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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 여름호 논쟁문화의 장: 반경환 명시감상
---유종인, 정호승, 홍영택, 이선희, 이종민의 시
찬란의 묵계
-성산포
유종인
아무리 둘러봐도 청(靑) 파도 에워싸는 유채꽃밭이다
조랑말에 귓속말하는 유채꽃들 귀이개로 파내느라
근동 파도들 사팔뜨기처럼 눈길이 모이는 화투판이다
고개 들면 아직도 설문대할망이 엉덩이로 지긋이 누르고 앉은 성산 봉우리,
언뜻 언뜻 초록의 분화구 안에 사슴의 관(冠)이 높고
그 사슴 잔등에 오뉴월에도 흰 잔설이 푸르러
땀 들이는 동안 수수억 광년 햇살이 발등에 솜다리꽃 그리메로 흔들린다
몬스테라처럼
늘어진 망사모자의 여인은 성산에 들어 몸이 달랐다
멀구슬나무 넋을 만 평의 하늘 바다로 맘에 들였으니
엊그제까진 장삼이사라도
오늘은 거진거진 세간에 껴둘만한 신선의 방계 직속들,
대구 장모의 발뒤꿈치 낮꿈의 각질을 밀어볼까
기념품점 부석을 들면
기분 호탕한 날엔 돌이 공중에 뜬다
좋이 성산을 바라 바람 속에 캉캉춤을 추다 내려앉는 곳
오지랖이 싱싱한 다시마 미역내음 바람이
성산포 성당에 들러 사방 성호를 긋듯
성산포 절간에 들어 시방 천 배를 모시듯
아닌 곳이 없는 다솜들 아닌 데가 없는 자비들
비바람치는 캄캄하니 궂은 날
성산 같은 한 사람을 들여 그대 찬란이다
이마가 새파라니 영원으로부터 미리내를 예 끌어다
한 사람으로 온천지 사람을 여는 끌림의
한낮에도 은하(銀河)ㅅ물에 목젖이 푸르게 젖는 찬란의 묵계 속이다
---애지 겨울호에서
제주도의 천지창조주는 설문대 할망이며, 이 거인 할머니는 몸이 한라산보다 더크고 제아무리 깊은 바다라도 설문대 할망의 무릎에 닿는 정도라고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명소이자 섬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일 정도인 제주도는 산과 바다와 섬과 바위들이 모두가 다같이 설문대 할망의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유종인 시인의 [찬란한 묵계]는 ‘성산포의 찬가’이며, 성산포의 아름다운 풍광을 역사 철학적으로 노래한 명시라고 할 수가 있다. “아무리 둘러봐도 청靑 파도 에워싸는 유채꽃밭”뿐이고, “조랑말에 귓속말하는 유채꽃들 귀이개로 파내느라/ 근동 파도들이 사팔뜨기처럼 눈길이 모이는 화투판”처럼 보인다. “아직도 설문대 할망이 엉덩이로” 성산 봉우리를 지긋이 누르고 있고, “언뜻 언뜻 초록의 분화구 안에 사슴의 관冠이” 높다. 그 사슴 잔등에 오뉴월에도 흰 잔설이 묻어 있고, “수수억 광년 햇살이 발등에 솜다리꽃 그리메로 흔들린다.” 천남성과 상록 다년초인 ‘몬스테라’처럼 “늘어진 망사모자의 여인은 성산에 들어 몸이” 달아올랐으니, 그것은 “멀구슬나무의 넋을 만 평의 하늘 바다로 맘에 들였”기 때문이다. 멀구슬나무는 멀구슬나무과의 활엽교목이며, 꽃과 열매가 아름답기 때문에 조경수로 많이 심는다고 하지만, 성산에 든 망사모자의 여인에게는 그 나무에게서 설문대 할망과도 같은 회임(다산)의 징후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모든 축제는 대동축제이듯이, 유종인 시인의 [찬란한 묵계]의 성산포는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는 곳이고, “성산포 성당에 들러 사방 성호를 긋듯/ 성산포 절간에 들어 시방 천 배를 모시듯” 수많은 민족과 그 어떤 종교적 차별도 없는 곳이다. 엊그제까지도 이 세상의 장삼이사였던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두가 다같이 영생불사하는 신선의 자손들이 되고, 대구 장모의 발뒤꿈치의 각질을 밀어도 어느 누구 하나 흉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기념품 가게의 부석들마저도 더없이 호탕하게 웃으며 공중에 떠 있고,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은 성산을 바라보며 캉캉춤을 추다 내려 앉는다. “오지랖이 싱싱한 다시마와 미역내음 바람이/ 성산포 성당에 들러 사방 성호를 긋듯/ 성산포 절간에 들어 시방 천 배를 모시듯” 성산포의 ‘찬란한 묵계’에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이곳에도 애틋한 사람뿐인 다솜들이 살고 있고, 저곳에도 애틋한 사랑뿐인 다솜들이 살고 있다. 이곳에도 더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자비들이 살고 있고, 저곳에도 더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자비들이 살고 있다. 