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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열둘을 세우셨으니 말씀/ 마가복음 3:7-35 요절/ 마가복음 3:14,15 | 2024. 4. 21 | |
마가복음 제 5 강 |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사람을 키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많은 일을 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사람을 키우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특히 열둘을 세우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능력 많으신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청년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의 삶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셨습니다. 회당과 바리새인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바닷가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병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이요 사랑의 목자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그의 인기를 시기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고 없애버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엎드렸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굴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며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아직은 자신을 메시아로 드러낼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3-19절은 예수님께서 열둘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고 부름 받은 자들은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열둘이었고, 그 부르심은 제자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당시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들, 인생문제로 고통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함께 일할 사람을 한 사람씩 부르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세리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빌립과 나다나엘도 부르셨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돕는 목자들이 필요하다는 아셨습니다. 그리고 산에 오르사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위해서는 첫째로 생활과 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생활과 일에 파묻힌 사람들은 제자로 부름 받기 어렵습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위해서는 생활과 일을 떠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과 떨어진 곳, 산이나 교회로 가서 자신을 돌아볼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원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원한다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많고 지식이 많고 열심이 많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원하셔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로 부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제자를 부르십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셋째로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나아왔습니다. 나아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로 부름 받고 예수님께 나아온 자들은 예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예수님께 그들의 장래와 인생을 맡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열둘을 세우셨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저자 마가는 14절과 16절에서 열둘을 세우셨다는 것을 반복해서 말함으로서 열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많은 백성들을 돕는 데 열둘은 너무 적은 숫자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시니 열둘이 아니라 120명, 500명을 세워야 되지 않을까요? 먼저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열두 지파의 두령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신약시대 열두 제자는 새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새로운 지도자들이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주역들입니다.
다음으로 열둘은 하나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리의 역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역사요 소수의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수십 년 간 줄기차게 도우심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셨습니다. 또한 다윗 한 사람을 오래 동안 훈련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로 키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시고 한 사람을 키우십니다.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열둘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키우시고 열둘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민족과 같고 한 나라와 같습니다. 나 한 사람을 작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돕고 있는 한 사람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믿음의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이요 섬김의 사람으로 키워가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열둘을 제자로 부르신 목적은 첫째,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예수님을 많이 배우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서로 닮아갑니다. 얼굴도 닮아가고 먹는 것도 취미도 비슷해져 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양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어떻게 돕는지 목자란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가까이서 들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배우고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본받게 되고 닮아가게 됩니다. 가장 효과적인 교육방법은 도제교육이요 함께 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둘째, 보내사 전도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배우는 목적은 써 먹는 데 있습니다. 배우기만 하고 배움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 배움은 반쪽 짜리가 될 것입니다. 제자도에서 있어서 전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참 제자는 배운 것을 세상에 전하고 고장난 세상을 아름다운 나라로 바꾸는 데 힘쓰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납니다. 전도 없이는 구원도 없고 아름다운 나라도 세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전도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도에 힘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까지 가서 남편 문제가 있는 한 여인을 장시간의 대화를 통해 구원하시고 제자들에게 사마리아 땅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남장로교 미국선교사들은 1890년대 한국에 들어와 전라남북도를 중심으로 40여년간 배고픔과 질병으로 고통하는 한국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 중에 전킨 선교사가 있는데 지난 주 스탭목자수양회 때 그 선교사의 묘비를 보았습니다. 전킨은 지방순회사역에 몰두하다가 1908년 43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전주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전킨과 메리의 세 아들도 풍토병에 걸려 어린 나이에 모두 죽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님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선교하다가 순교한 그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통해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와 병원이 세워지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힘 있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연초에 우리는 디모데후서 4장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말씀을 붙들고 출발했습니다. 