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흘 째 추적추적 내린 비는 지난 무더위에 후끈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열기를 다 식혀버리고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온 동네 구석구석 습기가 내려앉아 아직 한 여름인데도 가을처럼 싸한 기운이 맴돌고 있으며, 그것은 안방도 마찬가지이다. 천장은 비가 새어나와서인지 벽지에 거뭇한 것이 내려앉아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다. 어느 곳은 벌써 찢어져서 빗물이 오줌방울마냥 쪼르르 떨어지기도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비 내리는 소리로 가득 차있던 나의 방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틈으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그들의 목소리이다. 나는 보통 손님을 맞듯 문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채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더 거세져만 갔다. 발로 걷어차기라도 한 건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사물들이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욕지거리도 했다. 하나같이 입에 담기 힘든 욕들뿐이었다. 그런 심한 욕지거리가 한동안 계속 되어도 나는 일어나선 안됐다. 그리고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져갈 때서야 나는 이불을 걷어냈다.
언제까지 이렇게 쥐구멍 속에 숨어든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그들이 이렇게 맨손으로 와서 맨손으로 가는 것도 잠시뿐이지, 분명 언젠가는 연장이나 흉기 같은 것을 들고 와서 저 연약한 문 따위 아주 쉽게 따고 들어올 거라는 생각들이 조금씩 내 목을 쥐어간다.
빚쟁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그 1년 사이에 내 얼굴엔 주름살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머리에는 염색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건만 그 필요성을 느끼게 할 정도로 희끗한 머리카락들이 보기 싫게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몇 번이고 다 때려치우고 한강에 몸을 던질까 생각도 했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고, 하나밖에 없는 딸, 민서를 위해서라도 죽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텔레비전 위에 앞면 유리가 처참하게 깨진 액자를 바라봤다. 나와 아내, 그리고 민서가 어딘가의 꽃밭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이다. 그 일이 있은 직후, 홧김에 던져버린 걸로도 모자라 갈기갈기 찢어서 버릴까 생각까지 했던 것이지만,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그대로 내버려둔 게 지금 저 모양으로 남은 것이다. 액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느껴진 시계 초침 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리고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었다. 큰 거래가 있는 오늘, 좋든 싫든 거래처 손님을 대접해야하는 자리에 앉아야하기 때문이다.
해는 콘크리트 장벽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흘 내내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지만 하늘엔 아직도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달은 물론 조막만한 별 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새벽이 올 때까지 말간 빛을 발하는 가로등불, 빨갛고 하얗고 노란 자동차 불빛이 한데 어우러진 현대엔 그런 것 즈음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수많은 젊은이들과 중년들은 잔뜩 취기가 올라 인공의 빛 사이를 마치 무대의 조명으로 착각이라도 한 듯, 비틀거리며 발을 놀린다. 나는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똑바로 걸었다. 접대하는 동안에 도로 공사라도 한 건지 올 때만 해도 반듯하던 길이 이상할 정도로 구불거리는 바람에 조금 헤매긴 했지만 안전하게 도로변에 도착했다. 누가 미리 전화라도 했는지 택시가 한 대 정차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택시 뒷좌석 문을 열고 비틀비틀 거리는 거래처 손님을 조심스럽게 배웅했다.
“사장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조심히 가세요. 기사 양반, 잘 모셔다드려.”
거래는 성공했다. 빚쟁이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내 품에선 엄청난 금액이 빠져나갔고, 내 나이가 오십 줄에 길 한복판에서 허리를 90도로 굽히는 수모도 겪었지만, 결과만 따지고 보면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금액이나 짓밟힌 자존심 따위는 보잘 것 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수표를 비롯해서 몇 십만 원어치 지폐가 들어있던 지갑 안에는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오백 원 동전 두 개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집까지 가는데 택시비로 오천 원은 나간다 치고, 남은 돈은 동전 두 개 합친 천 원이나 다름없다. 그래. 민서랑 같이 마시게 캔 커피 두 개 뽑아 가면 되겠다. 가까운 자판기로 비척비척 다가가 동전 두 개를 집어넣었다. 점점 더 얇아져만 가는 지갑이었지만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았다.
눈을 뜬 것은 해가 중천에 떠있을 무렵이었다. 정신은 멀쩡했지만 몸에는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꽤나 욱신거렸고 결국 일어나질 못했다. 시간을 확인하기위해 핸드폰을 찾으려 손만 뻗어 머리맡을 더듬다가, 핸드폰이 아닌 다른 뭔가가 집혔다. 눈앞에 가져와보니 뭔가가 쓰인 작은 메모장이다.
