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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 목사
I. 인생의 깊은 밤에
함께 60이 되어 회갑을 맞은 노 부부가 있었습니다. 회갑잔치에서 요술램프를 선물로 받았지요. 이 요술램프는 꼭 한가지씩 소원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소원을 말했습니다. “지니야 지니야 할아버지하고 세계를 여행했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연기가 뽕 나오면서 항공권, 세계 곳곳의 호텔 예약권이 뚝뚝뚝 떨어졌습니다. 할아버지가 이거 어떻게 얻은 선물입니까? “지니야 지니야 이왕 여행하는 김에 나보다 30이나 젊은 여자하고 세계를 여행했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뾰안 연기가 나더니 할아버지가 90세로 바꿔져 있었습니다.
늘 환경이 바뀌면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행복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는 걸 깨닫지 못하고 늘 사람들을 바꾸어 보려고 하다가 불행해 우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루를 지나더라도 낮이 있고 밤이 있듯이 평생 살아가다 보면 낮이 있고 밤이 있고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지난 몇 주간 동안 우리는 "인생의 깊은 밤”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첫째시간 - 마지막 추수라는 제목으로 인생의 깊은 밤에 드린 감사를 주제로 은혜를 나누었고,
둘째시간 - 김운용 목사님을 통해 한밤중에 부른 노래 라는 제목으로
지난 주일엔 - 야베스의 기도를 통하여 인생의 깊은 밤에 얻은 복, 인생의 깊은 밤에 드린 기도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그 네 번째 시간으로 「인생의 깊은 밤에 들려온 음성」라는 제목으로 주께서 주시는 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II. 고독한 밤에 나를 부르는 소리
독방 감옥에 갇힌 사람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고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꽃 한송이 액자 하나 반겨주지 않는 빈방을 홀로 지켜야 하는 고독이란 참으로 이기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가끔 간수라도 한번씩 지나가며 “70번”하고 자기 죄수 번호라도 한번씩 불러주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고 합니다.
고독에도 여러가지 고독이 있습니다. 먼저는 육체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 가정이 없는 걸인, 친구가 없는 외톨이의 고독. 이에 더하여 참기 어려운 배고픔의 고독이 있습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고독, 나이가 들고 몸이 늙어가면서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자신의 늙음을 의식하게 되는 늙음의 고독도 있습니다. 나와 함께 삶을 나누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면서 '나도 갈 날이 있겠구나.' '내가 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구나.' 느낄 때 오는 고독 말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깨닫게 되는 고독, 소외감의 고독, 사랑하는 사람마져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는 고독, 심지어 지도자만이 갖는 정상의 고독이란 게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고독은 영혼의 고독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의 자리에서 싸늘해져 가는 내 시체를 안고 오열을 토하는 그들의 울음소리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행여나 하나님 마져 버리신 것은 아닌가? 마지막 자리에서 우는 고독이 있습니다.
때로 바닷물이 밀려오듯 벅찬 은혜가 있을 때는 하나님도, 세상도 모두 내편처럼 보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모든 것들이 내 곁을 떠나가면서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 아닌가 외로움과 고독에 젖어 들지요. 인천 앞바다의 물이 창일했다가도 어느덧 물이 다 밀려나가 뭍이 드러나듯이 우리의 신앙에도 끊임없는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한 것 같은 그런 부푼 가슴을 가지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사람들 속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만 같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이 우리의 믿음의 수은주가 뚝뚝 내려갈 때에 깊은 고독에 빠져들곤 합니다.