이 애틋한 사랑뿐인 다솜들과 더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자비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비바람치는 캄캄하니 궂은 날” “성산 같은 한 사람을 끌어들여” 그대 [찬란한 묵계]를 완성해 낸다. “이마가 새파라니 영원으로부터 미리내를 예 끌어다/ 한 사람으로 온천지 사람을 여는 끌림의/ 한낮에도 은하銀河ㅅ물에 목젖이 푸르게 젖는 찬란의 묵계 속이다”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미리내는 남북으로 길게 퍼져있는 별무리이며, 은하수의 제주도의 말이라고 한다. 미리내는 성지이며, 성스러움과 찬란함이 만장일치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 유종인 시인의 [찬란한 묵계] 속의 성산포라고 할 수가 있다.
택배
정호승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부모형제가 이 세상을 떠나갔을 때에도 우리는 울고, 대학입학시험이나 취직시험, 또는 학생회장선거나 국회의원선거에서 떨어졌을 때에도 우리는 운다. 뜻밖의 홍수와 화재를 당했을 때에도 우리는 울고, 너무나도 때 이르게 실직을 하거나 이 세상의 꿈을 상실했을 때에도 우리는 운다. 운다는 것은 그 엄청난 상실감과 좌절감 때문에 비롯된 생리적인 현상이며, 우리는 이 현상들을 슬픔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슬픔은 여러 가지 복잡한 차원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감정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슬픔은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현상이면서도, 역사 철학적으로도 설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 정신불열증, 불안과 공포, 회의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염세주의 등의 기원은 슬픔이고, 따라서 슬픔은 기쁨과는 반대방향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이 크나큰 장애를 만났다는 것을 뜻한다.
정호승 시인의 [택배]는 슬픔을 물질화(상품화)시킨 시이며, 이 ‘슬픔’이 ‘발송자 미상’의 택배로 왔다는 ‘가상의 현실’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라는 매우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주제부터가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데, 왜냐하면 슬픔은 물건이 아니며, 따라서 슬픔은 택배로 보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고 주소도 없기 때문에 어느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고,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겨보지만, 그러나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도 않는다.” 아주 얇은 슬픔도 있고, 매우 깊은 슬픔도 있다. 풋감처럼 떫은 슬픔도 있고, 청양고추처럼 매운 슬픔도 있다. 가벼운 슬픔도 있고, 무거운 슬픔도 있다. 슬픔에도 여러 차원의 슬픔들이 있지만, 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슬픔이 배송되어 왔나라고 정호승 시인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그러나 매우 심각하게 되물어 본다. 슬픔은 상품도 아니고, 어떤 물질도 아니며, 따라서 “슬픔이 택배로 왔다”라는 가상의 현실은 그러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시인의 심리적 상황의 반영일 뿐이며, 이 심리적 상황이 그의 [택배]의 시적 주제로 승화된 것이다. 슬픔이 슬픔을 낳고, 슬픔이 또다른 슬픔을 낳으며, 이 수축과 확산의 힘이 정호승 시인의 [택배]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사랑을 잃었다는 것은 두 눈이 멀었다는 것이고, 두 눈이 멀었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야 할 목표와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보낸 슬픔이며, 그 슬픔과 날이면 날마다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그 슬픔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슬픔도 없고, 택배로 주고 받을 슬픔도 없다. 