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849]百折不撓(백절불효)
백 번 꺾여도 휘어지지 않는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꿋꿋한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사람 교현(喬玄)은 청렴하고 강직했으며, 항상 그릇된 일들과 맞서 싸웠다.
젊은 시절 현에서 근무할 때 외척 양기(梁冀, ▶ 발호(跋扈) 참조)의 비호를 받던
진왕(陳王)의 상국(相國) 양창(羊昌)의 죄를 적발한 적이 있으며,
한양(漢陽) 태수로 있을 때는 상규(上邽) 현령 황보정(皇甫禎)이 횡령죄를 범하자
즉각 사형에 처한 일도 있었다. 교현은 영제(靈帝) 때 상서령이 되었는데,
태중대부 개승(蓋升)이 황제와 가깝다는 것을 믿고
백성들을 착취한 사실을 적발하여 처벌하도록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그 후 영제가 태위(太尉)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루는 교현의 열 살 난 아들이 강도들에게 붙잡혀 가는 일이 일어났다.
양구(陽球)라는 장수가 즉시 관병을 데리고 구출하러 갔지만,
교현의 아들이 다칠까 봐 강도들을 포위하고만 있을 뿐,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교현이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강도는 법을 무시하고 날뛰는 무리들인데 어찌 내 아들 때문에
그들을 놓아준다는 말인가.” 그러고는 병사들을 다그쳐 강도들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강도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교현을 높이 평가했다.
교현에 대한 이야기는 《후한서(後漢書) 〈교현전(喬玄傳)〉》에 나온다.
교현은 죽으면서 남긴 유산이 전혀 없었으며, 장례도 극히 간소하게 치러졌다.
조조도 교현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 주었으며,
채옹(蔡邕)은 교현을 위하여 〈태위교현비(太尉喬玄碑)〉라는 비문을 지어
「그 성격은 엄격했으며, 화려함을 미워하고 소박함을 숭상했다.
백 번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고, 큰 절개에 임하여서는
빼앗을 수 없는 풍도를 지녔다.
(其性莊, 疾華尙朴. 有百折不撓, 臨大節而不可奪之風.)」고
칭송하였는데, 바로 채옹이 쓴 비문에서 ‘백절불요’가 유래했다.
‘백절불요’와 비슷한 말로는 ‘백절불굴(百折不屈)’,
‘백절불회(百折不回)’, ‘불요불굴(不撓不屈)’,
‘위무불굴(威武不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