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 기차가 보이지 않는다
임병식 rbs1144@daum.net
1960년 초기 한때 경전선 구간 순천과 광주 간에는 기차로선 할아버지 격인 <프러> 열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이 기차는 말로 치면 조랑말에 해당하여 여느 차에 비해 훨씬 작고 낡은 것이었다. 실제로 보아도 다른 기차는 기관차 몸통이 길고 큰 바퀴 세 개 이외에도 작은 보조 바퀴가 달렸는데 이것은 작은 몸통에다 큰 바퀴만 달랑 세 개만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향 득량역을 일곱 시 반에 지나갔다. 그래서 학생들 간에는 이 차를 통학 열차라고 불렀다. 그 시각에 맞춰 타면 약 이십 분 나마 걸려 보성역에 도착하여 등교 시간이 알맞았다.
당시 보성중학교에 다닌 나는 봄에서부터 가을까지는 마을 뒷산인 풍치산을 도보로 넘어서 통학을 했지만, 겨울철에는 역에서 한 달 치 통학증을 끊어서 기차로 다녔다. 아침 등교 시는 그런대로 재를 넘어 다닐 만했지만, 하교 시는 금방 해가 넘어가 어둑해져서 도보로 통학하기가 불편해서였다.
사시사철을 새벽밥을 먹고 나서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겨울에는 신경을 써야 했다.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다니고 있어 ‘속담에 기차 떠난 뒤 손 들기’라는 말이 있듯이 놓치기라도 하면 허망한 입장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역까지 나가면서 조금이라도 해찰을 부리면 맨 처음 마주하는 교차로에 세워진 신호기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때가 많았다.
그러면 이때는 삼백 미터 남짓한 거리를 뛰어가야 한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뛰노라면 금방 숨이 막혀왔다. 그래도 숨을 몰아쉬고 뛰면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명치끝이 아려왔다.
그 기차는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통학차’지만 학생들만 이용하는 건 아니었다. 4, 50대 아주머니들이 함께 많이 이용했다. 이분들은 주로 기차 통로에다 꼬막 포대를 싣고 있었다. 그런 꼬막 포대가 어떨 때는 세단까지 쌓였다. 그런 꼬막 포대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났다. 간 끼를 충분히 빼고 실어도 조금씩은 흘러내려 미끄덩거리기도 했다.
짐이 많이 실린 날은 바지가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잘못하여 자칫 스치기라도 하면 그 특유의 꼬막 냄새는 하루 내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득량역에는 급수대는 없었지만, 반드시 이곳에서 석탄을 화구에 집어넣었다. 화구를 열면 뜨거운 열기가 확 끼치는데 기관사들은 능숙한 솜씨로 그곳에다 석탄을 퍼 넣었다. 이때는 삽을 이용하는데 두 사람이 교대로 집어넣었다.
그때 보면 차장은 반드시 차에서 내려서 전후방을 살폈다.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혹시라도 승객이 뛰어오나 살피는 것 같았다. 붉은 기와 푸른 기를 들고 있다가 푸른 기를 흔들면 출발이다.
이 기차는 큰 바퀴 사이에서 유독 많은 증기를 내뿜었다. 아마도 기관이 낡아지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아니, 이 기차가 낡았다는 것은 기적소리가 증명해 주었다. 여느 기차는 우렁차게 ‘뛰-’ 하고 소리를 내는데 이것은 목청이 갈라지는 가냘픈 소리를 냈다. 그것만 보아도 고물이 다 된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기차는 한 번씩 곤욕을 치렀다. 여느 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곧잘 다니는데, 어떤 때는 서행을 하다못해 미끄러지는 때도 있었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도말’을 한다고 했다. 득량 지역이 끝나가는 지점에는 기러기재가 있다. 통상 그럭재라고 부르는 곳인데, 여기에는 오백 미터 가까운 터널이 뚫리어 있다.
그곳에 이르기 직전은 상당한 오르막 경사로가 펼쳐진다. 여기서 통학 열차는 단번에 오르지는 못하여 2, 30미터씩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그러면 다시 석탄을 제겨 넣고 한동안 시커먼 연기를 피워 울린 다음 겨우 힘을 받아 올랐다.
그런 날은 자칫 창문이라도 틈새가 벌어지면 승객들의 콧구멍은 시커먼 굴뚝 구멍이 되었다.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 검은 연기가 흡입된 까닭이었다.
나는 당시는 그런 열차를 타면서 열차 출입구에 쌓인 꼬막이 어디로 실려 가는지 몰랐다. 그런데 연전에 직장에서 퇴임한 고향 친구와 문화탐방을 다니면서 그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기 어머니가 그렇게 새벽잠 설치고 고막을 싣고 나가 광주 남광주 시장에서 팔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런 꼬막은 상차 지점을 보지 않아 모르지만 아마도 벌교에서부터 싣기 시작하여 조성과 예당을 거쳐 최종적으로 득량역에서 마지막 짐을 싣지 않았을까 한다.
당시 차장은 그런 짐을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그런 짐들이 계속 실려 나가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 기차 안은 학생들은 눈방울이 또렷또렷하지만 짐을 실은 아주머니들은 바로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먼길을 가자면 한참이 걸리기에 짬을 내어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들의 얼굴빛은 밝지 못했다. 생활전선에 뛰어든 사람들의 본연의 모습처럼 한편에서는 근심의 어리고 고단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이 되었다.