슬픔의 출생지도 모르고, 슬픔의 창안자도 모르고, 슬픔의 얼굴(진실)을 만나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러나 슬픔은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며 나를 괴롭히고, 이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받아보게 만든다. 나의 슬픔이 또다른 슬픔을 낳고, 따라서 이 동병상련의 마음이 이 엄동설한에 사랑을 잃고 따뜻한 밥과 국과 잠잘 곳을 잃어버린 그의 이웃들을 향하여 눈길을 돌리게 한다. 택배로 포장된 슬픔은 수축의 힘이 되고, 그 슬픔의 진실(얼굴)을 보려는 힘은 확산의 힘이 된다. 슬픔이 슬픔으로 모여들고, 슬픔이 슬픔으로 모여들어 그 힘을 비축한 슬픔은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찾아나서게 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라는 시구나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라는 시구는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시구이며,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동병상련의 시학’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고, 초록은 동색이다라는 말도 있다. 슬퍼하는 자는 슬퍼하는 자들만을 보고, 슬퍼하는 자들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슬퍼하는 자들만을 바라보면서 그들과의 무한한 동료의식과 함께 공동체 의지를 발산시키게 된다. 정호승 시인의 [택배]는 그의 좌절감과 상실감, 즉, 그의 슬픔의 산물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의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 진다. 이 세상의 삶의 장애물 때문에 사랑과 희망과 꿈을 잃고 괴로워하지만, 그러나 그 슬픔의 존재를 역사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집요한 노력 때문에 그의 ‘삶의 철학’으로 승화된다. 사회적 불의 때문인지, 인간의 불평등의 기원과 자원의 분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 슬픔의 기원과 그 존재 이유를 규명하려는 너무나도 분명한 목표와 그 공동체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슬픔이 더 이상 내려갈 수가 없을 때, 이 슬픔의 밑바닥에서 희망의 새싹이 솟아나온다. 정호승 시인의 [택배]는 희망의 택배이며, 그의 개인의 의지와 공동체 의지가 마주쳐 ‘삶의 철학’으로 활활 타오른다.
바닥
홍 영 택
바닥은 틈이다
만물은 바닥에서 시작하고
바닥에서 이루어진다
바닥은 바탕이다
생각, 소망, 주식, 꿈…
‘바닥은 단골 메뉴다
바닥이라야 만물이 자란다
바닥은 기회다
음양의 변곡점이다
음양이 변신하여 순환하는 곳
생존의 본질이다
바닥은 절망이다
짚고 일어설 지팡이 없다
바닥까지 가면 더 잃을 게 없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닥은
절망과 희망의
틈
---홍영택 시집 {오상五常}에서
바닥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첫 번째는 욕실 바닥같은 평평하게 넓이를 이룬 면을 말하고, 두 번째는 양말 바닥같은 물체의 평평한 면을 말한다. 세 번째는 ‘서울 바닥’이나 ‘부산 바닥’처럼 일정한 지역이나 장소를 말하고, 네 번째는 ‘주식이 바닥을 쳤다’라는 경제학의 용어처럼 주가가 크게 내려앉는 상황을 말한다. 다섯 번째는 ‘바닥이 고운 옷감이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피륙의 짜임새를 말하고, 여섯 번째는 지질학에서처럼 ‘감흙층 밑에 깔려 있는 굳은 층’을 말한다. 요컨대 ‘바닥’이란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등의 근본 토대를 이루고 있는 말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의 활동무대가 되는 지구와 우주 전체를 지시하는 말이라고 할 수가 있다.
