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울은 감옥에 잡혀 있습니다. 복음전파에 있어서 그와 경쟁의식을 가졌던 사람들은 때는 이 때다라는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마음을 괴롭힐 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의 복음적 영성이 얼마나 순수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바울은 어떤 동기로 그리스도가 전해지든지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나 가득하여 다른 것이 도저히 틈탈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살아남아 교회들과 성도들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지금 곧 사형 당해 그리스도 곁으로 가 그와 함께 영원토록 교제하며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둘 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만 생각한다면 후자가 훨씬 낫다고 고백합니다. 그에겐 그리스도 외에 바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목숨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이용해서 뭔가 다른 것을 얻어 보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사랑의 백미를 보여줍니다.
어거스틴은 불후의 명작 「신의 도성」에서 “이용하다(use/uti)”는 말과 “향유하다(enjoy/frui)”는 말을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무엇을 즐긴다는 것은 그 대상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무엇을 이용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용해서 좀더 중요하고 정당한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순수한 신앙이란 바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임을 넌지시 말해줍니다. 개혁교회에서 가르치는 인생의 제일 된 목적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개혁교회 소교리문답 제 1 문에 의하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와 교제하는 데서 최고의 즐거움과 행복을 맛볼 줄 아는 신앙 그것이 바로 순수한 신앙입니다.
이재철 목사는 그의 책 『내게 있는 것』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었던 아름다움 일화를 들려줍니다. 그 일화는 아퀴나스의 친구 레지날드(Reginald)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퀴나스가 성전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제단에 걸려 있는 십자가로부터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나에 대한 참 좋은 책을 썼구나. 너는 나에게 어떤 보답을 원하느냐?” 이에 대한 아퀴나스의 대답은 단 한 줄이었다. “주여, 오직 당신만을(Only yourself, Lord)!"
CCM 가수인 레이 볼츠(Ray Boltz)가 부른 은혜로운 곡이 있습니다. 제목은 ‘오 주님, 당신은 아름답습니다’입니다. 그 가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제가 찾는 전부입니다... 제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코 면류관을 구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당신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 바로 저의 상급이기 때문이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뜨겁게 사모하고 그 얼굴을 뵈옵는 것만으로 최고의 행복을 삼는 신앙, 그 외에는 어떤 보상이나 상급도 바라지 않는 신앙! 이런 신앙이야말로 순수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2.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한 한국교회
한국교회사를 보면서 많은 이들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터전’이 되었음을 공감하게 됩니다. 그 피 속에 순수함의 절정을 봅니다. 하나님께 생명이 남김없이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초대교회사는 감동 없이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신사참배의 협박과 유혹에서 신앙을 지킨 이들의 아름다움이 빛나고 있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교회의 주요 교단들이 거의 모두 신사참배에 공식적으로 무릎을 꿇고 만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순교적 자세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사람이 있었기에 한국교회는 여전히 소망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비극은 오히려 해방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신사참배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출옥성도들이 겸허하게 한국교회를 새롭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면 한국교회는 새로워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938년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을 때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는 1945년 11월 평북노회 주최 ‘교역자 퇴수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강력히 변호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라고 강변하였습니다. 결국 1946년 6월에 열린 장로교 ‘남부총회’에서 1938년 제 27회 총회가 신사참배하기로 결정한 것은 합법적 절차를 거쳐 가결된 것이 아니기에 무효하다고 결의 한 후 신사참배 문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김영재 교수가 잘 지적한 것처럼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고 진실하게 회개를 하기보다는 얼른 잊어버리기에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사가 중에 한 사람인 민경배는 신사참배 반대자에게는 ‘신앙의 결단과 경건’의 훌륭함이 있었고 신사참배 수용자에게는 ‘존속의 슬기’가 있었다는 애매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회개를 강력히 촉구했던 이들을 자기 의에 도취해 은혜의 신비를 잃어버린 사람들로 폄하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그 동안 한국교회의 주류를 차지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순수성을 잃는 데 치명적인 영향력을 미쳤다고 봅니다.
이러한 교회사의 흐름가운데 어찌 목숨을 걸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가르쳐 질 수 있었겠습니까? 순수성을 지키는 것보다 특정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항상 앞서는 분위기 가운데 한국교회는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풍토 위에 기복신앙이 뿌리를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여건들이 무르익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려온 한국백성은 잘 사는 것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되었습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독재정권은 이런 국민들의 열망을 포착해 경제성장제일주의 정책을 밀어 붙였습니다. 이는 정권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한편 도덕성과는 상관없이 세상적 축복을 도모하는 무속신앙의 전통이 한국교회 안으로 슬며시 침투해 들어와 기독교와 접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때 마침 미국에서 활성화되고 있던 번영신학과 적극적 사고가 한국에 직수입되었습니다. 이 신학과 사상은 한국교회에서 적절한 토양을 만나 미국에서보다도 더 활발하게 뻗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복신앙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와 파괴력으로 한국교회를 장악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정신 바짝 차려 기복신앙의 정체를 밝혀내 교회 안에서 퇴출시켜야할 때입니다.
