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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8:1-5 여호와여 주의 노로
다윗은 추측되는 것과 같이 어떤 가혹하고 위급한 병에 시달리면서 자신은 주님에 의한 징계를 받는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에게서 하나님의 노를 거두어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내리시도록 더욱 힘 있게 간구하기 위해 다윗은 자기가 당하는 심한 고통을 하나님 앞에서 몹시 슬퍼하면서 낱낱이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개별적이고 순서적으로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이 시편의 표제는 “다윗의 기념케 하는 시” 입니다.
1) 이 표제는 여기서와 70편에서만 보여집니다.
이 시는 이른바 참회의 시편(Penitential Psalms)들 중에 세 번째입니다.
앞선 두 편은 6편과 32편이며, 뒤에 네 편은 51, 102, 130, 143 편입니다.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했기에 종교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을 때 3년간 참회로 이 일곱 시편을 매주 반복해 읽게 받은 명은 별났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죄를 고백하게 하고 그가 받은 언도에 정당성을 인정하게 하였습니다.
2) 이 시의 표제는 이 시의 주제를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표제가 일반적인 노래의 시작이라고 상상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시에서 그 시가 노래의 곡조에 붙여지는 경우, 일반적으로 그 노래의 시작이 서두에 붙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무리한 것이며 근거도 없습니다.
이 해석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내리시는 징계를 너무 속히 잊지 않도록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자기에게도 기념이 되는 시로서 이 거룩한 시를 지었다는 사실을 이 표제가 암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권고하시고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교훈의 방편이 되어야 할 징계가 얼마나 쉽고 신속하게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가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또 다윗은 자기가 받은 소명의 귀함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온 총회의 어른과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교훈하심으로서 자신이 배운 것은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38 편
이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모두가 그 교훈으로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징계들을 종종 회상하는 것이 대단히 유익한 행위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2. 본문 1절은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입니다.
우리는 6편의 시초에서 이미 이것을 설명했으므로 우리가 신자들에게 지루한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기 위해 여기서는 간략히 살피려 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받고 있는 고통이 옮겨지기를 구하고 있지 않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단지 자기가 받고 있는 그 가혹한 징계를 하나님이 약하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육신의 정욕을 어거하고 있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헌신적으로 징계를 바르게 받는 정신을 가지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형벌을 받지 않고 죄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정욕에 제재를 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나친 호의와 편애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받는 고통이 덜해지는 것으로 만족히 여기고 있습니다.
다윗은 마치 ‘여호와여 저는 당신의 징계를 거절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단지 간구하기는 감당할 수 있는 이상으로 저를 괴롭게 하지 마시옵고 저의 연약함을 생각하시어 당신의 격렬한 노를 누그럽게 하옵소서.
그 가혹한 고통이 저를 온통 압도할까 염려되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기도는 경건의 규범에 다른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것만을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또한 눈여겨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은근히 짜증을 부리거나 투덜거리는 마음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경건을 유지하면서 자기의 불만을 하나님 앞에 드러냅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는 데에는 죄악의 불평으로가 아니라 용서를 얻고자 하는 희망과 함께 겸손한 기도와 거짓없는 고백이 되겠습니다.
다윗은 ‘노’와 ‘분노’라는 말들을 사용합니다.
이 말들은 극히 엄중함을 의미하며 아버지로서의 징계와는 대조가 되는 의미입니다.
시편 38 편
3. 본문 2절은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불행에 대한 너그러움을 구해야 하는 긴박한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자기 스스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버텨왔던 그 짐의 압력 밑에서 짓눌림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눈 앞에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 이 규범을 우리는 언제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종들이 범한 과실의 경중에 따라서 징계하지 아니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징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가 괴로움으로 심하게 압제를 당할 때, 자기들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자주 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은 ‘살’, ‘손’ 또는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로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병을 극히 적절하게 묘사합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그와 같은 고통을 주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을 갖게 되지 않았더라면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게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우매하기 일 수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하여 된다고 상상합니다.
그리고 백 명 중에 한명도 심판 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손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당했던 다른 모든 역경 가운데에서도 그러했듯이 다윗은 그의 병 중에 자기의 죄를 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손을 들고 계신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다른 각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재난이 주는 그 고통스러운 감정으로만 그 재난이 어떤 것인가를 헤아리는 사람은 들짐승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모든 징계를 받을 때마다 우리는 그의 심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참된 지혜는 선지자 이사야가 선언하고 있는 것같이 “치시는 자에게로”(사9:13)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명사 ‘당신의’(주의-한글개역)는 강조적으로 쓰였습니다.
다윗이 한 말은 ‘나는 단지 자기의 기세에 따른 힘으로 자기의 살을 쏘는 인간과는 상관해서는 안된다. 오직 온전히 압도적인 힘을 가진 손으로 살을 쏘시는 하나님과 상관해야 된다’와 같습니다.
시편 38 편
4. 본문 3절은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름다움이 없사오며’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번역은 그렇게 적합한 것으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하반절에서 다윗은 의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 찬양이 없다면 다윗의 하나님의 징계에 관한 인정은 거의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와 같이 인정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격앙되어 하나님이 잔인하시다고 비난하고 하나님을 대항해 무서운 욕설을 함으로 하나님을 더 격노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의를 빼앗을 만큼 어떤 최상의 절대적인 능력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터무니없는 일도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곧 자기 죄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 이유라고 간주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필요없이 함부로 잔인한 행위를 하는 폭군과 같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불쾌함을 심판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시며 매우 심하게 격노하실 때 심판하시는 의로운 재판관이시라는 생각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마땅한 찬양을 드리고자 한다면 다윗이 보여준 모범을 따라서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연관시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5. 본문 4절은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무거운 짐에 그렇게 된 것처럼 자기 죄에 압도된 사실을 고통스럽게 말합니다.
다윗은 그 죄악의 짐 밑에서 온전히 실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은 매우 엄중하고 무섭게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가 받아야 마땅하다고 이미 말한 교훈을 다시 확증합니다.
우리가 ‘죄악’이라고 번역한 ןוע(아본)이란 말이 때로는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단지 이차적이고 은유적인 의미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견해 또한 거리낌없이 인정합니다.
곧 다윗이 자기의 죄로 받게 된 형벌을 ‘죄악’이라는 말로 설명했을 때 이유라고 말해야 타당한 것을 결과로 돌립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목적은 자기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은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고백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38 편
다윗은 가인이 “내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4:13)라고 말한 것같이 자기가 받는 형벌에 대한 심한 엄격성에 하나님과 논쟁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 중에서 모세가 같은 단어인 ןוע(아본)이란 말을 쓰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다윗과 가인의 말에는 약간의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가인에게 내리셨던 징계와 같은 것을 내게도 내리시고자 하신다면 하나님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나를 괴롭히실 것인가?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고통을 덜어주시고자 하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가 멸망을 받아 패망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숨과 신음을 무시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용기가 약해지고 버린 바 된 것을 보면 볼수록 나를 더욱 사납고 더 큰 심판으로 다스리십니다.
이 같은 악한 생각들과 추측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에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해서 마치 방패로 몸을 막는 것처럼 자신을 방어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느끼는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는 자기 죄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윗은 자기가 지금 당하는 고통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의한 것임을 다시 인정합니다.
자신의 불행을 슬퍼하면서 다윗이 조금은 하나님과 논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을 주시지 아니하시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할 뿐 평안함을 구하고 있지 않는 겸손한 마음을 갖습니다.
반면에 악한 자들은 양심으로 자기 죄를 확신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불평합니다.
마치 야생의 짐승이 성이 나서 자기를 묶은 사슬을 물어뜯는 것처럼 말입니다.
6. 본문 5절은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입니다.
다윗은 약간의 관용을 얻기 위해 자기 병이 오래 계속된 사실음을 애절하게 말합니다.
주께서 자기 교회에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사40:2)고 선언하셨을 때 자기 백성을 충분히 징계하신 다음에는 그들을 향하여 곧 진정하신 사실을 의미하고 계셨습니다.
