.
최소 425로 측정되는 뉴욕의 센트럴파크나
아니면 465로 측정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전망대에서
기도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말하자면 근육 테스트는 마음속 싶이 간직된 환상과 망상의 가면을 찢어내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무자비합니다.
근육테스트는
에고와 기만에게
그리고 거짓의 조달업자들에게
무자비합니다.
진실에 곧장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을
통제하고 조종하기는 어렵지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인류는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정치가는
진실의 힘에 의지하는 반면
정치인은 이득을 위해
진실을 전복시킵니다.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렇듯 진실을 뒤집어 엎는 일은
나치의 제3제국 에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괴벨스(측정수준 30)는
가장 터무니없는 선전조차도
수백만의 사람에게 먹힐 수 있다는 사실을
간단히 보여주었습니다.
선동가들은
통제하기 위해 왜곡하고
감정화합니다.
진정한 정치가는
510으로 측정된 처칠처럼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진실을 이용하지요.
대결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사회는
대결을 통해
희생자들이 스스로
타마스에서 빠져나와
정신차리고 행동을 취하는
라자스로 들어가기를 희망합니다.
법이
범죄행동과 대결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법은
변화하려는 동기를 제공하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변화할 수없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지요.
개중에는
자신의 의지를 바꾸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들이 병들었거나
혹은 필수적인 비판적 뇌 기능이 결여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상태는
'도덕적 저능'으로 불렸습니다.
현재는
사이코패스적 성격으로
지칭되지요.
이러한 결함은
두세살의 어린아이에 나타나는데,
아이는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욕구충족이 지체되는 것을 참지못합니다.
또한
경험에서 배우는 능력에
내재적 결함이 있고
귀결을 두려워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결핍되어 있습니다.
솔직함은 종교의 스승이나 전통적인 영적 스승의 관습적 스타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경건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합니다.
실상은
좋다고 묘사되는 위치성들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입니다.
진실의 선은
단도직입적이며
망상적 오류에 대해
정확히 대결적이지요.
구도자가
깨달음의 길에 헌신할때는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되는데
왜냐하면 위치성은 신념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신념은
진실에 대한 인식앞에서
사라집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푸념하는 양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분이 상한다는 것은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그자체로 진실하지 못하는 것에
매달리고 있음을 의미하지요.
진실은
방어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방어적이지 않습니다.
진실에는
증명해야 할 것이 없으며,
답을 구하는 질문에 취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증거를 요구한다는 것은 실상을 부정하는 것입니까?
날카로운 관찰이군요.
모든 증거는
구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전통적 증거에는
인식론적 결함이 있는데,
그것은 논리과정 자체에 뿌리내린
오류로 인한 것입니다.
예를들면
객관성대 주관성이라는
표면적 대립쌍의 오류가 있습니다.
객관성이란
믿을 수 있는 진짜 실상을
창조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인위적인 정신적 구조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데 실패하는데,
그것은 표면적으로 논리적인 구조전체가
전적으로 주관성과 신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어떠한 개념에도
그것에 딸린 주관적 가치외에는
진실의 고유한 권위가 없습니다.
신뢰성은
주관적 결정이고
순수히 경험적이며
정의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넌센스로 취급될 수도 있지요.
신에 대한 각성과 인식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순수하게 주관적입니다.
이성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가정조차 할 수 없습니다.
진실은
오직 그것으로 존재하는
동일성으로 말미암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그렇다면 영적 관심의 무르익음이라고 할만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인생 길에서 그것은 전환점이 됩니다. 수많은 생이 걸릴지라도 그것은 절망과 패배의 바닥을 친 것이고, 또한 사람을 희망없음에서 건져내는 내면의 빛이지요. 일단 그 지점에 도달하면 에고의 시간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상한다는 것은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그자체로 진실하지 못하는 것에 매달리고 있음을 의미하지요. 진실은 방어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방어적이지 않습니다. 진실에는 증명해야 할 것이 없으며, 답을 구하는 질문에 취약하지 않습니다.
신뢰성은 주관적 결정이고 순수히 경험적이며 정의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넌센스로 취급될수도 있지요. 신에 대한 각성과 인식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순수하게 주관적입니다. 이성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가정조차 할 수 없습니다. 진실은 오직 그것으로 존재하는 동일성으로 말미암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진실은
오직 그것으로 존재하는
동일성으로 말미암아
인식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