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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도인촌으로 유명한 청학동은 본래 ‘학동’이었던 지명을 개명한 곳으로 여길 최치원 선생이 말한 청학동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많지 않다.
그럼 청학동은 어디인지에 대해 의견들이 많지만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이상세계, 유토피아이다.
그럼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예전부터 이상향은 있었겠지만 청학동이란 명칭은 최치원선생으로 부터 출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생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유자로 보는 사람도 있고, 도교적인 측면에선 신선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 둘의 분기점에 청학동이란 명칭이 생겼다고 봅니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높은 벼슬에 올라 귀국했지만 골품제도와 기울어져 가는 국운에 한직을 자청한다. 그가 품었던 뜻을 펼치기도 전에 현실의 높은 벽에 막혀 좌절을 했고, 그리하여 고운(孤雲)이란 호도 지었을 것이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하는것 만큼 스트레스가 큰게 없다. 비젼없는 일을 매일 반복해야 한다면 더 그랬을 것이다.
북극의 두꺼운 얼음속을 누비는 물범이 호흡할수 있는 작은 숨구멍이 필요하듯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삶의 휴식처이자 도피처인 청학동이 필요했을 것이다.
선생은 쌍계사와의 인연이 깊다. "쌍계석문" 석각과 "당해동고진감선사비"는 진성여왕 원년(887)에 선생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고, 호중별천<壺中別天>이란 시에서도 화개동을 노래한다.
불일폭포로 오르는 길에 환학대에서 학을 타고 청학동으로 들어갔다하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후 이인로를 필두로 최치원의 흔적을 따라 청학동을 현실의 세계에서 찾고자 노력하였으며 현재까지 위치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네곳이 있다.
1. 불일평전(이인로外 다수)
2. 세석평전(류겸암일기)
3. 악양 매계마을(이중환택리지)
4. 덕평고원
그들 각각이 주장하는 이유에는 모두 타당성이 있고 모두 공통점은 넓은 곳이라는 것이다.
최치원은 불일암 앞쪽에 "완폭대"에 앉아 폭포를 감상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그를 추종하던 유자들은 불일폭포 주변의 빼어난 경치에 반해 불일평전 주위를 고운 선생이 말한 청학동이라 생각했다.
이청련청학동기와 류겸암일기에 주장하는 세석평전은 고원지대 이면서도 특이하게 잔돌이 펼쳐진 지형이고 물이 많은 곳이다. 두사람의 자료를 살펴보면 형태가 비슷하며 동시대에 살았거나 후답자가 선답자의 자료를 보고 참고를 했다고 본다.
현대에 들어와 이 두편의 글을 읽고 세석에 있던 인공연못에 "청학연못"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우를 범한다.
악양은 추강 남효온 선생의 유산기에 잠깐 언급도긴하지만, 되를 뿌리면 섬으로 거둘수 있는 곡창지대이며 백운산을 안산으로 두었다고 류겸암 선생이 등산구로 사용한 곳이라 현대에 들어서 여러가지를 종합해서 나온 후보지로 정한것이라 생각이든다.
덕평고원은 옛마을이 있었고 넓은 평원에 토질이 좋으며 서산대사의 당취들이 의신을 비롯한 이곳 고원에서 훈련을 받거난 은둔생활을 하던곳이며 마을 중심에는 천우동 석각이 남아있다. 주변에 험난한 검각(도덕봉)이 있어서 범인의 접근도 어려운곳이라 이곳을 이상향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청학동은 어디인가요?
최치원 선생이 말한 청학동을 묻는다면 불일평전일 것이고, 내마음속의 청학동은 추억이 있는 영랑대나 중봉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람록과 문헌에 나오는 청학동>
●불일평전 일원(8편수록)
1.이인로(1152~1220)_청학동기
지리산은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금나라 영내의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과 꽃받침처럼 잘 어우러진 봉우리와 골짜기가 면면히 이어져 대방군(帶方郡)에 이르러서 천 리에 서리어 맺히었다. 이 산 주위에 10여 고을이나 있는데, 한 달 이상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노인들이 전하기를 “이 산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사람이 겨우 다닐 만큼 길이 매우 좁아서 겨우 통행할 만하다. 구부리고 기어서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마을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좋은 농토로 땅이 비옥하여 농사짓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곳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그 동네를 청학동이라 부른다. 옛날 속세를 등진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집터가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예전에 나는 집안의 형 최상국(崔相國)과 함께 영원히 속세를 떠날 뜻이 있어서, 이 고을을 찾기로 약속하였다. 살림살이를 담은 대고리짝을 두세 마리 소에 싣고 들어만 가면, 세속과 멀어질 수 있으리라 여겼다.
