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32권, 16년(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1월 6일(계사)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정평(定平)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이르니, 임금히 심히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3998) 하고 쌀·콩 각각 50석과 종이 2백 권을 치부(致賻)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인지(鄭麟趾)를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원로(元老) 대신은 인군의 고굉(股肱)이요,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살아서는 휴척(休戚)을 함께 하고, 죽으면 은수(恩數)를 지극히 하는 것은 고금의 바뀌지 않는 전례(典禮)이다.
생각하면 경은 천지가 정기를 뭉치고 산악(山嶽)이 영(靈)을 내리받아, 고명 정대(高明正大)한 학문으로 발하여 화국(華國)의 웅문(雄文)이 되었고, 충신 중후(忠信重厚)한 자질로 미루어 경세(經世)의 큰 모유(謀猷)가 되었다. 일찍 이부(二府)에 오르고 네 번 상상(上相)이 되었다. 잘 도모하고 능히 결단하여 계책에는 유책(遺策)이 없었고, 사직을 정하고 천명을 도운 것은 공훈(功勳)이 맹부(盟府)에 있다. 한결같은 덕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우리 국가를 보호하고 다스렸는데, 근자에 고사(故事)를 가지고 나이 늙었다 하여 정사를 돌려 보냈다. 그 아량을 아름답게 여기어 억지로 그 청에 따랐다.
거듭 생각건대, 삭북(朔北)은 기업(基業)을 시초한 땅이고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이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돌아보아 살피려고 하는데, 실로 적합한 사람이 어려웠다. 경의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하여 먼 길의 근로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陵寢)이 중하기 때문에 경(卿)의 한 번 가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뜻하였겠는가?
슬프다! 사생(死生)의 변(變)은 인도(人道)에 떳떳한 것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이후로 대사(大事)에 임하고 대의(大疑)를 결단하여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 국가를 반석의 편안한 데에 둘 사람을 내가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
하윤(河崙)은 진주(晉州) 사람인데, 순흥 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麟)의 아들이었다. 지정(至正) 을사년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좌주(座主)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영주(知榮州)가 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가 그 치행(治行)을 제일로 올리니, 소환되어 고공 좌랑(考功佐郞)에 제수되어 여러 벼슬을 거치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침범하니, 하윤이 힘써 불가함을 말하였는데,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에 추방하였다.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계유년에 기용하여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가 되었다.
태조가 계룡산(雞龍山)에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이미 역사를 일으키니, 감히 간하는 자가 없는데, 하윤이 힘써 청하여 파하였다. 갑술년에 다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병자년에 중국 고황제(高皇帝)가 우리의 표사(表辭)가 공근(恭謹)하지 못하다고 하여 우리 나라에서 문장을 쓴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태조가 비밀히 보낼지 안보낼지를 정신(廷臣)들에게 물으니, 모두 서로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반드시 보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하윤이 홀로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니, 정도전이 원망하였다. 태조가 하윤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상주(上奏)하여 자세히 밝히니, 일이 과연 풀렸다.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윤이 일찍이 임금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윤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윤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윤은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宣言)하고 군사를 끌고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상왕(上王)이 위(位)를 잇자 하윤에게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고 정사공(定社功)을 녹훈(錄勳)하여 1등으로 삼고, 작(爵)을 진산군(晉山君)이라 주었다. 경진년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가 되고, 9월에 우정승(右政丞)이 되매 작을 승진하여 백(伯)으로 삼았다. 11월에 임금이 즉위하자 좌명공(佐命功)을 녹훈하여 1등으로 삼았다. 신사년 윤3월(閏三月)에 사면하였다가 임오년 10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으로 제수되어 영락 황제(永樂皇帝)의 등극(登極)한 것을 들어가 하례하는데, 하윤이 명(明)나라에 이르러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새 천자가 이미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였으니, 청컨대, 우리 왕의 작명(爵命)을 고쳐 주소서.”
하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기어 계미년 4월에 명나라 사신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인장(印章)을 받들고 왔다. 임금이 더욱 중하게 여기어 특별히 전구(田口)를 주었다. 갑신년 6월에 가뭄으로 사면하기를 빌고, 을유년 정월에 다시 복직하였다가 정해년 7월에 또 가뭄으로 사피하기를 청하였다. 기축년 겨울에 이무(李茂)가 득죄하자 온 조정이 모두 베기를 청하였는데, 하윤이 홀로 영구(營救)4000)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기를,
“하윤이 ‘죽일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실로 그 마음에서 발한 것이다.”
하였다. 을미년 여름에 이직(李稷)이 그 향리에 안치(安置)되었는데, 하루는 하윤이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내전에서 인견하였다. 하윤이 말이 없이 웃으니,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다. 하윤이 대답하기를,
“이직의 죄가 외방(外方)에 내칠 죄입니까?”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임진년 8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고 갑오년 4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금년 봄에 이르러 나이 70으로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임금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는데, 하윤이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부원군(府院君)으로 집에 나갔다.
하윤이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端委] 차림으로 묘당(廟堂)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계옥(啓沃)한 것이 대단히 많았으나,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몸을 가지고 물건을 접하는 것을 한결같이 성심으로 하여 허위가 없었으며, 종족(宗族)에게 어질게 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실(信實)하게 하였으며, 아래로 동복(僮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인재(人材)를 천거하기를 항상 불급(不及)한 듯이 하였으나, 조금만 착한 것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거(居)하여서는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잔치하여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성질이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유유(悠悠)하게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었다.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까지도 모두 지극히 정통하였다. 후생을 권면(勸勉)하여 의리를 상확(商確)함에는 미미(亹亹)하게 권태를 잊었다. 국정(國政)을 맡은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 사대(事大)하는 사명(辭命)과 문사의 저술이 반드시 윤색(潤色)·인가(印可)를 거친 뒤에야 정하여졌다.
불씨(佛氏)와 노자(老子)를 배척하여 미리 유문(遺文)을 만들어 건사(巾笥)4002) 에 두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 섬실(纖悉)하고 주비(周備)하였다. 또 상사(喪事)와 장사(葬事)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하윤이 죽은 뒤에 그 글이 나오니, 그 집에서 그 말과 같이 하였다. 자호(自號)는 호정(浩亭)이요, 자(字)는 대림(大臨)이요,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아들은 하구(河久)와 서자(庶子)가 세 사람인데, 하장(河長)·하연(河延)·하영(河永)이었다. 하윤이 죽자 부인 이씨(李氏)가 애통하여 음식을 먹지 않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임금이 듣고 약주(藥酒)를 하사하고 전지하기를,
“상제(喪制)는 마치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제를 마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부디 술을 마시고 슬픔을 절도 있게 하여 상제를 마치라.”
하였다. 이씨가 사람을 시켜 승정원(承政院)에 나와 상언하기를,
“가옹(家翁)이 왕명을 받들어 외방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시체를 서울 집에 들여와 빈소(殯所)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예조(禮曹)에 내리어 예전 제도를 상고하여 계문(啓聞)하게 하고, 이어서 전지하기를,
“《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사명을 받들고 죽으면 대부(大夫)·사(士)는 마땅히 집에 돌아와 염(殮)하고 초빈(草殯)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