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풀브라이트 장학계획’선발돼 미국 연수
리영희 평전/[5장] 젊은 의지와 투지, 언론계 입문 2010/05/16 08:00 김삼웅미국 유학 시절 리영희 선생.
미국이 세계의 패권유지를 목적으로 각국 언론계를 지도할 유망한 기자를 뽑아서 세뇌(미국화)하는 미국 정부의 프로그램이었다. 미 국무성의 정치인 초청과 비슷한 계획이었다. 언론계의 쟁쟁한 기자들이 선택되는 미국 연수코스를 입사 2년차에 불과한 리영희가 선발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리영희는 면접시험에서 언론, 정치, 경제, 사회, 분야를 지원하는 다른 기자들과는 달리 이공, 과학기술이 등한시되고 있는데 자신은 이 분야를 공부해 보겠다는 ‘희귀성’때문에 선발되었다. 8월말 출국을 앞두고 가정에 비극의 사단이 닥쳤다. 그 해 봄에 첫 아들을 잃은 데 이어 부친이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입원비 때문에 큰 병원에 입원도 못시켜본 채 세상을 떠났다.
환갑상도 차려드리지 못하고 다른 기자들처럼 반듯한 집 한칸도 마련하지 못하여 남의 셋방에서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부친의 죽음에 리영희는 불효의 곡(哭)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미국행을 앞두고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신출내기 기자의 해외연수를 못마땅해 하는 편집국장의 눈초리가 견디기 어려워서였다. 월급이 끊어지면서 아내와 어머니는 생활비를 줄이기로 하여 부엌도 없는 단칸방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리영희는 미국 체류 6개월 동안에 나오는 월 360달러의 장학금 중에서 아끼고 줄여서 일부를 아내에게 보냈다. 편지 속에 달러를 넣어서 보내는 우편 송금이었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리영희는 처음으로 발디딘 미국에서 ‘엄청난 문화쇼크’에 빠졌다.
외신기자 생활을 비롯하여 그동안 미국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편이었지만 “종합적으로 말하면 영토의 큼과 물질적 부의 큼에 압도당하고 돌아왔다”고 썼지만, 막상 현지에서 지켜 보았을 때는 듣던 것보다 더 심각한 흑백차별 등 예상 외의 현상이 너무 많아 놀랐다.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6개월 연수를 마친 다음 하버드대학 옌칭 도서관을 방문하고, 인종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앨라배마주를 찾아가 인종차별주의자인 훠버스 주지사를 인터뷰하였다. 또 흑인인권운동단체인 NAACP 본부를 방문하여 흑인 지도자들에게서 그들의 고충과 투쟁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일은 한국에서 간 동료들은 모두 관심이 없어서 혼자 다녔다.
리영희가 미국에서 연수를 받고 있을 즈음인 1959년 1월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가 쫓겨나고 카스트로가 2월 13일 수상에 취임했다. 오래 전부터 쿠바혁명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미 국무성에 쿠바 방문 신청을 했지만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미국 체류기간 중에 하와이의 독립운동 단체를 방문했다. 하와이에는 이승만 계열의 태평양동지회와 대한독립협회가 있었다. 대한독립협회는 초기 이민자들이 힘든 노동을 하고 받은 임금에서 일부를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내주는 등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기구였다. 반면에 태평양동지회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쫓겨난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만든 분파적 사조직이었다.
먼저 방문한 태평양동지회의 마치 장사꾼들 같은 집단에 크게 실망한 리영희는 고지대에 위치한 대한독립협회를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갔다. 이승만 정권 기간에 고국에서 찾아온 이는 민주당 대변인 조재천 한 사람 뿐이었다고, 의외로 젊은 방문객에 노인들이 오히려 리영희의 안전을 걱정해 주었다. 리영희는 진짜 독립운동가(단체)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핍박받거나 소외되고, 사이비들이 활개치고 있는 모습을 하와이에서도 목격하게 되었다.
국립해양대학시절 리영희 선생.
미국 연수 중에 얻은 소득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워싱턴에서 망명생활을 한 김용중(金龍中)과 친교를 맺은 일이다. 그는 ‘코리아문제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정치사신문>을 발행, 한국(조선)문제를 집중 보도 ․ 논평하여 미국 조야의 주요 기관과 개인에게 발송하는 일을 하였다.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통일, 평화, 외세배격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외로운 통일운동가였다. 그와 만나 의기투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귀로에 들른 일본 도쿄에서 다시한번 ‘문화충격’에 빠졌다.
