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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상 벚꽃 필 무렵 찻잎을 따는 조연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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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신선이 머물 만한 별천지’를 동천(洞天)이라 했다. 청학동 전설이 곳곳에 서려 있는 하동군 화개동천이 바로 사계절 내내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수류화개(水流花開) 별천지의 고장이다.
‘쌍계청학 실상백학’이라 했으니 쌍계사 근처에 푸른 학이 내려앉은 청학동이 있고, 실상사 근처에 흰 학이 내려앉은 백학동이 있다고 했다. 특히 하동군 화개면은 지리산 자락이 섬진강으로 뻗어 내려 감싸는 무릉도원이 아닐 수 없다. 예로부터 최치원 선생을 비롯한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수많은 여행객을 사로잡는 화개골은 매화와 벚꽃이 필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룬다. 화개천 양쪽 산기슭의 야생차가 연초록의 새순을 밀어 올리며 물안개처럼 차향을 풍기고 마침내 하동야생차문화축제가 시작되면 전국의 차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여름 휴가철과 단풍철뿐만 아니라 한겨울에도 흙내음, 풀내음이 풍기는 화개동천은 그 어느 때든 지리산 중에서도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곳이다.
섬진강 19번국도에서 화개버스터미널로 막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아담한 찻집 ‘풍경소리’가 있다. 언제나 고운 한복을 입고 단아한 자세로 앉아 바느질을 하거나 책을 보다가 환한 웃음으로 반기는 중년의 여인. 바로 ‘산녹차’의 조연옥(55)씨다. 한국 녹차대중화의 선구자인 ‘조태연·김복순가’의 딸로서 전통수제차의 맥을 이어온 ‘산녹차’의 대표이자 지리산학교&지리산행복학교의 차만들기반 선생이다.
어느새 15년의 인연을 이어오는 동안 조연옥씨는 한결같았다. 언제나 쑥스러워하며 자신을 내세울 줄 모른다. 봄밤을 지새우며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차를 적극적으로 홍보할 줄도 모른다. 그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지리산의 차인답게, 한겨울에 흰 꽃을 피우는 녹차 꽃처럼 단아한 기품을 잃지 않는다. 겉은 온화하면서도 내면은 독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지리산에 들어와 처음 인연을 맺은 차인은 조연옥씨의 오빠인 ‘무향다원’의 조성기씨였다. 지리산에 최초의 찻집인 ‘석천다원’을 연 주인공이다. ‘녹향다원’의 오신옥씨와 동업하기도 했다. 절대 타협할 줄 모르는 강골 인상의 그는 녹차뿐만이 아니라 전각과 목각, 그리고 수석 등에도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안목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3년 전 고인이 되고 말았다. ‘무향’이라는 그의 차도 최고의 경지였지만, 전서체로 돌 위에 일필휘지의 각을 하는 그의 솜씨 또한 뛰어났다. 최규일 선생에게 전각을 배우기 위해 기차를 타고 끈질기게 서울을 오갔다. 찻상이며 차도구 등 목각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내가 지리산에서 만난 장인과 예술인 중에 단연 최고였다.
지리산 첫 찻집 석천다원, 친오빠가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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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막 따온 녹차잎들. 2 막 따온 녹차잎을 덖기 위해 가마솥에 붓고 있다. 3 지리산녹차를 덖고 있는 조연옥씨.
