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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序詩(서시)
신동엽
아담한 산들 드믓 드믓
맥을 끊지 않고 오간
서해안 들녘에 봄이 온다는 것
것은 생각만 해도, 그대로
가슴 울렁여 오는 일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또 가을
가을이 가면 겨울을 맞아 오고
겨울이 풀리면 다시 또
봄.
농삿군의 아들로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고웁게 자라서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걷워딀 때 걷워딀 듯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 짤랑
꽃가마 타 보고
환갑 잔치엔 아들딸 큰절이나
받으면서 한 평생 살다가
조용히 묻혀가도록 내 버려나
주었던들
또, 가욋말일찌나, 그러한 세월
복 많은 歌人(가인)이 있어
(蜂蝶風月(봉접풍월)을 노래하고
장미에 찔린 애타는 연심을 읊조리며
수사학이 어떠니 표현주의가 어떠니
한단들 나 역 모르는 분수대로
그 장단에 맞추어 어깨춤이라도
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자탄에 맞은 사람
태백줄기 고을 고을마다
강남 제비 돌아와 흙 묻어 나르면
솟아오는 슬픔이란 묘지에 가 있는
누나의 생각일까.....?
산이랑 들이랑 강이랑
이뤄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 산천인데
머지 않아 나는 아주
죽히우러 가야만 할 사람이라는
것이라.
잘 있으라.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구름이 끼던
두번 다시 상기하기 싫은
人種(인종)의 늦장마철이여
이러한 노래 나로 하여
처음이며 마즈막이게 하라
진창을 노래하여 그 진창과 함께
멸망해 버려야 할 사람이
앞과 뒤를 헤쳐 세상에
꼭 하나뿐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면.....
두고 두고, 착한 인간의 후손들이여
이 자리에 가는 길
서낭당 돌을 던져
구데기.
그런 역사와 함께 멸망한 나의
무덤, 침 한번 더 뱉고
다시 보지 말아져라.
32.수운이 말하기를
신동엽
水雲(수운)이 말하기를
슬기로운 가슴은 노래하리라.
맨발로 삼천리 누비며
감꽃 피는 마을
원추리 피는 산 길
맨주먹 맨발로
밀알을 심으리라.
수운이 말하기를
하눌님은 콩밭과 가난
땀흘리는 사색 속에 자라리라.
바다에서 조개 따는 소녀
비 개인 오후 미도파 앞 지나는
쓰레기 줍는 소년
아프리카 매 맞으며
노동하는 검둥이 아이,
오늘의 논밭 속에 심궈진
그대들의 눈동자여, 높고 높은
하눌님이어라.
수운이 말하기를
강아지를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개에 의해
은행을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은행에 의해
미움을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미움에 의해 멸망하리니,
총 쥔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그, 사랑에 의해 구원받으리라.
수운이 말하기를
한반도에 와 있는 쇠붙이는
한반도의 쇠붙이가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미움은
한반도의미움이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가시줄은
한반도의 가시줄이 아니어라.
수운이 말하기를,
한반도에서는
세계의 밀알이 썩었느니라.
33.어느 해의 유언
신동엽
뭐…….
그리 대단한 거
못되더군요
꽃이 핀 길가에
잠시 머물러 서서
맑은 바람을
마셨어요
모여 온 모습들이 곱다 해도
뭐 그리 대단한 거
아니더군요
없어져
도리하며
살아보겠어요
맑은 바람은 얼마나 편안할까요.
34.여름 이야기
신동엽
팔월의 하늘에는
구름도 없고
바람 부는 가로수,
피난가는 내 소녀는
영어를 알고
있었지.
나뭇게 끄을며
절길 오른
바랑,
산골길 칠백리엔
이마 훔치던
원효선사.
원두막 밑에선 미국 간 아들
편질 읽으며 칠순 할아버지가
사관침 장죽에 쑥을 버무려 넣고
있었지.
패랭이 달린
황토 언덕
젯트편대가
강을 울리면
배꼽 내논 아해들은
풀뿌리 씹으며
구경을 하고.
마(馬), 진(辰) 사람네
조개무덤 쌓던
댕댕이 넌출 고을엔
수평 멀리
함성소리만
불 질려 오른다.
꽃신 놓인 토방
놋거울은 닳고,
콩밭 매는 뒷곁
황진이 숲속선
땅 즐겁게
멍석 딸기가
익고
있었다.
35.여자의 삶
신동엽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섣달 그믐
그리고 석양
눈ㅅ발은 잔잔한 바다
수평선 너머
날리는데
해안선
모래밭 따라
여인 하나 콧노래 부르며
걷고 있었지
고개는 숙이고
사각 사각, 모래밭 밟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콧노래.
조용히 날리는
옷고름.
파도소리도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고
겨울도
도시도
그녀의 눈엔
보이지 않고
다수운 피만
흰 볼기따라
발끝으로
머리끝으로
고루고루
흐르고 있었지.
무엇을 생각하며
그녀의 귀밑머린
바람에 날리고
있었을까.
