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ㅡ 강성은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가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 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것도 녹진 않았다.
(2005년 문학동네 당선)
테레민(Theremin) ㅡ 강성은
밤마다 그림자극을 보여주던 나뭇잎들이 그림자를 버리고
무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림자를 주워 모으려고 죽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쉼표로만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했다
음악을 듣는 자들은 겨울잠을 잤다
음악을 듣지 못하는 자들은 밤새 걸어다녔다
어두운 골목마다 잘린 귀들이 흩어져 반짝거렸다
손바닥에 그려진 지도만 보고 걸어온 엄마는
자주 길 위에서 울었다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달을 스푼으로 떠먹었다
새들은 열 켤레의 구두를 메고 날아간다
가면을 쓴 아이들이 서로에게 돌을 던지며 달아난다
태양이 내 음악을 듣고 잠든 날
나는 희미해진 그림자와 귀를 주우러 다녔다
이따금 침대 밑의 병든 악어를 꺼내 핥아먹었다
악어는 눈뜨지 않았지만 죽은 건 아니었다
ㅡ
밤마다 그림자극을 보여주던 나뭇잎들이 그림자를 버리고
(학교를 마치고, 또는 그만 두고)
무대 밖으로 뛰쳐나갔다
(직장을 구하러 나갔다)
그림자를 주워 모으려고 죽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구직을 하러 실업자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쉼표로만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했다
(나는 일을 못 찾고 내 방에서 쉬었다)
음악을 듣는 자들은 겨울잠을 잤다
(나처럼 쉬는 실업자가 많았다)
음악을 듣지 못하는 자들은 밤새 걸어다녔다
(직업이 있는 사람은 열심히 일을 했다)
어두운 골목마다 잘린 귀들이 흩어져 반짝거렸다
(구직을 위해 열심히 정보 수집을 했다)
손바닥에 그려진 지도만 보고 걸어온 엄마는
자주 길 위에서 울었다
(어머니는 가끔 나를 찾으러 다니며 속상해서 울기도 했다)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달을 스푼으로 떠먹었다
(있는 돈을 다 까먹었다)
새들은 열 켤레의 구두를 메고 날아간다
(시월이 되었다)
가면을 쓴 아이들이 서로에게 돌을 던지며 달아난다
(취직 수험생들이 치열하게 경쟁을 하였다)
태양이 내 음악을 듣고 잠든 날
(어느 실업의 날 밤)
나는 희미해진 그림자와 귀를 주우러 다녔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직업이라도 구하러 다녔다)
이따금 침대 밑의 병든 악어를 꺼내 핥아먹었다
(이따금 침대에 엎드려 속앓이를 했다)
악어는 눈뜨지 않았지만 죽은 건 아니었다
(아직은 구직을 못했지만 희망을 잃은 건 아니다)
------------------------------
이 시는 '테레민'이라는 제목에 주를 달 법한데 그 영문만을 괄호 안에 밝힐 뿐입니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그건 1924년 러시아의 음향물리학자 테레민이 발명해 낸 일종의 전자악기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악기로 연주한 괴기스러운 음향은 알프렛 히치콕의 영화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시인은 그런 것조차 굳이 감춰두고 시를 발표한 것입니다. 베일로 감싸서 독자들에게 호기심과 신비스러움을 한껏 자극하기 위해서라고 보여집니다.
밤마다 그림자극을 보여주던 나뭇잎들이 그림자를 버리고
무대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이 첫 부분을 "밤이면 검은 그림자를 보여주던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나무에서 떨어져 내렸다"라는 뜻으로 읽어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막연하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달을 스푼으로 떠먹었다"라든지 "새들은 열 켤레의 구두를 메고 날아간다" 같은 구절의 상징은 아무래도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 같았습니다. 왜 하필이면 '열 켤레'인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테레민이 악기로 밝혀진 이상 그 전자악기를 사용한 그로테스크한 음악적 인상을 시인이 환상적인 이미지와 상징을 동원하여 그려냈구나 하고 짐작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뭐, 그런 정도의 상상적 즐거움을 주는 것도 이 시의 미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이 시가 과연 좋은 시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이 추구하는 실험적이고 새로운 경향의 맛보기라는 측면에서 나는 이 시를 소개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 시는, 독자에게 상상의 즐거움도 없이 소통을 거부하며 시인 자신만을 위한 엽기적 상상, 또는 요령부득의 공상을 나열하는 다른 시들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습니다.