- 조성기씨를 통해 동생인 조연옥씨의 ‘산녹차’을 알게 되고, 그 무렵 백운장(단야식당)의 구월순씨, 녹향다원의 오신옥씨 등을 통해 지리산 녹차의 맛을 조금씩 알게 됐다. 14년 전쯤 조연옥씨의 찻집 산녹차와 구월순씨의 백운장은 소위 ‘공포의 지리산 마실단’들의 아지트였다. 지리산 마실단이란 별칭은 말 그대로 ‘입만 달고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공짜로 차를 얻어 마시고 밥과 술까지 얻어먹는, 외지에서 들어온 가난한 예술가들’이었다. 당시 막 입산 준비를 하던 사진작가 이창수씨와 <여행생활자>를 쓴 유성룡씨, 끼니도 제대로 때우기 힘들었던 시인과 화가 등이었다. 언제나 산녹차에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때의 찻집 산녹차는 쌍계사 가는 벚꽃길에 커다란 통나무집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조연옥씨와 외항선 선장 출신인 그의 남편 박준대씨는 언제나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때의 지리산 마실단들이 10년쯤 뒤에 ‘지리산학교’를 만드는 중심축이 되었다. 지리산 마실단의 자발적 가난에 버금가는 이 학교가 바로 돈 한 푼도 없이 만들어진 데다 변변한 교실 하나 없이 이집 저집을 떠도는 ‘열린 학교’이자 ‘움직이는 학교’가 되었다. 학생과 선생의 구별 없이 세 개의 학교로 분화발전돼 운영되고 있으니 그 초심만은 변치 않은 셈이다. 그 무렵 나는 피아골 외곡리의 조동마을 폐가에 살았는데 ‘단식’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지리산 화개 작설 수제라
홀로 산녹차를 마시며
주소 불명의 편지를 쓴다
오늘 저녁은 이것뿐
무련, 그대를 생각하면
도무지 밥을 먹을 수 없다
오미의 지리산 녹차여
어느새 나의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떫은맛이 된 그대여
어스름 산그늘에 몸을 가리고
그대 영혼의 맑은 피를 마신다
지리산 녹차를 널리 알린 ‘조태연·김복순가’는 화개골에 정착해 ‘덖음 방식’의 전통수제차를 1962년부터 생산해 보급하기 시작했다. 덖음차를 만든 이는 조연옥씨의 어머니인 김복순 여사(1916~1992)였고, 이를 전국적으로 대중화시킨 사람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인 조태연 선생(1919~1996)이었다. 2002년 국제신문에 ‘한국 차 이야기’를 연재한 소설가 정동주씨는 이렇게 기록했다.
‘김복순씨는 일제 식민지시절 일본의 차 공장에 일하며 어깨너머로 덖음 방식을 터득했다. 광복 이후 남편 조태연씨와 부산에서 살던 김씨는 어느 날 차를 다시 만들고 싶다는 일념에 남편과 차나무를 찾아 전국 일주에 나서게 된다. 이들은 야생 차나무 군락을 발견한 하동에 자리를 잡았고 1962년부터 이 방식으로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의 차 공장에서 덖음방식을 터득했다’는 부분 때문에 조금의 오해를 사기도 했다. 마치 ‘구중구포’ 등으로 알려진 우리의 전통수제 덖음차가 일본차를 모방한 듯한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다. 일본은 덖음차가 아니라 찌는 방식의 증제차이기 때문이다. 조연옥씨는 이 부분을 이렇게 바로잡는다.
“저희 어머님은 어릴 때부터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차 봉지를 보며 자랐다고 해요. 어릴 때부터 차를 보고 마시고, 만드는 것을 지켜본 것이지요.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시집 간 어머님이 어쩌다 차공장의 노동자로 일했는데, 그때 고향에서 먹던 녹차를 발견하고는 너무나 놀랐다고 해요. 그런데 허드렛일만 시키고 차 만드는 공정을 절대로 보여 주지 않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이 작심하고는 일본인들에게 고향의 오랜 기억을 더듬어 덖음차를 만들어 보였대요. 일본의 증제차와 달리 덖어서 만든 우리차를 내보인 것이지요. 그러자 비로소 일본인들은 매우 경탄하며 어머님을 진급시켰다고 해요. 어머님이 일본차의 장점을 배운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전통 덖음차를 가르친 셈이지요.”
김복순 여사는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8.15 광복 후 한국으로 나와 부산으로 수입되는 일본차를 보면서 ‘우리도 저보다 더 잘 만들 수 있는데’ 라는 열망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남편 조태연 선생과 찾아온 곳이 바로 화개골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의 차문화는 일본에 의해 말살되다시피 했다. 약용으로 발효차격인 작설차는 마시고 있었지만 녹차문화는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사찰의 일부 스님들이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 이들 부부의 노력으로 사찰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판매를 위한 녹차의 대표격으로 신라시대 김대렴(金大廉)의 녹차시배지가 있는 지리산 화개골의 녹차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어머니 김복순씨 손맛 그대로 전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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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연옥씨가 사월초파일을 맞아 지리산 칠불사에서 찻자리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다.
- 조태연·김복순 부부의 7남매 중 셋이 가업을 잇고 있다. 셋째 아들 조성호씨가 ‘조태연가 죽로차’를, 여섯째 아들 고 조성기씨가 ‘무향차’를, 막내딸 조연옥씨가 ‘산녹차’를 만들고 있다. 하동군 악양면 출신인 첫사랑, 외항선 선장이었던 박준대씨와 결혼한 조연옥씨는 서울에서 살다 20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을 잇고 있다. 그녀는 어머님의 제다방법과 더불어 오빠인 고 조성기씨의 고급 브랜드인 ‘무향차’의 특별지도를 받았다. 어머니 김복순 여사가 실질적으로 차를 만들고 딸이 전수한 셈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명칭으로는 ‘조태연가’가 맞지만 실질적인 수제차의 계보로는 ‘김복순가’인 셈이다.