델마 탐슨이라는 여인은 2차 세계대전 중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육군 장교와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제브 사막 육군 훈련 캠프로 왔습니다. 그러나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가득찬 그곳에서의 삶은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곳에 오게 한 남편에게 불평을 서슴치 않았으며 이로 인해 결혼 생활이 점점 어려워져 파국의 위험에까지 이르게 되자 장군인 아버지에게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로부터 온 답장의 내용은 단 한줄 -“감옥에 두 죄수가 있었단다. 한 사람은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헤아리며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감옥에 굴러다니는 먼지를 세며 살았단다”라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 들고 곰곰히 생각하던 그녀는 큰 깨달음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던 중 그녀는 인디언이 사는 동네를 방문하여 그들의 생활습성과 사막의 여러 생리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를 모아 그녀는 책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빛나는 성벽」이라는 사막에 관한 최고의 소설이 되었습니다. 훌륭한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가 환경에 대해서 원망하며 무료한 삶을 보낼 때 저는 불행했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삶을 하나님께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며 해야 할 일을 찾았을 때 하나님은 제게 이 놀라운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라는 세리장이 나옵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직업 하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자신의 진실이 통하지 않는 고독감에 젖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듣자하니 예수님이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내 고독을 알아 주실까? 달려나가 보았지만 사람이 많고 자신은 키가 작아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봐야지'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그 밑을 지나시다가 삭개오를 보시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이 한마디 말씀 속에 지금까지 쌓여져 왔던 온갖 상처와 아픔들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 어떤 문제를 짊어지고 오셨습니까? 어떤 상처를 안고 오셨습니까?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오셨습니까? 끊임없이 나를 쓰러지게 만들고 물에도 불에도 넘어지게 만드는 영혼의 상처, 아픔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는 주님의 음성, 마리아야, 삭개오야 부르던 주님의 음성이 오늘 여러분들 귓전에 들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1절과 20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절 "화 있을찐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20절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셨다."
영적으로 침체되고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했고 그래서 사람은 저마다 징계를 받아 신음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시리아의 침략을 대응하기 위해 하나님을 등지고 애굽의 세력과 결탁을 했습니다. 승리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전쟁에서 비참하게 패하고 백성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달려와 이제는 내가 살아도 하나님을 위하여, 이는제 내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고백하고 항복하고 돌아오면 좋으련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좌우로 치우쳐 편법이라도 써 보고자 했습니다. 이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III. 나의 등 뒤에서
첫째, 이 위로의 소리가 어디서 들려왔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는 그 소리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네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나의 등뒤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어디론가를 향하여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데 뭔가를 찾아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내 등뒤에서 들려왔습니다. 이 본문의 그림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하고 있는데 나는 하나님을 등지고 앉아 있습니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등진 것은 모든 것을 등진 것이다.”
철학자 베이콘의 네 가지 우상 가운데 "동굴의 우상”이란 게 있습니다. 동굴 입구에서 동굴을 향하여 사람을 꼼짝 못하게 묶어 두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뒤에서 비춰오는 빛은 볼 수 없고 그 빛을 통하여 비춰진 눈 앞의 그림자만 보일 뿐입니다.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분의 모습을 볼 수는 없습니다. 구세주의 자비로운 시선과 인자한 얼굴의 영광을 볼 수 없는 죄인의 고독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등졌을 때 세상의 모든 신성한 것을 등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진리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생명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등지게 한 장본인을 우리는 "죄"라고 부릅니다.
① 죄는 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습니다. 어둡고 답답하고 외로워서 견딜 수 없는 고독을 몰고 옵니다. 축복과 기쁨과 행복의 통로를 막아버립니다.
죄는 먹구름과 같습니다. 태양의 밝은 빛, 생명의 빛을 막고 있는 먹구름처럼,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고 우리를 답답하고 우리의 삶을 시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② 죄는 독소입니다.
이는 부패한 음식물과 같아서 그것을 속에 넣어 두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 토해 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독약중 비소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먹으면 먹는 즉시 죽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생명을 죽여가는 무서운 독이라고 합니다. 죄는 우리의 생명을 조금씩 조금씩 죽여가는 비소와도 같은 것입니다.
③ 죄는 진노의 화살입니다.