(2006. 8. 8)
환상의 빛ㅡ 강성은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
삶이 겨냥하는 제일의적 가치는 ‘좋음’으로서의 행복인가? 행복은 어떻게 오는가? 미덕의 실천, 영양섭취, 원만한 인간관계, ‘좋음’을 지향하는 활동의 순조로움 들이 조화를 이룰 때 사람은 행복하다. “가장 고상한 것은 정의이고, 가장 훌륭한 것은 건강이다. 그러나 가장 즐거운 것은 바라던 것을 얻는 것이다.” 델로스 섬의 레토 신전 입구에 새겨진 명구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행복은 다를 바가 없다. 어쩌면 행복은 ‘환상의 빛’인지도 몰라.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는 있지만, 영원히 붙잡아 놓을 수는 없으니까. 장석주(시인)
낙관주의자 ㅡ 강성은
잉어찜을 먹었다 잉어는 아주 컸고 어제까지도 물속을 헤엄쳐 다녔을 거라는 건 생각하지 않았고 저수지의 깊은 물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 내린 비로 물이 불어 잠긴 낮은 지대의 집들과 지붕들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곳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의 연못에는 커다란 잉어 떼가 검은 물속을 무리지어 다녔는데 먹이를 주지 마시오, 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고 하지만 누군가 뭔가 던지기만 하면 탐욕스럽게 달려들었다 어떤 잉어들은 사람의 얼굴을 닮았고 사람보다 오래 살기도 한다고
등 푸른 생선을 먹을 때도 먼 바다를 생각하지 않았고 커피를 마실 때도 커피농장과 그곳의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닭을 먹으며 새들을 생각하지 않았고 소를 먹으며 돼지를 먹으며 생각이란 걸 하지 않았고 먹고 또 먹었다
잉어 가시가 목구멍에 걸렸는데 병원에 가지 않았다 커다란 잉어의 커다란 가시 어떤 의심도 없이 나는 그것을 삼켰는데
검은 물속에서 문득 아름다운 빛깔의 비늘을 드러내 보이며 잉어는 진흙도 먹을 것이다
- 강성은, 『애지, 2015 가을호』 중.
*
항상 거꾸로 가야 해요. 시는 희미한 것을 뚜렷하게 하고,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고, 같은 것을 다르게 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해요. 지금 나는 ‘살아 있다’ 하는 대신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하세요. ‘희망은 절망이다’라고 말하고 나서, 그것을 증명하는 게 시예요.
- 이성복, 『무한화서』 중.
이상하고 아름다운 ㅡ 강성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커튼이 흔들리고 있다 그 틈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금이 간 안경알이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 침대가 있다 그 옆으로 흘러내린 촛농으로 덮인 나무 테이블이 있었다 벽에 걸린 몇 년 전의 달력이, 마룻바닥 위 여행 가방이 입을 벌리고 옷가지들을 쏟아낸 채 잠들어 있었다 천장에는 얼룩덜룩한 곰팡이가 꿈의 무늬를 그려놓고 있었다 방문 앞에 흙 묻은 신발이 뒤집혀 있었다 침대 속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센서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 사람이 오랜 외출에서 돌아왔다. 무엇을 찾아 떠났던 여행이었을까? 방랑이라고 해도 되고 탐색이라고 해도 된다. 근본적으로는 이승에 온 의미를 찾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한옆에서 '빛나고' 있는 '금이 간 안경알'은 치열하게 찾아 헤맨 자의 흔적이다. 몇 년 전의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달력 아래에 잠든, 몇 년 동안 그만큼 낡아진 여행 가방은 이 사람의 초상이라고 해도 되리라. 서글픈 것은 이 사람의 꿈의 무늬가 얼룩덜룩한 곰팡이의 무늬라는 사실이다. 아직 '흙 묻은 신발'이 찾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오랜만의 휴식에서도 울고 있다. 그를 찾아온 이 누구인가? 센서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도록 입구에서 들여다보는 이 누구인가? 그 또한 '나'다. 비로소 저만치 '나'를 보기 시작한 나!