오히려 만일 주께서 너무 긴 시간동안 자신의 노를 나타내신다면 주님 자신이 가지신 자비심으로 인해 그 분노에 싫증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사48:9, 10)고 말씀하신 것같이 서둘러 구원하십니다.
시편 38 편
그러므로 다윗이 자기 불행이 너무 길다고 할 때의 다윗의 생각은 자기가 받게 된 형벌을 견뎌낸 다음에 자기는 마침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계속해서 쇠약해지고 그의 불행 중에 곪아서 썩는 것은 불명히 하나님의 종에게는 가벼운 시련은 아니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다윗의 지조는 더욱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오랫동안 지연되고 있었어도 다윗의 지조는 상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윗은 무거운 고통의 짐 밑에서도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말 대신에 ‘우매’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다윗은 위선자들이 죄의 혐의를 회피할 수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같이 자기의 잘못을 가볍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자신들을 변호하고자 위선자들은 거짓으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행세하고 자기들이 염치없이 그리고 부주의하여 잘못을 범했다고 호소하며 그렇게 믿도록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일반적인 표현의 형태에 따르면 ‘우매'라는 말을 사용해서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을 반대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동하게 되었을 때 자기는 바른 정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범죄를 가장 잔학한 것이라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 성경말씀의 여러 구절에서 이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께서는 마치 사람들이 어떤 가벼운 실수에 의해 죄를 지은 것처럼 그 범죄를 가볍게 보시려 하지 않고 오히려 격렬한 분노로 비난하십니다.
거룩하지 못한 욕망으로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성자 앞에서 도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죄는 언제나 우매와 정신 착란과 관련됩니다.
다윗이 자기의 우매를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정욕을 따라 하나님께 등한했을 때 다윗은 자기가 이성을 잃고 사나운 짐승이 가진 정신없는 격노와 같은 정신 착란으로 이끌려 갔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시편 38 편
시38:6-10 내가 아프고
다윗은 죄로 말미암은 징계로 인하여 심한 죄책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1. 본문 6-8절은 “(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7)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입니다.
1) 이 기록은 이 거룩한 사람이 극한 슬픔으로 억압을 당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큰 불행 밑에서 다윗의 믿음이 지탱할 만큼 충분히 튼튼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구부러졌으며’라고 말함으로서 다윗은 자기가 가진 겸손과 낙심을 많은 사람들이 가진 교만과 완고와 명백하게 대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수차의 징계에 겸비하게 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저항하고 반대하면서 자신들을 완악하게 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필연적으로 당하는 괴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각 없는 상태에 깊이 빠져 그 괴로움에서 좋은 영향을 받지 못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당한 형편에 긍휼을 베푸시도록 하늘의 심판자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는 하나님의 손이 자기위에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을 완고하게 거역하고 허리 굽혀 순복하기를 거절하는 자들 중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벧전5:6)고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자기를 낮추고 비천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가운데에 있을 때 모든 고집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징계를 겸손하게 받는 것보다 위안을 받을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검은’으로 번역한 דדוק(코데르)라는 말을 다른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은’으로 번역하고 겉옷을 가리키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검정색 옷은 언제나 슬픔의 표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피부의 검은 색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는 더욱 정확합니다.
슬픔은 사람의 안색을 야위게 하고, 창백하게 하고, 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슬픔의 표로 자기가 당하는 고통이 크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다윗은 얼굴색이 흐릿해지고 그는 이미 쇠약해져 오그라든 시체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허리’라고 번역한 다음 절에 있는 םילסכ(크살라임)이란 말을 어떤 사람들은 ‘옆구리들’이라고 번역합니다.
시편 38 편
그러나 더욱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이 말이 궁둥이 또는 넓적다리와 옆구리 사이에 있는 부분으로 뻗친 허리 밑 부분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그의 아픈 상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우리가 ‘열기’라고 번역한 הלקנ(니클레)라는 말에 관해서도 의견을 달리 합니다.
우리는 번역할 때 이 말의 원어적 의미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따랐습니다.
동사 הלק(칼라)는 ‘타다’ 혹은 ‘불로 태우다’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더러움과 부패’의 의미로 이 말을 설명하는데 부적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상처에다 국한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 견해는 이 말이 단순히 그의 허리 혹은 옆구리 또는 넓적다리에 염증성 질환이 넓게 퍼져 있었거나, 혹 최소한 부패된 상처로 덮여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생각입니다.
몸 가운데 이 부분은 가장 염증이 생기기 쉽고 부패되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자신의 치욕을 깊이 생각했을 때에는 자기 스스로 보기에도 몹시 싫은 사람으로 보였다는 의미로 이 말을 우의적(寓意的)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너무 무리입니다.
다윗이 자기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라고 말함으로서 그는 앞 절에서 자기가 한 말을 더욱 확증합니다. 이 여러 가지 말로 다윗은 자기가 가진 견딜 수 없는 슬픔의 격렬함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울부짖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 뛰어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고 고통을 당하는데 있어서 뒤로 물러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다윗의 고통은 극도로 심하고 아픈 것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비통하게 울었을 뿐 아니라 울부짖고 하소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음’이라고 번역한 명사 תמהנ(나함맛)은 다윗이 여기서 사용한 것과는 다른 동사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다윗의 마음에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그가 부르짖지 않을 수 없게 했다는 것입니다.
2. 본문 9절은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관해서라기보다는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약간 누그러지게 해주시기를 희망하면서 스스로 강하게 견디기 위한 기도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설명될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와 슬픔을 주께서 들어주셨다는 신뢰할 만한 확신을 의미하거나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든 근심과 괴로움을 쏟아놓고 있음을 단순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미는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시편 38 편
사람들이 자기들의 슬픔이 하나님 앞에 이르렀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하여 의심을 하는 동안에는 계속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되고 이 감정은 그들의 마음을 사슬로 묶고 붙잡아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향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면에 우리의 슬픔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 상달시키고 하나님께서 이를 호의적으로 들으시며 우리의 기도를 친근하게 들어주심을 확고하게 믿을 때 우리는 즉시 그리고 성실하게 기도에 힘쓰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의심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고 그도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말한 자기의 눈물이 하나님의 병에 담긴다(시56:8)는 사실을 확신함으로서 담대해지고 용기를 얻어 하나님께로 나아갔던 사실은 그가 용기를 얻는데 작은 근거가 아님을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같이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히11:6)을 믿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자기의 모든 슬픔을 하나님의 품에 다 드리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는 해석을 인정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슬픔 가운데서 심하게 하소연하는데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기도와 탄식을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으로 스스로 용기를 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기 슬픔의 목격자가 되어 오셨으며 그 슬픔과 고통을 잘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불신앙자들이 항상 그렇게 하는 것처럼 성을 내는 데에 이끌려가지 아니하고 자기의 불만과 아우성을 허공에다 쏟지 않았습니다.
또 다윗은 자기 마음의 모든 소원을 하나님 앞에 펼쳐 놓았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0절은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사용하는 동사는 ‘이곳저곳으로 여행 혹은 방황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동사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지 못할 때, 마음이 흔들려 생기는 동요나 불안을 의미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불안을 느낀 만큼 더 방황하고 이곳저곳으로 헤매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일단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시켜 주기 때문에 다윗의 마음이 어떻게 불안과 괴로움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반문이 생길 것입니다.
시편 38 편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지탱되고 있을 동안에 다윗은 계속 하나님의 길에 서서 행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인간으로서의 약점으로부터 온전히 떠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 육신의 마음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수단과 계획을 암시하고 충고를 얻고자 하면서 많은 잘못을 범하도록 이끌어가는 일은 언제나 생길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자신을 지키고 굴복시켰던 제재를 자신에게 가하지 않는다면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넘어지고 방황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의 한계 안에 가둠으로서 자신을 지키고 굴복시켰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평안할 때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의 마음이 헛되고 변하기 쉬운 생각에 따라 흐르고 방황하게 되는 것을 너무도 잘 경험합니다.
