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들
요즘은 사는 일이 단순하다. 장 보기, 청소, 아내 병원 모시기, 노인정 문학, 미술 강의 참석, 일주일 두 번 고등학교 동기 바둑 모임이 전부다. 다른 사람도 80 쯤 되면 대략 이럴 것이다. 그동안 살면서 만난 분들 이야길 좀 해보고 싶다.
1) 金忠烈 교수님
촌놈 서울 와서 처음 만난 분이 대학교 은사님이다. 나는 철학과 30 명 중 동양철학을 전공한 유일한 한 명이다. 중국어는 김경탁 선생님한테, 중국사상사는 이상은 선생님한테 배웠다. 두 분 중 이상은 선생님은 북경대학 수석 졸업으로, 동양학의 세계 최고 권위자였다. 공산화된 중국 대륙이 처음엔 공자 맹자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이 교수님은 하와이 동서문화연구소에 가시면 동양을 대신했고, 국립 대만대 박사 과정 학생들 논문을 서울서 지도했다. 그런 두 분 한테 개인 과외 받듯 혼자 배운 데다, 이상은 교수님은 결혼 때 동국대 교정 안에 있었던 조계종 법당에서 결혼식 주례로 모셨으니, 지금 생각해도 운이 좋다.
두 분 후임으로 오신 분이 국립대만대에서 오신 김충열 교수님이다. 나는 그분에게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주렴계, 소강절, 장횡거, 주회암, 육상산, 왕양명 등 송대이학(宋代理學)과 왕선산 등 청대철학(淸代哲學)을 강의받았다.
김충열 교수님은 첫 강의 시간이 멋졌다. 칠판에 일필휘지 詩를 하나 적어놓고 시작했는데, 글씨는 명필이고 내용도 굴윈의 어부사(漁父辭)였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는, 탁하고 흐린 세상에 자신의 고결함을 더럽힐 수 없다며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진 분의 글이라, 자고로 동양 선비의 절개를 논할 때 첫 번째로 꼽는 글이다.
자신의 아호(雅號) 청광(淸狂), 허주(虛舟), 춘곡(椿谷)을 소개하셨는데, 淸狂은 장모님 때문에 만든 호라고 했다. 장모님은 조선 시대 왕후 집안의 몇 대 후손으로 원주에 수천만 평의 임야와 전답을 가진 집안이다. 젊은 시절 세상의 상식과 가치관을 하찮게 보고, 불의에 과감히 저항하는 사위를 볼 때마다 장모님은 ‘미쳤다’고 하셨고, 스승은 ‘저는 미쳐도 맑게 미쳤습니다’라는 뜻으로 청광(淸狂)이란 호를 쓰셨다고 한다. ‘맑게 미쳤다’는 말은 초나라 굴윈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그다음 호 허주(虛舟)는 ‘마음을 비우고 흐르는 물결에 빈 배처럼 흘러간다’는 노장사상이 담긴 호이다. 동백꽃 피는 골짜기를 뜻하는 춘곡(椿谷)이란 호는 일찍 타계하신 어머님 그리워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나는 직선적인 성격이다. 굴원의 고사가 담긴 청광(淸狂)이란 호가 맘에 들어, 그 자리에서 교수님께 그 호를 제게 하사해주실 수 없으시냐고 당돌하게 요청했다. 보통 사람들은 맑게 미치던 흐리게 미치던 어쨌든, ‘미칠’ 광(狂) 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충열 교수님은 광(狂) 자 들어간 호 좋아하는 파격적인 제자, 특히 그가 과에서 유일하게 동양철학 전공하는 데다가 자기 젊은 시절 기질과 비슷해서 좋게 보셨던 모양이다. ‘호는 스승이 제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의미 있다’ 시며, 즉석에서 호를 양도해 주셨다.