'있다'와 '있었다'의 중첩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나누는 '나'와 나의 대화가 이상하기는커녕 아름답기만 하다. ㅡ 장석남
채광 ㅡ 강성은
창문에 돌을 던졌는데
깨지지 않는다
생각날 때마다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
밤이면 더 아름다워지는 창문
환한 창문에 돌을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
어느 날엔 몸을 던졌는데
나만 피투성이가 되고
창문은 깨지지 않는다
투명한 창문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 있었다
—《시인동네》2016년 여름호
--------------
사운드 ㅡ 강성은
겨울밤
복도에는 복도의 소리
빈방에서는 빈방의 소리가 나고
거울 속에는 거울 속의 소리가 난다
눈길에 장화를 신은 남자가
나무를 끌고 가는 소리
겨울
음악은 사운드지
네가 말했다
쓸모없는 소리
내가 말했지
너의 불안에도 소리가 있어
귀뚜라미 소리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누가 오나 보다
—《세계의 문학》2015년 겨울호
---------------
동물원 ㅡ 강성은
비가 내렸다
홍학도 원숭이도 사자도 기린도 라마도 하마도 물개도
늑대와 너구리와 수달도
비를 보지 못했다
해도 보지 못했다
실종된 아이들이
동물원에서 살고 있다는 소문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으러
눈멀고 귀먹은 백발의 노인들이
동물원 더 깊숙이 들어갔다
작년에 탈출했던 곰이 돌아왔다
작년에 사자에게 물려 죽은 조련사도 돌아왔다
동물원 밖에도 동물이 있다고
동물원 밖에도 동물원이 있다고
신들이 사라지고 나선
이제 인간이 사라지는 일만 남았다고
—《애지》2015년 가을호
----------------
개를 산책시키는 노인에 관한 영화 ㅡ 강성은
개는 줄에 매여 있었다
노인은 무언가에 끌려가는 듯했다
그는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였는데
바람이 불자 나뭇잎도 떨어졌다
눈이 내려도 개는 짖지 않았다
거센 눈보라가 치자
그들의 모습은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백치의 백지처럼
파동과 입자로 오는 빛처럼
알 수 없는 자막이 계속되었다
—《詩로 여는 세상》2015년 봄호
---------
겨울이 온다 (외 1편) ㅡ 강성은
11월에는 새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새 형제들이여, 라고 말했지
나는 해를 보고 환희에 차서
얼음 속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
검은 달의 허밍을 하루 종일 들었네
누군가는 내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찬비가 내리면
목이 긴 새처럼
침묵하는 사람들
그리고 쓸쓸한 겨울이 온다
보자기를 쓴 늙은 여인이 광장을 백 년째 돌고 있다
교회 꼭대기의 다락방
하느님은 거기 계실까
—《문학과 사회》2015년 봄호
밤의 광장
검고 푸른 밤이었다 길을 걷다 광장에 이르렀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광장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광장은 넓고 고요하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광장의 침묵 속에 한참 서 있다가 광장을 가로질러 작은 샛길로 들어갔다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들과 처마를 지나 불 켜진 창을 지나 교회와 상점들을 지나자 또다시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은 여전히 고요했고 바닥에 버려진 깃발들과 전단지들이 굴러다녔다 진흙과 피의 냄새가 공기 중에 스며 있었고 어디선가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개 울음소리인지 고양이 울음소리인지 사람의 울음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에 나는 급히 광장을 빠져나왔다 길은 이어져 있었고 이 길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불 꺼진 시장을 통과해 학교와 약국과 정류장을 지났는데 내 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좁은 골목들과 창문들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자 다시 광장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 시체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내 가족들과 친구들과 꿈속에서 보았던 사람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끝에는 내가 누워 있었다 나는 나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그는 뜨거웠고 내 손은 차가웠다 죽어 있는 것은 나였다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죽었다는 게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부르던 노래가 떠올랐다 이 광장을 벗어날 수가 없구나 이 노래는 끝나지 않는구나 매일 밤 모든 길은 광장으로 이어졌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그랬다
—《창작과 비평》2015년 봄호
단편 같은 장편 / 강성은
아버지를 아저씨로 부르거나 아저씨를 아버지로 부르는 일 그게
뭐 별건가 아줌마를 어머니로 부를 수도 어머니를 아줌마로 부를