홍영택 시인의 [바닥]은 그의 삶의 체험이 육화된 시이며,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체험을 ‘바닥의 철학’으로 승화시킨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바닥은 틈이다.” 왜냐하면 “만물은 바닥에서 시작하고/ 바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바닥은 바탕”이고, 이 바탕에서 “생각, 소망, 주식, 꿈”이 자란다. “바닥은 기회”이고, 이 바닥을 통하여 “음양”이 순화하며, 그 모든 조화를 연출해낸다. “바닥은/ 절망과 희망의/ 틈”인데, 왜냐하면 바닥은 절망의 밑바닥이지만, 그러나 바닥까지 내려가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닥은 꼭 막힌 벽이나 감옥이 아니고, 언제, 어느 때나 생존의 숨구멍이 지구로, 우주로 통하는 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음양오행론에 따르면 극과 극은 통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망의 새싹이 자라고, 희망의 최정점에서 절망의 새싹이 움튼다.
‘군자는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공자의 바닥, ‘나는 잉글란드를 응징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잔 다르크의 바닥, ‘에너지는 물질이고, 물질은 에너지다’라던 아인시타인의 바닥, 반 고호의 [나부]와 뭉크의 [절규]의 바닥, 모든 것을 다 잃었으니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라는 홍영택 시인의 바닥----. 요컨대 바닥은 이 세상의 만물들의 삶의 토대이고 우주이며, 우리 인간들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의 무대라고 할 수가 있다. 바닥은 틈이고 기회이고, 바닥은 벽이고 절망이다. 바닥은 꿈이고 행복이고, 바닥은 자기 체념이고 불행 중의 불행이다. 하지만, 그러나 모든 생성과 변화와 소멸이 이 바닥에서 이루어지고, 이 바닥을 잘 가꾸어야 고귀하고 위대한 삶과 그 역사가 이루어진다.
홍영택 시인의 ‘바닥의 철학’은 그 유명한 동양철학의 ‘오행론五行論’으로 이어지고, 이 ‘오행론’은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 한다’라는 그의 ‘바닥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아는 자만이 바닥을 꿰뚫어 보고, 아는 자만이 ‘바닥의 철학’을 통하여 이 세상의 삶의 찬가를 노래할 수가 있다. “아버님, 저를 명예롭게 죽게 해주세요. 더 이상 치욕을 짊어지고 살아가기는 싫습니다”라고, 그 꽃다운 나이에 장렬하게 전사를 선택했던 천하무적의 용사 탤버트의 아들을 생각해보고, “바닥까지 가면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라고 절망에서 희망의 싹을 틔운 홍영택 시인의 잠언적인 경구를 생각해보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사즉생死卽生의 용기’가 생기고, 생존의 밑바닥에서 절망의 똥구멍을 핥을 때, 문득 문득 바닥의 틈이 보이고 희망의 샛별이 떠오른다. 바닥은 절망이 아니고, 반드시 절망을 뚫고 희망이 자란다.
바퀴 달린 가죽가방
이선희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을
무엇을 쑤셔 넣으면 한없이 들어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비뚤어지게 서 있는 것이
희끗희끗 때 묻은 것이
울퉁불퉁 늘어진 것이
벌써 여러 곳을 거쳐 왔을
바퀴 달린 가죽가방
여행의 경유지나 기착점을 모른 채
속이 열릴 때까지 지퍼를 닫고 굴러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낡은 바퀴로 끝까지 가 보겠다며
공항 대기실, 의자 옆에 손들고 서 있는
바퀴 달린 가죽가방
----이선희 시집 {환생하는 꿈}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인간 사회는 그가 지닌 힘의 크기에 따라 계급적인 서열제도를 구축하게 된다. 크나큰 힘을 지닌 자는 지배를 하고, 크나큰 힘을 지니지 못한 자는 복종을 하게 된다. 모든 무리는 ‘소수지배의 원칙’에 복종하게 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유를 빼앗기고 타인의 명령에 복종을 하게 된다. 명령을 한다는 것은 복종을 하는 것보다 수천 배는 더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의 역사 철학적인 지식과 함께, 타인들의 심리와 행동양식을 꿰뜷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마음과 뜻대로 나를 이끌 수가 있다면 이제는 나의 목표와 공동체의 목표를 일치시키고, 그 목표가 이상적인 낙원이든지, 영원한 제국이든지간에, 만인들을 설득시키고, 만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여행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이 세상의 모든 곳을 찾아다니며, 그 고장의 역사와 전통을 익히는 것을 말한다. 그 여행지가 자기가 살고 있는 국가일 때는 국내여행이 되고, 그 여행지가 그가 소속된 국가 밖일 때는 외국여행이 된다. 수많은 국가와 수많은 저자들의 책을 읽으며 떠나는 독서여행도 있을 수가 있고, 영화와 음악을 통한 문화여행도 있을 수가 있다. 자아의 발전사가 세계의 형성사가 되고, 세계의 형성사가 자아의 발전사가 되는 여행이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여행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여행이란 그 주체자가 자유롭고, 타인들과 이 세상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내가 내 자신을 내 마음대로 이끌고 다닐 수 있는 행동양식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행자의 삶은 해방자의 삶이 되고, 해방자의 삶은 자유인의 삶이 된다.