사월초파일 칠불사를 다녀오던 조연옥씨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차를 누가 먼저 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좋은 차를 만드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지요. 다만 지리산 녹차의 역사에 대해 정확한 인식은 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저희 어머님은 차를 잘 만들기도 했지만 음식도 참 잘했어요. 손매가 매우 섬세한 사람이었지요. 딸인 저로서는 그런 어머니가 자랑스럽고, 또 그런 어머니의 엄격하고도 섬세한 손매를 따라 할 뿐입니다.”
사실 김복순 여사의 옛날 사진을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막내딸 조연옥씨와 매우 닮았다. 늘 “어머니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다”고 말하지만 음식 솜씨와 더불어 섬세하고 감각적인 안목으로 찻집을 꾸민 모습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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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국제신문에 보도된 조연옥씨의 어머니 김복순 여사(오른쪽)의 모습. 2 지리산녹차의 대를 잇고 있는 김복순씨와 자녀들. 오른쪽부터 김복순 여사, 조연옥씨, 조성옥 씨, 옆집 소년, 고 조성기씨.
- 그러나 조연옥씨의 지리산 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두 번의 험난한 파도가 지나갔다. 그 한 번은 외환위기(IMF)의 여파였다. 3남매가 서로 연대보증을 서는 바람에 3남매의 보금자리와 찻집이 동시에 경매에 넘어가는 아픔을 겪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연 찻집 산녹차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올해의 명차상’을 받는 등 막 자리를 잡아 갈 때 오빠들이 곤경에 처하면서 연대보증의 ‘파산’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오빠들 때문에 받은 고통은 견딜 만했다. 고향 후배를 믿고 헐값으로 경매에 넘긴 차공장과 찻집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큰 상처를 받았다. ‘3년 정도 재기할 때까지 차공장을 사용하게 해주겠다던 약속’을 믿고 다른 이들의 도움을 거절했는데, 막상 낙찰되자마자 고향 후배에게 매몰차게 쫓겨난 것이다. 순진하게도 각서 한 장 받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쫓겨난 것도 억울한데 남편 박준대씨가 ‘약속을 지키라’고 항의하다가 오히려 무고죄로 감옥살이까지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나도 가까이에서 그 아픔을 지켜보았다. 지리산 마실단들뿐만 아니라 화개장터의 강남식당 등 산녹차를 사랑했던 많은 이들이 경매를 받아 재기할 때까지 기회를 주자고 논의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박준대씨가 후배의 제안을 덜컥 수락했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알거지가 된 것은 둘째 치고 감옥살이까지 했다. 모두들 분개하며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출소한 뒤 재기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남편이 이른 새벽 서둘러 벌초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조연옥씨는 아직 어린 막내아들 균이와 맏딸 유리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엄청난 비극 앞에서도 그녀는 우리에게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 균이의 어머니이자 차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고향에서의 온갖 멸시와 험담에도 굴하지 않고 전셋집을 오가며 해마다 녹차를 덖었다. 아무 죄도 없이 망하는 바람에 옛날의 찻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찻집이지만 그래도 날마다 문을 열었다. 10여 년 동안 네 번 이사하고 세 번 찻집 문을 다시 열었다. 막내아들을 키우고 먹고살기 위해 녹차만을 고집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한국의 유행이자 대세’인 커피도 판다. ‘목연’이란 간판을 달고 녹차만 고집할 때는 여행자들이 공방인 줄 알고 잘 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름을 ‘풍경소리’로 바꾸고 커피를 곁들이니 많이 들어왔다가 녹차를 마시기도 한다. 일종의 지리산 녹차를 위한 방편인 셈이다.
파산·남편 사별 아픔 딛고 일어서
그러는 사이 막내아들은 대학에 가고 최근에 군 입대를 했다. 지난 봄에는 그녀를 따르는 13명의 제자도 생겼다. 최근까지 지리산행복학교의 제자들이 매주 1박2일씩 네 번이나 모여 조연옥씨에게 지도를 받으며 전통수제차를 만들었다. 발효차도 만들었다. 밤새 찻잎을 덖고 비비는 고난의 행군이었지만 모두들 더불어 화사했다.