수도 있는 걸 그리고 아줌마와 아저씨와 함께 살 수도 가족이 될 수
도 있다 아줌마와 아저씨는 날 사랑할 수도 있고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나를 학대하고 어둠 속에 혼자 내
버려두기도 한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줌마
와 아저씨,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외롭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은 밤
마다 잠꼬대를 한다 그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말 잠이 아니라면 하
지 못하는 말 그들이 되고 싶었던 건 아저씨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
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닌 걸 그들이 되고 싶었던 건 음
악이나 달, 혹은 쏟아지는 눈이나 나무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 무엇으로 불려도 상관없지만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다 그
러니까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아버지를 아저씨로 부르거나
어머니를 아줌마로 부르거나 아줌마를 어머니로 부르거나 이런 일
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가끔 박쥐라고 부르거나 굼벵이라고
부르거나 아메바로 부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진짜 아무 일도)
- 2015년 <시로 여는 세상> 봄호
-------------
악령 (외 1편) ㅡ 강성은
포로가 된 것은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포로가 되었다 내 손과 발이 호송줄에 묶여 있었다 나처럼 묶인 자들이 줄지어 걷고 있었다 저항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러나 우리는 끌려가고 있었다 숲속의 작은 길이었다 키 큰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고요하고 서늘했다 우리는 어디론가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우린 끝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다른 누군가 말했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린 이미 죽은 시체들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배불리 먹고 잠들면 그만이라고 또 누군가 말했다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이었는데 생각하는 사이 금세 무릎까지 쌓인 눈을 밟고 있었다 여전히 묶인 채로
그곳은 평화롭겠지
이대 앞에 살 때 자주 봤던 두 사람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처럼 머리를 세운 거구의 남자
한여름에도 오리털잠바를 입고 있던 까만 맨발 여자
전철역 주변을 서성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가끔 하늘을 보며 히죽이죽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밤이 되면 저들은 어디로 돌아가는지
밤이 되면 저들의 눈은 무엇을 보는지
언젠가 꿈속에서 나는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거나 발로 차기도 했는데 어떤 낯선 얼굴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 눈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왜인지 나는 일어날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그때 하늘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새들은 멀리로 날아가고
왜인지 밤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곳은 평화롭겠지
—《현대시》2015년 1월호
-------------
단지 조금 이상한 (외 3편) ㅡ 강성은
아직 이름이 없고 증상도 없는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 땐 멈춰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 생동하는 세계와 같은
단지 조금 이상한 병처럼
단지 조금 이상한 잠처럼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계절처럼
슬픔도 없이 사라지는
위에서 아래로 읽는 시절을 지나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읽는 시절을 지나
이제는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관해진
노학자의 안경알처럼 맑아진
일요일의 낮잠처럼
단지 조금 고요한
단지 조금 이상한
ㅡㅡㅡㅡㅡ
꼭 명백할 필요가 있을까. 앞에서부터 읽고 뒤에서부터도 읽어본다. 아니 읽고 싶은 구절만 발췌해 마음대로 조합해서 읽어본다. 어떤 가독의 원리가 끼어들더라도 비슷한 느낌으로 우리를 흔들고 있다. 굳이 서술어와 결합하지 않아도 강성은의 세계는 이렇게 열린다. 마치 바람 부는 창에 펄럭이는 커튼처럼 창밖의 풍경을 잠깐, 잠깐 보여주며 “단지 조금 이상”하게 열린다. 순서나 질서, 관념에도 구애받지 않고 시인은 이미 감정적 호소를 포기한 채 친밀한 손을 내밀고 있다.
