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원을 졸업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가슴 벅찬 일이다. 더욱이 그가 장애인, 그것도 사지를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이라면 더더욱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올해 총신대신학대학원은 사지마비 중증장애인 졸업생 2인을 배출한다. 개교 이래 중증장애인이 3년간 공부를 마친 것도 무사히 졸업한 것도 처음이다. 주인공 안성빈 전도사와 고경호 전도사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손과 발 되어준 동료들에 감사 특수목회 큰 비전 키워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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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빈 전도사는 하루 종일 휠체어에서 생활하는 중증장애인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늘 밝다.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
안성빈 전도사
안성빈 전도사(43, 동서울노회)의 외모는 건장하다. 밝고 하이 톤인 목소리와 잘생긴 얼굴, 듬직한 체격을 보면 그의 몸이 불편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오른손을 약간 움직일 수 있을 뿐 다른 이의 도움이 없이는 식사를 하거나 양치질을 하거나 돌아누울 수조차 없는 사지마비 중증장애인이다.
그는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여느 날처럼 외출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병원에서 들은 병명은 목뼈 속에 종양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수술만 하면 벌떡 일어설 것으로 기대했으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찬양 인도와 청년부 리더 등으로 교회를 섬겼던 그였지만 그때 받은 충격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오랜 슬럼프, 병약하신 어머니, 택시 운전을 하시며 아들 때문에 하루 세 차례 집에 돌아와 자신의 배설물을 치워주시고 몸의 위치를 바꿔주셨던 아버지를 바라봐야 했던 안 전도사에게 하루하루는 절망 그 자체였다.
“차라리 방구석을 기어가는 집게벌레가 부러웠던” 곤고했던 어느 날, 후배가 전해준 찬양 시디 속의 ‘나의 안에 거하라’는 찬양을 듣고 그는 큰 은혜와 위로를 얻었다. ‘하나님이 나를 보배롭고 존귀히 여기신다’는 가사에 회개가 터졌고 곧이어 감사가 나왔다. 몸을 쓸 수 없는 상태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희망이 생겼다. 인터넷 희망방송 찬양대회에 나가 동상을 수상했고 장애인단체, 군부대, 교도소 등을 방문해서 찬양과 간증사역을 했다. 교회의 해외단기선교도 다녀왔고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방송 진행을 하고 장애인 안전센터 강사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활동도 했다. 2012년에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 입학해서 목회자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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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신학대학원에 사지마비 장애인이 입학한 것은 처음이었다. 학교도, 안 전도사도 서로 당황할 일들이 연속됐다. 입학시험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손을 움직일 수 없어서 연필을 잡지 못합니다. 답안을 말하면 시험지에 옮겨써줄 대리 필기자를 구해주십시오.” 입학시험을 앞두고 학교에 전화를 했을 때 “네?”하며 화들짝 놀랐던 직원의 목소리를 안 전도사는 잊을 수 없다.
안 전도사는 “학창 시절 중에 시험 기간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학교 측의 배려로 별도의 교실에서 시험을 치르게 됐지만 겨우 움직이는 검지로 컴퓨터 화면에 직접 답안을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시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판을 움직여야 작성할 수 있는 분량이 A4 1매 분량. 일주일 내내 치러지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크고 작은 일화가 적지 않았고 그로 인해 학교가 변화된 부분도 많았다. 중증장애인을 위한 3인실 숙소가 기숙사에 처음으로 마련됐고, 2년 여간의 청원 끝에 승강기가 없는 건물 내에 있던 매점과 구내 서점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예배당에 휠체어 석과 성경 거치대도 마련됐다. 개인적으로는 밤중에 침대로 옮겨지던 중 소변 줄이 끊어져 두 차례 응급실 신세를 져야 했던 위기의 순간들도 있었다.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지만 그는 상위 10% 정도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혼자서는 책장 한 장 넘길 수 없고 오래도록 공부하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밤을 새울 수도 없는 그였다. 그런 안전도사가 공부를 마칠 수 있었던 데에는 순번을 짜서 3년 내내 24시간 그의 눈과 귀가 되고,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룸메이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민규, 손용환, 이지형, 남림 전도사, 그리고 저를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안 전도사는 학교가 자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주었지만 장애인들을 위해 더욱 배려해 주기를 바라는 일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장애인을 위한 샤워시설, 필기 불능자를 위한 구술시험을 인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또 새벽예배 때에도 장애인채플실을 운영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안 전도사는 졸업 후 중증장애인을 위한 특수목회를 기도하고 있다. 중증장애인 몇 명과 함께 교회를 시작할 생각으로 지인의 도움을 얻어 예배 공간을 무상으로 대여 받는 문제를 논의 중이다. “장애인을 온전한 한 사람의 신자로 만들고 싶습니다. 중증장애인에게도 하나님이 똑같으시며 같은 영향력을 끼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몸으로 보여주는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아직 미혼인 안 전도사의 새 출발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활동보조비 29만원과 개인 후원자 극소수 외에 수입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 ‘나의 안에 거하라’는 말씀으로 새 희망을 주셨던 하나님을 바라고 있다.