마침내 화엄사(華嚴寺)에서 출발하여 화개현(花開縣)에 이르러 신흥사(神興寺)에서 묵었다. 지나는 곳마다 선경(仙境) 아닌 데가 없었다.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가 다투듯 빼어나고 다투듯 흘러내리며, 대울타리 초가집이 복사꽃에 보일 듯 말 듯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이른바 청학동은 어딘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지어 바위에 새겨 놓았다.
“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 구름은 낮게 깔려/ 천만 골짜기와 봉우리 회계산(會稽山) 같네/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 찾아가니/ 숲 속에선 부질없이 원숭이 울음소리뿐/ 누대에선 삼신산(三神山)이 아득히 멀리 있고/ 이낀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쌍계석문??)/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디멘가/ 꽃잎 떠오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예전에 서루(書樓)에서 우연히 『오류선생집(五柳先生集)』을 뒤적이다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있기에 반복해 읽어 보았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대개 진(秦)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처자를 거느리고 산과 물이 겹겹이 둘러쳐져 나무꾼도 갈 수 없는 깊숙하고 외진 곳을 찾아가 그곳에서 살았다. 진나라 태원 연간에 어떤 어부가 요행히 한 번 찾아갔으나, 사람들이 그 다음엔 길을 잃어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와 시로 전하였는데, 도원을 선계로 여겨 우거표륜(羽車飇輪)을 타고 다니며 장생불사하는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는 「도화원기」를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니, 실은 저 청학동과 다름없는 곳이리라. 어찌하면 유자기(劉子驥) 같은 고상한 선비를 만나 그곳에 한번 가볼 수 있을까?
2. 1487년_남효온_지리산일과
1487년 10월 9일 을해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시내를 건너니 양쪽에 문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글자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이 글씨는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손수 쓴 것이다. 석문 안쪽으로 1, 2리쯤에 쌍계사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청학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니, 의문이 말하기를, “석문 밖 3, 4리 못 미쳐 동쪽에 큰 동네 가 있는데 그 동네 안에 청학암(靑鶴庵)이 있으니 아마도 그곳이 옛날의 청학동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 찾고자 하니, 숲 속에선 부질없는 원숭이 울음소리뿐이구나. 누대에 삼신산(三神山)이 아득하게 있고, 이끼 낀 바위엔 네 글자만 희미하구나.”라고 하였으니, 그는 성문 안 쌍계사 앞쪽을 청학동이라고 여긴 것은 아닌가. 쌍계사 위 불일암 아래에 청학연(靑鶴淵)이란 곳이 있으니, 이곳이 청학동인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3. 1588년 조식 유두류록
1588년 4월19일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그제서야 불일암에 도착하였는데, 바로 청학동이다. 암자는 허공에 떠있는 듯하여 아래로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동쪽으로 높고 가파르게 솟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香爐峯)이고, 서쪽으로 푸른 벼랑을 깎아내어 만 길 절벽으로 우뚝 솟은 것은 비로봉(毘盧峯)으로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여 살면서 때때로 날아올라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아래에는 학연(鶴淵)이 있는데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였다. 좌우 상하에는 절벽이 빙 둘러 있고, 층층으로 이루어진 폭포는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쏟아져 내리다가 합쳐지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수초가 우거지고 초목이 무성하여 물고기나 새도 왕래할 수 없었으며,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왕래할 수 없는 약수도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바람과 우레 같은 폭포 소리가 서로 얽혀, 천지가 개벽하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 안에 신선, 거령, 큰 교룡, 작은 거북 등이 살면서 영원히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잘라 다리를 만들어, 겨우 그 초입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낀 돌에는 ‘삼선동’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옹과 내 동생 및 원생 등 몇 사람이 나무를 부여잡고 내려가 배회하며 이리저리 둘러보고서 올라왔다. 나이가 어리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은 모두 향로봉에 올랐다. 돌아와 불일암에 모여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절문 밖에 있는 소나무 아래로 나와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음껏 술을 마시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그 소리가 암자 주위에 울려 퍼지고 산봉우리에도 가득하였다.
동쪽으로 있는 폭포는 나는 듯 백 길 낭떠러지로 쏟아져 학담(鶴潭)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우옹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물이란 만 길의 골짜기를 만나면 아래로만 곧장 내려가려고 하여, 다시는 의심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려가니, 이곳이 바로 그곳이네.”