무엇을 노래하며
그녀의 두 젖무덤은
저고리 안섶에서
물결치고 있었을까.
무엇을 기원하며
그녀의 눈동잔
겨울 하늘 아래 수밀도처럼
드리워져 있었을까.
『나는 밭,
누워서 기다리고 있어요
씨가 뿌려질 때를.
하늘 나르는 구름이든
여행하는 씀바귀꽃이든나려와 쉬이세요
씨를 뿌려 보세요.
선택하는 자유는 저한테 있습니다.
좋은 씨 받아서
좋은 신성(神性) 가꿔보고 싶으니까.
좀더 가까이, 이리 좀 와 보세요
안 되겠어요, 당신 눈은 살기.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은 우둔, 당신 입은 모략,
오랜 대를 뿌리박고 있군요.
또 와 보세요.
당신은 전쟁을 좋아하는 종자,
또 당신은,
피가 화폐냄새로 가득 차 있군요.
안 되겠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긴 목덜미
비가 내리고 있어지, 그녀의 가는 허리 아래
비가 내리고 있었지
구렁이처럼 흐느적치던 긴 네 다리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그 깊은 정상 위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지리산 산정 꽃밭 위에도
너는 서 있었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경부선 가로수 총 메인 소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미국으로 서독으로 품팔이 떠나던
내 소녀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강강수얼래 대열에 끼여
조국을 돌던 내 소녀.
그때 네 뒷꿈치에선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
여자는
집.
집이다, 여자는.
남자는 바람, 씨를 나르는 바람.
여자는 집, 누워있는 집.
빨래를 한다, 여자는 양말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
전장에서 살육하고 돌아온
남자의 마음.
그 피묻은 죄까지
그 부드러운 손길로
그 신비로운 늪에서
빨래를 시켜 준다.
쇠붙이도
탄도탄도
그녀의 무릎 밑에 와선 흐물흐물
녹아나리는 물.
여자는
물.
갈대가 아니라, 물.
있을 것이 없는 자리에 자기를 적응시켜
있을 것으로 충만시켜 주는, 물
껍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은
신.
겁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의 알몸은
평화.
껍질이여
여인을 질식시키고 있는
껍질이여,
네가 하나의 사내를 사유하고 싶어 할 때
불행은 네 발 밑에 허당을 판다.
네가,
네가
자연 속 보물들을 자기 코걸이 귀걸이로 사유하려 할 때
세상의 발 밑은 구더기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흐려지면
사내들은, 전쟁을 장사하는
미치광이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맑으면
사내들은, 구도하는
성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길러 낸 토양이여
넌, 여자.
석가모니를 길러 낸 우주여
넌, 여자
모든 신의 뿌리 늘임을
너그러이 기다리는 대지여
넌, 여성
마을마다
빠알간 홍시감이 익어나갈 때
붉은 벽돌담이 있는 도시
그 도시로 가는 길가에서
나는 보았지
고개마다
옥바라지 봇짐, 그 옷보자기 속에서
나는 보았지.
남편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오빠의 것이었을까
누럭누럭 기운
두툼한 솜바지 두툼한 솜저고리.
못쓰게 된 꼬마들 옷조각으로 기운
다스운 속 내의.
그리고 나는 보았지
그녀가 쉬었다 일어서면서
허리띠 조르는 것을.
그리고 나는 보았지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쉐타 안섶에
꽂혀있던
한 권의 문화사개론 책.
그리고 나는 보았지
송화가루는 날리는데, 들과 산
허연 걸레쪽처럼 널리어
나무뿌리 풀뿌리 뜯으며
젊은 날을 보내던
엄마여,
누나여.
그리고 나는 보았지
진달래는 피는데
벌거벗은 산과 들
가마니 속에
솔방울 고지배기 따 이고
한 손으론 흐르는 젖 싸안으며
맨발 길 삼십리
울렁이며 뛰던
아낙네의 종아리.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함박눈은 산과 도시
여인의 호수 위 펑펑
쏟아져 오는데
고궁 담 모퉁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두 손을 깍지 싸
높은 가슴 위에 얹고
눈은 수밀도처럼 내리깐 채
들릴 듯 말 듯
콧노래 부르며
고궁 길 돌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36.영(影)
신동엽
버스에 오르면 흔들리는 재미에
하루를 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먹먹한 가슴 굳어만 갈 뿐
나타나줄 것같은
비가 내리는
어둔 저녁에도
너는 없었다.
대폿집 앞에 서면
부서지고 싶은 대가리
대가리를 흔들면서
전찻길을 건넌다.
댕그랑 땡
미친 가슴처럼
아스팔트 바닥에 쏟아지는
통쾌한 중량의 동전잎
버스에 오르면 울고 싶은 재미에
하루를 산다.
너는 말할 것이다.
돌아가라, 돌아가라고.
그러면서도
너는 내 눈을 지켜보며
떠나지 않는 것이다.