"아내 통해 하나님 사랑 체험 신앙공동체 만들어 헌신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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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호 전도사는 아내 김영실 사모의 사랑과 격려 속에서 무사히 신학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고 전도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신앙공동체를 이룰 꿈을 가지고 있다. |
고경호 전도사
지난 2004년 한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인간극장> ‘우리는 연인’편을 아직 기억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5부작으로 방영되고 1년 6개월 후 다시 5부작이 추가 제작된 이 프로그램은 한 중증장애인(고경호 전도사, 40세, 서울노회)과 정상인 여인(김영실 사모, 42세)과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를 담았다. 대학교 1학년 때 추락 사고로 목뼈가 부러져 겪어야 했던 절망, 장애인으로 살기에 너무나 불편한 우리 사회 곳곳의 모습, 중증장애인 가족의 애환, 낙망 속에도 피어나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 결혼을 강력히 반대한 부모와의 갈등을 그린 프로그램은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었던 고경호 전도사가 총신대신학대학원을 졸업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그는 사고로 사지마비 전신장애인이 된 후 가족 내 유일한 신자였던 막내 누나의 인도로 신앙을 가지게 됐다. 남들보다 간절하게 예수님께 매달렸던 그에게 하나님은 차츰 신학공부를 할 마음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막상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결심하기까지 그는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목회자가 되어 장애인 사역을 해야 겠다는 소명감이, 건강에 대한 염려로 인해 자꾸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신학공부를 미룰 수 없다는 절박감 속에서 그는 30대 후반에 어렵게 신대원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학교 생활은 처음부터 장벽에 부닥쳤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기숙사 입실이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중증장애인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학교측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신대원 기숙사는 1실에 4인이 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었고 책상 위쪽에 침대가 붙어 있는 시설뿐이었다. 기숙사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맨바닥에서 잠을 잘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사고 후 20년 가까이 24시간을 곁에 계셨던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1년 6개월간 부모의 도움을 받아 등하교를 했다.
혼자서는 책장 한 장 넘길 수 없는 몸이기 때문에 신학공부를 하면서 이겨내야 했던 어려움은 너무도 많았다. 동료의 도움으로 책장을 넘겨가면서 책을 읽고, 손가락을 쓸 수 없어서 손등으로 아이패드의 자판을 두드려 리포트를 작성해야 했다. 남들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과제 제출 날짜를 지키지 못해서 진땀을 흘렸던 일도 많았다.
“제가 졸업을 하게 된 데에는 저의 가족 뿐 아니라 동료 전도사님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임대진, 조인, 유혁, 정영욱, 임세환, 김삼열 전도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고 전도사는 도우미 전도사들이 공부와 생활 등 모든 것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동휠체어가 고장났을 때 수십만원의 수리비까지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고 전도사는 학교가 재학중인 장애인에 대한 장학금을 좀 더 높여주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현재 장애인 장학금은 학기 등록금의 1/3 수준인데 장애인이 교회 사역을 할 수 없고 학업으로 경쟁하기도 힘든 점임을 더욱 감안해달라고 밝혔다.
고 전도사는 졸업 후 활동할 사역지를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는 사역지가 정해지기 전까지 송파구의 장애인자립재환센터에서 비상근으로 장애인 상담사역을 할 예정이다. 그의 꿈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가 되는 신앙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은 아직 장애인이 접근하기가 힘든 구조다. 좁은 통로와 계단이 많아 장애인 휠체어를 타고 예배당에 들어가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막상 교회생활을 한다고 해도 정상인들은 장애인 신자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고 있다. 고 전도사는 비장애인에게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시켜 주고, 장애인에게는 바른 말씀을 전해서 온전한 신앙인으로 성장토록 돕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한편 고 전도사의 오늘이 있기까지 분신과 같은 역할을 했던 아내 김영실 사모는 고 전도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회복지사 일을 계속하고 있다. 고 전도사를 만났을 때 신학대학을 졸업했던 김 사모는 이어서 총신대신대원에서 공부한 선배이기도 하다. 고 전도사 부부는 2005년 사모의 가족이 반대하는 결혼을 진행했고, 10부작 다큐멘터리 ‘우리는 연인’ 말미에는 완강했던 사모의 가족들이 결혼식장을 찾아오는 모습으로 화합을 이뤘다.
“제 아내는 절망의 구덩이에 던져진 것 같은 저를 꺼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아내는 저에게 요구하지 않고 한결같이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고 전도사는 20세의 청춘에 사고를 당한 이후 홀로서기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지만 가족과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그에게 졸업은 또하나의 시작이며 도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