3. 기복신앙의 정체
어거스틴은 기복신앙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용하다”와 “향유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기복신앙의 정체를 잘 밝혀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이용의 대상인 세상의 재화를 향유하고 향유의 대상인 하나님은 이용하려는 위험성을 경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향유하고자 원하면서 하나님을 단지 이용하려는 것은 왜곡(perversion)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돈을 쓰지 않고 돈을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이것이 기복신앙의 핵심입니다. 즉 하나님께 다양한 축복을 구하는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러한 축복추구가 표면적인 고백과는 달리 실제적으로는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데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질적 목표를 하나님 열심히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겠다는 데 두는 개인주의적 기복신앙이 오늘날 영성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나아가 교회를 부패의 늪으로 빠뜨리고 있습니다. 목사는 복 빌어주는 일종의 샤먼으로 전락되고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거래가 형성됩니다. 목사는 성도가 세상적으로 크게 성공하면 그 과정이 과연 정의로웠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묻지 않습니다. 성공한 성도가 거액의 헌금을 하면 그 출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을 잘 믿어 축복 받은 사람으로 추켜 세워줍니다. 성도들은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들을 잘 따르고 떠받들어 줍니다. 이런 분위기에선 장로로 임직하기 위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헌금을 드리는 관행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결국 교회 안에 진리와 정의는 설자리가 없어지고 맘몬이 실권을 휘두르게 됨으로써 교회는 썩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기복신앙을 노골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복신앙이 한국교회 안에서 어떻게 교묘하게 가르쳐 지고 있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1) 축복의 복음
첫째, 여의도순복음교회 홈페이지에 보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PDF판을 보면 오중복음 중 축복의 복음과 관련해 고후 8:9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가난과 성도의 부유함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물질적 부유함의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사신 것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신 부요를 누리며 살아야 하며, 받은바 축복을 나누어주며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이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길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누는 삶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지만 이를 위해서 우선 부자가 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주 교묘하게 진리를 비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는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고후 8:9의 맥락은 정 반대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독려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해진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해지는 은혜에 동참하자는 뜻으로 말씀한 것입니다(고후 8:1-9).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동을 받고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은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구제헌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씀을 우선 그리스도인은 부자가 되어야한다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마게도냐 성도들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영성을 지닌 사람은 물질적 풍요를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론 물질적 풍요를 부차적인 수단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거기에 얽매여 사는 자기기만의 함정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삶에 진력할 뿐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부의 창출에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다하는 데 필요한 것 외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질적 부를 멸시하는 금욕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필요마저 충족시키지 못한 채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의한 현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압니다(빌 4:12).
2) 야베스의 기도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가 20001년 한국에 상륙하자 폭발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대박을 터뜨렸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무섭게 팔려나갔습니다. 단숨에 유명대형교회들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인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의 정서와 흐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대하 4:9-10). 야베스는 어머니가 고통 중에 낳았습니다. 이 세상에 힘겹게 태어난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자신의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자신을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여 그는 가족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 기도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브루스 윌킨슨은 기복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윌킨슨은 자신이 해석한 야베스의 기도는 종래의 기복신앙과는 다르다고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신뢰는 캐딜락이나 거액의 수입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돈을 버는 물질적인 복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며 인기를 끄는 종류의 복음과는 전혀 다르다’. 이어서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야베스의 기도의 의미를 해석합니다.‘ 야베스가 구하는 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를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레이저처럼 초점을 맞추어 광선을 비추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기복신앙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면을 보면 성경적인 복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잠언 10:22을 인용합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즉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부자가 되고 근심하지 않는 복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적 기도와 야베스의 기도와 실질적인 면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부를 구하되 단순히 자기 욕심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기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복신앙이겠습니까?