먼저 나갈게요. 아침은 차려놨으니까 꼭 잡수세요.
민서가 쓰고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기특함에 술기운이 한 번에 날아갈 것만 같았지만, 마냥 흐뭇하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딸이 이른 아침에 나가는 건 학생의 신분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인의 신분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부자리에 누워 가만히 민서가 쓴 메모를 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흘리며 힘을 꽉 주고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이 고통으로 아우성을 쳤지만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찾던 핸드폰은 어제 자신이 입었던 외투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시간은 오후 두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고, 부재중 전화는 걸려있지 않았다. 바로 어제 큰 거래를 마친지라 그렇게 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잡다하게 납품할 게 있는데도 전화가 없다는 것이 영 께름칙해서, 재빨리 공장 전화번호를 눌렀다. 짧은 착신음에 이어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OO전기입니다.
어제 있었던 큰 거래가 성공했다는 것을 전하고, 잡다하게 남은 납품은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았다. 직원은 웃으면서 다 마쳤다고 말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사장이 제 입에 풀칠하기도 바빠 봉급도 하나 제대로 못주는 상황인데도 공장에 나와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는 걸 보면 직원들이 하나같이 기특할 뿐이다. 오늘 공장에 나가지 못한 것에 사과를 하자, 직원은 괜찮으니 오늘은 푹 쉬시라고 대답했다. 게다가 아침에 미리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누구한테 연락을 받았느냐고 물으니 자제분이라고 대답했다. 아. 민서는 내 아침밥상을 차려준 걸로 모자라 이런 곳까지 신경을 써준 것이다. 괜스레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꾹 참고 수고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은 뒤, 거실로 나가 민서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늦은 아침이자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할 때,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공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하는 조바심에 손에 묻은 물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수신 상태가 안 좋은 탓인지 수화기 너머에선 말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불러보자, 그제야 목소리가 들렸다.
날세, 윤 서방.
한없이 기운이 없었고 근심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었고, 잊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도 좀처럼 잊을 수 없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처남의 목소리였다. 아내의 오빠의 목소리. 그 쌍년의 오빠의 목소리. 그래도 처남이니까 나름대로 격식을 차려 조심스럽게 말한다고는 했지만 내 성격도 성격이거니와 감정이란 걸 그렇게 쉽게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불손한 태도에도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격양되기는커녕 더욱 수그러들 뿐이었다.
……미안한데, 우리 집으로 와줄 수 있겠나?
대체 뭐 보여줄 게 있다고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것인가? 애당초 이 자는 나를 볼 낯도 없을 것이었다. 이렇게 전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워해야하고, 남은 인생동안 내 이름 석 자를 들으면 고개를 숙인 채 죄책감에 시달려야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부르는 것인가?
그게……. 영이가 이쪽으로 왔어.
나는 하마터면 핸드폰을 놓칠 뻔했던 것을 꽉 붙잡고 다시 확인해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그대로였다.
영이가 이쪽으로 왔어. 병이 또 도졌나봐. 애 꼴이 말이 아니야. 약도 다 떨어져서 없고, 병원 가자고 하니까 죽어도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애써 포장을 하려는 의도가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도 역력히 드러난다. 너무나도 불쾌한 나머지 얘기를 다 듣지도 않은 채 핸드폰을 꺼버렸다. 민서와 직원들이 베풀어준 휴식시간은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나는 어제 입었던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떠오르는 것은 낯짝도 두꺼운 아내, 그 쌍년의 얼굴에 주먹을 내다꽂겠다는 것 하나 뿐이었다. 1년 전, 나에게 이런 짐을 떠넘기는 걸로 모자라 딸의 인생까지 망가뜨려놓고서 이 서울 땅에 다시 나타날 정도면 낯짝이 두꺼워도 여간 두꺼운 게 아닐 터이다. 그러니 흠신 두들겨 패도 그 독한 년은 괜찮을 것이다.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긴 할까? 아마 고개를 치켜들고 콧대를 높이며 대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독한 년. 쌍년. 쳐 죽일 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년. 네 이년 기다려라. 당장 가서 그 머리털을 모조리 뽑아줄 테니.