때마침 한 학기 수업이 끝나는 날이 조연옥씨의 생일이었다. 제자들이 준비한 아름다운 축하 이벤트와 생활한복 한 벌을 선물 받고는 마침내 참았던 눈물을 보였다. 혼자 속으로만 삼키던 눈물이 그예 터져 나온 것이다. 돌이켜 보면 군대에 갈 정도로 장성한 아들 균이가 고맙고, 그 힘든 시절을 쓰러지지 않고 헤쳐 나온 자신이 고맙고, 어머니와 지리산 녹차가 고맙고, 남편이 떠난 뒤 10여 년 만에 처음 받아 보는 생일축하 파티가 정말 고마웠던 것이다.
모계의 대를 이은 ‘지리산 차여인’ 조연옥씨는 녹차 때문에 고향에 돌아오고, 고향에서의 슬픔마저 오직 녹차만으로 극복했다. 그녀는 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찻잎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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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지리산 전통 수제차 산녹차의 상품들. 2 지리산학교 차만들기반 플래카드. 3 하동 화개장터 버스터미널 입구에 있는 찻집 ‘풍경소리’.
- “일단 찻잎이 제일 중요하지요. 저는 4월 중순부터 찻잎을 따러 나갑니다. 악양골 구재봉 자락에 차밭이 있지요. 높은 산자락의 차가 잎이 바르고 단단해서 좋지요. 그래도 부족한 것은 화개 모암마을이나 가탄마을에서 가져와 덖습니다. 덖는 횟수와 무쇠솥의 온도도 정확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차를 대하는 마음이 안정돼 있어야 합니다.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차를 덖기 위해 기도를 하고 마음과 몸을 정갈히 하는 것도 좋지만, 평상시 늘 그러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차를 마시는 것만이 다도가 아니라 차를 덖고 마시고 생활하는 것, 그 모두가 다도입니다.”
화개버스터미널 입구의 찻집 ‘풍경소리’에는 언제나 달밤의 박꽃처럼 환한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한겨울의 녹차꽃처럼 내공 깊은 여인이 지리산 수제녹차를 내리고 있다.
첫댓글 흐흐...그자리에 저두 있었다는.... 요안나님 고마워요.이래 이시인님 글을 읽으니 정말반갑네요.거의 빡센수업 마치고 지금은 내노력의 결심물을 아침부터 우와한 마음으로 대할때면 마으미 뿌듯하답니다.
달밤의 박꽃처럼 환한 여인님!!!
아름다우십니다!
멋지십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환한 얼굴로 웃으며 맞아주셔서 행복했습니다!
담엔 꼭 풍경소리에서 차한잔 하겠습니다!!^^
가슴이 뭉클하네요
I.M.F... 배신...무고... 교통사고..큰 아픔속에서도 자식을 훌륭히 키워오신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조금 힘들었다고 고백한 내자신이 부끄럽네요
행복하세요........
여전한 수고로 글 올려주시는 요안나님 감사합니다.
조연옥선생님~~ 지금의 절제되고 단아한 모습 그래서 더 존경스럽습니다.
어제 밤에 읽어 보지도 않고 올리긴 했는데
아침 맑은 정신으로 읽어 보니 가슴 뭉클하네요.
언제나 한결같이 단아하신 모습,존경합니다...
자유게시판 글을 옮겨 놓습니다.^^
감사 합니다!!! 여러분이 계셔 힘이 됩니다
이 시인께서 약간의 말씀을 언급 하시긴 했지만 글을 통해서 제 이야기를 내 놓으니
자랑 할거라곤 하나 없고 치부를 들어 낸듯 부끄럽기만 합니다.
부끄럽게 생각 하면 한없을것 같고 여러분들께서 모아주신 격려와, 위로와,칭찬에, 힘을 얻어
당당 하고 여법함으로 삶을 살겠습니다.
이 시인님께 깊은 감사 드립니다
이 시인님은 개인적으로 저의 하고는 15~6년 지기라 (애들 아빠 계실때부터)
식구라 할 만큼 가깝게 느끼며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저가 사는게 여의치 않아 변변히 해드리는 거라곤 없지만......
서로 마음이 있기에 이렇게 유지 되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귀한 말씀 가만히 한 마디 한 마디 호흡을 조절하며
천천히 읽었습니다.
차가 사람처럼 보이고 사람이 차처럼 보이는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합장 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