강성은의 세계는 슬픔도, 증상도, 시간도, 질서도 포기해버린 경미한 흔들림의 세계이다. 의도된 답이 없고 끝과 한계도 없는 홀연 이곳을 흔들고만 가는 매혹의 세계. 시가 가진 어떤 비밀스러운 발화점을 말하고 있는 이 시를 각자 ‘단지 조금 이상하고 엉뚱하게’ 읽어보자. 아무런 구속도 없이, 원인도 없이, 우리가 우리를 흔들어보도록.ㅡ 박성준 (시인, 문학평론가)
기일(忌日)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겨울밤 왕의 잠은 쏟아지고
겨울의 긴 왕국에서
왕은 침대 속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내들이 줄줄이 죽고
일 년 내내 제사를 지내야 했지만
잠은 쏟아지고
그 누구도 왕의 슬픔에 다가가지 못했지만
백성들은 왕을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왕이 없으면 왕국도 없는데
잠은 쏟아지고
겨울이 없으면 봄도 없다고
잠이 없으면 꿈도 없다고
파도처럼
잠은 쏟아지고
이 겨울밤의 이상함은 어디서 오는가
잠든 왕의 슬픔이 도처에서 쏟아지는데
인테리어
아름다운 북유럽 가구들처럼
겨울에 더 빛나는 흰 자작나무처럼
낡은 아파트에서 담요를 두른 맨발의
가난한 음악가처럼
가구들을 이리저리 옮겨 보는
겨울밤 복도에는 발 없는 유령들이 걸어 다니고
차갑게 식은 욕조 속에서 나는
타일 위에 가고 싶은 나라의 지도를 그렸다
빛이 통과하는 물속처럼
겨울 공원 벤치처럼
어디에도 없는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지도 위로 매일 눈은 내리고
—시집『단지 조금 이상한』(2013)
------------
객차 ㅡ 강성은
승객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창밖은 빠르게 지나가는 겨울 나는 혼자 깨어있다 끝없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화장실에 다녀왔을 뿐인데 내 자리는 보이지 않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길을 잃었다 맨 끝 칸으로 갔다가 반대로 돌아오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끝에 다다른 곳은 기관실이었다 그곳에 기관사가 잠들어 있었다 그의 주위로 쐐기풀이 무성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곧 뛰쳐나와 모든 객차를 뒤덮을 것만 같았다 나는 문을 닫고 돌아섰다 기차는, 우리는 지금 어디로 달리고 있는 걸까 반대편 끝으로 가야 하는데 아무리 걸어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승객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빈자리가 있어 나는 그곳에 쓰러지듯 앉았다 눈을 감았다
—《포지션》2013년 가을호
------------
강성은 /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문학동네》로 등단.
계면(界面) ㅡ 강성은
k는 죽은 후에도 가끔 산책을 한다
p는 죽은 후에도 가끔 시를 쓰고 담배를 핀다
L은 술을 마시고 꿈도 꾼다
어제는 오래 전 죽은 친구를 만나 강에서 수영을 했는데
죽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b는 살아있는 사람인 척 온종일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옆 테이블에서 떠드는 사람들도
살아있는 척하느라 그런 것 같았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죽은 사람인지 산 사람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m은 아이를 낳고 나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은 잊기로 했다
생각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h는 죽은 애인과, y는 산 애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했다
g는 죽었다가 일 년에 한 번씩 깨어나
자신의 개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다시 죽었다
z는 매일 해산물 요리를 먹으며
죽어서도 이걸 먹을 수 있다면 죽음 따윈 문제될 게 없다고 확신했다
w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오직 완전한 죽음을 바랐다
한밤중 불 켜진 사무실
n은 매일 밤 야근을 했다
그러다 책상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깨면 다시 야근이 시작되었다
불 꺼진 시장에서 버려진 야채를 줍던 노파는
늘어선 천막과 전깃줄 위로 가득 내려앉은 검은 까마귀 떼를 보고
두려워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면
죽음이 무슨 소용인가요
가수는 노래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죽고 죽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 노래하고
s는 어제 쓴 일기를 반복해 써내려가고
c는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을 매일 베껴 적는다
불행한 일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불운한 날들이 빛처럼 쏟아져 내려도
도시가 잠기도록 비가 내려도
—《문장웹진》2017년 7월호
계면
1
서로 맞닿아 있는 두 물질의 경계면.