우리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돌아와야 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의 자리를 점검해 보십시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무그늘 밑에 숨은 아담을 부르시듯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건만 너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냐? 나는 너를 안기 위하여 너의 등뒤에서 기다리고 있건만 너는 어디를 향하여 도망가고 있느냐? 나는 내 시선으로 너를 주목하고 있건만 너는 어디를 향하여 두리번 거리고 있느냐? 돌아오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두운 그림자가 내 앞에 가로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림자를 지워 보려고 칼로 찔러 보기도 하고 총으로 쏘고 폭탄을 떨어뜨려도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몸을 돌려 태양을 바라보면 문득 그림자는 나의 등뒤로 사라지고 마는 것을. 주님을 등지고 도망 갈 때는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가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아픔과 상처와 문제의 그림자가 내 등뒤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IV. 추적의 하나님
둘째, 인생의 어두운 밤에 들려온 음성이 무엇입니까?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면? 논리적인 귀결로 보아 어떤 음성이 들려야 되는 것입니까? 네 이놈 내 눈을 피해 어디로 가느냐? 그러고도 네가 살아 남을 것 같으냐? 이런 소리가 들려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네 이놈 나는 네게 실망했다. 내가 너를 가만히 둘 줄 알았더냐? 심판의 소리가 들려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따뜻하고 포근한 음성이었습니다. "돌아 오라.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하노라. 돌아 오라. 너는 아직도 내게 소중한 존재이니라. 돌아오면 내가 안아 주마. 용서해 주마."
저는 고등학교 시절 꽤 개구장이 소년이었던 모양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교무실 옆에서 장난을 치다가 넘어지면서 창문을 짚어버렸습니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교무실 창문이 깨졌고 내 손등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달려나온 훈육주임 선생님 - 박달나무 몽둥이로 사정없이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어찌 감히 겁 없이 교무실 앞에서 장난을 쳐! 하는 말투였습니다. 그 순간 달려나온 선생님은 성경 선생님이었습니다. 영모야 많이 다쳤구나. 하얀 손수건 끄집어내 내 손등을 감싸시더니 품에 안고 양호실로 가서 이것 저것 약을 발라 주시며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목사님이 되셨지요.
그분의 하얀 손수건은 예수님의 피묻은 옷자락이었고 그분의 품은 자비로운 하나님의 품이었습니다. 실수하고 넘어져 울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아닐까? 내가 깨어져 상처받아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실까? 용서 하실까? 우린 걸핏하면 죄를 짓고 길바닥에 나뒹구는 돌멩이처럼 천박한 존재로 전락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돌아 오라 말씀하십니다. 여기로 와야 네가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가슴문을 열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만한 여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릴 만큼 여백이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말입니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집사의 가시나무새라는 노래의 가사 가운데 이런 귀절이 나오지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우리들의 것들로 가득 채워져 하나님의 것이 우리속에 존재할 수 없는 모습은 아닌지요?
하나님의 애절한 음성 "이리로 행하라!" - 어떻게 돌아간담 걱정하지 말고 돌아오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가르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돌아와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누구에게로 가야할지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때로 사하라 사막에 서 있는 나그네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들에게 길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둘째는 함께 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서 미로를 헤매고 있을 때 "이리로 행하라" 낮선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마냥 가르쳐 주기만 하고 그것으로 끝내지 아니하시고 동행해 주십니다. 내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 해 주십니다.
어떤 인디안의 추장이 외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이 철없는 아들은 외소하고 소심하고 용기가 없어서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그 아들을 밀림으로 끌고가 나무에 꽁꽁 묶어 두었습니다. “내일 아침 네가 살아오면 내가 너를 살려두고 왕위를 물려 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는 짐승의 밥이 되고야 말 것이다.” 밤이 깊어가자 번뜩이는 눈빛을 하며 맹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덤벼들려고 어흥~ 했다가 앞에서 퍽 쓰러지고 퍽 쓰러지고 계속해서 쓰러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아들이 새벽을 맞이했을 때 저만큼 보니 아버지가 활을 들고 빙그레 웃고 서 있었습니다. ‘나는 힘이 없지만 아버지가 함께 하신다는 뜻이겠구나.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도와 주신다는 뜻이겠구나.’ 주님은 험한 이 세상, 우는 사자처럼 우리에게 달려드는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우리들과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약속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이십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란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셋째는 다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리로 행하라는 말씀은 심판하시겠다는 뜻이 아니고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나를 돌이켜 주시는 것은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용서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이사야 1장 18절을 보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 6장 1절을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찢어졌으나 싸매어 주시고 감싸주시고 낫게 하여 주실 것이니라.