또 우리의 마음이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우리가 소원하는 목적에 열중하고 동일한 강도로 집착시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도 잘 경험합니다.
우리가 어떤 심한 시련에 의해 연단받고 있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가 수천 번 죽을 위협을 느끼는 사나운 폭풍과 태풍에 의해 동요를 당하고 이것들을 피할만한 길이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이러한 폭풍과 태풍이 다윗의 마음을 이끌어 그처럼 맹렬한 요동 속에 있는 갖가지 감정에 끌려가게 되었더라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내 기력이 쇠하여’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다윗은 자기를 죽은 사람에게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이 ‘내 눈의 빛’에 관해 말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사방으로부터의 절망으로 심하게 억눌려 자기에게 아무 뜻이나 선견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 이 말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더욱 단순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이 가진 생명의 빛 안에는 영혼의 힘이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생명의 빛을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시편 38 편
시38:11-14 나의 사랑하는 자와
다윗의 또 한가지 고통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당한 사실에 있습니다(11-15).
다윗이 죄로 주께 징계 받을 때 그의 사랑하는 자들은 그를 멀리하였습니다(11).
또 다윗의 원수들은 그를 해하려고 하였습니다(12).
그러나 다윗은 원수들의 비방을 받으면서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습니다(13, 14).
이것 역시 다윗이 회개한 태도입니다.
시므이가 훼방할 때, 다윗은 그것을 달게 받고 아무 말하지 않았습니다(삼하16:5-14).
다윗이 그렇게 침묵한 것은 회개의 태도였습니다(삼하16:10).
다윗은 자기가 당하는 징계의 해제(解除)를 위해 하나님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15).
1. 본문 11절은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심한 불행의 성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상황을 열거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상황 중 하나가 자기는 사람들 가운데서 도움이나 위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라는 말에서 다윗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어떠한 일도 자기에게 해주지 않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친구들이 이렇게 한 것은 교만이나 두려움에 의해 그렇게 됩니다.
만일 그들이 이 불쌍한 고통 가운데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여 그 사람으로부터 물러간다면 그들은 잔인하고 교만합니다.
만일 그들이 악평을 들을까 두려워서 그 사람에게 줄 도움을 거절했다면 이는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비겁입니다.
또 이 말씀은 다윗의 친구들과 친척들까지도 그를 향한 동정의 기색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다윗은 이렇게 자신이 당하는 재난을 크게 확대합니다.
많은 친구를 사귀었던 사람이 그들 모두에게 버림당한다는 것은 극심한 시련입니다.
2. 본문 12절은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괘이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입니다.
시편 38 편
여기 또 하나의 상황이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올무를 놓고 그의 멸망을 논하며 자기들끼리 속임수를 꾸밉니다.
다윗의 친구들은 겁에 질린 채 그를 돕기 위한 어느 것도 하지 않는 반면에 다윗의 원수들은 힘차게 일어나 그를 멸망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자기 생명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윗의 불구 대천의 원수들이며 피에 굶주린 자들이므로 그에게 어떤 보편적인 손상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격심하게 그를 멸망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그들이 무력과 폭력으로 자기를 공격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렇게 심하게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그들의 간교한 음모를 더욱 비난합니다.
첫째로 다윗은 ‘올무’라는 말을 써서 이 사실을 은유적으로 지적합니다.
다음으로 “괴악한 일을 말하여”라는 말과 그들이 자기를 어떻게 손상시킬 것인가에 관하여 은밀하게 의논하고 있음을 비유없이 말합니다.
다윗은 마치 세상의 변사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호소하기 위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꾸며댄 웅변술을 변호사들로부터 빌어 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기의 이론을 얻습니다.
다윗이 믿음의 확증을 위해 여기 쓰는 말들을 우리 역시 적용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의 도움과 협력을 전혀 받지 못하고 궁핍한 때에 친구들이 우리에게 실망을 주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망하는 것을 바라며 우리를 멸망시키겠다고만 말한다면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 앞에 고하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행 중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공정치 못하게 버림받게 되고 배반당한 자들을 보호하십니다.
또 악한 자들의 폭력에 저항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만적인 계획을 예방하시고 그들의 의도를 좌절시키시기 위해 그들을 막으시기도 하십니다.
3. 본문 13-14절은 “(13)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14)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이 기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자신을 말 못하고 귀먹은 사람에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자기가 원수들의 거짓되고 악한 심판에 의하여 심히 억눌려서 자신을 변호하려고 해도 입을 열도록 허락해 주지 않음을 넌지시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8 편
둘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더욱 신속하게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시게 하려는 기원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내력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온유함과 온화함은 그럴만한 이유와 함께 죄없이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얻게 해줄 뿐만 아니라 참된 경건의 표적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의존하고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갖는 자들은 자기들이 당한 손상을 보복을 할 수 없을 때 큰 소리로 불평해서 마음에 가진 불붙는 격노와 격분을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욕과 폭력과 비방, 그리고 자기 원수들의 속임수를 말없이 참을성 있게 견뎌내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주시는 분이신 사실을 자기 마음 속에 확신하는 사람은 말없이 자기의 소망을 간직할 것이며 도우심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감정을 억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억압을 당할 때에라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므로 로마서 12장 19절에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말씀을 극히 타당하게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만 속한 원수갚는 권한을 하나님께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빼앗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합니다.
다윗이 발언 기회를 얻었다면 자신의 결백을 변호할 준비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그럴만한 기회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자기의 주장을 위한 모든 변호를 할만한 처지로부터 쫓겨나고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하늘에 계신 심판자를 참을성있게 기다리면서 겸손하게 순응하였습니다.
다윗은 마치 자기가 이미 유죄 판결을 받고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처럼 잠잠하였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죄를 알고 있을 때 마치 우리가 아무런 논거를 내세울 수 없고 어떤 변명이나 답변을 갖지 않은 것처럼 참으면서 말없이 올바르지 못한 정죄를 견딘다는 것은 극히 어렵습니다.
시편 38 편
시38:15-20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다윗은 원수들 앞에서 실패하기를 기도합니다(16-22).
다윗이 기도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다윗은 자기가 실패하므로 원수들이 기뻐하며 망자존대할까 두려워합니다(16).
이 원수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그들이 성공하고 기뻐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일입니다.
(2) 다윗은 자기가 넘어지고 망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근심하신다는 것입니다(17).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이 실패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3) 다윗은 자기가 자기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하고 슬퍼한다는 것입니다(18).
하나님께서는 죄를 고하는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히브리 원문에서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י =키)로 시작합니다.
(4) 다윗은 자기 원수들이 무수하고 그 활동이 활발하다는 것입니다(19).
하나님의 원수가 극도로 강해질 때 하나님은 간섭하시는 법입니다.
(5) 다윗은 자신이 선을 행하기에 그 원수들이 대적한다는 것입니다(20).
선을 대적하는 원수들에게는 그 패망할 날이 가까워집니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간절한 생각을 얻은 것입니다.
1. 본문 15절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가진 인내력의 근원을 보여줍니다.
그 인내력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면서 세상 온갖 시험을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기 전에는 그 마음은 온화하고 온유하게 되지 않으며 자기 감정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다윗은 실망치 않기 위해 끝없는 묵상으로 자기 희망을 소중히 간직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내를 위한 유익한 수단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실성과 불변성을 우리의 견해보다 앞세우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들 스스로를 향한 보증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5장 4절에서 인내를 소망과 안위에다 바르게 결합시킵니다.
시편 38 편
이 구절에 같은 말이 반복되는 것은 이 거룩한 사람이 결심하고 힘든 투쟁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말은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돕는데 지체하신다면 이 중첩된 방어를 자기 앞에 놓고 그 투쟁 가운데서 용감하게 참지 않는 한 지쳐서 기진해 버릴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2. 본문 16절은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 존대할까 하였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 믿음의 진지함과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실 경우에 원수들이 자기를 이기게 될 것을 신중히 생각하면서 드리는 기도의 진지함을 확증합니다.