바깥은 어제 그쳤나 싶었던 비가 또 다시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산을 쓰진 않았다. 폈다가 접었다가 하는 시간도 아깝게 느껴졌다. 얇은 외투는 생각보다 빨리 젖기 시작했다. 그래, 이 외투가 마를 때까지 뚜드려 패버리는 건 어떨까. 그러면 내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질지도 모른다. 민서는 엄마가 돌아온 걸 모를 테니, 그 몫까지 더해서 패주자. 다신 그 재수 없고 두꺼운 낯짝 들고 다닐 수 없게끔 뭉개 버려주자. 기다리고 있어라, 독한 년. 쌍년. 쳐 죽일 년. 에이, 쌍년.
괜스레 가래가 들끓어 바닥에 퉤하고 내뱉었다.
지하철을 타고 20분, 내가 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었는지 처남은 매표소 주변에서 기다려주고 있었다. 비를 홀딱 맞아 축 늘어진 몰골을 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처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윤 서방. 자네 우산 없이 온 건가?
처남은 자신이 쓰고 왔는지 빗방울이 좀 묻어있는 접이식 우산을 나에게 쥐어주었다. 그러나 그걸 곱게 받기가 싫었다. 바로 내쳐버리고 처남에게 집 위치를 안내하라고 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이놈의 처남은 알려달라는 위치는 안 알려주고 계속 말을 돌리려고만 한다. 하도 짜증이 난 나머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것도 무시하고 크게 역정을 내니, 처남은 그제야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자네, 영이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
걷는 도중, 처남은 나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꼴에 오빠랍시고 동생을 감싸줄 모양인가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가면 보기 싫어도 보게 될 것이다. 처남도 그걸 알았는지 심난한 표정만 지을 뿐,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여기일세.
처남은 반 지하로 된 집의 문을 열었다. 나는 신발을 집어던지다시피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보인 문을 부술 기세로 열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건너 방의 문을 열어보았다. 바닥에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세상 편하게 자고 있는 여편네가 눈에 들어왔다. 이마엔 얼음주머니를 얹어놓고 있고 옆에는 각종 약들이 널브러져있었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더니 이런 팔자가 또 있을까. 나와 민서는 지난 1년 간 아파도 약 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잠도 제대로 못 잤으며 새우잠을 자기 일쑤였는데 이 쌍년은 지금 저렇게 편한 자세로 자고 있으니, 사람 삶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름을 몇 번 부르자 여편네는 힘아리 하나 없이 눈을 부스스 떴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힘아리 하나 없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랜다. 하지만 피하려는 기색은 보이지가 않았다. 아니, 피할 수가 없는 것인지, 여편네는 간질이 난 것 마냥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줄줄 흘리기만 했다. 에이, 쌍년. 꼴에 동정심을 유발할 생각인가보다.
그 꼴값을 떠는 걸 보자 괜스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손을 한 번 치켜들자 여편네는 지레 겁을 먹은 듯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휙 돌린다. 그것도 기침을 콜록콜록하고 몸을 요란스레 들썩이며.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얼음주머니가 옆으로 툭 떨어졌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얼음덩어리가 여러 개 둥둥 떠다니던 것들이 벌써 다 녹아서 없다. 나는 치켜든 손을 내려 여편네 이마에 올려보았다. 샛바람 맞은 것 마냥 오들오들 떠는 것이 이마에 얹힌 손바닥을 통해 그대로 전해져왔다. 열도 불덩이 같았다. 주위에 널브러진 약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통일된 게 아니라 두통약에 감기약에 해열제, 우황청심환, 안정제, 별의 별 오만 잡다한 약들이었다. 눈알이 뒤집어질 뻔 했다. 오히려 내가 안정제를 마시고 싶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바깥에 있을 처남을 불렀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들어오는 처남에게 구석에 있는 약들을 가리켜 보이며 이것들은 대체 뭐냐고 물어보았다.
……애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병원 데려가려고 했더니 죽어도 싫다고 하고…….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긴 했는데 어떤 약을 먹여야할 지 몰라서…….
화가 나기 이전에 어이가 없었다. 주먹으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어떻게 저렇게 딱 봐도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모를 중환자를 가기 싫다며 생떼를 부린다고 병원에 안 데려간 걸로도 모자라 죽도 한 사발 안 끓여주지 않고 빈속에 이상한 약을 퍼다 줄 수 있는 걸까. 이런 미친놈을 오빠, 오빠 하고 따르던 여편네가 불쌍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당장 처남에게 구급차를 부르라고 했다.
하, 하지만, 병원비도 빠듯한데…….