라고 하였더니, 우옹이 말하기를,
“그렇네.”
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였지만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뒤쪽 능선으로 올라가 두루 지장암(地藏菴)을 탐방하니 모란이 활짝 피어있었다. 한 송이가 한 말 정도가 되는 붉은 꽃이었다. 이곳에서 곧바로 내려가 한 번에 몇리를 가서야 겨우 한 차례 쉴 수 있을 정도로 가파랐다. 양의 어깻죽지를 삶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쌍계사로 돌아왔다. 처음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더니, 아래쪽으로 내려올 때에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내려갔다. 그러니 어찌 선(善)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惡)을 따르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쉽지 않겠는가.
인숙과 강이가 팔영루(八詠樓)에 올라 우리를 맞이하였다. 저녁에 인숙, 우옹과 함께 다시 절 뒤채의 동쪽 방장의 방에서 잤다.
4. 1640년_허목_지리산 청학동기
1640년(인조 18) 9월 3일
남방의 산 중에서 지리산이 가장 깊숙하고 그윽하여 신산(神山)이라 부른다. 그윽한 바위와 뛰어난 경치는 거의 헤아릴 수 없는데 그중에서도 청학동(靑鶴洞)이 기이하다고 일컫는다.
이것은 예부터 기록된 것이다. 쌍계(雙溪) 석문(石門) 위에서 옥소(玉簫) 동쪽 구렁을 지나는 사이는 모두 깊은 물과 큰 돌이라 인적(人跡)이 통하지 못한다. 쌍계 북쪽 언덕을 좇아 산굽이를 따라서 암벽을 부여잡고 올라가 불일전대(佛日前臺) 석벽 위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향하여 서면, 곧 청학동이 굽어보인다. 돌로 이루어진 골짜기에 가파른 바위요, 암석 위에는 소나무ㆍ대나무ㆍ단풍나무가 많다. 서남쪽 석봉(石峯)에는 옛날 학 둥우리가 있었는데, 산중의 노인들이 전하기를,“학은 검은 깃, 붉은 머리, 자줏빛 다리로 생겼으나 햇볕 아래에서 보면 깃이 모두 푸르며, 아침에는 빙 돌아 날아올라서 하늘 높이 갔다가 저녁에는 둥우리로 돌아오곤 했는데, 지금 오지 않은 지가 거의 백 년이 된다.”하였다. 그리하여 봉우리를 청학봉(靑鶴峯), 골짜기를 청학동이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峯)을 마주하고, 동쪽은 석봉(石峯) 셋이 벌여 솟았으며, 그 동쪽 구렁은 모두가 층석기암(層石奇巖)인데 어젯밤 큰비로 폭포수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그 대(臺) 위의 돌에는 완폭대(玩瀑臺)라고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못이 있다.
숭정 13년(1640, 인조18) 9월 3일에 나는 악양(嶽陽 하동(河東) 악양(岳陽))에서 섬진강(蟾津江)을 거슬러 올라가 삼신동(三神洞)을 지나 아침에 쌍계의 석문을 보고, 또 쌍계사(雙溪寺)에서 최학사(崔學士 최치원(崔致遠))의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를 관람하였는데, 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끼 사이로 보이는 문자를 읽을 수 있었다. 이어서 불일전대에 올라가 청학동기(靑鶴洞記)를 지었다.
5. 1651년_오두인_두류산기(頭流山記)_
1651년1651년 11월 2일
스님 수 십 명이 이곳까지 마중 나왔다. 말에서 내렸다. 앉아서 계곡과 산을 두루 살펴보니 계곡은 물이 발원하는 곳이 두 개 있다. 신흥동과 의신동에서 내려오는 것은 우계(右溪), 불일동과 청학동에서 내려오는 것은 좌계(左溪)이다. 두 물줄기가 여기서 합류하고 절은 그 사이에 있다. ‘쌍계’라고 부른 것은 그런 까닭이다. 말을 버리고 견여(肩輿좁은 길을 갈 때 타는 가마)를 타고 올라가 쌍계사에 도착했다. 10척 되는 고비(古碑)가 절 앞에 서 있다. 스님인 진감선사를 위해서 새긴 것이다. 이 비 역시 고운 최치원이 쓴 것이므로 세상에서는 ‘학사비(學士碑)’라고 부른다. 용이 날고 뱀이 꿈틀거리는 듯한 필적은 여전히 생생하니 참으로 불후(不朽)7)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날 저녁은 적묵당에서 머물며 잤다. 적묵당은 쌍계사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앞에는 팔영루(八詠樓), 동쪽에는 학사당(學士堂)이 있다. 모두 고운 최치원의 행적이다.
