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소동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석곤
새벽 2시 40분 대한리무진 버스로 인천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15박 16일간 서부유럽 10개국 여행은 시작됐다. 10m쯤 가다가 차가 멈추었다. 뒤차를 타야 할 승객이 차를 세운 게다. 그때 아내는 나에게 물어보았다.
"환전한 돈 가져왔어요?"
깜짝 놀랐다, 서로 눈만 쳐다보며. 다 챙겼는데 그것만 빼놓았다.
그저께 예매한 승차권은 내 지갑에 넣어두었다. 환전한 달러와 유로화는 통장을 보관한 가방에다 넣어두고는 깜박한 것이 아닌가? 아내는 그것도 모른 채 그 가방을 장기간 외출할 때 자기만의 비밀 금고에다 두고 나왔다. 가슴팍은 더 두근거렸다. 일단 내렸다.
아내더러 승차권을 다음 차로 바꾸라 해놓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날 기다리고 있는 심야 택시가 고마웠다. 난폭운전이라도 해서 빨리 가길 바랐는데 모범기사였다. 차를 고샅에 세워 두고, 환전한 돈이 든 하얀 봉투를 바로 찾았다. 그건 평소에 아내와 대화의 덕을 본 게다. 아내는 두 번이나 전화하며 나의 동선(動線)을 살폈다. 터미널에 가는데 다행히 녹색 신호등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차를 타고 숨을 고르면서 익산 나들목 곁 정류소에 갔다. 승객들이 몰려 한 좌석만 남았다. 소장이 한 사람은 내리라고 다그쳤으나 막무가내였다. 뒤차 석 대가 빈 좌석이 없다고 해서 더 그랬다. 겨우 바닥에 앉기로 하고 차는 출발했다. 염치불고하고 뒷자리 앞의 바닥 계단에 앉아 통로를 바라보았다. 중년 아주머니 앞이었다. 뒷자리는 오빠, 언니를 부르는 게 친척 일행인 것 같았다. 꼭두새벽이라 눈을 감았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낯선 아주머니 앞이라 몸을 가누기가 조심스러웠다. 잠도 그걸 눈치를 챘을 거다. 그 아주머니도 깊은 잠이 들지 못했을 것 같아 미안했다. 퍼뜩 꾀가 생겼다. 천안휴게소에 가서 아내를 뒷자리로 오라고 했다. 아내 양다리에 엉덩이를 대고 몸을 기대니까 갈 만했다. 잠도 들다 깨다를 서너 번 반복했다. 빨리 어둠이 거치길 기다렸다. 기사는 내 맘을 아는 듯 시간을 앞당기려 서울 올림픽대로를 지나 힘차게 달렸다.
가끔 마트에 가면 아내를 따라 카터기를 밀고 다니며, 진열된 상품을 기웃거리다가 고객들이 상품을 고르는 모습을 본 게 생각났다. 어쩌다 아가씨와 젊은 아주머니들이 메모 쪽지를 가지고서 연필로 표를 하며 물건을 고를 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곧바로 아내에게 저걸 보라며 재촉하기도 했다. 총각이나 젊은 남편들이 메모 쪽지를 가지고 돌아다니면 더 눈여겨 보았다. 삶의 지혜를 일찍 깨달아 사는 게 장하게 여겨졌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지만 감사한 건 출발할 때 실수를 발견한 것이다. 만약 가다가 또는 공항에 가서 알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도 했다. 김포공항에 닿았다. 가는 손님은 뒤통수가 예쁘다더니, 내리는 승객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영종대교를 달렸다. 어둠은 다 물러갔는데 바다에서 잠을 잔 안개가 다리 위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좌석에 앉으니 피로가 싹 가셨다.
생물의 생존경쟁 결과,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는 현상을 적자생존(適者生存)이란 말로 표현한다. 지금은 그 말을 '종이에 적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가 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웃어보자고 하는 억지 풀이인데도 그게 나를 두고 말한 것 같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S 대선배님께서 5,60대 때의 생활의 지혜를 보곤 했었다. 재활용 판지로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한 카드를 만들어 날마다 할 일을 메모해 놓고, 그 일을 다 했을 때는 선을 긋고 남은 일은 확인하셨다. 그때는 그분의 버릇이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내가 가져야 할 생활 지혜였다.
여행 준비물 목록을 적어두고 확인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성싶다. 아내가 여행지와 여행상품 선정부터 모든 걸 정하고 준비도 다 했다. 내가 맡은 건 겨우 여행비 계좌이체와 공항까지 승차권 예약 그리고 환전한 것뿐이었는데도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드디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인솔자와 만남의 시간이 한 시간 남짓 남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총명(聰明)이 둔필(鈍筆)만 못하다는 속담이 내 머리에 맴돌았다.
(2016.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