이선희 시인의 [바퀴 달린 가죽가방]은 사물(가죽가방)을 인간화시킨 시이며, [바퀴 달린 가죽가방]을 인간화시킴으로써 가난한 자유인의 애환과 그 의지를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배부른 노예가 더 나을까? 가난한 자유인이 더 나을까? 먹고 사는 생존이 문제일 때는 배부른 노예가 더 나을 수도 있지만,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가난한 자유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을/ 무엇을 쑤셔 넣으면 한없이 들어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비뚤어지게 서 있는 것이/ 희끗희끗 때 묻은 것이/ 울퉁불퉁 늘어진 것이/ 벌써 여러 곳을 거쳐 왔을/ 바퀴 달린 가죽가방”, “여행의 경유지나 기착점을 모른 채/ 속이 열릴 때까지 지퍼를 닫고 굴러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은 ‘남부여대男負女戴, 유리걸식流離乞食’의 피난민이나 조국을 잃어버린 난민과도 다른 데, 왜냐하면 수많은 세월동안 여러 곳을 거쳐왔고, 앞으로도 그 가난한 자유인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너무나도 분명하고 고집스럽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모든 탐욕과 정주민의 집착을 버리고, 내가 내 마음대로 “낡은 바퀴로 끝까지 가 보겠다며/ 공항 대기실, 의자 옆에 손들고 서 있는/ 바퀴 달린 가죽가방”의 삶의 철학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유인이란 강한 인간의 가장 이상적이 모델이지만, 그 반사회적인 성격 때문에 그만큼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정과 사회와 단체와 국가의 모든 안전장치를 거부하고,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권자가 되어 합법과 불법, 정의와 불의, 안전과 불안, 수많은 고통과 기쁨과 위험과 쾌락을 취사선택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는 [바퀴 달린 가죽가방]은 그의 삶의 축소판과도 같고, “비뚤어지게 서 있는 것이/ 희끗희끗 때 묻은 것이/ 울퉁불퉁 늘어진 것이/ 벌써 여러 곳을 거쳐 왔을/ 바퀴 달린 가죽가방”은 그의 어렵고 힘든 삶의 체위와도 같다. 개인의 자유도 있고, 사회 속의 자유도 있다. 법률 속의 자유도 있고, 국가 속의 자유도 있다. 개인의 자유로 이 수많은 자유들을 거부하고, 이곳 저곳을 향하여 더없이 낡고 남루한 육체를 끌고 다닌다는 것이 오히려, 거꾸로 그를 피곤하고 지친 자유인으로 구속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경유지와 기착지도 모르고, 여행의 목적지와 종착지도 모른다. 잠시 잠깐 동안 “속이 열릴 때까지 지퍼를 닫고 굴러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은 오히려, 거꾸로 자유로운 여행자의 삶을 추구하다가 그 [바퀴 달린 가죽가방]에 구속되어 있는 자유인의 삶을 말해준다. 자유인은 자유 속에 구속되어 있고, “낡은 바퀴로 끝까지 가 보겠다”는 그의 시대착오적인 똥고집과 이데올로기 속에 구속되어 있다.