목회현장에서 때로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힘은 너무나도 연약하기만 하고, 해결해야 될 일은 너무나도 크고 엄청나고, 우리가 탄 배는 작기만 하고 파도는 거칠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구하고도 의논할 수 없고, 함께 기도할 수 조차도 없는 시절에 이 교회를 섬기면서 자주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한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으셨고 하나님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뒤로 돌아다 보면 언제나 빙그레 웃고 있고 나를 지켜봐 주시는 한 눈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허우적 거리면 힘있는 손으로 언제나 내 손을 붙들어 주셨던 능력 있는 한 팔이 있었습니다.
1.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후렴)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2.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3.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 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당신의 등뒤에서 당신을 돕는 그분의 손길은
① 야단스럽지 않으면서도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의 등뒤에서 당신을 돕는 그분의 손길은
② 초초한 우리에게 늦은 듯 하지만 가장 정확한 시간에 여러분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등뒤에서 당신을 지켜주시는 그분은
③ 한번도 당신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④ 눈길을 떼신 적이 없습니다. ⑤ 손을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명해진 시 한편이 있지요. 시카고의 한 무명용사가 쓴 시입니다.
「모래위의 발자욱」 - 구연 -
어렵고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다가 많은 이웃에게 상처를 주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누구를 붙들어 의논할 대상조차 없었습니다. 기도할 용기조차 없었습니다. 힘 빠진 두 다리로 터덜터덜 걸어와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어서 지친 몸으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막 들었을까요.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 아들의 손을 붙들고 “아들아 일어나라!” 그리고 그가 걸어왔던 인생길을 보여주는데 하얀 모래위에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온 발자욱이 보였습니다.“아들아 보려무나. 너 혼자 험한 길 걸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했느니라. 언제나 네 곁에서 떠나지 않고 너와 함께 걸어왔느니라.” 그런데 최근에 너무너무 고통스럽고 아프고 힘들어서 정말 주저앉고 생명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가운데 살아갈 때에 한 사람 발자욱만 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이것 보세요 하나님! 하나님이 내 곁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 아니예요.”하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아들아 자세히 보려무나. 그 발걸음은 너의 걸음이 아니고 내 발자욱이니라. 니가 너무 힘들어 풀썩 주저앉아 있길래. 니가 걸어갈 힘조차 없길래. 내가 너를 품에 안고 걸어왔느니라. 세상끝날까지 승리의 자리까지 너와 동행하고 너를 품에 안아 줄 것이니라.”
V. 이것이 정로(바른길)니
셋째, 인생의 어두운 밤에 들려온 음성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른 길이니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소리, 도망가도 찾아와 들려오는 소리, 내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우리말 속담 가운데 바꾸고 싶은 속담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①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라.
→ 못 올라갈 나무는 사다리라도 놓고 올라가거라. 올라가다 미끄러지더라도 도전하라.
② 버스 떠난 다음에 손든다.
→ 버스가 지나가도 손이라도 흔들어라 그러면 운전사가 빽밀러로 보고 설지 누가 아느냐.
③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
→ 아는 길 주저하지 말고 달려가라.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우리 속담에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는 길이 잘못되어도 목적지에 잘 도착만 하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은 전혀 반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에 부딪혀 좌편 길로도 가고 싶고, 우편 길로도 가고 싶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바른 길로 가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 길로 가라." 차라리 전해오는 속담을 바꿔라 → 서울은 못 가도 좋다. 바른 길로 가라!
특별히 인생길이 어두울 때에 우리는 편법을 쓰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길이 있다면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것이 "시험"이라고요.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시고 몹시도 시장해 계실 때에 사탄이 찾아와 시험합니다. 이 돌을 명하여 떡을 만들어 먹어라. 너는 돌로도 떡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돌로 떡을 만들어 내 고픈 배를 채우는 것 보다 중요하고 우선 되는 일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말씀 먹고 산다. 나는 말씀대로 산다. 나는 말씀의 정도를 걸어간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왜? 그 곳에서 머뭇거리고 계십니까? 왜 주저하고 계십니까?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VI. 돌아오는 자에게 주시는 복
넷째, 여기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정로를 걷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23절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 소산의 곡식으로 살찌고 풍성케 하실 것이며."