2
<물리>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가지 상(相)의 경계면.
3
<음악> [같은 말] 계면조(국악에서 쓰는 음계의 하나).
---------------
계면(界面) ㅡ 강성은
서로 맞닿아 있는 두 물질의 경계면.
현 사회가 이렇다고 고발하는 시
k는 죽은 후에도
가끔 산책을 한다
가끔 시를 쓰고 담배를 핀다
술을 마시고 꿈도 꾼다
어제는 오래 전 죽은 친구를 만나 강에서 수영을 했는데
죽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살아있는 사람인 척 온종일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옆 테이블에서 떠드는 사람들도
살아있는 척하느라 그런 것 같았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죽은 사람인지 산 사람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아이를 낳고 나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은 잊기로 했다
생각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죽은 애인과, y는 산 애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했다
죽었다가 일 년에 한 번씩 깨어나
자신의 개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다시 죽었다
매일 해산물 요리를 먹으며
죽어서도 이걸 먹을 수 있다면 죽음 따윈 문제될 게 없다고 확신했다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오직 완전한 죽음을 바랐다
한밤중 불 켜진 사무실
매일 밤 야근을 했다
그러다 책상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깨면 다시 야근이 시작되었다
불 꺼진 시장에서 버려진 야채를 줍던 노파는
늘어선 천막과 전깃줄 위로 가득 내려앉은 검은 까마귀 떼를 보고
두려워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면
죽음이 무슨 소용인가요
가수는 노래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죽고 죽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 노래하고
어제 쓴 일기를 반복해 써내려가고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을 매일 베껴 적는다
불행한 일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불운한 날들이 빛처럼 쏟아져 내려도
도시가 잠기도록 비가 내려도
ㅡㅡㅡㅡㅡㅡㅡㅡㅌㅡㅡㅡㅡㅡㅡ
이번 시집에서 강성은은 기존에 보여주었던 초현실적 상상력을 뒤틀어 현실 세계를 내파하는, 그리하여 미세한 균열을 통과해 자신만의 불가해한 시공간을 탄생시키는 데 이르렀다. 시인은 Lo-fi(로파이)라는 ‘저음질’을 뜻하는 음향 용어에 걸맞게 독자들을 한순간에 정체불명의, 나직하고 깊은, 확신이 불가능한 시공간으로 데려다놓는다.” _출판사의 책 소개
섣달그믐 (외 3편) ㅡ 강성은
고양이가 책상 위에 잠들어 있다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아
나는 따뜻한 음식을 만들기로 한다
손에 든 감자 자루를 놓치자
작은 감자알이 끝도 없이 굴러 나온다
쏟아지는 감자를
어찌할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라디오가 켜지고
어제 들었던 노래가 흘러나와
밖에선 종말처럼 어두운 눈이 내리고 있고
나는 이제 잠에서 깨버릴 것 같은데
집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고양이가 너무 오래 잔다
Ghost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땐 죽은 여자 같더니
죽고 나선 산 여자처럼
밤의 정원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닌,s 작은 새처럼
밤하늘을 떠다니는 검은 연처럼
장갑을 끼면 손가락이 생겨나고
양말을 신으면 발가락이 생겨나고
모자를 쓰면 머리가 생겨난다
책을 읽으면 눈이 생겨나고
음악을 들을 땐 귀가 생겨나고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면 입술이 생겨나는데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입이 있어도
말은 못한다
카프카의 잠
그는 야근을 하고 있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라고 쓰자 그는 잠이 쏟아졌다