다윗의 원수들에 의한 그 경멸은 주께서 우리를 돕게 하는데 큰 비중을 갖게 합니다. 악한 자들은 우리들에게 그처럼 자기들을 자랑하고 경멸을 일삼음으로서 우리 육신의 마음에 싸움을 걸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며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경건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나 없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조롱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약속하신 것은 헛되고 무가치한 것이라고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윗은 자기 원수들이 자기를 대하여 기뻐할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데에는 이유가 있음을 이어서 말합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오만한 자랑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무례와 잔인성을 더하거나 우리가 무거운 역경의 짐 덩이 밑에 이미 깔려있는 것을 보면서 교만한 경멸감을 갖고 우리를 자기들의 발로 밟으면 밟을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실 것이라는 더욱더 큰 희망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본문 17절은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입니다.
성경 주석가들은 다윗이 어떤 상처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고 상상합니다.
또 다윗은 일생동안 이 상처로 약해져서 절름발이가 될까 두려워하였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편 35편 15절에서 이 상상이 매우 합당치 않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저는 것을 기다리며”(20:10)라고 말했을 때, 그가 절름발이였다고 상상할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같이 다윗이 그러했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갖지 않습니다.
시편 38 편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윗이 한 말의 의미는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를 돕기 위해 속히 오시지 않는다면 자기의 이전 상태로 회복될만한 희망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심히 고통을 받아 마치 일생동안 병신 혹은 절름발이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라는 설명이 곧 이어집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다윗이 심히 고통스럽게 괴로움을 당했기에 다윗은 약간의 휴식을 얻을만한 짧은 순간도 그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절의 상반절과 하반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치료를 받지 않으면 자기의 병은 불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지 않고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그것을 이겨낼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다윗은 자기의 생각과 요구를 하나님께로만 향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는 순간 즉시 파멸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4. 본문 18-20절은 “(18)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9)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20)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입니다.
1) 다윗은 비교로서 자기 원수들이 가진 교만과 부끄러운 행위에 관하여 잠시 전에 자기가 말한 것을 넓혀서 설명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악한 사람처럼,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처럼 누추하고 비참한 상태에 누워있는 반면 원수들은 부하고 권세를 갖고 있으므로 환락과 기쁨 중에 날뛰며 오히려 고개를 높이 쳐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째로 어떤 의미로 다윗이 자기 “죄악을 고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판단으로는 다윗이 용서를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악을 고백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다윗은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시32:5)라는 구절에서 말한 것을 여기서 반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괴롭고 불행한 상태를 슬퍼하는 것만큼 회개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란 주의 진노에 대한 표로 돼 있는 ‘고통’과 ‘징계’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마치 ‘하나님의 손이 나를 대적하고 나에게 심히 엄중하게 임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처하고 있는 그 불행을 보고 세상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정죄를 받고 버린 바 된 사람으로 인정할 것이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시편 38 편
이 말씀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해석하기 위해 18절과 19절을 ‘나는 내 죄악과 나의 원수들이 살아 있음을 선언한다. 나는 내 죄악 때문에 실망하나 내 원수들은 강하게 되었다’ 라고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기가 당하고 있었던 그 불행은 자기의 죄로부터 연유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경건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다릅니다. 경건한 자들은 역경을 당하면 자기의 죄악에 대한 경고를 받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스스로 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결과를 갖고 이유를 판단함에 다음 두 가지를 고려합니다.
첫째로 다윗은 억눌림과 고통을 당해 불행한 무거운 짐 밑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이 모든 불행은 죄에 대한 징계로 바르게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다윗이 그의 원수들을 묘사한 ‘활발하며’라는 말은 그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계속적이고 풍성한 번영을 누리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강하고 무수하오며”(강하고 세력을 더하고 있다-칼빈)라고 덧붙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쓰인 בבר(라밥)을 ‘세력을 더하다’로 해석합니다.
만일 다윗이 ‘그들이 수가 많아졌으며’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다윗은 불합당하게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숫자적으로 불어났다는 사실을 하소연하지 아니합니다.
다윗은 오히려 그들의 힘이 세어진 것을 하소연 합니다.
그들이 재물을 더 얻으면 얻을수록 선량하고 순진한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더욱 대담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그들에 의하여 무리하게 공격을 당하고 있음’(칼빈-무리하게 나를 미워함-한글개역)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더욱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변호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어떤 사람을 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누구도 우리를 미워하지 않게 해야 됩니다.
3) 이 사실은 다음 절에서 더욱 충분히 확증됩니다.
다윗은 자기가 그들에게 베풀었던 선을 그들은 자기에게 악으로 갚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말 속에는 이보다 더한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말은 그의 원수들을 향해 온갖 손상을 주는 행위를 삼갔을 뿐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그들에게 모든 선행을 했다고 암시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악한 자가 발하는 분노는 더욱 변명할 수 없습니다.
이 분노가 그들로 이유없이 다른 사람들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친절로서도 진정될 수 없습니다.
시편 38 편
악한 사람들이 극히 명예롭지 못하고 불공평한 수단으로 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것보다 더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손상을 받은 자들 때문에 마음을 상하시는 것과 똑같이 그처럼 감사를 알지 못하는 행위 때문에도 마음이 상하신다는 이렇게 위안이 될 만한 사실을 그들이 깊이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정도에 지나치리만큼 괴로워할 이유란 없습니다.
이 순진한 사람들의 슬픔을 적게 하기 위해 이 교훈을 그들이 자주 하는 묵상의 제목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교훈이란 우리가 좋은 일을 해주려고 애썼던 악한 자들이 우리의 선행을 악으로 갚을 경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어김없이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지독한 악독에 대한 극도의 행위로서 다윗이 정직을 실천하고자 애를 쓴다는 이유로 그들이 그를 미워했다는 말씀, 곧 “내가 선을 쫓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가 부가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고집이 세고 극도로 악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정직을 그처럼 싫어하여 그것을 좇는 자들과 고의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마귀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더욱 신실하게 노력하면 할수록 더한 괴로움과 슬픔을 당하게 되는 것은 극히 격심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선한 양심의 증거에 의해 지탱될 뿐 아니라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나타내려 하신다는 사실을 그들 역시 아는 것은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 충분한 이유로 입증돼야 합니다.
이에 대한 확신을 근거로 그들은 감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서게 됩니다.
이는 자기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도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유지하시고 방어하시도록 간구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모범을 보여서 모든 신실한 자들을 향해 공통된 규범을 정합니다.
이 규범은 세상의 미움과 악의를 불러일으킬지라도 조금도 의무의 길에서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 규범은 공평하고 의로운 것을 반대한다고 알려진 자들을 지체없이 원수로 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38 편
시38:21-22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려 주시고 또 알게 해 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아는 터, 곧 하나님 면전에서 피조물인 인간 자신을 알게 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알아모신 터에서 자기 자신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일과 부모와 주인과 왕을 주신 것은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알게 하는 은총의 배려입니다.
본문은 이 시편의 결론 부분으로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다윗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알게 된 터에서 기도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그러하듯이 이 다윗의 기도에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이며 예정론이며 구원의 서정이며 또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기도하는 바 그야말로 총체적인 기도입니다.
다윗의 기도에서 보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본문 21-22절은 “(21)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22)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Ou, de mon salut ; 혹은 나의 구원의 - 프랑스어 판 난의 주)” 입니다.
1. 이 결론적인 성경 말씀의 구절들에서 다윗은 자기가 요망하는 요점을 기록합니다.
또 다윗은 자기가 드린 모든 기도의 요약을 기록합니다.
이렇게 다윗이 요망하는 요점과 다윗이 드린 기도의 요약은 다윗이 사람들에게 버림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또 다윗이 여러 가지로 심한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시편 38 편
그러므로 다윗 요청은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 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세 가지 표현을 씁니다.
