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이 이야기하는 수필은...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pavement)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만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이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한다. 세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프로니우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첫댓글 참으로 좋을 글들을 남기신 파천득님은 97세까지 사시면서
가신지도 이제17년이 된 것 같아요. 님의 글이 많은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