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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5월2일자 대한불교(불교신문 전신)647호 3면 운허스님 인터뷰 기사. 오른쪽은 1978년 동국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당시 운허스님. 불교신문 자료사진 |
-그러면 요즈음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선대들이 못 이룬 정신적인 개혁의 요원한 불길이 활활 불타고 있을까요.
“그야 내가 알 수 있나. 내가 내속도 몰라서 이날까지 속아왔는데…. 하하.(노사는 대소 아닌 미소로써 대소를 대신한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를 불사를 수 있는 어떤 큰 주제를 붙잡지 못 한 듯 해보여. 생명을 완성시키겠다던 지혜를 맑힘에 혼신을 던진다던지 하는 맹렬한 자기연소의 불길이 미약해. 혹 내가 잘 못 읽었는지도 몰라…”
-버스를 타는 경우 마음에 드는 얼굴과 도저히 두 번 다시보기 싫은 얼굴이 있는데, 인생의 수레 속에서도 그와 같은 현상이 보인다고 할 때 어떻게 된 까닭에서 일까요.
“그렇지. 딴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버스 속에다 구겨 넣고 볼 수도 있는 게지. 든다 안든다는 건 차별이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떠나야지. 그러나 매양 감정(感情) 지닌 여느 사람들이라면 당연하지. 생명과 생명에는 서로 관류하는 마음의 선이 있는 게야. 그게 불성이라는 언어로 표현되지. 또 인연이라는 언어로도 나타나고…. 인연이 있었던 게지. 그러나 언어는 마음을 묘사하는 한낱 부호야. 마음자리 바로 그 자리는 아니거든. 그래서 언어의 유희(遊戱)에 말리지 않으려면 자성을 밝혀나가야지”
-인생에 있어서 뜻있는 만남이란 자신을 창조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준다고 봅니다. 가령 스님의 재종형이신 이광수 선생님과 허영숙 여사와의 만남 같은….
“그런 만남이 없었으면 춘원은 더 많이 방황을 했을 게야. 그게 인연이지. 노력하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뒷받침이 될 언덕이 없으면 공허하고 황량해. 뭘 하든 다 같아. 인과 연이 마주 닿아야 빛나는 재창조(再創造)가 형성되는 거지”
-스님께서는 지난 13년간 오진 역경(譯經)에 몰두해오셨는데 그 구체적인 내역을 좀 이 기회에 말씀해주십시오.
“1년에 8권씩 해인사에 있는 장경 번역본을 내기로 하고 시작해서 지금 현재까지 71권을 냈지. 앞으로 32년은 계속해야 되는 일이야. 이 사업은 김법린 동국대총장시에 동국대부설로 동국역경원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일을 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다행스러운 일을 시작했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가 있었고 그 현대를 비수로 가르는 이는 앞서가는 정신인(精神人)이었는데요, 미래에 충격을 줄 수 있는 불교가 되기 위해선 오늘을 어떤 좌표(座標)와 비전으로 가꿔야 할지요.
“무거운 물음이야. 마침 부처님오신날이 앞에 왔는데 성자 앞에 나를 남김없이 내놓아야해. 그리고 자기와 피나는 대결을 해서 인생의 요체(要諦)에 대해 깨달음이 있어야 해. 그리고 소아(小我)의 망언을 삼가고 생명의 사명이 완전한 인간회복(人間恢復)이라는 것을 진실(眞實)하고 성실(誠實)하고 보람 있게 완성돼야 한다는 것을 개혁(改革)을 뒤로 미루는 우치를 버리고 내 생명 속에서 나날이 실천(實踐)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불교인이 느끼고 노력(努力)하면 그게 곧 비전의 제시요, 좌표(座標)의 정립일 게야. 내가 또 망언(妄言)을 하는군.”
■ 운허스님은 …
1892년 2월25일(음력) 평북 정주군 신안면 안흥동에서 태어난 운허용하(耘虛龍夏)스님은 한학을 공부하다 한일강제합방이 체결되자 고향을 떠나 평양 대성중학교를 다녔다. 1912년 미국으로 가기위해 만주 안동현에 들렸다 동지들을 만나 환인현에 머물며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를 지냈다. 항일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15년 봉천성에 흥동학교(興東學校)를, 1918년에는 배달학교(倍達學校)를 설립했다. 1919년에는 삼원포에서 ‘신한족(新漢族)’이란 독립군 기관지를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흥사단에 가입했으며,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무장독립투쟁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동지가 체포되자 경성을 탈출해 양양 봉일사에 은신했다.
1921년 5월 경송(慶松)스님을 은사로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에서 출가했다. 1924년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사교를 이수했고, 1926년 청담스님과 함께 전국불교학인대회를 개최했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1930년 9월 조선혁명당에 가입했다. 1936년에는 남양주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해 후학 양성에 노력했다.
해방 후 경기도 교무원장이 됐고, 1946년 4월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했다. 불경 번역을 평생의 원력으로 삼고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이 됐다.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했고, 1978년 동국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11월18일 봉선사에서 89세 법납 59세로 입적했다.
[불교신문3088호/2015년3월14일자]
첫댓글 우리 아미타부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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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미타파()()()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 ()()()
부처님의 법을 알게됨에 감사드립니다.
스님의 열정적인 바른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아미타파와 인연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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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 이면서 역경을 하신 분이군요 위와같은 분이 많이 나오시길 발원합니다 아미타불
일심 광명 화신
감사합니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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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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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 앞에 나를 남김없이 내놓아야해. 그리고 자기와 피나는 대결을 해서 인생의 요체(要諦)에 대해 깨달음이 있어야 해. 그리고 소아(小我)의 망언을 삼가고 생명의 사명이 완전한 인간회복(人間恢復)이라는 것을 진실(眞實)하고 성실(誠實)하고 보람 있게 완성돼야 한다는 것을 개혁(改革)을 뒤로 미루는 우치를 버리고 내 생명 속에서 나날이 실천(實踐)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불교인이 느끼고 노력(努力)하면 그게 곧 비전의 제시요, 좌표(座標)의 정립일 게야. > 선지식의 말씀에 두 손 모읍니다.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일심.광명.화신.
감사드립니다.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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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명속에서 나날이 실천해야한다는 것을 모든 불교인이 느끼고 노력하면 그게 곧 비전의 제시요 좌표의 정립일게야
일심 광명 화신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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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 광명 화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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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사명이 완전한 인간회복이라는것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완성하기위해 나날이 실천해야한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파
일심.광명.화신.아미타!
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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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줄 나무아미타불_()()()_
힘있는 불교로 거듭나서 젊은이들이 경전을 밥 먹듯이 읽는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티벳은 어쨋거나 아이들이 입보리행론(6바라밀행 실천)을 초등 정도에 배운답니다.
우리도 그런 사회가 되기를 꿈꿉니다.
감사합니다. 일심 광명 화신 나무아미타불()()()
"깊은 사상(思想)과 지혜(智慧)를 지니느냐에 묶여 지냈지"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이치 깊이 보고자 끊임없이 성찰하시어 중생제도의 길로 나아가시는가 봅니다
부처님지혜을 가르쳐 주시는 선지식이 계신 아미타파가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일심광명화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감사드립니다.
일심광명.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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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일심 광명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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