이 인간은 대갈통에 돈 생각만 꽉 찬 모양이다. 사람이 죽을까 살까 하는데 병원비 걱정을 하고 있다. 뒷골이 당겨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깔이 뒤집어지려고 하는 걸 온 힘을 다해 꾹 참고 구급차를 부르라고 다시 한 번 강하게 말했다. 처남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결국 119를 눌렀다. 그걸 확인한 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담배를 끊은 지 거의 6년이 다 되어가건만, 또 다시 담배에 손을 대고 싶은 욕망이 피어올랐다. 편의점 주위를 배회하길 수십 번, 유혹을 견뎌낸 대신 소주 두 병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아직 시간이 이렀기 때문인지 민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내심 안심을 하고 말았다. 솔직히 민서가 온다면 비로 축축하게 젖은 이 꼴을 뭐라고 설명해야할 지도 모르겠고, 그 여편네에 대해 말을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을 할 게 뻔했다. 소주 한 병의 뚜껑을 따며 술잔도 없이 그냥 주둥이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그 시원했던 소주가 오늘은 어째 시원하기는커녕 속만 더 끓게 만든다.
그 독한 년을 패죽이겠다는 심정으로 갔건만 어떻게 빈손으로 돌아와 버렸는가. 지난 1년간 짊어진 업과 내가 쌓아온 분노는 그것밖에 안됐던 걸까? 그 여편네가 아프든 말든 한 대 정도는 쥐어박았어야만 했다. 그게 정상이었건만 그러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그 꼴을 한 사람을 어떻게 때린단 말인가? 그것도 밖으로 기어나간 뒤에 병에 걸려 들어온 거라면 고소하기라도 하지, 저놈의 여편네는 신혼 때부터 저렇게 빌빌거리며 살아온 인간이었다. 원래부터 몸이 편찮았고 한 번 아프면 오늘이 고비다, 내일이 고비다 할 정도로 연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주제에 밖으로 기어나간 것이다. 그래도 죽고 싶진 않았는지 자기가 먹던 약을 다 싸들고 나갔다만, 약을 1년 치가 아니라 반년 치 끊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것만 달랑 싸들고 나갔으니 적어도 반 년 넘게 약을 못 먹고 지낸 셈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병원에 안 간 건 아마도 의료보험이니 뭐니 거치다가 나한테 연락이 닿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리라. 에이, 쌍년. 머리 굴리는 꼬락서니 하고는……. 어쩜 저렇게 둔할 수가 있을까. 초등학생이 머리를 굴려도 저 정도로 제 살 파먹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소주 한 병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손에는 어느새 텅 비어버린 소주병이 쥐어져있었다. 그걸 옆에다 두고 남은 한 병마저도 뚜껑을 따버렸다. 눈앞에 빌빌거리던 여편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에이, 쌍년아. 에이, 독한 년아. 평소엔 물처럼 넘어가던 소주가 오늘따라 너무나도 뜨겁게 느껴졌다.
바깥에서 쓰레기 운반차가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간을 보니 새벽 1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민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이틀 술을 마신 탓인지 몸이 좀 무거웠다.
빗줄기는 조금 더 거칠어져서 금방이라도 창문을 꿰뚫을 것만 같은 기세로 주룩주룩 내린다. 천장의 거뭇한 문양은 아침에 봤을 때보다 더욱 커져 있었다. 이젠 사람의 얼굴이니, 동물의 모습이니 할 수준이 아니라 무언가가 썩고 곪은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날씨도 이런데 돌아오지 않는 민서가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서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응, 아빠.
다행히도 별 일 없는 모양이었다. 민서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다며, 먼저 주무시라고 말했다. 전화를 받다가 손님이라도 온 걸까. 일하다가 겪은 일을 신나게 얘기하던 민서는 깜짝 놀라는 소리를 내더니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부터는 일하는 도중에 전화를 거는 건 자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찮게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안 돼서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처남이었다.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어. 폐에 물이 차고 심장도 많이 안 좋대. 그리고 갑상선도 심하게 부었다고 하더라.
남의 일처럼 말하는 처남이 참 골 때렸다. 처남이 지 멋대로 약을 처먹이지 않고 아내를 일찍 병원에 데려갔다면 아주 조금은 괜찮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놈의 처남은 결국 자기 집에 오기 전부터 아내가 아팠으니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병원비 말인데…….
