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은 세월 따라/靑石 전 성훈
독감 예방 주사를 받은 다음 날부터 귀에서 소리가 난다. 소위 이명(耳鳴)증상이다. 몇 년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기에 별로 고민하지 않고 하루 이틀 그대로 지내는데 계속해서 소리가 나고 잠을 자려고 누워도 소리는 여전하다. 사흘째에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고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매스꺼운 증세가 나타나 별 수 없이 동네 이비인후과를 찾는다. 의사는 귀 모형을 보여주면서 내외부기관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간단히 이것이 원인이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우선 며칠 약을 복용해도 차도가 없으면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으라고 한다. 의사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으며 차도가 있기를 빈다. 처방전을 보니 수면진정제와 신경안정제, 구토 억제와 어지러움을 경감시키는 약과 혈액순환 개선제가 포함되어 있다. 약을 먹으니 종일 졸음이 쫓아다녀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낮에도 두 시간 이상 자고 밤에는 9시가 넘으면 그냥 잠에 곯아떨어진다. 약을 먹으니까 매스꺼움 증세는 사라지고 귀에서도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다. 몇 해 전 부터 건강검진을 하면 청력에 이상이 있다하여 어느 병원에서 검사를 해 보니, 노인성 청력 저하라고 한다. 결국 늙어감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보청기를 하면 좋고 이대로 그냥 좀 지내도 괜찮다는 이야기다. 귀에서 소리가 나고 어지럼증이 생기는 것은 약을 먹으면 없어졌다가 며칠 지나 다시 생기고 없어지는 현상이 보름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옛 어른들 말씀처럼 늙으면 함께하는 병이라고 여기고 받아드려야 할 것 인지, 여하튼 한 동안 조금 더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철소 용광로에서 일하는 근로자처럼 그야말로 불철주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죽을 둥 살 둥 주인을 위하여 일하던 몸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잔 고장이 나기 시작하는 건 당연하다. 칠십년 이란 세월 동안 30년 가까이 담배를 피워대고 아내보다 더 가까이 술을 옆에 끼고 살았으니 육신이 고장이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이다. 잔병치레이니까 별것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며 할 짓 못할 짓 다하다가 늦가을 낙엽 신세가 되는 것 같다. 술과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어느 틈에 바람소리에 놀라 살그머니 떨어지는 낙엽처럼 늙은이가 되니까 이곳저곳 한꺼번에 몸이 망가지고 고장 나기 시작한다. 몸이 성하지 못하여 걸음조차 내 맘대로 걸을 수 없고 병색이 깊어지면 의사도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목숨을 가진 생명체가 가야할 숙명의 길인 것을 내 어찌 모르겠냐만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계절이 변하여 가을도 끝자락을 향하고 있어서 그런지 마음이 심란하고 허전하다. 한 여름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흠씬 맞은 길 잃은 강아지처럼, 뉘 집 처마 밑에 서서 눈 주위가 촉촉이 젖은 채 처량한 모습으로 갈 곳 없는 나그네가 된 듯하다.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너무나 속상하고 야속하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 누군가 알려준 대로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젊은 날 즐겨 읽었던 시를 암송하는 일이다. 일주일에 단 한 두 편이라도 좋아하던 시인의 시를 암송하거나, 졸작인 나의 시도 암송하면서 가라앉은 기분을 훌훌 털고 일어나고 싶다. 젊은 시절처럼 잘 외워지지 않겠지만 종이에 시를 적으면서 읽고 눈을 감고 그 옛날 홍릉 길을 걸으면서 암송하던 추억에 빠져보고 싶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그 때 만났던 잊었거나 잃어버린 가슴 아린 인연들을 저 깊은 기억 창고 속에서 건져내어 조용히 마주하고 싶다. (2022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