이 표현들은 인간관계에서도 조금은 나타나는 일로서 일종의 적응계시입니다.
첫째로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 단절보다 더 참혹한 징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보살피시는 일을 그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입니다.
처음 기도가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다윗은 첫번째 기도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버리시지는 않으실지라도 가까이 해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멀리 하신다면 하나님이 계신 실존을 체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간관계에서도 사실상 이런 서먹한 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첫 번과 둘째 번 기도에는 회개와 자기 교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셋째로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구원의 주님이시여”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손을 펴셔서 신속하게 건지시지 않으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아래서 인내하는 중에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기 종들의 옆에 계신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이 한순간도 지체하지 아니하신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말씀의 다른데서 본 것같이 성도가 자기들의 근심과 슬픔을 하나님의 품에다 맡겨드릴 때, 육신의 감정에 따른 말로 간구하는 것은 옳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들의 약점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 하면 안 됩니다.
또 성도들은 자기들의 마음속에 생기는 의심을 감추는 것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마음에 따르면 기다린다는 것이 다윗에게는 지루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구원이시여” 혹은 “나의 구원의 주님이시여” 라고 부를 때 다윗은 확신 중에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나의 구원을 향하여’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무리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의 믿음을 공격하는 모든 악한 계책에 대항하는 방어벽으로 이 말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다윗은 ‘자기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성령의 조명과 성령의 감화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38 편
2. 다윗은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는듯한 곤궁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면전에서 인간일 뿐인 사실을 인식한 자로서 다윗의 기도는 이제 그런 자기 사정에 맞춰서 끝을 맺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렸거나 멀리 계셔서 자기를 너무 오래 내버려두시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구원의 주님이시여” 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극히 곤고한 때에 잠시 낙심하였다가도 기도할지언정 절망의 수렁에 함몰당하여 무저갱에 빠진 자로서는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낙심에서 절망의 수렁에 빠져서 망하는 것은 자살과 같은 것이니만큼 큰 죄악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무저갱과 같은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지 않는 만세반석의 받침대, 영원 무궁한 보호 장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기도할 힘을 얻습니다.
시39:1-3 내가 말하기를
이 시편의 서두에서 다윗은 자기의 마음이 극도로 쓰라린 슬픔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하소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입을 다물고 싶고, 견뎌내고 싶었을 때 자기의 슬픔이 격렬하여 전혀 마음먹지 않았던 지나친 정도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기도 중에 하소연합니다. 이는 다윗의 마음이 심히 괴로운 것을 설명해줍니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다윗은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시험에 저항하면서 많은 노력으로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1. 본 시편의 첫머리는 “다윗의 시, 영장 여두둔으로 한 노래” 입니다.
여두둔이 성경 역사가 언급하는 악장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자기와 함께 묵고 있었던 이 영장에게 넘겨졌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제목이 그 특별한 가락을 의미하고 있으며 어떤 다른 노래의 시작을 잘라 붙였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석이 무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는 다윗이 질병으로 호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도 일치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이유 없이 일반적인 설명을 특별한 경우에 한정시키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반대로 다윗이 묘사한 고통의 극심함으로 볼 때 갖가지 괴로움이 여기에 내포되었거나 최소한 다른 모든 고통들보다 더욱 심하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통이 언급된다고 추측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마치 다윗이 고통 가운데서 참된 경건에 의한 정신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장점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다윗은 엄청난 슬픔으로 폭발되고 이 격렬한 감정에 끌려 죄악된 하소연을 하고 있는 자기의 부족한 죄를 고백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2. 본문 1절은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 의향과 결의에도 불구하고 심한 하소연을 하게 된 형편을 통하여 자기가 당하는 슬픔의 막대함을 설명하며 예증합니다.
시편 39 편
이 말씀의 실질적 의미는 그가 참기 위해 자기의 마음을 억누르고 입을 열지 않으려고 결심했지만 그가 당하는 슬픔의 힘은 그의 결심을 흔들어 놓고 자기가 대단한 슬픔에 항복했음을 설명하는 말을 할 수 없게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기를”이란 말씀은 누구나 잘 아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마음 속에 있는 의도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에는 ‘마음에’ 라는 말이 덧붙여지기도 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가진 불굴의 정신과 변함없는 마음을 자랑하며 그 정신과 마음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계속하여 명상함으로서 강하게 되어 자기가 지금 당하고 있는 시험을 참을성 있게 견뎌낼 준비를 갖추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다리면서 특히 나타났던 다윗의 조심성을 특별히 주시해야 됩니다.
다윗이 자신을 살피는데 그처럼 주의를 기울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다윗은 사단의 많은 계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곳으로부터 시험이 자기에게 이르러 자기의 마음에까지 미치지 못하도록 좌우를 살피고 사방을 주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가혹한 슬픔이 그를 압도하지 않고 그의 결심을 무너뜨리지 못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사방으로 닫혀 있기에 시험이 거기 미친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다윗은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그가 그의 슬픔을 어렵기는 하지만 억제하고 감출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그 마음 속에 교만이 부풀어 있을 때에도 거동과 말이 겸손하게 보이는 것은 단순히 겉치례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혀보다 미끄럽고 매이지 않은 것도 없기에 최소한의 불평이라도 폭로하게 될 자기의 입으로부터 한 마디의 말이라도 빠져나가지 않도록 자기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어거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이 말로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에 빠지기 쉬운 자기의 혀를 거짓없이, 그리고 한사코 억제하는 사람은 진실로 특이한 용기를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중간에 기록되어 있는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라는 말씀은 마치 다윗이 악한 자들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자기의 슬픔을 감추었던 것처럼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시편 39 편
이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심한 고통 아래서 스러지는 것을 보면 즉시 그들을 향하여 무례하게 조롱을 퍼붓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있다’(서 있다-칼빈)는 말로 다윗은 어떤 것을 더 표현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즉 악한 자들이 지배권을 갖고 권세를 행사하며 존귀한데 이르는 것을 볼 때에라도 다윗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또 선한 사람들을 적지않이 슬프게 하고 괴롭히는 가난과 모욕을 견디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악한 자들의 조롱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들 앞에 있을 때 자신을 억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가장 악한 자들이 형통하고 자기들의 높은 계급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을 때에라도 그것 때문에 괴로운 마음을 갖지 않기로 깊이 결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사실로서 다윗은 자기가 언제나 악을 행하고자 하는 악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비웃음과 조롱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자유롭게 탄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이 불평을 함으로서 범죄하지 않기 위해 자기의 혀를 억제하는 것이 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보여준 모범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언제나 어려움이 우리를 괴롭힐 때면 하나님에 대한 불경건한 말이 우리들의 입에서 새어나가지 않도록 우리의 감정을 온화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3. 본문 2절은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입니다.
다윗은 앞서 말한 결심이 그저 지나가는 순간적인 생각이 아닌 사실을 선언합니다.
오히려 다윗은 자기의 마음 속에 참으로 깊이 박힌 결심이었음을 자기의 행위로 보여준 것이었음을 선언합니다.
다윗은 마치 자기가 귀먹은 자처럼 어느 기간동안 잠잠하게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가 가진 참을성에 대한 독특한 표현입니다.
다윗이 잠잠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 결심은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고 의욕을 실행하는데 방해하는 변덕스러운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인내를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을 연단시켰습니다.
시편 39 편
다윗은 침묵을 지킴으로서만 아니라 마치 자기가 말을 못하게 된 것처럼 스스로 벙어리가 됨으로서 그렇게 했습니다.