친구 어머니는 그렇게 장사를 하여 8남매를 건사했다고 한다. 논밭 뙈기 하나 없이 온전히 노동으로 꼬막을 팔고, 고막이 나지 않을 때는 그릇장수를 하여 생계를 이어갔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당시 내가 바짓가랑이에 닿지 않도록 꼬막 포대를 넘고, 무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 긴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졸고 있는 분 중에는 친구 어머니도 끼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때 친구가 될 어머니인 줄 알았다면 상냥하게 인사라도 건넸을 텐데 아쉽게 생각된다. 그런데 그렇게 다니던 열차가 지금은 득량과 보성 간을 간헐적으로 운행한다. 그것도 득량역은 역무원이 주재하지 않는 상태로 변모하여 하나의 풍경으로 남아 있고, 다른 급행열차도 차량을 단출하게 한 두 칸만 매달고 다니고 있다.
물론 당시 다니던 기차는 그때도 고물이었으니 진즉 퇴역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열차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부속품 일부는 해체되어 다른 용도로 처분이 되었다고 해도 본체는 남아 있을 텐데 어디에 보관이 되어 있을까. 무려 60여 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회상을 해보는 것이지만 무척 궁금하다.
그때 보면 다른 기차 즉, ‘터우’나 ‘미카’는 큰 바퀴이외도 보조바퀴가 있어서 오르막 기러기재를 문제없이 다니고 있었는데, 조랑말 같던 그 헉헉대던 기차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통학생과 수산물을 파는 남도의 아주머니들과 함께해온 그 ‘프로’ 열차가 보고 싶다. 차제에 나는 지자체에 당부하고 싶다. 한때 물류의 거점이면서 지역경제의 교통로 역할을 했던 이곳에 그 기차를 철도청과 교섭하여 역사 내에 전시해 놓으면 어떨까.
수년 전에는 철도청에서 득량의 역사를 ‘가볼 만한 명소’로 지정한 적이 있고, 군에서도 추억의 거리로 명명한 이상 그 열차를 가져다 놓으면 좋지 않을까. 옛 추억도 더듬어 볼 수 있고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한 번씩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것이 아닌가. 모처럼 오래 적 추억을 더듬어보면서 소박하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지금은 그 기차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다니지 않는다. (2024)
첫댓글 득량역 기차 여행을 잘 했습니다. 기차 기종, 기차 바퀴 수, 기차 속도하며 득량을 달렸던 기차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기차를 이용했던 학생들 하며 꼬막포대를 실고 광주까지 가는 4~50대 아주머니 모습들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고생을 통하여 후손들이 잘 살 수 있었고, 그 때의 어머니들을 둔 후손들은 부모님의 노고에 대하여 은공을 생각할 수 있는 귀한 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득량역이 있었던 곳에 흔적을 살려 보성 문화상품을 개발하면 또 하나의 좋은 관광 상품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글이 없었다면 어떻게 득량역을 잘 알겠습니까! 후대에 좋은 역사 자료가 될 것입니다.
보성군 행정을 맡은 공직자들은 보성출신 《임병식작가의 문학관》을 조속히 세워 문화의 거리를 마련하여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그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바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김선생님의 가슴 따뜻한 댓글 잘 읽었습니다.
평소에도 저를 많이 챙겨주시는데 댓글을 읽으니 그간의 고마웠던 마음이
다시 한번 느껴집니다.
저는 나이가 들었지만 지금도 득량과 보성간 경전선을 오가던 기차의 추억을
잊지 못합니다.
어려서는 기차통로에 가득 쌓인 고막포대가 비켜다니기에 불편하여 그것만
조심할 생각을 하고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고막을 팔아 자식들을 건사한
어머니들의 노고가 생각나 새삼 가슴이 뭉클합니다.
지금은 역사도 폐쇄가 되어 쓸쓸하기 짝이 없는데 그것에 당시 다니던 폐차나마
기차를 가져다 놓은다면 하나의 관광상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한번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일같이 득량역으로 달려가 보성중학교에 등교하고 방과 후엔 다시 득량역에 내려 귀가하던 중학생의 모습을 그려보게 됩니다 제가 살던 지역에서도 순천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새벽같이 십리 길을 걸어 덕양역에서 동차라는 기차를 탔지요
득량역 일대가 추억의 거리로 조성되어 있는데 막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그 시절의 기차가 전시되어 있지 않은 점은 제가 생각해도 아쉽습니다 통학생들과 지역 주민의 삶의 애환이 서려있는 기차를 찾아 전시했으면 합니다 부득이한 경우라면 비슷한 유형의 기차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전역 구간에는 세종류의 기타가 다니고 있었지요.
가장 오래된 '프러'와 다음은 '터우' 그리고 '마카가 다녔습니다.
프로는 득량역에서 7시반경에 출발하기에 통학생들이 많이 이용했습니다.
초겨울에는 고막을 팔러가는 아주머니들도 함께 다녔지요.
나는 당시에는 그 고막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나중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남광주까지 가서 팔고 왔다고 하더군요.
고단한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은 득량역이 기차도 서지 않는 폐역사가 되었는데 그곳에다 옛날 다니던
'프러'열차를 가져다놓으면 좋은 관광상품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