1651년 11월 3일
험준한 고개 하나를 넘어서 바라보니 자그마한 암자 하나가 낭떠러지 절벽 사이에 붙어 있다. 예측도 할 수 없는 마을을 아래로 굽어보니 소위 청학동이요, 불일암이다. 벼랑을 따라 가서 암자 앞에 당도하였다. 울긋불긋한 아름다운 벼랑과 기슭이 천 길이나 되었다. 두 개 봉우리가 우뚝 튀어나와 좌우로 마주보았는데 동쪽은 향로봉, 서쪽은 청학봉이다. 봉우리 중간에 층층이 바위가 있었는데 매우 기이하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청학이 항상 그곳 사이에서 살았으므로 청학봉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향로봉 북쪽에는 수 십 장이 되는 폭포가 있다. 다만 겹겹이 얼어 있는 얼음이 굽이굽이 서려 있으며, 물소리가 계곡을 따라 흘러가니 마치 용이 하늘에 올라가면서 성대한 우레 소리가 산에 있는 듯이 눈앞에 선하였다. 참으로 기이한 볼거리다. 불일암 가에는 석대(石臺)가 있으며, 완폭대(翫瀑臺)라고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만약 햇살이 오르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때에 여기에 앉아서 완상한다면 적선(謫仙)이라 불리우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지은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의,
나는 듯이 흘러 곧장 삼 천 척을 내려오니(飛流直下三千尺)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하다(疑是銀河落九天)'라는 시를 거듭 외울 것이다.
폭포가 흘러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양봉(兩峯 : 향로봉과 청학봉) 남쪽이 학연(鶴淵)이며, 바로 그곳이 쌍계 좌측 물줄기의 근원이다. 다시 청학봉을 넘어 봉우리 남쪽 기슭에 당도하니 두 세 개의 작은 암자가 있다. 어떤 암자는 남아 있고, 어떤 암자는 허물어져 없다.옥소영대(玉簫靈臺)는 그 명칭이고, 성불심원(成佛深院)은 그 터전이다. 불일암에는 스님 한 분이, 옥소영대에는 스님 세 분이 계셨는데 모두 곡기(穀氣)를 끊고 수도에 전념하는 부류의 스님이다. 아래로 내려와 청학동 하류에 도착하니 수석(水石)이 더욱 기이하여 정신이 상쾌해짐을 갑절이나 깨달았다. 계곡 주위를 배회하다가 갑자가 시 한 수가 바위 사이에 있음을 보았다.
6.1655년 김지백_유두류산기
1655년10월8일_무오
호남과 영남이 교차하는 곳을 누르고 동남쪽으로 웅장하게 솟은 것은 두류산(頭流山)이 아닌가.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니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 크기는 십이주(十二州)를 품에 안고 있는데, 뛰어난 경치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두류산의 남쪽은 바다와 가까워 더욱 맑은 기운이 쌓여 흩어지지 않았고, 산세가 굴곡지고 아름다운 기운이 충만하니 신선이 살던 곳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다.
학사(學士)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도 일찍이 이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쉬었는데, 그의 기이한 자취가 뚜렷한 것은 특히 쌍계사(雙溪寺)에서 드러난다. 쌍계사에서 십리쯤 되는 곳에 이른바 청학동(靑鶴洞)이 있다. 옛날에는 붉은 이마에 푸른 날개를 가진 학이 노닐었는데, 지금 오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어 언덕 구멍에 다만 빈 둥지만이 있다.
완폭대(翫瀑臺), 삼신동(三神洞), 세이암(洗耳巖), 무릉교(武陵橋), 홍류동(紅流洞)이라는 곳이 있는데, 또한 모두 최치원이 노닐던 곳이다. 골짜기가 기이하고 수석(水石)이 빼어나서 나보다 앞서 왕래하며 여기저기 두루 다닌 자들이 한둘이 아니요, 그 사람들이 기록하여 세상에 전해지는 것 또한 많으니, 내가 쓸데없이 덧붙이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집이 용성(龍城)에 있고, 이 산이 용성을 차지하는 것이 십분의 일이다.
