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인물탐구 - 표연말, 윤석보, 이원의 아버지, 조위
■ 익살과 풍자로 연산군에게 간언한 표연말
표연말(? ~ 1498)의 본관은 신창이고 자는 소유, 호는 남계이다. 성종 3년(1472)에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17년에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호당에 들어가서 사가독서(젊고 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제도)하고 검열이 되었다. 벼슬은 홍문관,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하루는 강가에 나가 놀다가 배를 타고 용산으로 내려가려 하였는데, 표연말이 노를 붙잡고 간하였다.
"육지로 해서 가면 안전하고 배를 타고 가면 위태로우니, 안전한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길로 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연산군이 노하여 사공을 시켜 노를 빼앗게 하니, 표연말이 물속에 뛰어들었다.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건져낸 후 물었다.
"네가 무엇하러 강물에 들어갔느냐?"
표연말이 대답하였다.
"초희왕의 신하 굴원을 만나려고 뛰어든 것입니다"
연산군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과연 굴원을 보았느냐?"
표연말이 대답하였다.
"그를 만나 보았는데, 굴원이 시를 주었습니다"
"무슨 시냐?"
나는 어두운 임금 만나 강물에 빠져 죽었지만
너는 밝은 임금 만나 무슨 일로 왔느냐
익살로 넌지시 간한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뒷날 함양의 전사에 물러가 살았는데, 연산군이 군현에 명하여 역마를 주어 불러 올리니, 표연말이 시를 읊었다.
새로 지은 서당의 벽 마르지도 않았는데
말발굽이 나를 재촉하여 서울로 올라가게 하네
아이 때엔 벼슬하는 것이 좋다고만 말했는데
늙어 가니 세상살이 어려움을 알겠네
천리 밖의 고향은 천리 밖의 꿈이요
한번의 비바람에 한번의 추위 닥치네
어느 때에 산림 속에 조용히 앉아
푸른 대나무, 오동나무 자세히 살펴보려나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곤장을 맞고 경원에 유배되어 죽었다.
■ "한 치의 땅도 더 늘리지 말라"하며 사들인 땅을 되돌려 주게 한 윤석보
윤석보(? ~ 1505)의 본관은 칠원이고, 자는 자임이다. 풍기군수로 있을 적에 아내와 자식들은 풍덕의 시골집에 그대로 살았는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스스로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부인 박씨가 대대로 전해 오던 비단옷을 팔아 한 마지기의 땅을 사들였다. 윤석보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사들인 땅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옛날 사람은 한 자, 한 치의 땅도 더 늘리지 않음으로써 그 임금을 저버리지 않은 이가 있었는데, 지금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면 서 임금의 녹을 먹고 있는데 전지와 주택을 마련하도록 해서야 되겠소"
부인이 할 수 없이 그 땅을 되돌려 주었다.
벼슬은 직제학에 이르렀다.
■ 자라 여덟 마리를 살려주고 아들 여덟을 얻은 이원의 아버지
이원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낭옹, 호는 재사당이다. 성종 20년(1689)에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이 되었다. 사람됨이 당당하여 절의를 위해 죽을 만큼 지조가 있고, 나이 어린 임금도 맡겨 부탁할 만한 사람이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으로 하자고 의논했다 하여 곤장을 맞고 원지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에 처형 당했다. 추강 남효온이 늘 그를 칭찬하였다.
"익재(이제현의 호)의 후손이고 취금헌(박팽년의 호)의 외손자로 두 집의 어짊이 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아버지 현감 공린이 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거행하던 날 밤 꿈에, 늙은 첨지가 나타나 말하였다.
"내 자식 여덟이 바야흐로 삶겨 죽으려 하니, 원컨대 풀어 주어 삶기지 않게 해주소서"
공린이 꿈에서 깨어나서 이상하게 여겨 그 아내에게 묻자, 아내가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라 여덟 마리를 주기에 내일 아침에 국을 끓이려 합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자라를 강물에 놓아주었다. 그 뒤에 과연 아들 여덟을 낳았는데, 별, 귀, 오, 타, 원, 경, 곤, 용으로 모두 재명이 있었다. 오는 진사가 되었고 귀는 원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 조의제문으로 유배되고, 지난 일로 부관참시 당한 조위
조위(1454 ~ 150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태허,호는 매계이다. 성종 3년(1472)에 생원과 진사가 되었고, 성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추천으로 사국에 들어갔으며,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연산군 4년(1498)에 하정사로 중국 연경에 가서 미처 돌아오기 전에 사화가 일어났다. 그가 일찍이 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하면서 '조의제문'을 사초에서 뽑아 내어 '점필재집'에 수록하였는데, 그 죄목으로 연산군이 노하여 조위가 압록강을 건너오거든 즉시 목베어 죽이라고 명하였다.
조위가 요동에 이르러 그 말을 들었는데, 일행들이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위의 아우 신이 요동 지방에 유명한 점쟁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길흉을 물어 보니, 점쟁이는 오직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써 줄 뿐이었다.
천충 물결 속에서 몸을 뛰쳐나오지만 바위 아래에서 사흘 밤을 묵으리
조신이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하니, 조위가 말하였다.
"첫 구절은 화를 면한다는 뜻인 듯하나, 다음 구절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
압록강에 당도하자, 정승 이극균이 힘을 써 죽음은 면하고 의금부 도사가 잡아가 국문 하였다. 곤장을 맞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에 이배되고 연산군 9년에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자 고향인 금산에 장사지냈다.
갑자사화 때에 전의 죄를 추록하여 관을 쪼개고 시체를 목베어 무덤 앞 바위 밑에 끌어내어 두고 사흘 동안이나 바깥에 드러내 놓게 되었다. 조신이 그제서야 그때의 점쟁이의 말이 징험이 있음을 알고
신기하게 여기며 탄식해 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