더 듣기도 싫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병원비? 지랄을 한다. 거기까지 책임져줄 정도로 난 성인군자가 아니다. 병원에 데려가라고 시켰으면 됐지, 내가 뭐가 좋아서 그딴 여편네 병원비를 대줘야하는 건가? 것보다 처남 이놈은 지 동생이 중환자실로 갔으면 슬퍼하든지 자기 행동이 굼떠서 병이 더 커진 건 아닐까, 하고 죄책감을 느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끝까지 돈, 그 놈의 돈만 입에 올린다. 여편네보다도 처남이 더 개새끼 같다. 아니, 여편네가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도 다 처남이 무능했기 때문이니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저 처남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여편네가 그렇게 된 것도 다 네 탓이니 네가 돈 다 내라, 이 개새끼야. 그 여편네가 뒈지면 너 때문에 뒈진 거고, 그 순하던 여편네를 이토록 독하게 만든 것도 너 때문이니 네가 다 책임져라, 이 쌍놈아. 에이, 쌍놈.
솔직히 그 때 아내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처남은 그저 사업에 실패해서 빚쟁이 신분으로 아내나 나에게 어디 일자리가 없냐고 물어봤을 뿐이었다. 문제는 이놈의 여편네가 착해도 너무 착한 나머지, 제 오빠 불쌍하답시고 내 통장에서 돈을 조금씩 빼다준 것이었다. 아무리 저축을 해도 재산이 불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드는 것이 이상해서 출금내역을 조사해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돈이 수차례 출금되어 있었고,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은 통장관리를 하는 사람인 아내밖에 없었다.
처음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네가 돈을 뺐냐고. 아내는 민서의 등록금 때문에 그랬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늘여다놓았다. 등록금 문제를 왜 네가 멋대로 처리하느냐고, 그런 건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넣어줄 것 아니냐고 했더니 아내는 다음부턴 안 그러겠다고 빌었다. 다소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가 돈을 이상한 곳에 쓸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에, 그냥 통장관리를 나한테 넘기는 걸로 끝냈었다. 만일 아내가 그 때 이실직고 했거나 그 뒤로 가만히 있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빚쟁이라는 업을 짊어질 필요도, 아내가 집을 나갈 이유도, 약이 다 떨어져서 반년 넘게 못 먹어 병이 심화되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통장에서 돈을 빼지 못하게 된 아내는 주위에서 내 이름으로 돈을 빌리기 시작했고, 그게 내 귀에 들어와 추궁을 한 날 밤, 아내는 도망을 쳐버렸다.
처남은 아내가 내 통장에서 돈을 몰래 빼고, 주위에서 빚까지 져가면서 자신에게 돈을 대줬다는 사실을 아내가 도망치고 난 뒤 내가 연락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했다. 돈을 어디서 났냐고 물어봐도 다 자기가 번 돈이라고 대답했었고, 네가 어디서 이렇게 벌 수 있냐고 물어보면 남편이 조금 도와줬다는 식으로 핑계를 댔었다고 했다. 결국 나는 물론 처남까지 아내의 주둥아리에 놀아난 셈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이 지경이 된 건 꼭 누구의 탓이라고 말할 게 아니었다. 처남이 사실을 몰랐던 것, 아내가 너무 착했던 것, 내가 사전에 아내의 잘못을 잡아내지 못했던 것이 모두 종합돼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처남이 일찍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정말 못된 인간이 아닌 이상 말렸을 것이다. 아내가 조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면 무턱대고 돈을 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사전에 아내의 잘못을 알고 호되게 혼냈더라면 아내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안 가져왔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속은 그렇게 넓지 못했다. 힘들게 일 하고 들어와도 반겨주는 이는 없었고, 휴일에 조금 쉬려고 해도 빚쟁이들이 가만있질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갖은 협박, 욕지거리는 하루하루 내 목을 옭아맸다.
민서는 또 어떠한가? 잘 다니던 학교를 등록금 문제로 그만두고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은 한 번씩은 꼭 한다는 핑크빛 연애도 못한 채 벌써부터 먼지를 마시고 손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있다. 아들새끼였다면 그러려니 하겠건만 곱디고운 외동딸 손에 스물 중반도 넘지 않았는데 굳은살이 베기는 꼴을 마냥 기특하다고 볼 아버지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뭐가 어쨌든 이 모든 일은 아내가 거짓말을 하고 돈을 함부로 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좋아서 결혼을 한 것이고, 이런 저런 고비가 있어도 아내가 있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다. 이젠 사랑이고 뭐고 진짜 밉보일 뿐이지만 미운 정도 고운 정이라고, 그래도 아내인데,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마누라인데, 몸이라도 성해서 돌아왔으면 화를 내든 때리든 내쫓든 하지, 저렇게 반병신이 돼서 돌아왔는데 어떻게 죄를 물을 수 있다는 건가.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교활한 년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르고 도망쳐놓고는 차마 혼낼 수도 없는 몸이 돼 돌아왔느냐 말이다.