이어서 저자는 천국 경험을 한 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베드로를 졸라서 어느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 거대한 건물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선반들이 빼곡이 들어 차 있었고 각 선반에는 이름이 적힌 빨간 리본이 묶여진 하얀 상자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발견한 존은 흥분된 마음으로 상자 뚜껑을 열었습니다. 존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 상자에는 하나님께서 존에게 주시기 원했지만 존이 기도하지 않아서 주시지 못한 복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저자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는 예수님의 말씀과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라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윌킨슨은 그런 말씀들의 맥락과 관계없이 기복신앙적 기도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야베스의 기도가 그런 기복신앙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그 기도는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불의한 세상에서 고난가운데 억울한 삶을 살았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이기적 행복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억압과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땅에 대한 정당한 권리, 인간의 존엄성과 적절한 품위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당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정의를 위한 기도이지 단순히 자기 유익을 위한 기복신앙적 기도가 아닙니다.
혹 야베스의 기도가 기복신앙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해도 성경전체의 맥락에서 그 자리매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고 자신의 백성을 단계적으로 훈련시키는 분이십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은 그 기도가 대단히 성숙한 기도여서가 아닙니다. 다만 야베스의 영적 수준에 걸맞게 하나님께선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베스의 기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모범적인 기도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야 할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마 6:9-13; 눅 11:2-4). 예수님 제자들의 기도의 가장 우선적 관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의 영광, 그의 나라의 확장 그리고 그의 뜻의 실현에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물질적인 문제를 위해선 생존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할 뿐입니다. 이런 기도에 기복신앙적 요소가 틈탈 여백이 전혀 없습니다. 기복신앙으로 포장되고 왜곡된 야베스의 기도에 혼을 뺏긴 한국교회는 주기도문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3) 깨끗한 부자론
요즘 기독청년들 가운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동호 목사의 ‘깨끗한 부자론’ 소위 신청부론(新淸富論)도 조심스럽게 살펴봐야 합니다. 신청부론은 물질적 성공을 축복으로보다는 일종의 은사로 봅니다. 또한 아무렇게나 성공해서는 안되고 정직하게 살아야 됩니다. 또한 성공한 다음에는 획득한 부(富) 중에서 하나님의 몫과 이웃의 몫으로 34.8%를 확실히 떼어나야 합니다. 34.8%는 매년 드리는 십일조(10%)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매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3.3%)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남겨두어야 하는 작물(21.5%)에서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부자와 힘있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돌보는 흐름이 있을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서 남는 부는 자유롭게 즐겨도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깨끗한 부자로서 모든 신앙인이 그런 사람이 되도록 힘쓸 것을 권유합니다.
신청부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기존의 기복신앙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질적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은사라고 강력히 주장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이나 결론을 보면 그 차이가 무색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부자도 되고 권력자도 될 것이다.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부자와 권력자가 될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 이런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전심으로 바란다.
물론 김동호 목사는 단어사용의 실수라며 복이란 단어 대신에 은사를 집어넣으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어만 은사로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복신앙 여부를 가늠하는 데는 단어 자체보다는 돈의 소유와 향유가 실질적으로 그의 삶에 차지하는 위치와 무게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김동호 목사는 돈을 반듯하고 정직하게 벌어 하나님과 이웃의 몫으로 34.8%로 드린 다음 남은 것으로 자유롭고 떳떳하게 누릴 수 있는 깨끗한 부자와 권력자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설정하기를 바란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동호 목사는 돈은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며 돈은 그냥 돈 일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 중립적인 돈이 깨끗하고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동호 목사가 말하는 깨끗한 부자와 권력자가 되려는 사람은 소위 돈을 많이 소유하려는 기복신앙적 소유형 인간일까요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려는 존재형 인간일까요? 김동호 목사는 분명히 깨끗한 부자는 기복신앙과는 무관한 존재형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여기에 김동호 목사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김동호 목사는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진실한 믿음으로 정직하게 살다가 가난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런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존재형 인간이 되려면 가난해질 각오도 해야하기 때문에 아무리 깨끗한 부자와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그렇게 철저한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김동호 목사는 ‘진리대로 살면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적인 불신앙을 버릴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이 도전은 ‘진리대로 살면 밥을 먹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입장에는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패배주의적인 불신앙에 기인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에 궁극적인 결과를 맡기는 겸손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능성은 김동호 목사 자신도 인정한 바일 뿐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바요(히 11:36-39) 정직한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생각마저 패배주의적 불신앙이라고 말한다면 김동호 목사는 자랑스런 가난의 가능성을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김동호 목사가 이런 딜레마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없이 꼭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과잉집착 혹은 누구나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면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과잉믿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잉집착과 과잉믿음이 바로 기복신앙적 요소인 것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기복신앙의 전파자로 공격받아 온 분들이 정직한 삶과 나누는 삶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그들의 문제 역시 정직한 삶과 나누는 삶이 은연중 혹은 공공연히 더 큰 부자가 되는 축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는 깨끗한 부자와 존재형 인간 사이의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천국열쇠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철이 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마 16:19). 