일본에서 관광 같은 것은 애시당초 뜻이 없었고 유명한 서점을 두루 찾아다녔다. 마루젠(丸善)과 이와나미서점 등은 한마디로 놀라움, 충격이었다. 한국에는 아직 2층짜리 서점도 없을 때에 도쿄에는 5~6층짜리 큰 빌딩에 수십만 권의 책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이미 그 때에 지금의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규모였을까?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고는 하지만, 역시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서양문물을 도입해서 현대학문의 꽃을 피워온 업적이 여실히 드러나더군. 한국과 그 수준을 비교하면 틀림없이 백년의 차이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전쟁에 패망하고 15년이 지났을 때인데, 세계 인류의 지적 활동과 정신적 탐구의 모든 분야에서 없는 서적이 없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연구업적이 그득 차 있었어. 나는 그 엄청난 책의 더미 앞에서 그냥 넋을 잃었다고. (주석 19)
리영희는 도쿄의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구입하면서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도 샀다.
이 책의 내용은 미리 알고 산 것이 아니라 산더미 같이 쌓인 책더미에서 ‘아리랑’이라는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어서 산 것이다. 미국인 여성 님 웨일즈가 1920~30년대 조선인 인텔리 공산주의자 장지락의 조선독립과 공산혁명 과정을 다룬 이 책은, 리영희에 의해 국내에 들여와서 60~70년대 여러 사람에게 은밀히 돌려가면서 읽혀지고, 1984년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리영희는 이 책을 읽고 감명되어 중국혁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글 번역본을 미국 시골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저자에게 보내고, 출판사에 뒤늣게나마 인세를 보내도록 하였다. 리영희는 책의 서문에 저간의 과정을 소개하였다. 이 책은 한국에서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지난 30년의 지적, 사상적 암흑 속에서 가끔 <아리랑>을 펼치는 것은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모색하다 지치고 좌절 때문에 실의했을 때는 ‘김산(金山)’을 찾았다. 그는 내가 감히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나에게 빛이 되어 주고 힘이 되어 주곤 했다.
나는 이 책의 감격을 도저히 독점할 수가 없었다. 마음과 사상이 통하는 지금은 모두 60대를 넘은 벗들의 손에서 손으로 나의 <아리랑>은 전달되고 읽혔다.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는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반지성적인 광적 반공주의하에서 이 “어느 조선인 공산주의 혁명가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표지를 가린 채 그늘에서 돌려져야 했다.
내 나이 30세, 6ㆍ25전쟁 7년 간의 소모적인 군대 복역을 강요당하고 나와, 남들보다 뒤늦게 의식의 눈이 뜨이기 시작한 청년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아 헤매이던 때였다. ‘김산’의 삶이 바로 내가 찾고 있던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다. 아리랑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과 감동은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무슨 표현의 수단과 방법으로써도 다 그릴 수가 없다. (주석 20)
미국은 한국의 유망한 언론인들에게 여비와 활동비를 주어가면서 ‘풀브라이트 장학계획’의 코스를 마련하고, 리영희에게도 혜택이 주어졌다. 적지 않은 한국의 언론인이 이 과정을 밟고 와서 미국에 우호적인, ‘친미언론인’이 되었다. 이들 중에는 정.관계에 진출하여 ‘출세’한 인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리영희는 그러지 않았다. 미국에 가장 비판적 언론인이 되었다. 같은 물을 마시고도 소는 우유를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고 한다. 소와 뱀의 구조 차이 일 것이다.
그가 1994년에 쓴 논문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남한은 북한이라는 형제와 싸우기 위해서, 미국이라는 억센 사나이를 집안에 불러들여, 안방아랫목에 모셔놓고 수십 년간 알몸으로 시중들어 왔다. 북한이라는 형제가 남한보다 강하고 우월했던 1970년대 후반까지라면, 그 사나이가 이마를 살짝 찌푸리기만 해도 만면에 아양을 떨면서 치마를 걷어 올리는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사나이는 지난 날의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여 성적 사디즘을 즐겼다.
지금은 그에 그치지 않고 집주인의 목숨 보호자를 자처하게 되었다. (주석 21)
주석
18) 앞의 책, 226쪽.
19) 앞의 책, 230쪽.
20) 님 웨일즈 지음, 조우화 옮김, <아리랑>, 리영희, '아리랑과 나', 11~12쪽, 동녘, 1984.
21) 리영희, '한 ․ 미 관계의 본질을 알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143쪽, 두레,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