나는 다시 한 번 핸드폰을 열어 처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착신음은 그렇게 길게 들리지 않았다. 처남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나는 간단하게 할 말만 했다. 돈은 이쪽에서 알아서 지불할 테니까 이제 돌아가라고. 그리고 아내가 빌려줬던 돈은 차후 나와 따로 만나서 합의 보기로 하고, 그 일이 끝난 이후엔 두 번 다시 아내와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까지 겁을 줬으니 처남은 다시는 아내에게 손을 뻗지 않을 것이고, 아내 역시 또 다시 처남을 돕겠답시고 나서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용서해줬는데도 하지 말라는 짓을 할 사람이었으면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한 번 더 믿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기가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을 한 걸까. 아니면 정말로 동생을 걱정했기 때문일까. 처남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그만 두라고 해도 처남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기에, 적당한 선에 내가 먼저 끊었다.
이걸로 잘 된 것이다. 정말로 나쁜 년도 아니고, 오히려 천성이 착해서 곤란한 아내인데, 이런 일까지 겪고 또 다시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조용하고 소심스러워질까봐 걱정이었다. 그래. 이걸로 겨우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서로 지탱해주고, 내 수입에 처남이 빌린 돈을 더하고 해서 조금씩 빚을 갚으면 아내의 치료비도 넉넉하게 대줄 수 있을 것이고 민서의 등록금도 마련돼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지난 1년 사이 사라진 줄 알았던 편안함이라는 기분을 간만에 느끼며,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모처럼 편하게 자고 있건만 누군가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기에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이불을 거두고 몸을 일으켜보니 언제 돌아온 건지, 민서가 뭔가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내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예. 아, 예. 잠시 만요. 지금 아버지께 전화 바꿔 드리겠습니다.
민서는 뭔 일인지 몰라 멍하니 있는 나에게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전화를 받으니 낯선 남자가 사무적인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병원 중환자실입니다. 실례지만 이윤영 씨 보호자 되시는 분 맞습니까?
이윤영이라면 아내의 이름이었다. 분명 ○○병원에 입원했다고, 처남이 말했던 게 기억났다. 병원비 문제로 뭔가 문제가 일어난 걸까? 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안타까운 소식입니다만, 이윤영 씨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만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민서는 땅에 떨어진 핸드폰을 다시 받아들고 뭔가 말을 하고는 끊었다.
아빠…….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당장 외투를 걸치고 급하게 신발을 신어 밖으로 나갔다. 문단속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몸이 시키는 대로 차도로 나가서 택시가 지나가길 바라고 또 바랐다. 민서는 뒤늦게 따라 나와 우산을 펼쳐들고 내 옆에 섰다. 이 빌어먹을 놈의 택시는 왜 안 오는 걸까. 뉴스나 신문에서 손님 없다고 징징 짜는 놈들이 왜 손님 냄새를 못 맡는 것인가? 초조함만 더해져 갔다. 위로 올라가다보면 조금 더 빨리 택시를 만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 택시 한 대가 다가왔다. 나는 급하게 손을 흔들어 택시를 멈춰 세웠다.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병원으로 가자고 외쳤다. 이 택시 기사는 귓구멍이 어떻게 된 것인지, 어디요? 라고 다시 묻는다. 그래가지고 장사 참 제대로 하겠다. 이 새끼야.
죄, 죄송합니다. ○○병원으로 가주세요.
민서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 뒤 다시 한 번 행선지를 말해주었다. 그제야 택시는 달리기 시작했다.
병원은 대부분 불이 다 꺼져있었다. 정문도 잠겨 있었다. 결국 응급실 쪽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그 입구에서 처남을 만났다.
유, 윤 서방!
처남은 얼마나 운건지 눈이 퉁퉁 불어있었다. 아내는 어디 있냐고 물어보았다.
영안실로 옮겨졌어……. 미안해, 정말 미안하이. 내가 영이를 일찍 병원에 데려갔더라면……!
흐느껴 우는 처남을 뒤로 하고 응급실로 들어가 아무 간호사나 붙잡고 영안실 위치를 물어보았다. 위치를 확인한 뒤에 바로 그쪽을 향해 달렸다.
안내받은 자리로 가보니 아내는 안 보이고 흰 이불과 천이 뭔가를 덮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던 사람인지, 어떤 의사가 다가왔다.
이윤영 씨 보호자 되시는 분입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폐부증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사망했단다. 사망이라니. 어제까지만 해도 빌빌거리긴 했어도 살아 숨 쉬던 사람이 사망이라니?