그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뒤적이고 있을 때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이 야심한 시각에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이 누굴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어가 문을 열어주려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굳게 잠긴 문을 열어보려 애쓰다 이 문은 밖에서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심히 문을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두드려 보았다 똑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갇힌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밤에
눈 내리는 사무실에
어마어마한 눈이 쏟아지고 쌓이고 있는데
건물이 눈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그는 나가지도 못하고
그를 도와주러 올 이 하나 없는 것이다
저 눈을 멈추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흰 눈은 펑펑 쏟아지고
누구도 저 희고 무서운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
그가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가 삶을 포기하고 나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
모든 일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채광
창문에 돌을 던졌는데
깨지지 않는다
생각날 때마다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
밤이면 더 아름다워지는 창문
환한 창문에 돌을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
어느 날엔 몸을 던졌는데
나만 피투성이가 되고
창문은 깨지지 않는다
투명한 창문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 있었다
⸺시집『Lo-fi』(2018. 6)에서
-----------
강성은 /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단지 조금 이상한』 『Lo-fi』.
강성은/ 섣달그믐 …새 시집 『Lo-fi』에서 네 편. “이번 시집에서 강성은은 기존에 보여주었던 초현실적 상상력을 뒤틀어 현실 세계를 내파하는, 그리하여 미세한 균열을 통과해 자신만의 불가해한 시공간을 탄생시키는 데 이르렀다. 시인은 Lo-fi(로파이)라는 ‘저음질’을 뜻하는 음향 용어에 걸맞게 독자들을 한순간에 정체불명의, 나직하고 깊은, 확신이 불가능한 시공간으로 데려다놓는다.” _출판사의 책 소개 글에서
유령선 ㅡ 강성은
우린 다 죽었지
그런데 우리가 죽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우린 이미 죽었어요
말해도 모른다
매일 갑판을 쓸고 물청소를 하고
죽은 쥐들과 생선, 서로의 시체를 바다로 던져버리고
태양을 본다
태양은 매일 뜨지
태양은 죽지 않아
밤이면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죽음 이후에도 먹고 자고 울 수 있으며
울어도 바뀌는 건 없으며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검은 쌀과 검은 물과 검은 밤의 폭풍을 오래오래
이가 녹아 사라질 때까지 씹는다
침수와 참수와 잠수의 밤
언젠가 우린 같은 꿈을 꾸었지
아주 무서운 꿈이었는데
꿈에서 본 것을 설명할 수 없어
잠에서 깬 우리는 모두 울고 있었다
아침이면 다시 태양 아래 가득 쌓여 있는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
풍랑을 일으킨 거센 비바람은
누군가의 주문이었다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의 출항은 순조로워 보였는데
날씨는 맑았고
우리가 당도할 항구의 날씨는 더 맑고 따뜻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와 너의 그의 그녀의 너희의 그들의 우리의
아주 무서운 꿈속에서
그곳에 당도하기를
우린 아직도 바라고 있구나
이제 우리 자신이 무서운 바다의 일부인 줄도 모르고
환상의 빛 ㅡ 강성은
아침에 자기 이불을 팔고
저녁에 울면서 다시 그것을 사러 온 사람처럼
눈알을 잃어버린
맥베스의 마녀들처럼
자신의 그림자를 피해
끝없이 달아나는 사람처럼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려고
한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니던 여자처럼
불 꺼진 사무실에 갇힌
내일의 유령처럼
한여름에 흩날리는 눈처럼
두 사람이 숲으로 들어갔는데
한 사람만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처럼
Ghost ㅡ 강성은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땐 죽은 여자 같더니
죽고 나선 산 여자처럼
밤의 정원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는 작은 새처럼
밤하늘을 떠다니는 검은 연처럼
장갑을 끼면 손가락이 생겨나고