7.1871년_배찬_유두류록
1871年 9月 初5日
(일월대에서) 호남과 영남이 교차하는 곳을 누르고 동남쪽으로 웅장하게 솟은 것은 두류산(頭流山)이 아닌가.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니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 크기는 십이주(十二州)를 품에 안고 있는데, 뛰어난 경치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두류산의 남쪽은 바다와 가까워 더욱 맑은 기운이 쌓여 흩어지지 않았고, 산세가 굴곡지고 아름다운 기운이 충만하니 신선이 살던 곳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다.
학사(學士)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도 일찍이 이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쉬었는데, 그의 기이한 자취가 뚜렷한 것은 특히 쌍계사(雙溪寺)에서 드러난다. 쌍계사에서 십리쯤 되는 곳에 이른바 청학동(靑鶴洞)이 있다. 옛날에는 붉은 이마에 푸른 날개를 가진 학이 노닐었는데, 지금 오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어 언덕 구멍에 다만 빈 둥지만이 있다.
완폭대(翫瀑臺), 삼신동(三神洞), 세이암(洗耳巖), 무릉교(武陵橋), 홍류동(紅流洞)이라는 곳이 있는데, 또한 모두 최치원이 노닐던 곳이다. 골짜기가 기이하고 수석(水石)이 빼어나서 나보다 앞서 왕래하며 여기저기 두루 다닌 자들이 한둘이 아니요, 그 사람들이 기록하여 세상에 전해지는 것 또한 많으니, 내가 쓸데없이 덧붙이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집이 용성(龍城)에 있고, 이 산이 용성을 차지하는 것이 십분의 일이다.청학동을 바라봄)
1871年 9月 初6日
그 아래로 석벽(石壁)이 뾰족하게 있는데 한 줄기로 구불구불 이어져서 인적이 닿지 못할 곳이었다. 그 아래에는 작은 돌이 많은 평전(細磧平田)이 있고 또 그 아래에는 쌍계(雙溪) 칠불사(七佛寺)가 있으니 이른바 청학동(靑鶴洞)이었다.
하동(河洞)의 섬진강은 마치 한 필의 비단처럼 휘돌아 흐르고 광양(光陽) 백운산(白雲山)은 마치 소 한 마리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나머지 산과 강은 평소 알지 못하던 것이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었으며, 또한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먹구름이 있는 곳은 그 아래에 폭우가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구름이 없는 곳은 그 아래에 날씨가 청명함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천지가 채색되자 급히 일월대에 올랐다.
8. 1928년 김규태 유불일폭기
산행이 쌍계사 뒤로 6~7리쯤에 이르자산은 더욱 높고 유경(幽境)은 더욱 깊었다. 한 고개를 넘어 굽어보니, 선7)이 문득 펼쳐졌다. 때때로 석벽이 하늘에 꽂힌 듯하고, 사방이 꽉막혀 들어갈수록 평탄한 길조차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청학동(靑鶴洞)’이라 일컫는 것이 이 사이에 존재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로부터 높은벼랑을 걷고 깊은 골짜기를 굽어보았다. 그래서 길을 가는 것이 담장에를 대듯 벽에 붙었고, 잔교(棧橋)는 흔들거려 떨어질 듯하였다. 숲속사이로 바라보면 은은하여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하였다. 여기몇 리를 더 가 불일암(佛日庵)8)에 도착하였다.
불일암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시냇물 소리가 불일암 아래에서 메아리쳐 들려왔다.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 불일폭포를 아직 보지 못해서,갓을 벗고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불일암에서 내려갔다.
