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15,5-12.17-18; 필리 3,17―4,1; 루카 9,28ㄴ-36
+ 찬미 예수님
봄이 오는가 했는데 또다시 얼마간 춥겠다는 예보를 듣고, ‘봄이 오는 게, 마냥 쉽고 당연하지만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겨울이 기승을 부린다 해도 결국 봄은 오고야 맙니다. 겨울의 마지막 심술과 훼방에 건강 유의하시고 기쁘게 새봄을 기다리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사순 제2주일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하고 계시다고, 저는 여러 차례 전해드렸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첫 번째 계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의 옛 이름인데요,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짐승들을 가져오라고 명하시고, 아브람은 이들을 반으로 잘라 마주 보게 차려 놓습니다. 이는 당시 서아시아 지역에서 계약을 맺을 때 하던 의식이었는데, 어느 한쪽이 계약을 어기면 이렇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계약의 내용은, 하느님 편에서는 아브람에게 후손과 땅을 주신다는 것이었고, 아브람 편에서는 하느님만을 주님으로 모시며 주님만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은 계약에 충실하고자 했고,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대로 후손과 땅을 주셨는데, 바오로 사도는 ‘후손들’이라는 복수형이 아니라, ‘후손’이라는 단수형이 사용되었음을 지적하며 그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해석합니다.(갈라 3,16) 결국 후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땅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말씀을 나눌 때 얼굴이 빛났던 모세를 떠오르게 하는 한편(탈출 34,29), ‘하느님의 옷이 눈처럼 희었다’는 다니엘서(다니 7,9)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세이시고, 다니엘서가 예언한 메시아이심이 드러납니다.
이어서 율법과 예언서를 상징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는데, 이 일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고, 새롭고 결정적인 출애굽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베드로는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초막절 축제가 있었는데요, 이는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초막에서 살았던 것을 기념하여 일주일을 초막에서 지내는 축제였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이 초막절 축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는 성부 아버지의 말씀이고, 구름은 성령의 상징으로서, 결국 예수님 세례 때처럼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거룩한 변모 때에도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여기서 “내가 선택한”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42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하느님 백성 전체를 위해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의 운명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길에 동행하던 제자들은,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무척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당신 영광을 보여 주시며,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감사송)는 것을 밝혀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가 지상에서 겪는 고난이, 당신 영광의 빛 안에서 언제가 함께 빛날 것임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제2독서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저는 ‘엔도 슈사쿠’라는 일본 작가를 좋아해서 작년 성지주일 강론 때 이분의 책을 인용해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일 감정이 많은 저는, 그분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그분의 책을 덜 읽으려 노력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나가사키 성지 순례를 다녀와서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라는 사회에서 천주교 신앙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이라는 그분의 책을 새로 읽었는데, ‘사일런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그분의 소설 ‘침묵’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안에서 진중한 신앙적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가 없었으면 종교는 시작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가 백혈병으로 죽어갈 때 부모는 열심히 기도합니다. 이때 아이가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사이비 종교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어가고, 절망 가운데 하느님도 부처님도 없다고 말할 때, 그때 진짜 종교가 시작된다고 엔도 슈사쿠는 말합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책날개에 ‘남편 엔도 슈사쿠를 말한다’라는 책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이런 구절이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부인] 엔도 준코는 남편을 잃어 슬퍼하기보다 평화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는 고인이 죽기 전에 남긴 ‘난 어머니도 형님도 만났어. 이미 빛 속으로 들어왔어. 안심해.’라는 ‘부활’ 메시지에 있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지성의 회의 속에서 철저하게 사실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엔도 슈사쿠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부활의 증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던 탓인지, 어떤 맥락에서 저 말을 했는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책이 절판되어, 지난주에 신학교 도서관에 부탁해서 다른 대학 도서관에서 대출받아 겨우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남편은 세상을 뜨기 한 1년 전부터 거의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손을 잡거나 스킨십을 하는 것밖에는 달리 의사를 소통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숨을 거두는 순간에 아주 인상적인 일을 겪었어요. 제가 남편의 손을 쥐고 있었는데 말이죠. 남편 쪽에서 ‘난 어머니도 만났고 형님도 만났어. 이미 빛 속으로 들어왔어. 안심해.’라는 메시지가 전해온 거예요. 저는 분명히 그 메시지를 받았어요.
만일 남편이 말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저는 남편의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말을 할 수 없는 상태, 서로 손을 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하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저는 제 마음을 두드렸던 구절이 그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였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부인이 한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자유로이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그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어쩌면 확실한 보증의 말을 찾고 싶었던 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와 같았는지 모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증인으로 붙잡아 두고, 수난의 길로, 불확실의 길로 나아가기를 만류하려는 우리의 약한 마음에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어쩌면 엔도 슈사쿠가 들어간 ‘빛 속’은, 오늘 복음의 거룩한 변모 속에서 예수님께서 펼쳐 주신 빛이 아니었을까요?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천 년 전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살아계시며 오늘 이 미사 중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거룩한 변모, 15세기
출처: Transfiguration of Jesus in Christian art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