양말을 신으면 발가락이 생겨나고
모자를 쓰면 머리가 생겨난다
책을 읽으면 눈이 생겨나고
음악을 들을 땐 귀가 생겨나고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면 입술이 생겨나는데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입이 있어도
말은 못한다
⸺시집 『Lo-fi』 (2018. 6)에서
------고스트 ㅡ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읽습니다. 여자는 밤의 정원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작은 새 같습니다. 여자가 하는 일은 죽어서나 살아서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장갑을 끼면서는 손가락을 사랑하지요. 양말을 신을 때면 발가락을 사랑해요. 책을 읽을 때면 눈을 사랑하고 음악을 들을 때면 귀를 사랑해요.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를 때면 입술을 사랑하지요. 그런데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지 못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있으므로 삶은 조금씩 따뜻해지고 죽음은 사과향이 나는 그늘을 지닐 것입니다. 내게 그 말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곽재구 (시인)
------
소설小雪 ㅡ 강성은
꿈에서 배를 가르자
흰 솜뭉치가 끝없이 나왔다
겨울이면 옷 속에 새를 넣어 다닌다는 사람을 생각했다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손님 ㅡ 강성은
부스럭 문이 열리고
그가 가방을 열고 모래를 꺼낸다 가방에서 모래가 끝도 없이 나온다 어디 먼 곳 해변에서 담아 온 걸까 내 방에 해변을 옮겨놓기라도 할 작정인지 모래는 스르르 사르르 르르르 내 귓속으로도 쌓인다 나는 눈과 코와 입이 사라지고 귀만 남는다 귀는 점점 더 넓어진다 그가 가져온 모래를 다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모래는 곱고 부드럽다 어제의 공기 내일의 냄새 그의 손은 아주 크다 눈과 코와 입이 없어도 알 수 있다 그가 나를 해변에 묻고
나는 모래 속에 잠기고
모래가 내 속에 잠기고
얼굴이 사라져간다 그사이
그가 내 얼굴을 훔쳐 간 것 같아
미닫이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고
마당 자갈 밟는 소리
멀어져간다
Lo-fi ㅡ 강성은
친구는 우울하다고 했다
친구여 오늘은 내가 옆에 있어줄게
하지만 내가 옆에 있어도
우울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갔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았다
다음 해 극장은 사라지고
밤새 불 켜진 쇼핑센터가 되고
혼자 온 사람은 텅 빈 커다란 카트를 끌고 돌아다닌다
쇼핑센터는 예식장이 되고
예식장은 병원이 되고
병원은 주차장이 되고
주차장은 유치원이 되고
유치원은 납골당이 되고
우리는 납골당에 갔다
친구는 여전히 우울해 보였다
여기도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어두운 한낮
파도가 출렁이는 소리
들으며 오래 누워 있었다
어떤 나라 ㅡ 강성은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았다
어젯밤의 그 나라를 생각했다
나는 원주민이었을까 이주민이었을까
나는 왜 그 나라를 떠나지 않았을까
모두가 떠난 그 나라를
생각에 잠겨 있는데
까마귀 소리는 계속 들리고
까마귀 소리는 아주 검고
까마귀 소리는 하나의 점이 되고
그 나라의 공중을 맴돌고
눈을 떠도 어찌 된 일인지
까마귀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시집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2018. 8)에서
------------
강성은 /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시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단지 조금 이상한』『Lo-fi』『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개의 밤이 깊어지고 ㅡ 강성은
개가 코를 곤다 울면서 잠꼬대를 한다 사람의 꿈을 꾸고 있나 보다 개의 꿈속의 사람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개가 되는 꿈을 꾸고 울면서 잠꼬대를 하는데 깨울 수가 없다
어떤 별에서 나는 곰팡이로 살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곰팡이로서 살아 있다는 것이 슬퍼서 엉엉 울었는데 아무도 깨울 수가 없었다
개는 나를 바라보는데
깨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계간 《시인수첩》 2019년 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