이전에도 폐에 물이 차는 증세 때문에 치료를 받으시다가 1년 정도 병원에 오지 않으셨더군요. 약도 거의 오랜 시간 못 드신 듯싶고요. 그 사이에 증세가 악화된 것 같습니다. 병원에 오셨을 때는 이미 손도 쓰지 못할 정도로 심해져있어서…….
옆에서 의사가 뭔가 계속 주절거리기는 하는데 도통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내가 죽었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진짜 숨 쉬고 있었단 말이다. 대체 무슨 소리냐. 흰 이불 덮고 흰 천 뒤집어쓰고 있으면 다 죽은 거란 말인가? 무슨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나는 조심스레 흰색 천을 들춰보았다.
아뿔싸.
……유감입니다.
이 년아. 장난치지 마. 1년 간 나 속여먹었으면 됐지, 또 속여먹으려고 하냐? 이 년아. 무슨 곰 만났어? 왜 죽은 척 하고 있어. 남편이 왔다고. 네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짓도 눈감아 줄 정도로 마음이 넓은 남편이 왔다고. 이런 남편이 또 어디 있냐? 이 호강스러운 여편네야. 몸은 왜 이렇게 차가워. 난 지금 더워 죽겠건만, 이것 봐. 내 이마에 흐르는 땀 좀 보라고, 이 여편네야. 너 때문에 흘린 땀이야. 네 남편은 이렇게 땀 흘리고 있건만 넌 왜 이렇게 몸이 차가워. 이불까지 덮고 있으면서 왜 이리 몸이 차가워. 이 여편네야. 눈 좀 떠봐. 네 남편이 왔단 말이다. 너랑 내 보물인 민서도 왔어. 이 여편네야. 윤영아. 네가 한 일 다 잊었으니까 제발, 제발 눈 좀 떠봐. 뭐라고 안 할게. 손 안 치켜들게. 술도 안 마실 게. 앞으로 네가 일찍 들어오라고 하면 회식이니 접대니 있어도 다 무시하고 일찍 들어올게. 응? 윤영아…….
영안실에서 나온 뒤로 어디로 향해야할 지 몰라서 그냥 병원 정문에 서서 비오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남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고, 딸은 내 옆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에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시작은커녕 종점에 다다른 것이다. 종점에 다다랐으니 생각나는 게 없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어쩌면 생각하는 게 싫어진 걸지도 모른다. 뭔가를 생각하려고만 하면 아내의 얼굴만 어른거린다.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의 헤픈 웃음을 지닌 아내의 얼굴이 아니다. 파랗게 질려서 오들오들 떠는 얼굴, 볼이 쏙 들어가서 광대뼈가 흉하게 두드러진 얼굴, 그리고, 그리고, 눈도 안 뜨고 입고 꽉 다물고 시퍼런 몰골을 하고 차가운 뺨을 가진 얼굴……. 뭔가를 생각하는 것조차도 싫었다.
딸의 얼굴은 더 보기가 싫었다. 딸은 아내를 너무나도 닮았다. 그 사랑스럽던 딸이 원망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왜 그딴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느냐. 그 얼굴은 아내의 얼굴인데. 윤영이만의 얼굴인데. 왜 네가 가지고 있느냐, 라고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또 참는다. 그걸 눈치라도 챈 걸까. 딸은 너무나도 슬픈 얼굴을 한 채 거리를 둔다. 잠시나마 딸을 원망한 자신을 책망했다.
이제 남은 게 없다. 대체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건가. 시작점은 잃어버렸고, 이런 종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아니, 딱 하나, 새롭게 시작하는 방법이 있긴 했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아내가 집을 나간 후부터 줄곧 상상해왔지만 차마 하진 못했던 것. 그러나 이젠 할 수 있다. 지금이라면 그 방법을 시행할 수 있다. 너무나도 유쾌한 나머지 하하하 소리 내어 웃으면서 비오는 거리로 달려 나갔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거늘!
뒤에서 딸이 우산이라도 씌워주려는 건지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민서도 데려가자. 나만 새롭게 시작을 해버리면 혼자 남겨진 민서만 불쌍하지 않은가. 나는 민서에서 손을 뻗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그저 민서가 우산을 떨어뜨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만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아스팔트 위에 얼굴을 부딪쳐버렸다.
닷새 째 내리는 비는 어째서인지 씁쓸한 맛이 났다.
“문 안 열어? 이 썅, 문 열어!”