‘선한’이란 말을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죄악 되고 분별없는 악을 삼가했을 뿐 아니라 어떤 것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고 조심했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다윗은 불행과 고통에 억눌려 어느 쪽으로 향하든지 그 불행과 고통이 덜한 데는 없었기에 그렇지 않으면 그가 당하고 있는 큰 슬픔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기에 그가 선한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의견으로는 이 말의 본래 의미는 비록 다윗이 자신을 충분히 변호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불평에 대한 정당하고 타당한 이유가 부족한 것을 보여줄 수 없었지만 자기 자신의 단순한 의지를 말하지 않고 삼가했다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결백을 잘 변호하면서 악인들과 맞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무절제한 슬픔에 빠지기보다는 자기의 의로운 대의를 실행하겠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2절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가 잠시동안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당하는 슬픔은 마침내 자기 혀를 놀리지 못하게 했던 모든 장애물들을 제치고 나가게 되었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극히 용감한 전사였던 다윗이 침묵을 지키려다가 중도에 실패했다면 우리는 그처럼 넘어질까봐 얼마나 더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은 “나의 근심이 더 하도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게 되는 바와 같이 그의 감정의 열정은 동요될 만큼 격렬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다윗이 자기의 슬픔이 더 고조된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그의 슬픔은 변질되었다’ 라는 의미로 이 구절을 해석했습니다.
이는 상처가 썩거나 곪으면 더 악화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무리한 해석입니다.
4. 본문 3절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입니다.
다윗은 지금 직유를 서서 자기 슬픔이 심하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다윗은 자기 슬픔은 내적으로 억눌려서 그만큼 더 격화되어 마침내 자기 영혼의 격렬한 감정이 계속하여 그 세력을 더하게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대단히 유익한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시편 39 편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더욱 노력하고 인내력을 발휘하고자 모든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는 세찬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무관심하고 부주의한 사람에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거의 가까이 하지도 않는 사단이 이러한 사람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에나 우리의 마음 속에 격한 감정이 요동하고 소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실제로 느끼면 우리는 다윗이 했던 이 투쟁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고 최소한 우리의 약한 의지로 인하여 우리가 절망 속으로 무모하게 끌려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태양이 여름에 만들어내는 건조하고 뜨거운 수증기는 그것이 진행하는 것을 막는 것이 대기 중에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거침없이 공기를 뚫고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이 거침없이 오르는 그 수증기를 방해하여 막게 되면 충돌이 생기고 이 충돌로부터 천둥이 생깁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깁니다.
만일 경건한 자들이 마음에서 생기는 헛된 상상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들은 온갖 재미에 도취할 수 있는바 그야말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자들은 마음에서 생겨나는 그 상상들의 영향력에 저항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기에 육신의 반발로부터 생기는 방해가 그들을 괴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그 힘을 나타내고 우리 마음속에 불을 붙일때면 우리는 다윗에게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주었던 같은 종류의 시험으로 괴로움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절의 마지막에서 다윗은 자기가 당하는 그 심한 고통이 마침내 자기를 압도하여 어리석고 분별없는 말이 자기 입에서 나가게 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다윗은 친히 우리 앞에 인간의 연약성에 관한 거울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기 쉬운 이 위험으로부터 경고를 받아서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를 받고자 하는 마음을 때가 늦기 전에 익히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이 말한 “나의 혀로 말하기를”이란 말은 쓸데없는 말은 아닙니다.
이는 자기의 죄에 대한 참되고 더욱 충실한 고백입니다.
다윗은 죄가 되는 불만을 말했을 뿐 아니라 큰 소리로 하소연까지 했었습니다.
시편 39 편
시39:4-6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본문의 서론으로 박윤선의 본 시편 강요를 사용합니다.
1. 다윗은 견디기 어려운 역경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치 않으려고 극히 침묵하기를 힘썼습니다. 다윗은 그 당하는 곤란이 하나님의 징계로 온 줄을 알기에 침묵으로 그것을 감수(甘受)하려 한 것입니다(1, 2, 9, 욥5:17, 18, 애3:26-29).
2. 다윗은 또한 인생의 연수가 길지 못할 것과 이 세상이 헛된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러므로 그 때에 다윗은 자기가 당한 역경의 쓰라린 고통을 눈감아 버리려고 하였습니다(4-6, 11).
다윗은 자기의 소망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것만큼 이 세상에서 당한 난관을 그리 문제시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연수가 짧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이 세상에서 몇 만년이나 살 것처럼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자기 생명의 연한이 짧은 것을 실감(實感)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 본문 4-5절은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 약함을 알게 하소서(여호와여 나로 내 종말과 나의 날들의 수를 알게 하사 내가 얼 마나 살 것인가를 알게 하소서 - 칼빈)
(5) 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 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윗은 부덕하고 죄 되는 지나친 감정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흠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계속되는 구절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에서 다윗은 경건하고 합당한 기도들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은 생명이 연약하고 죽어야 하는 일시적인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더욱 부드럽게 자기를 취급하지 아니하신다고 불만스럽게 말합니다.
욥이 한 말에도 이 말과 비슷한 하소연이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렇게 말한 데에는 분과 노가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 하나님, 하나님은 저를 향하여 극히 엄중하게 역사하고 계시니 나로 하여금 최소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오래 살도록 정하셨는지 알게 하소서.
나의 생명이 순간적인데 어찌하여 그처럼 심히 혹독하게 하시나이까?
시편 39 편
마치 내가 아직도 수세대 동안 살 것처럼, 내 머리 위에 그 같은 불행을 쌓아 놓으시나이까? 만일 내가 극히 짧은 생존의 기간을 불행한 중에 연속적인 재난에 억눌려 지내야 한다면 나의 출생에 무슨 유익이 있겠나이까?”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라고 말한 다음 절과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손 넓이”란 네 손가락을 합친 넓이이며 여기서는 극히 작은 치수를 가리킵니다.
마치 이 말씀은 사람의 생명이 신속하게 날아가고 그 생명의 끝은 시작과 붙어 있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단지 ‘허사’ 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 말의 의미에 관하여 다윗은 마치 자기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인간의 생명이 짧은 것을 자기에게 보여 주시기를 요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에는 반어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마치 다윗은 ‘이 땅 위에서 나에게 남아 있는 햇수를 계산해 보게 하소서. 이 햇수는 제가 견디는 불행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옵니까?’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לדח(헤델)이란 말을 ‘현세의’라고 번역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일시적인’ 즉 단지 잠시동안만 지탱되는 것이란 의미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후자의 번역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아직 자기 생명이 짧은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저 그것에 관해 막연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현세의’라는 말을 택할 경우 이 구절의 의미는 ‘당신이 나의 생명을 세상 끝까지 연장시키실 것인지 저에게 보이소서’가 됩니다.
우리 판단으로는 우리가 옳다고 보는 이 번역이 훨씬 적합합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단어의 자모들 중에 ד(달렛)과 ל(라멧)이 서로 위치가 바뀌어 ‘헬렛’ 대신에 ‘헤델’이 되고 말았다고 추측됩니다.
여하간 이 말은 ‘한 세대’ 또는 ‘생의 기간’으로 해석되면 합당할 것입니다.
다윗이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라고 말하여서 하나님께서 그만큼 더 많은 긍휼과 동정심을 갖게 하려고 다윗은 자기 생명의 덧없음에 대한 증인으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이 덧없이 지나가는가를 자기는 잘 알고 있음을 말합니다.
“진실로 허사”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밖에 아무것도 없음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그 든든히 선” 때, 곧 인생의 가장 주요한 그리고 생기있는 때에, 존경받기를 원하고 상당한 영향력과 권세를 가진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시편 39 편
다윗이 이 하소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슬픔에 의한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자기들의 무가치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주로 역경에 의하여 심하게 억압을 당할 때라는 사실입니다.
번영은 사람들을 극히 흥분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잊고 감각을 잃고 땅위에서 죽지 않기를 꿈꿉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 길지 않음을 안다는 것은 극히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문에 자신의 불만을 말하고 불평할 때 슬픔의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다윗은 사람이 가장 위대한 상태에 올라간 것처럼 보일 때에라도 그 사람은 바람에 불리는 물 위에 떠오르는 거품과 같다고 선언함으로서 진실로 지혜롭게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하소연하게 되었을 때 잘못을 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기가 꺾이고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겸손하게 애원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들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청하게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당하는 현재의 조건에 의한 불행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다윗이 자신을 시정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잠시 후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경솔하고 분별없는 애곡을 계속하지 않고 믿음을 활용하여 자기의 영혼을 끌어올리면서 하늘에서 오는 위안을 얻습니다.