하늘은 넓고 하늘은 무한히 높다. 새의 불행은 무한히 넓고 높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날개를 접고 내릴 곳이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자유는 다만 하나의이상이자 환영일 뿐, 자유는 이선희 시인의 [바퀴 달린 가죽가방] 속에 잠들어 있다.
시인은 역사 철학자이자 심리학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시인은 아주 탁월한 현실주의자이자 초현실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바퀴 달린 가죽가방]을 역사 철학적으로 인간화시키고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그 이야기를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은 어느 누가 감히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이다.
이선희 시인의 [바퀴 달린 가죽가방]: 나는 자유인이고 나는 복종을 모른다.
야생의 마음
이종민
담장 앞에 늑대가 찾아왔다
우유를 데워 먹이고 밤에는 이불을 깔아주었다 무럭무럭 자라난 늑대 나를 보면 다가와 얼굴을 핥았다 웃자란 송곳니에 작은 생채기가 나기도 했다
낯선 사람을 보면 이빨을 드러내고 경계했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 있잖아 은빛 털이 아주 보드랍지 않니
사람들은 집 안에 무슨 늑대냐며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담장 앞에서 집을 지키는 늠름한 나의 늑대
고깃덩이를 들고 있으면 꼬리를 흔드는 나의 늑대
가끔 나를 물어서 작지 않은 상처가 났다 상처가 어디서 났냐고 물으면 기르는 늑대에게 물렸다고 대답한다
정말 큰 개를 기르시나 봐요
상처를 볼 수 있으면서도 늑대는 믿지 않는 사람들
손하면 발톱을 주는
밤이면 대신 울어주는 나의 늑대
어느 날 늑대가 떠났다
담장 앞에 남은 이불과 살을 다 발라낸 뼛조각
사람들이 물었다 저렇게 큰 늑대가 왜 집 안에 있느냐고 담장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놀라워하며 말했다
상처가 가려웠다 내게는 보이지 않지만
장성한 나의 늑대
나를 지켜주는 나의 늑대
----이종민 시집,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창비)에서
지구의 대변혁기에는 최상위 포식자인 동물들이 모조리 다 멸종을 해나갔다고 한다. 육식성 공룡이든, 초식성 공룡이든, 하늘을 날아다니던 익룡이든지간에, 모든 공룡들은 백악기 때 모조리 멸종되었고, 그 화석들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오늘날의 지구의 위기는 최상위 포식자인 우리 인간들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이 ‘야수 중의 야수’인 인간들의 미래는 대단히 불길하고 그 끔찍한 재앙이 약속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최상위 포식자인 우리 인간들은 공격본능과 방어본능을 아주 정교하고 세련되게 발전시켰으며, 그것은 학교의 교육, 즉,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통해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격본능은 아주 좁게 말하면,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에서 자기 자신의 영역을 극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방어본능은 외부의 적이나 상호 경쟁적인 동료들로부터 자기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 공격본능과 방어본능이 적절하게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는 ‘생존경쟁’이라는 삶의 장으로부터 탈락을 하게 된다.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이 투쟁을 위해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늑대’ 한 마리씩은 다 기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신용대부업은 고리대금업이라는 늑대가 지키고 있고, 모든 증권거래소는 조지 소로스나 워런 버핏 같은 늑대가 지키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플랫폼 기업은 약육강식에 충실한 늑대가 지키고 있고, 대학제도와 실버산업은 휴머니즘의 탈을 쓴 늑대들이 지키고 있다. 