“아버지께서 상을 입었다고 몇 번을 말씀 드려요? 제가 돈을 아예 안 갚겠다는 것도 아니고, 전부 갚을 여력이 안 되니 조금씩 갚겠다고 사전에 통보 드렸잖아요.”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이 쌍년 말 하는 꼴 봐라. 니 애비가 돈 빌려놓고 안 갚고 죽었으니까 돈 못 갚겠다, 이거냐? 지랄하네, 니 애비가 못 갚았으면 네가 갚아야지, 어디서 생떼를 써? 문 안 열어? 콱 부셔버린다.”
“제가 언제 그딴 식으로 말했나요? 것보다, 부실 수 있으면 부셔 봐요. 경찰에 신고해버릴 거 에요. 저희 집, 아직 압류당한 거 아니거든요? 가택침입죄 충분히 적용시킬 수 있으니까, 어디 해볼 수 있으면 해봐요. 해보라고요! 안 들려, 이 개새끼야! 해봐!”
바깥에서 작은 목소리로 욕지거리가 몇 번 더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물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가 점점 잦아들면서, 민서는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을 수가 있었다.
엄마가 아빠에게 떠넘기고, 아빠가 짊어지던 업은 자연스레 민서에게로 옮겨졌다. 외숙부께서 도와주시기는 했지만 그쪽 사정도 좋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결국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결국 민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까처럼 역으로 큰 소리 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언제까지 통할까? 분명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저 빚쟁이들은 분명 언젠가는 연장이나 흉기 같은 것을 들고 문 같은 건 쉽게 따버리고 들어올 것이라는 걸 느낀 민서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엄마, 아빠.”
마침내 돌아온 엄마였는데, 아무리 속상하고 아프고 다쳐도 그에 굴하지 않던 슈퍼맨 같은 아빠였는데, 그런 소중한 사람을 한순간 둘이나 잃어버렸다. 민서에게 있어서 전부였던 것, 버팀목이었던 것을 잃어버렸다.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린 민서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목이 그 어느 때보다도 메였다. 더 살고 싶지가 않았다.
일주일 째 내리는 빗소리가 여느 때보다 강하게 쏴아아 하고 울려 퍼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차 퇴고입니다.
한 번에 정리하지 않고 이렇게 올리는 이유는 저장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집 컴퓨터가 잦은 오류로 말썽을 부리고 있어서 말이죠.
게시판을 혼잡스럽게 한 점, 죄송합니다.
전체적 흐름에는 손을 대지 않았고 일단 눈에 딱 띄는 어법상 오류나 표현 같은 것만 고쳤습니다.
앞으로 몇 번 더 수정이 될 지 모르겠네요.
제목 역시 가제임을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p.s - 정관호 선생님껜 정말로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 역시 원래 생활로 돌아가고는 싶지만……. 대체 어떻게 될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만 들고, 집에 가만히 있다보면 이렇게 엉망진창인 글만 죽죽 써내려갈 뿐입니다.
작문을 한 때 포기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문학은 일종의 예술이며, 예술엔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한 법이거늘, 전 단순히 어깨너머로 배운 걸로 죽죽 써내려갈 뿐이니까요.
유준처럼 유려한 감각을 지닌 것도 아니고 이상호처럼 논리정연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강경원처럼 기발한 생각을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택준처럼 자신의 기분에 충실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막 쓰는 글'.
제가 쓰고 올렸던 글은 문예부에 있어서 부끄럽기 짝이 없고 크디큰 흠집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2학년 중반서부터 최근까지 시고 소설이고 모두 내팽겨쳤었습니다.
조금씩 쓰긴 했지만 학교 조차 제대로 못 나가고, 급우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하는 제가 과연 글을 쓸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제가 쓴 글을 살펴보면 그저 한심하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눈이 이 모양이라 글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잘 보이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 그 공포감은 차마 뭐라고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였고, 펜을 놓게 만들기 충분했었습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합니다. 차라리 제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제가 정관호 선생님을 비롯해 문예부 여러분들과 여러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응석을 부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제가 좋아하는 작문이 오히려 절 이렇게 망가뜨렸다고.
저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리 기분이 나쁘고 아무리 몸이 아파도 글을 쓰다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몸도 편해지는 걸 느낍니다.
그리고 무섭습니다.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편해진 마음과 몸이 한순간 일그러집니다. 모두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고, 제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첫댓글 뭔가 가슴에 와닿는 작품.. 그리고 ps내용 뭐야... 글쓰는 것만큼은 학교에서 네가 최고야. 나도 노력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