2. 본문 6절은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계속하여 동일한 주제를 논합니다.
‘그림자’라는 말로 다윗은 사람 속에 실체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사람은 단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헛된 외관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그 전시와 겉치레가 얼마만큼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어둠’으로 번역하여 인생은 이해되기도 전에 사라진다는 의미로 이 시인의 말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말로서 다윗은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31)라고 말함으로서 바울이 온 세상에까지 연장시킨 것을 각 사람에 관하여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람 속에 어떤 것도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람들 속에 잠시동안 보여지는 힘은 곧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헛된 일에 분요하며”라는 말은 인간의 헛됨에 대한 절정을 보여줍니다.
마치 다윗은 사람들이 더욱 스스로 경멸을 당할 목적으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시편 39 편
그들은 그림자와 같을 뿐이지만 마치 어리석은 자들이나 정신이상자들인 것처럼 아무런 목적없이 성가신 염려와 자신들을 괴롭히는 일에 스스로 가담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람들이 마음을 조이며 조심스럽게 재물을 쌓아올리면서 자기들이 곧 현재 사는 곳에서 급히 떠나게 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선언했을 때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참으로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음과 몸을 그처럼 해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들은 결코 충분하게 소유할 수 없다고 상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득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욕심으로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정해진 수명보다 백배나 더 살아야 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부를 강렬히 붙잡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말씀 중에서 다윗은 솔로몬이 전도서 5장 10절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람의 욕심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의 상속자들에 관하여 말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재물을 쌓으면서 하고 있는 수고의 결과를 누가 거두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하면서도 근심하고 불안해 하며 스스로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진실로 자신들을 위하여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확한 목적이나 한정이 없이 유익하지 않는 근심으로 끊임없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미친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다윗은 그 열렬하고 억제할 수 없는 욕망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욕망에 의한 영향 때문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넋을 잃고 이상한 말을 하면서 천하를 어지럽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어야 하는 인간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이 손바닥 넓이만한 좁은 한계 안에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더욱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진정되지 않고 동요된 마음의 상태에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말 속에는 매우 유익한 교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생명의 짧은 그 기간, 곧 손바닥 넒이만 할 뿐인 사실을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가 모든 불필요한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더 나은 방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39 편
시39:7-9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본문의 서론으로 박윤선 주석의 강요 부분을 사용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소망이 주님께만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당한 곤고와 역경을 문제시하지 않고 주님께 기도합니다(7-13).
소망을 주님께만 두는 자는 이 세상의 죄악의 파동으로 요동되지 않습니다.
소망을 주님께만 두는 자는 오히려 힘 있게 또 순결하게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1. 본문 7절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주여 지금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내 소망이 주께 향하나이다 - 칼빈)” 입니다.
다윗은 큰 불안을 경험했던 그 격렬하고 맹렬한 감정에 의해 자기 마음이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 이제 조용하고 안정된 마음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이 시가 한 부분은 적절한 기도로, 또 한 부분은 분별없는 하소연으로 구성됐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올바른 기도를 시작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기 감정을 다윗과 같이 느끼는 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헛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실질적인 도우심을 구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속한 그들은 자기들의 헛된 상태에 대하여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기 위해 한사코 감각 없는 자들이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사람이 자신의 약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실패에 이르기 전에는 하나님께 의존하여 하나님 안에 자기의 소망을 둘 목적으로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사람들의 마음이 방심한 중에 깊은 잠이 들도록 하는 간사하고 헛된 상상에 의하여 다시는 속지 않고 지금 우리 상태를 충분하게 알아차렸다고 말한 것처럼 이 ‘지금’ 이라는 부사에는 큰 강조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초보적인 단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기대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는 한 단순히 우리의 연약함 만을 깨달음으로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의무를 알고자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편 39 편
그러기에 세상에 속한 자들이 자기들의 헛됨을 확실히 아는 것은 아무 효과 없습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확신해도 이 확신에 의해 그들은 나아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데에서 모든 것을 창조해 내시는 일을 특유한 직임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죽음에서 살아나기 위해 전진하고 더 진전하는 것을 익혀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도움을 받아 하늘의 것을 열렬히 사모하게 될 때, 헛된 자가 되지 아니하고 진실로 무엇인가가 되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8절은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건하고 거룩한 기도를 계속합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가 당하는 심한 슬픔에 의해 하나님께 하소연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합니다.
다윗은 범한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간구하면서 하나님이 의로우시다고 찬양합니다.
또 다윗은 자기가 견뎌왔던 모든 불행은 자기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가 아니라 많은 죄의 혐의를 받아 마땅함을 인정하며 자신을 책망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불행이 완화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다윗이 보여준 규범을 따라야 합니다
불행의 근원이 마르지 않는 한 불행은 중단하지 않고 빠르게 진행될 것입니다.
다윗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가 당하는 불행이 완화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께 화해하는 순간 자기의 죄에 대한 징계 역시 멈추게 되리라고 기대했기에 다윗은 지금 자신의 죄 용서만을 간구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보여주는 모범으로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구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허물을 제하여 주시도록 간구하면서 그 불행의 이유와 근원을 더듬어 찾기 위해서 간구해야 합니다.
이어서 기록된 “우매한 자에게 욕을” 혹은 “경멸을 보지 않게 하소서”에 관한 말씀은 수동적인 의미는 물론 능동적인 의미로도 이해됩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의 조롱을 받도록 자기를 내버려두시지 말 것 혹은 하나님이 악한 자들이 당하게 하신 치욕과 동일한 것에 자기가 참여하지 않게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다윗의 의도와 잘 일치하기에 우리는 신자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택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시편 39 편
그리고 לבנ(나발)이란 말은 ‘어리석은 사람’ 뿐 아니라 ‘전혀 무가치하고 비열하여 경멸할 만한 사람’ 을 의미합니다.
이 말로 다윗은 최소한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정죄하는 버림받은 자들을 말하고자 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들의 이성과 이해력을 잃고 지나치게 하나님을 멸시하며 비난합니다.
3. 본문 9절은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책망합니다.
다윗의 자책은 자기가 당한 큰 슬픔이 침묵을 깨뜨려서 잠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자기가 ‘잠잠하고’라고 말했을 때 다윗으로서는 자신에게 가한 한결같고 굽히지 않는 자제를 칭찬하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치 자신의 성급함을 책망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속으로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는 자신에게 침묵을 명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하게 하소연하고 있다.
이 주제넘은 행동으로 무슨 유익을 얻을 것인가?’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유익하고 본받을만한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는 죽어야 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과 관계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보다 슬픔에 의한 거센 발작을 억제하기에 합당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불평 중에, 또 하나님은 난폭한 비난 중에 자신의 의를 거스려 말하는데 맞서서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유지하십니다.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지나치게 참을성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감히 하나님과 논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들의 불행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자기들 나름대로 망상에 의해 생각해낸 여러 가지 이유로 그 불행을 설명합니다.
백 명 중에 한명도 그 불행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길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신랄한 불평에 자신들을 방임하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모든 거룩하지 못한 욕망과 죄악된 무절제를 극복하려고 잠잠을 결심합니다.
시편 39 편
다윗이 지금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가장 가혹한 시련을 당했던 다윗이 침묵을 지키려고 결심했던 것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스스로 겸손해지고 불만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에 굴복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위한 가장 중요한 훈련 중에 한가지 임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지신 전능한 능력으로 행하신다는 사실뿐 아니라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관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을 하나님께 겸손히 말없이 굴복시킨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합니다.
악한 자들 역시 하나님의 손이 자기들 위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잔인하고 포악하시다고 비난하기에 하나님을 향해 무서운 불경한 말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큰 존경과 경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밀하신 심판을 중요하게 여겨 하나님의 선하신 뜻만으로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거스려 입을 열어서 단 한마디라도 말 한다는 것이 죄가 된다고 간주합니다.