이종민 시인의 [야생의 마음]은 늑대의 마음이며, 내 안의 늑대를 키워나감으로써 공격본능과 방어본능을 배양해 나가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담장 앞에 늑대가 찾아왔다”는 것은 어느날 늑대를 키우기로 작정을 했다는 것을 뜻하고, “우유를 데워 먹이고 밤에는 이불을 깔아주었다 무럭무럭 자라난 늑대 나를 보면 다가와 얼굴을 핥았다 웃자란 송곳니에 작은 생채기가 나기도 했다”라는 것은 나를 늑대화시켜, 그 늑대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 약육강식의 전쟁터에서 늑대가 되지 않으면 고리대금업자나 워런 버핏이라는 늑대를, 또는 저커버그나 그 외의 다른 늑대들로부터 나를 지키고 방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낯선 사람을 보면 이빨을 드러내고 경계를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위장의 사활성이라는 말이 있다. 많이 배운 자일수록 자기 자신의 이빨과 발톱을 잘 숨기고, 지능이 낮거나 사회적 천민일수록 자기 자신을 잘 숨기지 못한다. 시인은 웃으며, 그 웃음으로 자비롭고 친절한 가면을 쓰고, 그 사납고 무서운 야수성을 감춘다. 그 결과, “여기 있잖아 은빛 털이 아주 보드랍지 않니”라고 사실 그대로의 진담을 말해도 “사람들은 집 안에 무슨 늑대냐며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아주 제대로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타인들을 잘 속이는 것은 즐겁고 기쁜 일이고, 타인들과 이 세계와 천하를 아주 잘 속이는 것은 더없이 즐겁고 기쁜 영웅의 일이다. “담장 앞에서 집을 지키는 늠름한 나의 늑대”도 나의 분신이고, “고깃덩이를 들고 있으면 꼬리를 흔드는 나의 늑대”도 나의 분신이다. 나는 최상위 포식자인 ‘늑대 인간’이 된 것이고, 나는 심리학의 대가이자 분장술의 대가가 된 것이다. 늑대의 생리와 활동영역은 나의 심리학적 지식이 담당을 하고, 내가 ‘늑대 인간’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모르게 한 것은 나의 분장술이 담당을 한 것이다. “가끔 나를 물어서 작지 않은 상처가 났다 상처가 어디서 났냐고 물으면 기르는 늑대에게 물렸다고 대답한다.” 내가 ‘늑대 인간’으로서 나 자신을 물어뜯었다는 것은 자기 자책의 일종이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늑대 인간의 야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말 큰 개를 기르시나 봐요”라고 아주 제대로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다. “상처를 볼 수 있으면서도 늑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또한 “손 하면 발톱을 주는/ 밤이면 대신 울어주는 나의 늑대”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러나 어느날 늑대가 떠나갔고, 담장 앞에는 늑대의 이불과 살을 다 발라낸 뼛조각만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물었다 저렇게 큰 늑대가 왜 집 안에 있느냐고 담장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놀라워하며 말했다.” 늑대가 떠나가자 비로소 그 큰 개가 늑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들----, 그 이웃사람들은 앎의 뿌리가 얕은 사회적 천민들이며, 그들이 그 큰 개를 늑대라고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그 늑대는 자취를 감춘 뒤였던 것이다. 늑대의 무리들이 사슴이나 들소의 고기를 다 먹고 떠나면 독수리와 까마귀들이 몰려들 듯이, 또는 이른바 큰손들이 한바탕 돈잔치를 하고 떠나가 버리면 그 텅 빈 막장을 수많은 개미들이 바글바글 모여 울부짖고 있듯이----.
나의 앎의 늑대는 그 정체를 숨겨야 하고, 그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큰 개’이어야 하고, 그리고 그가 한바탕 큰 잔치를 벌이고 떠나면 그 큰 개는 최상위 포식자인 늑대라는 사실이 밝혀져야만 한다.
장성한 나의 늑대, 나를 지켜주는 나의 늑대----.
이종민 시인의 [야생의 마음]은 그의 야수성이 분출된 시이며, 이제는 세계평화와 인간평등의 시대가 지나고, 우리 인간들의 멸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연기자가 ‘바보연기’를 가장 잘하고,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늑대 인간이 가장 자비롭고 친절한 현자의 역할을 가장 잘한다. [야생의 마음]은 늑대 인간의 마음이며, 늑대 인간의 마음은 어진 현자의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만성적인 소화불량증과 우울증 환자인 어진 현자----.
어진 현자와 인간 늑대가 함께 살 수 있는 곳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