당시 나와 같은 63학번 동기로 군대 제대 후 복학했던 송 모는 나중에 프린스튼에서 박사 학위 받고 경북대에서 교편 잡았고, 김 모는 모교 학위로 조치원 캠퍼스에서 강의했고, 권 모는 아테네 국립대학교 철학박사 학위 얻어 종암동 모교서 강의했고, 안 모는 영국서 학위 받아 성공회 신부 되었다.
김 교수님은 이상은, 김경탁 교수님 밑에서 A 학점만 받던 나를 삼양동 자택에 불러 막걸리 대접하며 은근히 대학원 진학을 묻기도 하고 관심을 주셨는데 나중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 될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대학원 갔으면 싸리나무 그늘에 누운 개 팔자가 될 것을 눈을 딴 데로 돌렸다. 선(禪) 공부하겠다며 불교신문으로 갔고, 그 후 꿩대신 닭이라고 교수님은 3년 후배로 서양철학 전공한 용옥이를 타일러 대만대로 보냈다. 용옥이는 거기서 석사, 하바드 가서 박사 받아 모교에 와서 강의했는데, 언론에 이름 내기 좋아해서 그쪽에 갔다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후에 교수님은 대학원장 은퇴하신 후 섬강 상류 간현유원지 근처 계셨다. 나는 속초 아남플라자 백화점 그만두고, 동우대학 겸임교수 자릴 얻었다. 비서실장 했기에 비서학을 가리킨 것이다. 강의 마치고 서울 올 때면 대포항에 가서 꽁치 상자 차에 싣고 댁에 날랐고, 스승은 강변 매운탕집에 데려가시곤 했다. 나는 書道家 친구 이모 장군을 데려가 인사시키기도 했고, 茶라는 것이 절개와 관련 있는 나무라 뜰에 심을 차나무를 구해가기도 했다.
한 번은 스승이 중국 정부에서 초대한 학술대회에 갈 때 만든 명함을 보여주셨다. 거긴 달랑 대한민국 김충열이란 두 글자만 적혀있었다. 천지 사유의 핵심인 철학을 하는 자보다 천하에 더 높은 사람이 없다는 그 뱃장이 존경스러웠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한 번은 철학과 동창회 서울모임에 오시어 제자들과 2차로 가서 밤 12시 넘도록 쾌음 하시다가 삼성동 우리 집에서 자고 가신 일이 있다. 이튿날 아침, ‘아차 내가 오늘이 박사 과정 면접하는 날인데 큰일 났다!’고 해서 내가 '솔직히 말씀하시면 학생이 섭섭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조언해 드린 적도 있고, 원주 모 대학 이사장에 초대받았다며 수락 여부 묻기도 한 적 있고, 스승님 자제분과 kAL 사장 비서이던 진주고 선배 따님을 소개한 적도 있었다. 또 자네는 기업 경력이 있으니, 우리 아이가 운영하는 ‘고려승마원’을 운영해 달라고 부탁하신 적도 있다. 딸아이 결혼식에 노구의 몸으로 원주서 서울까지 오시어, 너무나 황송하여 후배 차로 스승을 원주까지 모셔드린 일도 있다.
스승님은 1960년대 한국철학사에서 처음으로 남명사상을 비중 있게 다룬 남명학의 1세대 학자다. 진주고와 고대 철학과 후배인 을한이가 고향에 살아 을한이 주선으로 스승님이 진주 남명학연구소 기틀을 잡아주고, 정식으로 학계에 남명 사상을 소개하셨다. 용옥이는 오냐고 물었더니, 스승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셨다. 동양철학의 중심엔 禮가 있다. 근본이 을한이 보다 못한 것이다.
2008년 조선일보에서 ‘동양 철학계 원로 김충열 교수 별세’라는 부음을 보고 안암동 고대 병원에 찾아가 사모님을 뵈었다. 인사 올리니, ‘아! 권박사 친구분이시지요?’ 노부인이 권창은 교수 이름을 들먹이며 알아보신다. 청광(淸狂) 김충열(金忠烈) 선생님! 장자(莊子)처럼 호탕한 사상을 토로하시던 모습과 바다처럼 넓고 따뜻한 아량이 첫 번에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