돈, 세상 그리고 권력에 대해 반듯한 믿음의 자세를 갖추면 하나님께서 즉시 천국열쇠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것 즉 돈과 권력을 마음껏 누리고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상원 교수가 잘 지적한 것처럼 천국열쇠의 용도에 대한 김동호 목사의 잘못된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천국열쇠는 복음전파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펼쳐지게 되는 길을 열어 주는 열쇠를 말하는 것이지, 깨끗한 부자와 권력자가 되는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아닙니다. 또한 철만 들면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부와 권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도 과잉믿음입니다. 김동호 목사의 해석이 옳다면 역사적으로 가난했던 주의 종들은 모두 철이 들 든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이는 자랑스런 가난을 인정했던 자신의 말과도 배치됩니다. 이 모든 문제는 김동호 목사가 깨끗한 부자를 신앙적인 삶의 한 가능성으로 놔두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는 목표로 제시한 데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물질적 축복을 목표로 삼는 기복신앙적 요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물질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의 부는 모두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금욕주의자여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질의 풍요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다 함께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빈부의 차가 극심한 불의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부가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 풍성하게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삶을 복음적 가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깨끗한 부자에서 시작해서 복음적 가난으로 성장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깨끗한 부자를 그리스도인의 목표인 것처럼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복신앙의 경계선을 넘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속기 매우 쉬운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고세훈 교수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의 서평에서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깨끗하고 떳떳한 내 몫의 “부(富)”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행보는 이미 “넓은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버지의 집에서 장사하는 자의 집으로 바뀐 것에 대해 대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람의 이익과 물질적 번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핵심적인 문제임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4. 물질적 축복에 대한 바른 이해
기복신앙을 극복하려면 구약의 축복관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축복을 약속하십니다(신 28:1-4). 그러나 그 축복도 자세히 드려다 보면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주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이 축복을 함께 누리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입니다(신 15:1-18; 행 4:31-37).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진행되었던 구약시대에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축복의 약속은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개인주의적 번영을 도모하는 기복신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물질적 번영마저 구속역사의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한 것도 결국 아브라함의 신앙적 영향력과 교육의 결과로 그 후손들이 공평과 정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창 18:18-19). 구약에서도 결코 성공과 번영이 믿음의 최종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순수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욥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련을 허락하셨습니까? 사단에게 욥의 믿음이 기복신앙이나 번영신앙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임을 입증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욥 1:6-12).
5. 하나님이 보기 원하시는 신앙인의 모습
한국교회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분명하게 보여준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단 3:1-18). 그들은 왕명을 어기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다가 왕 앞에 고소를 당하였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지금이라도 우상에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기회를 줍니다. 이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에서 건져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어서 더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의 신앙은 자신의 생명이나 번영과는 관련이 전혀 없는 순수한 신앙이었습니다(단 3:1-30). 이렇게 구약에서조차도 개인의 이기적인 축복추구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의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필적할 최대의 적으로 맘몬을 지목하셨습니다. 맘몬은 강력한 흡인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맘몬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면 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맘몬과 하나님은 동시에 섬길 수 없으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마 6:24). 그리스도인은 맘몬을 철저히 거부하고 하나님만을 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자신을 위해선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하고 오로지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무속적인 전통과 군부독재시절의 경제성장제일주의가 기독교 믿음 안으로 스며들어와 순수한 신앙을 오염시켰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렇게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축복과 번영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교회가 대체로 쉽게 양적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충돌 없이 섬길 수 있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즐거운 복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복음에는 진정한 십자가, 좁은 문 그리고 좁은 길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교회내의 생활에 대한 충실성이 이를 대신 할 뿐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삶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본회퍼는 ‘값싼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상실한 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기복신앙을 회개하고 순수한 영성을 회복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는 별 희망이 없습니다. 경제학자 허경회는 ‘신은 죽었다. 그러나 돈의 신, 맘몬은 예외이다. 우리들 현대인에게 그는 유일하게 현재(顯在)하는 신이다. 우리들은.... 맘몬의 영광을 이 땅에 재현하는 거룩한 맘몬의 성도(聖徒)들이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비록 경제학자의 글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입니다. 맘몬의 위험성을 가슴깊이 새겨 기복신앙을 회개하고 이런 믿음이 교회강단과 성도들의 삶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운동이야말로 한국교회 개혁의 첫 걸음입니다. 대신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바울의 메시지가 힘차게 외쳐져야 합니다(행 14:22). 마틴 루터의 그 유명한 95개 조항으로 된 반박문의 마지막 조항은 486년이 지난 지금에도 너무나도 실감나게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따라서 거짓된 평화의 보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확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