●세석평전 일원(2편수록)
1. 이청련(1520~1578)청학동결(李靑蓮靑鶴洞訣)
지리산 남쪽 기슭에 청학동이 있는데 제비의 둥지 모양으로 조선의 이름난 터이다. 혹은 적야(磧野)라고 하고 혹은 학야(鶴野)라고도 하며 또는 사삼동(沙蔘洞)이라고도 한다. 청학동 뒤에는 돌이 뿔처럼 솟은 세 봉우리가 있고 그 아래에는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다. 골짜기의 물은 서쪽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흐른다. 청학동 입구에는 돌문이 있고 그 안쪽에는 돌 샘이 있다.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은 140~50세이고 중간 수명은 120~30세이며 가장 낮은 수명이 90세이다..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백운산 세 봉우리가 정남 쪽의 안산(案山)이다. 남해의 물이 앞에 임하였다. 일천여호(戶)가 살 수 있으므로 일천여 석(石)의(石)의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땅이 높으나 서리는 늦게 내리므로 한 되의 곡식을 심으면 한 석(石)의 수확을 하니 무한히 큰 땅인 것이다. 천운(天運)이 바로 당면하고 시운(時運)이 스스로 열리면 자연히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영남의 뛰어난 선비 이십여 명이 모여서 마을을 세우니 10년 안에 마을을 이루어서 100여호(戶)가 될 것이다. 20여 년이 지나면 석문이 우레에 깨어지고 큰 수레 마차(駟馬)가 출입하게 될 것이다. 40년 안에 공경(公卿)과 장상(將相), 명사(名士) 현인(賢人) 달사(達士)가 배출될 것이다. 문관이 일천이요 무관이 일만인 땅이로다. 이 골은 각 성씨가 모두 흥성하는 땅이다
2.류운룡(1539~1601)_류겸암일기(柳謙菴日記)
하나의 바위굴을 얻어 유숙하고 등산촌재(橙山村齋)에서 점심을 먹고 3일 양초(糧草: 식량과 꼴)를 갖고 가다가 들에서 잠을 자고 3일째 되는 날 석문에 이르렀는데 겨우 한 사람 정도 다닐 수 있었다. 석문에 새겨진 한 구절을 읊으니, 바위 아래 나무에서 새가 울어 사람을 놀라게 하고, 골짜기 가운데 하늘에 복숭아꽃이 물에 흘러가더라.
걷고 걸어 조금씩 나아가니 40여 리를 돌아올 정도의 평탄한 들판이 크게 열렸다. 가히 천석(千石)지기의 논을 만들 수 있고 되(升)의 씨를 뿌리면 석(石)을 수확할 수 있는 땅이라. 가히 천여 채의 집이 살아갈 수 있겠다. 여기는 마땅히 임좌병향하며 백운산 세 봉우리가 바로 안산이 되어야 한다. 인하여 한 구절을 읊으니, 많은 꽉 들어찬 대나무 속에 복숭아 꽃이 있고 가을의 석 달 단풍잎은 소나무 가의 산골 물에 있도다.
돌우물 하나가 있는데 돌 위에 큰 글씨로 “고려 낙운거사 이청련(高麗樂云居士李靑蓮)“ 이라 쓰여 있네. 20년을 살면 인간 세상과 통하지 않고 30년에 이르면 우레가 돌문을 깨뜨려 네 마리의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이 생기며 40년을 살면 이름난 정승과 판서(높은 벼슬)와 어진 선비와 영걸한 재목이 무리로 나오는 곳으로 남쪽 지방에선 가장 좋은 명승지이다. 땅은 높으나 서리가 늦게 내리며 흉년이 들지 않고 병화가 이르지 않는다. 노(盧), 이(李), 정(鄭), 류(柳), 강(姜)씨들이 가장 번성하고 여섯 성씨가 갖추어 발복(發福)하는 땅이다. 골(洞) 가운데 푸른 두루미가 많이 있어 청학동이란 이름을 붙였다. 혹은 학판(鶴板: 두루미 판), 적야(磧野): 돌무더기 들)라고도 했다
● 악양일원
● 덕평일원
그외 청학동관련 기록
●선인들의 유람록 2권에서
1618년 조위한의 유두류산록
1618년 양경우의 역전연해군현 잉입두류 상쌍계신흥기행록1640년 허목의 지리산청학동기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
1680년 송광연의 두류록
1719년 신명구의 유두류일록
1720년 신명구의 유두류속록
1724년 정식의 두류록
1727년 김도수의 남유기1743년 정식의 청학동록
1744년 황도익의 두류산유행록
1748년 이주대의 유두류산록
●선인들의 유람록 3권에서
1807년 남주헌 지리산산행기
1807년 하익범 유두류록
●선인들의 유람록 4권에서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언급)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언급)
1884년 김성렬 유청학동일기
●선인들의 유람록 5권에서
1883년 전기주 쌍계칠불암기
하겸진 유두류록
1901년 문진호 화악일기
1902년 송병순 유방장록
1902년 김회석 지리산유산록
1903년 안익제 두류록
●선인들의 유람록 6권에서
1909년 정종엽 유두류록
1928년 김규태 유불일폭기
1934년 김택술 두류산유록
1934년 정기 유방장산기
1940년 장덕영 방장산유람기
첫댓글 조용헌박사 세석
https://naver.me/5UdKfgLC
조용헌박사 쌍계사
https://naver.me/xoLZxNBu
이후로 유람록과 자료들을 발취해서 지속적을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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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최석기 교수님은 청학이 앉는 곳이 청학동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