곡식을 심으면 풍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공장을 세우면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사업을 시작하면 번창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갈길이 보여지게 될 것이다. 정로를 걸어가면 하나님이 앞장서 도와 주시고 뒤에서 밀어 주실 것이다.
본문 24절에 보면 가축에게도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복을 받으면 가축들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 자식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고, 내 가정이 복을 받게 될 것이고 내 교회와 역사와 시대와 사회와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26절은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또 다른 약속의 음성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 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하나님을 떠나서 보름달을 바라보니 우중충하게만 보였습니다. 고난 당하여 신음하며 눈물진 얼굴로 햇빛을 보았더니 어두컴컴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품에 안겨서 싸매주시는 아버지의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를 체험하고 달빛을 보니 햇빛처럼 밝기만 하고 햇빛은 일곱 날의 빛과 같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면 그 뜻이 더욱 선명해 집니다.
「주께서 백성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매 맞아 생긴 그들의 상처를 고치시는 날에,달빛은 마치 햇빛처럼 밝아지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서마치 일곱 날을 한데 모아 놓은 것 같이 밝아질 것이다.」 (사26)
노스캐롤라이나의 어느 시골 마을에 수백 년 전부터 울퉁불퉁하고 거무죽죽한 큰 돌멩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돌멩이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중 어느 가난한 농부의 벽이 흔들거리고 창이 흔들거려서 창문과 벽을 받쳐주기 위하여 뒤뜰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지질 학자가 그곳 지리를 탐사차 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집을 지나다가 문을 고정시키고 있는 이상한 돌멩이에 그 학자의 눈이 머물렀습니다. 한참을 이모조모 살펴 본 그는 그것이 금 덩어리라고 판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록키산맥 동부지역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큰 금 덩어리였습니다. 그 가격은 수십억원에 팔려나갔습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이 세상 한쪽 모퉁이에 버림받은 돌멩이, 쓸모없이 뒹구는 한덩이 바윗돌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번만 도와주시면, 하나님의 눈에 띄면, 전능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하나님이 붙들어 사용하시면 값비싼 존재로 바뀌어 집니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가나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 오라!
어리석은 자는 밝은 날에 교만하고 어두운 날에 비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밝은 날에 감사합니다. 어두운 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인생의 깊은 밤, 고난의 밤, 실패의 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 당신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 귀 막지 마십시오. 당신을 붙들기 위해 찾아오는 그 손길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품어 회복하기 위하여 넓게 벌린 그 가슴에 다시 못질하여 도망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깊은 밤 - 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복된 아침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난 인생의 밤은 어떤 밤입니까? 이 시간에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음성으로 들려옵니까? 여러분에게 가라고 말씀하시는 바른길은 도대체 어떤 길입니까? 돌아온 당신에게 주시는 약속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 여러분의 형편과 받은 은혜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그 말씀을 꽉 붙드는 복된 시간 갖기 위하여 함께 기도하는 시간가지겠습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모래위의 발자욱
어느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쌍의 발자욱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발자욱을 따라 그의 지나온 생애가
한 장면 한 장면 하늘에서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알 수가 있었습니다.
생애의 한 장면마다 모래 위에는
언제나 두 쌍의 발자욱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의 발자욱 옆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발자욱도 같이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계속해서 그의 지나온 생애가
한 장면 한 장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문득 그는 모래 위에 남긴 발자욱을
다시 한번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모래 위에는 한 쌍의 발자욱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곧 생각해 냈습니다.
이 기간이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슬프고 괴로운 기간이었다는 것을.
그러자 그는 무척 슬프고 당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을 때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내가 가장 슬프고 괴로웠을 때
그때 주님은 내 곁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게 주님이 가장 필요했을 때 주님은 나를 떠나셨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랑스런 내 아이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리고 나는 너를 결코 버린 적이 없단다.
네가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고 있을 때
나는 네가 가여워 너를 품에 안고 걸었단다.
그래서 모래 위에는 나의 발자욱만 남아 있는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