시편 39 편
시39:10-11 주의 징책을
사람들이 역경과 곤고에 빠진 때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우연에 돌리기에 낙심합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남들에게 돌리기에 불평하고 다툽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은 범죄를 더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자는 그 원인을 자기의 죄 때문에 임한 주님의 징계에 돌립니다. 따라서 그 때에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히 회심할지언정 변명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손 밑에서 그 징계를 달게 여깁니다.
또 하나님이 그것을 벗겨 주실 수도 있는 줄 알고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본문 10-11절은 “(10)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 였나이다
(11)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이미 드렸던 기도를 확증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께 용서를 얻고 하나님의 너그러운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자기가 위에서 말한 그 침묵을 깨뜨리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소원과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규범에 따라 드려지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쾌하게 여기실 만큼 무분별하거나 소란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소원과 기도는 우리가 마음 속에 믿음과 인내를 가질 때 조성되는 안정된 침묵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열렬하게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에 자기의 감정이 섞여 불만을 토하고 극도의 열정을 나타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앞에서는 자기의 불행을 요란스럽게 통곡했으나 지금은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고려하기 위해 침착하게 되었으며 용서를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내리셨던 형벌을 너그럽게 해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39 편
다윗이 이렇게 말한이유는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로 기록됐습니다
이와 같이 말함에 있어서 다윗은 자기의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한 핑계로 이를 주장하지 않고 자신이 약한 중에도 견뎌내고자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위하지 않음을 느껴서 자기는 쇠약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즉시 11절에서 일반적인 말로 동일한 진리를 진술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율법의 엄격한 요구에 따라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하신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모두가 멸망당하고 온전히 압도되고 말 것입니다.
다윗은 첫째로 한 사람이나 일반 사람들에 관해 말하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다윗은 용맹, 용기 또는 뛰어남 때문에 유명하게 된 한 사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을 징계하시려 한다면 그들이 그 자체를 고귀한 것으로 보는 모든 것은 소멸되고 녹아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맹렬하게 불탔을 때 그 진노가 곧 허사가 되도록 할 만큼의 능력과 영광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더욱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발하신 진노의 두려움을 단순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모든 형벌에 대한 의를 선언하고 설명합니다.
때로 하나님의 심판은 이방 사람들의 마음속에까지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매는 심한 분노를 채워 하나님을 대항해 싸움을 계속합니다.
‘견책’ 이라는 말로 다윗은 엄중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엄격한 공의의 표와 하나님이 가지신 표적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간혹 참된 신자들에게 징계의 매질을 내리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형벌할 때 가지신 자비와 사랑을 경험시키기 좋아하십니다.
자신이 내리고 계시는 징계를 가볍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징계에 위로를 곁들여서 훨씬 더 견디기 쉽게 하십니다.
여기서 다윗은 아버지로서의 징계에 관해 말하지 않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는 자기의 직무를 실행하실 때는 냉혹한 판사처럼 그들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 엄중함을 느끼게 하시는 순간 즉시 소멸하거나 멸망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말해 줍니다.
언뜻 볼 때 하나님을 좀에다가 비교한 것은 불합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좀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39 편
한 작은 좀벌레와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다윗은 좀이 보이지는 않지만 한 조각의 천이나 나무를 몰래 갉음으로서 못쓰게 하는 것같이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들을 향해 하늘로부터 공공연하게 천둥을 보내지는 않으시지만 하나님의 은밀하신 저주는 그들을 계속 소멸시킴을 우리가 알게 하려고 이 직유를 사용하십니다.
이와 함께 다윗은 사람의 ‘영화’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윗은 좀이 가장 귀한 천이라도 망쳐서 못쓰게 하는 것같이 하나님이 진노하시게 되면 그 ‘영화’도 변질시켜 소실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비유를 극히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이 비유들을 때로는 이 견해에 때로는 저 견해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사자에게 비교한 것은(사38:13) 자기 마음의 감정과 관련지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서움과 공포로 심히 기운을 잃고 압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은 우리에게 세상이 하나님의 무서운 보응을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이 보응은 버림받은 자들을 보이지 않게 갉아서 소멸시킨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 라는 말씀은 매우 적절하게 반복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압도되고, 티끌에 이르기까지 겸비해지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가 헛되다는 사실을 알아 모든 건방진 마음을 버리려고 마음을 살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처럼 어리석게 만족하고 칭찬하기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참아주신 한에서 자신들의 연약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교만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진노로 경고 받을 때 자기 자신들을 향해 불만을 갖기 시작할 뿐 아니라 티끌과 같이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시편 39 편
시39:12-13 여호와여
본문의 이 구절들은 기도의 결론을 짓습니다.
1. 본문 12절은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입니다.
다윗은 기도 중에 점차 열정을 더합니다.
다윗은 첫째로 ‘기도’, 둘째로 ‘부르짖음’, 셋째로는 ‘눈물’을 말합니다.
이 점층법은 단지 문체를 꾸미고 다른 말로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 수사법의 한 형식이 아닙니다.
이는 다윗이 자기 상태를 신실하게 마음속 깊은 데서 몹시 슬퍼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에서 다윗은 자신이 보여준 모범으로 기도의 한 규범을 제시합니다.
다윗은 자기를 ‘객’과 ‘거류자’라 부름으로 자기 상태가 얼마나 불행한가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분명하게 ‘주 앞에’(주께)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을 뿐 아니라 다윗이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알려주는 어떤 사람을 세우실 필요가 없이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여행이 짧고 그 여행의 끝은 멀지 않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계십니다.
또 사람들이 값을 내고 머무는 집에 있는 자들처럼 이 세상에 잠깐동안만 머물러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이 시인이 하는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만일 그의 자비로 붙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불행하게 될 것인가를 하늘로부터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2. 본문 13절은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주는 나를 내버려두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로 힘을 회복케 하소서-칼빈)”입니다.
글자 그대로 말하면 이 말씀의 다음 구절은 ‘나에게서 그치소서’ 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당신의 손이 나에게 미치지 않도록 우리 사이에 한 벽이 세워지게 하소서’ 라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目)을 보충하여 이 구절을 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에는 어떤 설명을 택하든지 문제 되지는 않습니다.
시편 39 편
그 의미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풀어주시도록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다윗은 힘을 회복하든지, 최소한 자기가 세상 떠나기 전에 휴식을 얻고자 합니다.
이 시의 마지막 절은 다윗이 육신으로 경험한 불안과 죄악의 감정을 말해 줍니다.
다윗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심하게 괴로움을 당할 때 흔히 그런 것같이 죽기 위해 최소한 자기에게 시간만이라도 허락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호소연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음을 나타내신다면 자기의 건강이 회복될 만한 희망이 없는 것을 인식함에 대하여 합당한 태도록 말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과오는 자기가 죽기 위한 시간을 얻기 위해 휴식을 구한 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주여 주의 매를 더 이상 견디기란 나로서는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그러므로 만일 주께서 계속하여 나를 더 고통스럽게 하신다면 나는 비참하게 망할 수밖에 없나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내가 나의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기 위하여 최소한 저에게 잠시동안의 위안을 주옵소서’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이해함으로서 그 기도가 용납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사용한 언사를 보면 다윗의 마음이 쓰라린 슬픔으로 심하게 자극되어 순수하고 또 훌륭한 믿음으로 잘 조화된 기도를 드릴 수 없었다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의 절망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말의 형식입니다.
다윗은 죽음이 사람의 전멸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또 다윗은 자기 구원의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멸망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이 말을 하게 된 이유는 자기가 전에 슬픔 때문에 극히 억압을 당하여 그에게 적당한 용기로 자신의 마음을 강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하소연 중에서 많이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려고 주의깊게 노력을 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상황에 의해 다윗은 매우 동요되고 고통을 느껴 슬픔 가운데서 지켜야 할 한계를 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