비는 내리는데
숙명처럼
나는 널 생각하고
고뇌의 심연에
빠져 버둥이는
내 눈을 너는
연민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떠나라,
아니면 함께 빠져주든가.
가로수에 잎이 트면
그리고 보리 이랑이
강과 마을을 물들이면
나는 떠나갈 것이다.
37.완충지대(緩衝地帶)
신동엽
하루 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運河) 이켠서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 건지다 보면
밑둥 긴 목포처럼
역사는 철철 흘러가 버린다.
피 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영(嶺) 넘으면
완충지대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森林) 거니노라면
초연(硝煙) 걷힌 밭두덕가
풍장 울려라.
38.이곳은
신동엽
삼백 예순 날 날개 돋친 폭탄은 대양 중가운데
쏟아졌지만, 허탕 치고 깃발은 돌아간다.
승리는 아무데고 없다.
후두둑 대지를 두드리는 여우비.
한 무더기의 사람들은 냇가로 몰려갔다.
그들 떠난 자리엔 펄 펄 펄 심장이 흘리워 뛰솟고.
독은 비어 있다.
다투어 배 밖으로 쏟아져 나간 콩나물 역사.
아침 햇살 속 오간 수만 화살. 날아간 물체들의
흐느낌은 정(定)한 문, 지평(地平)의 밖이었다.
그곳엔 무덤이 있다.
바닷가선 비묻은 구름 용을 싣고 찬란하게
찌들어오리니
급기야 홍수는 오고,
구렝이, 모자, 톱니 쏠린 공장 헤엄쳐 나가면
조상도 없이 옛 마을터엔 훵훵 오갈 헛바람.
쓸쓸하여도 이곳은 점령하라. 바위 그늘 밑, 맨 마음채
여문 코스모스씨 한톨. 억만년 퍼붓는 허공밭에서
턱 가래 안창엔 심그라.
사람은 비어 있다.
대지는
한가한
빈 집을 지키고 있다.
39.이리 와 보세요
신동엽
이리 와 보세요
당신 눈에 살색(殺色)이 도는군요.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엔 우둔이
당신 입엔 시의(猜疑)가
오랜 대(代)를 뿌리박고 있군요.
또, 와 보세요
당신은 교만한 종자야요
또, 당신은
피가 병균으로 차 있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눈이 순정과 지혜로
맑게 빛나고
너그럽고 슬기로운
토양에서 자란
맘과 몸이 착실한
사내의 씨.
그리고, 마음과 힘을 쏟아
정성껏
나의 몸에 씨를 심거줄 사내.
40.조국(祖國)
신동엽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신록 피는 오월
서부사람들의 은행(銀行)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거리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굿한 설악(雪嶽)처럼 하늘을 보며 누워 있지 않은가.
무더운 여름
불쌍한 원주민에게 총쏘러 간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간이역 신문을 들추며
비통(悲痛)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
이방인들이 대포 끌고 와
강산의 이마 금그어 놓았을 때도
그 벽(壁) 핑계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꽃 피는 남북평야에서
주림 참으며 말없이
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
조국아
한번도 우리는 우리의 심장
남의 발톱에 주어본 적
없었나니
슬기로운 심장이여,
돌 속 흐르는 맑은 강물이여.
한번도 우리는 저 높은 탑 위 왕래하는
아우성 소리에 휩쓸려본 적
없었나니.
껍질은,
껍질끼리 싸우다 저희끼리
춤추며 흘러간다.
비 오는 오후
뻐스 속서 마주쳤던
서러운 눈동자여, 우리들의 가슴 깊은 자리 흐르고 있는
맑은 강물, 조국이여.
돌 속의 하늘이여.
우리는 역사의 그늘
소리없이 뜨개질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나니.
조국아,
강산의 돌 속 쪼개고 흐르는 깊은 강물, 조국아.
우리는 임진강변에서도 기다리고 있나니, 말없이
총기로 더럽혀진 땅을 빨래질하며
샘물 같은 동방의 눈빛을 키우고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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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 속에 살며 시 속에 놀다 가셨군요. 신동엽 시인님은...
참 가슴에 맺힌 한도 많으셨겠다. 답답한 엉어리도 많으셨겠다. 참... ^^*...
나는, 우리 카페의 이 방에서 한국의 시인을 소개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지난번에 김숙이 선생이 김수영 시인을 발표하는데, 내가 그 시인을 몰라서 '김수영 시인이 누군데요?'라고 한 일이 있었다. 이 방에 한국의 시인을 소개하다보니, 김수영 시인은 우리우ㅏ 시 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시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아, 그랬구나. 나는 나의 무식함을 느끼고, 한국의 시인을 공부하기로했다. 그러면서 이 방에 소개하기로 했다. 내 생각으로는 시인의 소개보다는 시인들이 쓴 시가 더 중요하다 싶어서, 시들을 올린다. 그러면서 읽어본다.
돌아서면 머리가 하얗게 되고, 힌 구절도 생각나지 않지만, 그래도 시를 읽고 올리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