전도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대학생들이 2%라는 최근의 통계는 저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지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믿지 않는 자들이 이렇게 많으니 황금어장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전도할 때가 아닌가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광주1부에 한 평신도 약사사모는 매주 전도지와 빵을 들고 캠퍼스에 나가서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꾸준히 하다보니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이 있었고 그 중에 몇 명은 성경공부도 하고 예배에도 나온다고 합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그 분을 통해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때 오늘날에도 갈급한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봄수양회를 계기로 양들이 조금씩 오고 있습니다. 지난 주 수요소감모임 때는 10명이 소감발표를 하여 시간이 길어져 분량을 줄여서 밮표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여름수양회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여름수양회의 주제는 믿음과 생명입니다. 은혜로운 말씀과 프로그램을 주시고 30양의 양들을 얻게 하시고 이들을 믿음과 생명 천국잔치에 초청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셋째,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귀신은 사단의 수하로 사람들과 세상을 혼돈과 어두움에 빠뜨리는 악의 세력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아아 병든 영혼을 치유할 수 있고 건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귀신은 우리 인간보다 강하기 때문에 귀신을 내쫓으려면 영적 권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압할 수 있는 영적 권능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권능을 믿고 귀신과 싸울 때 귀신을 내쫓을 수 있고 병든 영혼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귀신은 개인을 공격하여 자기의 영향력 아래 둘 뿐 아니라 사회구조와 조직 가운데도 침투하여 거짓과 부정부패를 퍼뜨려 악한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부정부패의 배후에 귀신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악한 영을 물리침으로 공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열둘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가장 먼저 시몬이 등장합니다. 그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시몬은 어부였고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혈기가 많았고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반석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대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변화되었고 교회의 기둥이요 반석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나옵니다.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어부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불심판이 있기를 간구할 정도로 과격한 캐릭터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우레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파워플한 지도자로 세우고자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안드레는 시몬의 형제이며 심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빌립은 지성적인 사람이며 나다나엘을 전도한 사람입니다. 바돌로매는 나다나엘의 다른 이름이며 순수한 사람으로 예수님께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마태는 세리 레위이며 죄인의 대표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사람입니다. 도마는 실증주의자로서 보고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는 가장 귀한 신앙고백을 남긴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도 열두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별 다른 언급이 없지만 열둘 동역의 그릇을 이루는 데 힘썼고 복음역사에 헌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는 예수님을 판 자였습니다.
처음 언급된 시몬은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이었고 마지막 언급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부족하고 허물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뛰어난 사람들, 셀렙들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 죄인들을 부르셨습니다. 자격 없고 내놓을 것이 없는 나 같은 죄인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은 모두 제자로서 가능성이 있는 소망스런 사람들입니다. 열두 제자만 제자이고 다른 사람은 제자가 아니고 신자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입니다. 열두 제자 그룹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칠십 인 제자 그룹도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120명의 제자 그룹이 나옵니다. 우리는 제자입니까? 무리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제자로서의 부르심에 응답할 뿐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 한 사람을 키우고 열둘을 키우는 데 전교회적으로 힘을 모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35절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몰려오는 양떼들을 섬겼습니다. 이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친족들은 예수님을 붙들러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도 예수님이 바알세불이 지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며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없으며,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다고 하시며, 예수님의 역사는 사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과 같이 분명하게 보여지는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라고 비방하면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집 나가서 너무 고생만 하는 것 같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따뜻한 집밥을 먹이고자 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때야말로 제자들에게 영적 가족관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그리고 둘러 앉은 자들 다시 말해 제자들을 보시며 이르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은 혈육의 가족들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가족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혈육의 가족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진정한 가족,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기를 소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가족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족관, 영적 가족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가족들을 보십시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분들, 그리고 앞뒤로 앉아 있는 분들이 우리의 가족들입니다. 교회 밖에도 우리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진정한 가족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우리의 가족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의 캠퍼스 학우들이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기도와 전도와 성경공부와 예배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배우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어둡고 절망적인 시대에 열둘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소수의 지도자 양성은 하나님의 역사방법입니다. 나 한 사람이 참 제자가 되고 더 나아가 한 사람을 키우고 열둘을 키우는 데 우리의 시간과 열정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