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유와 이덕유의 우이당쟁(牛李党争)
관직에서의 당파 싸움은 개인들 간의 은원(恩怨)에서 촉발된다. 이런 당파는 정치상의 다른 의견으로 시작되어 왕왕 당파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감정처리로 격화된다. 당연히 이런 당쟁의 배후에는 실제로 사회 정치집단의 힘겨루기가 있다. 당쟁 중 가장 전형적인 것은 중당(中唐)시기의 “우이당쟁(牛李党争)”이다.
당 중기에 변경에는 소수민족의 침입과 내지의 할거하는 번진(藩镇)으로 농촌이 붕괴하고 있었고 조정에는 환관이 권력을 잡았으며 관계에는 당쟁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당헌종(唐宪宗) 때 이길보(李吉甫)는 두 차례 재상이 되었으며 번진의 반란을 평정할 계획을 가진 능력이 있는 중신이었다. 그러나 이길보는 또 다른 재상 이강(李絳)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항상 논쟁이 있었다. 어느 해 현량(贤良) 방정(方正) 제과(制科)고시에서 천거된 진사 이종민(李宗闵), 우승유牛(僧孺)가 책문에 대해 이길보의 시정방침을 격렬하게 공격하였고 이길보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조신들이 그들 두 사람의 책문에 대해 크게 선전하고 심지어는 범례로 만들어 낙제한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길보는 매우 섭섭하여 당헌종에게 읍소하였다. 이종민, 우승유는 이 때문에 장기간 쫓겨나 임관할 수 없었고 그들을 편든 조관들도 대부분 좌천되고 쫓겨났다. 6년 후 이길보는 죽고 이강은 병으로 휴직하였다. 이종민 우승유는 비로소 조금씩 승진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얼마 후 우이당쟁의 숨겨진 기록이 되었다.
당헌종이 죽자 이길보의 아들 이덕유(李德裕)가 한림학사(翰林学士)가 되어 당헌종(唐穆宗)에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이종민이 그의 부친을 공격한 것에 대한 묵은 빚을 갚기 위해 이덕유는 과거고시의 청탁의 혐의로 중서사인(中书舍人)이었던 이종민을 검주자사(剑州刺史)로 좌천시켰다. 여기서 쌍방은 각기 붕당을 만들어 서로 공격하면서 당쟁의 서막이 열렸다. 이덕유, 이종민, 우승유는 모두 정치적 재능을 갖추었고 관계에서도 일정한 호소력이 있어서 당쟁의 쌍방간 상처는 깊었고 범위도 컸다.
당문종(唐文宗 대화(大和) 3년(820),이종민은 환관과 결탁하여 재상이 되었다. 이덕유는 절서절도사(浙西节度使)의 임기가 만료되어 조정으로 돌아와 역시 재상으로 추천되었다. 이종민은 같은 당을 사주하여 악의적으로 배척하니 이덕유는 출경하여 의성절도사(义成节度使)가 되었다. 이종민은 우승유를 끌어들여 재상으로 삼고 두 사람이 함께 재상권을 장악하여 이덕유의 문생과 친구들을 배척하였다. 양파의 격렬한 논쟁으로 상대방에 대한 말은 뼈아픈 말들뿐이었다. 당시 이덕유는 서천절도사(西川节度使)로 옮겼는데 서천 유주[维州, 지금의 사천(四川) 리현(理县)]는 촉서(蜀西)의 문으로 공협(邛崃)의 산 입구이며 토번(吐蕃)과 당이 쟁탈전을 벌이던 전략 요충지였다. 토번은 딸을 유주성문을 지키는 사람에 시집보냈는데 두 아들을 키웠다. 20년 후 이 두 사람은 부친의 수문지기의 직을 계승하여 모친의 가르침을 듣고 밤에 성문을 열어 토번이 유주를 습격해 점거케 하였다. 이름은 “무우성(无忧城)”으로 바꾸었다.
당군이 여러 차례 반격했지만 유주를 빼앗지 못했다. 이덕유가 부임한 지 얼마 안되 토번의 유주 수장 실달모(悉怛谋)가 당조에 투항을 요청해왔다. 이덕유는 받아들이고 조정에 상주하여 토번에 대한 진공을 요구하였다. 당문종은 마음이 흔들렸다. 조신들도 대부분 동의했지만 우승유는 정적이 주장하는 것은 반대라는 원칙을 갖고 있기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토번은 광대하여 유주의 상실은 그리 대수롭지 않으며, 당은 토번과 화의를 맺었으므로 반드시 화약을 지켜 토번을 화나게 하거나 전쟁의 실마리를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또 당문종에게 토번이 대거 출병한다면 3일이면 함양까지 다다른다고 위협하였다. 당문종은 마음을 돌렸다. 이덕유에게 토번에 유주성을 돌려주라고 명령하고 실달모 이하 토번 항장과 항졸들을 토번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결과 실달모 등 사람들이 모두 참살당했다. 이듬 해 당문종은 후회하면서 우승유, 이종민을 모두 지방의 절도사로 보내고 이덕유를 불러 재상으로 삼았다. 양당의 말다툼에 대해 문종은 몹시 걱정하면서 “하북의 적(할거하고 있는 번진(藩镇) 제거는 어렵지 않다. 붕당의 제거가 실로 어렵다.)”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 이덕유도 내쫓고 이훈(李训), 정주(郑注)를 임용하여 환관을 없애도록 하였다. 835년의 “감로지변(甘露之变)”으로 환관이 정변을 일으켜 조신들을 잡아 죽이고 당 문종을 연금하였다. 환관이 독자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840년 당문종이 죽었다. 이덕유는 회남절도사(淮南节度使)에서 조정 재상으로 복귀하여 당무종(唐武宗)을 보좌하고 환관집단과 연계하여 우승유, 이종민 두 사람을 좌천시키고 당의 무리도 배척하여 출조(出朝)시켰다. 이덕유의 대권 장악으로 이당(李党)의 세력은 확대되었다. 6년이 지나고 당무종이 죽었다. 당의종(唐宜宗)이 환관에 의해 옹립되면서 이덕유도 재상에서 파직되었다. 우승유, 이종민이 다시 재상으로 컴백하였다. 두 사람은 앞뒤로 죽었지만 우당(牛党)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덕유는 좌천되고 또 좌천되어 애주(崖州, 지금 해남)의 사호(司户)가 되었으며 결국 해남(海南)에서 숨을 거두었다. 재능은 뛰어나면서 도량이 좁은 이 몇 사람의 정치 지도자들의 사후에 당쟁은 비로소 점차 평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