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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여당과 제일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확정되었습니다. 여야의 대통령 후보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공통점은 법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사시 합격과 함께 변호사와 검사로 오래 동안 일했습니다. 사시에 합격했으니 머리가 뛰어나고 집념 또한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요즘 한국에서 탑 뉴스에 나오는 주인공은 다 법을 공부한 율사입니다. 대장동 개발 사건, 검찰의 고발사주 사건의 주요 관련자들이 다 검사 변호사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법의 전문가가 나옵니다. 바로 율법사입니다. 율법사란 율법을 배워 몸에 익힌 사람으로 당대 엘리트 그룹입니다.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쳤고 자칭 택한 백성으로서 영생을 얻은 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포로기 이후에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전문적인 유대교 학자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서기관이요 율법사였습니다. 바로 법률 전문가였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가 성경을 필사하는 일이었습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는 점 하나만 잘못 찍어도 의미가 달라져 버리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한 학자나 똑똑한 사람들이 서기관을 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는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고, 지도적인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의 우두머리들이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촘촘히 짠 율법 규정의 망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떤 경우에라도 어기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막2:23-3:6)
그런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그 해결책이 질문입니다. 앞선 선생에게 묻는 것입니다. 질문없이 해답을 추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질문은 의문이 생기고 더 분명히 알고자 할 때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다른 의도로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슬거머니 자신을 드러내고자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짓궂은 학생은 선생님을 골탕 먹이고자 질문 공세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 “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
순수한 동기에서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 의도가 불손합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유대사회의 선생이 영생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이 이생의 삶이 전부인가? 아니면 이생이 전부가 아니며 다른 생이 있으면 어떻게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던질 수 있는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질문입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 때문에 연구하고 고민하다가 혜성처럼 나타나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면서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탁월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도 질문을 던져 보십시다. 예수님을 시험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십시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영생에 대해 말할 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로마서 6:23) 나오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이 선물은 죄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죽음”과는 대조적입니다.
영생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1:25). 영생은 생명이 "영원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은 끝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주 안에서 누리는 생명입니다.
사도 요한은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12).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생명이 영생이요 구원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영생’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율법사입니다.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나아와 시험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까? 바로 사단 마귀입니다. 예수님께서 약하여서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인간의 몸을 입으신, 사람의 아들(인자)이기에 허용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시험하는 일은 잘못된 마귀의 짓거리였습니다. 사탄의 종들이 하는 짓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은 시험할 수는 있어도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습니다.
사사기를 묵상하면서 지난 주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하여 전해준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안하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의 이방인을 그냥 두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얼마든지 가나안의 이방 족속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이성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스라엘의 자유의지에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하심을 절대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자신을 제한하셔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고, 인간의 판단과 행위를 존중해 주시는 하나님의 제한된 자기 행위를 보면서 ‘아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구나’ ‘우리 인간을 자기의 뜻대로만 인도하시기 보다는 인간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십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불경이요 악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했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랍비들은 무엇이라고 하느냐?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라 하느냐? “
이렇게 묻지를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묻기를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했더냐? “ “ 너희는 어떻게 읽었느냐?”라고 ….
율법에 대하여 박식한 율법사는 성경을 인용하여 자기의 박식함을 자랑합니다(신 6:5, 레 19:18).
“율법사는 말하기를 성경에 기록되기를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율법사는 율법에 근거하여 대답을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주 막힘없이 술술 율법의 구절로 대답했습니다. 자신이 율법의 전문가인 것을 들어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신이 알고 전문가이기에 알기는 하지만 정말 이 율법의 정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의미를 알고서 말했을까요?
율법의 요약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둘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둘이지만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이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같은 사랑이로되 다만 순서가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율법을 잘 아는 율법사라면 겸손하게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 누가 자기의 마음을 다하고 온 뜻을 다 바치어서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자기의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며 자기를 헌신하고 희생할 사람이 땅 위에 있겠습니까? 선생님, 저는 그것을 할 수 없어서 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
만일 영생을 간절히 소망하고 바라는 율법사라면 예수님에게 겸허하게 질문을 해 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하고자 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28)
그러면 율법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그렇게 살지를 못했습니다’라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송구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율법사는 아닙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 앞에 또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 앞에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말씀에서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서 예수님은 누구를 의롭다 하셨습니까? 자기 자랑과 과시에 빠졌던 바리새인보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나의 옳음을 드러내는 것보다 주님의 긍휼을 바라는 겸허함이 인간다움이며 더욱더 하나님 나라(영생)에 가까운 자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러하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며 과시하고자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앞에 뭐 보여줄 것이 있습니까? 허물 투성이인 우리가 무엇을 보인다는 것입니까?
율법사는 자기의 의에 상당히 도취해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일도 하고, 이런 선한 일도 했으니 나의 행함은 하나님 나라에 가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만약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웃이 누구이냐’고 질문을 하기 전에 ‘저는 율법을 다 행하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하고서 해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하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바로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선한 사마리아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었겠습니까?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시도하는 사람, 옳지 못하면서 자신을 옳다고 착각하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왜 비유를 말씀하셨겠습니까?
주제파악 못하고, 자기의 의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까지 생각하는 이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한 여행자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라는 지역으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물건을 빼앗기고 늘씬하게 구타를 당해 상처를 입고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강도와 강도 만난 사람, 그리고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사마리아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서 오늘은 강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0)
강도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사람을 거의 죽음에 이르도록 상처를 주었습니다. 악독한 행위를 저지렸습니다.
왜 이 강도는 이런 강도 짓을 했을까요? 그냥 태생적으로 강도이기 때문에 강도 짓을 하는 것입니까? 왜 이런 비극적인 불행을 저질러야 했을까요?
아마도 강도도 가족이 있어서 그 가족을 부양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굶주린 사랑하는 자식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 늙으신 부모님을 공양하기 위해서 …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어서 … 여러가지 선한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목적이 선하면 수단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까? 강도가 왜 강도인가 하는 것은 선한 목적이 있지만 정당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선한 목적과 동기가 있으면 그 수단도 올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 강도에게 그 앞에 지나가고 있었던 나그네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한 인간으로 볼 수 있었다면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가치를 인정했더라면 과연 칼을 들고 나그네를 찌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길 되신 주님의 길을 걷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이 없고,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능력자의 삶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는 길을 걷는 자가 되어야 생명에 동참하는 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조장하는 강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항변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뭐 칼을 들고 남의 물건을 훔친 적이 있느냐고 항의를 할지 모르겠습니다. 칼을 들었다고 해서 강도이고, 안들었다고 해서 강도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칼을 들지 않았지만 강도처럼 사람을 죽이는 강도와 같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내주변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강도로 변질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율법사처럼 나는 올바른 사람이라고 외쳐도 내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죽음의 늪을 조장하는 강도가 된다는 사실을 놀라와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생명의 길을 걸으면서 생명을 살리고 화목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누가복음 10:25-3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