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나의 최애 놀이터 ‘주인선 철길’
발간일 2022.11.21 (월) 13:31
응답하라! 인천 추억 ⑫ 주인선
소래철교, 수봉공원, 자유공원, 월미도 등 인천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간엔 저마다의 추억이 넘쳐 난다. 잊지 못할 첫사랑을 만난 장소, 개구쟁이 시절 친구들과의 모험담이 숨겨진 곳을 생각하면 빙그레 미소 지어지는 기억들이 소환된다. 인천시민들의 내밀한 추억이 숨겨진 그 곳을 찾아가는 기억 여행을 시리즈로 연재한다.
휴일 오후 다섯 시 나는 산책을 한다.
코스는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세 갈래의 선택지가 있다. 세 코스 모두 동네의 크고 작은 공원이나 숲을 끼고 있다. 삼십 분, 한 시간 언저리, 두 시간 코스 중에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부분 한 시간짜리 코스를 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다니는 길을 기찻길 코스라 부른다.
▲ 김정아 작가는 휴일 오후 다섯시가 되면 산책을 한다. 주로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는데 이 길을 기찻길코스로 부르는데 철길공원을 포함하고 있다. 사진은 필자인 김정아 작가가 주인공원을 산책하고 있는 장면.
기찻길 코스는 철길공원을 포함한다. 시는 1985년까지 운영하던 인천의 주안역과 남인천역 사이를 오가던 ‘주인선’에 철도 노선을 폐쇄하고 기찻길에 주인공원을 만들었다. ‘주안역’의 ‘주’ 자와 ‘남인천역’의 ‘인’ 자를 한 글자씩 딴 이름이다. 철로의 길이는 약 3.8 킬로미터인데 어릴 적 동무들과 기찻길을 따라 양팔을 벌리고 선로를 걷던 기억이 선연하다.
▲ 인천시는 1985년까지 운영하던 인천의 주안역과 남인천역 사이를 오가던 ‘주인선’에 철도 노선을 폐쇄하고 기찻길에 주인공원을 만들었다.
나는 독쟁이 언저리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때까지 용현동에서 살았다. 어린아이들이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낼 만한 학원도 변변찮은 시절이라 홀로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두 살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다. 나와 동생은 또래 아이들과 삼삼오오 함께 어울려 다니며 동네 구석구석을 쏘다녔는데 가까운 용현시장을 가로질러 주인선 기찻길을 따라 놀고는 했다. 그중 장난기 많고 기세등등한 아이가 앞장서서 기찻길 대장 노릇을 하면 나와 친구들은 그 뒤를 따랐다. 선로에서 떨어지지 않고 오래 걸어가기, 기찻길 옆 골목으로 들어가 요비링(초인종)을 누르고 숨바꼭질하기, 침목 따라 뜀뛰기 등 그 시절 기찻길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을 봐두었다가 10원짜리 동전을 선로에 올려놓고, 선로 뒤로 꼬맹이들이 나란히 앉아 기다리기도 했다. 서로 자기 동전이 더 크게 펴질 거라며 내기를 하고 기차가 지나가면서 동전이 납작하게 펴지면 그걸 가지고 동전치기를 할 요량이었다. 주인선 기찻길은 옆 동네 아이들과의 접선 장소이기도 했다. 기차가 남기고 간 납작하게 펴진 동전은 귀했고 다른 동네 아이들이 가져온 장난감과 거래를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하고 아찔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것만큼 짜릿하고 신나는 일이 없었다.
▲ 주인선 철도가 있는 장소는 주인공원으로 바뀌었다. 주인선 철로가 있던 시절 그곳은 나의 최애 놀이터였다.공원에 짙은 가을이 내려앉았다.
현재는 공원을 조성하면서 선로를 걷어내고 남겨진 나무 침목을 따라 키 작은 소나무를 심었다. 그 시절 아이들과 함께 엎드려 기차를 기다리던 소나무 뒤쪽 구릉에는 잔디를 깔고, 구릉 가장 높은 곳에 침엽수를 심어 그늘을 만들었다. 그리고 구릉 밖으로 골목길 주택가와 공원을 이으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공원을 오갈 수 있도록 조성했다. 주인공원에는 중간중간 각종 운동기구와 평상이 있어 동네 어르신들이 종일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해가 지기 전에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사람들도 자주 볼 수 있다.
기찻길 옆 골목에는 아직 군데군데 구옥들이 남아있다. 50년을 이어온 이발소는 빨강 파랑 줄이 새겨진 입간판이 회전하며 아직도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정겨움이 풍겨나는 옛 집들이 이발소 옆으로 줄지어 있다. 어린 시절에 보았을 땐 커다랗던 집들이 이젠 도심 속 아파트들 사이에서 자그마해져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구옥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철길 슈퍼와 철길 포차는 이곳이 주인선이 지나는 곳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곳에서 작은 노점을 열고 뽑기를 팔았던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10원이었는지 50원이었는지, 국자에 소다와 설탕을 받아서는 연탄불에 국자를 놓고 녹여서 뽑기를 했다. 옹기종기 연탄불앞에 아이들이 모였고, 어깨를 밀치다 국자 안에 녹은 소다와 설탕이 발등에 떨어져 화상을 입었다. 그때 다섯 살이던 나를 둘러업고 아주머니는 철길을 가로질러 우리 집으로 아이들과 뛰었다. 어머니는 호랑이연고를 구해 매일 발라주셨고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소다 뽑기는 금지되었다. 작은 화상이라 커가면서 상처는 점점 희미해졌지만 아주머니의 놀라고 다급했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천천히 걷다 보면 미안한 얼굴들이 스쳐가기도 한다.
▲ 기찻길옆 골목에는 아직 구옥들이 남아있다. 필자는 어린시절 이곳에서 뽑기를 하다 화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그때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좁고 길게 이어진 주인공원은 숭의동과 용현동이 맞닿은 자리 두 군데를 큰 도로가 가로지르며 세 갈래로 나뉘는데 이 길을 왕복으로 산책하고 나면 대략 한 시간이 흐른다. 나무 침목에 발걸음이 닿을 때는 코흘리개 시절 마냥 즐겁기만 했던 날들을 추억하며, 때로는 일상의 고민을 옛 선로 위에 내려놓으며 기찻길 산책은 계속된다.
글·사진 김정아 사진가, 시와예술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