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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화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송화
2014년 아내와 함께 다니던 성지순례 둘이 함께 못하고 저 혼자 앞으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외손 주 2명이 우리집에 함께... 큰 아이는 초등 학교 4학년 작은 놈은 초등학교 2학년 두 놈이 오는 바람에 아내는 바빠 젖습니다
혼자 다니는 순례 길은 외롭고 고독하기만 합니다
힘이 들어도 767곳 전통사찰 순례는 해야지요 남은 사찰암자 약 170곳 지금까지 다닌 사찰 암자 약 1.00곳 사찰 순례한지도 약 30년이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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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울주군 석남사
석남사는 가지산문의 종조인 도의선사(道義禪師)가 824년(현덕왕 16)에 처음 개창한 선찰로서 한국 최고의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공부가 엄하기로 유명한데, 금당(金堂)ㆍ심검당(尋劒堂)ㆍ정수원(正受院) 세 곳의 선방에서는 서릿발 같은 기상이 넘쳐난다. 정수원은 보통의 선방처럼 결제ㆍ해제를 지키지만, 결사(結社) 도량인 금당은 해제가 따로 없이 1년ㆍ3년씩 용맹 정진하는 수좌들만 모여 있는 곳이다. 또한 심검당은 노스님들이 자유롭게 수행하는 곳이기도 하여, 석남사는 각자의 근기에 맞게 다양한 방식의 선원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근대 석남사의 중창주인 인홍(引弘) 스님은 오늘날의 석남사를 있게 한 장본인이자 비구니 승단의 귀감이 되는 이로서,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등 백장선사의 청규를 엄격히 확립한 바 있다. 따라서 밭갈고 논매는 일에서부터 불공과 대중공양, 법당청소, 도량정비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의 청정한 생활은 세계최대의 비구니 도량다운 실천과 모범을 보여준다. 일찍이 시인 이영도(李永道)는 석남사 수좌들의 청정한 삶을 다음과 같은 시로써 그려낸 바 있다.
물소리 깊은 골에 다소곳 앉은 암자
석양 고인 뜰에 모란은 홀로 듣고 낭랑히 올리는 마지 메아리만 감돈다
일체를 외면한 젊음 먹장삼에 감싸는데
서리는 향연(香煙) 속 손이 고운 수자(修子)들
법탈(法脫)은 애정보다도 더 뜨거운 혈맥(血脈)일레
3천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죽림정사에서 안거를 시작한 이래 변함없이 지켜 내려오는 선원생활. 석남사는 비구니 수좌라면 누구나 방부를 들이고 싶어하는 비구니 근본도량의 본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천진자성은 본래 미혹할 것도 깨칠 것도 없으며 온 시방의 허공계가 바로 내 한마음의 본체라”는 월하스님의 해제법어처럼, 선방수좌들은 깨달음이라는 궁극적 지향점을 향해 오늘도 매진하고 있다.
위치
석남사(石南寺)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번지 가지산(迦智山) 자락에 위치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052-264-8900)
찾아오는 길
(1)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석남사를 찾는 가장 빠른 길은 경부고속도로 언양나들목에서 서울산 IC로 들어오는 길이다. 이곳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밀양방면으로 11Km 진입하면 얼음골 못미처 가지산 초입에 석남사 안내판과 함께 가지산의 절경을 만날 수 있다. 부산에서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 IC에서 언양으로 진입하는 방법과 언양간 328번 국도를 따라 찾아오는 방법이 있다.
경남 밀양시 석골사
석골사는 그 사명이 본래 석굴사(石堀寺ㆍ石窟寺) 였으나 후대에 와전되어 석골사(石骨寺)가 되었으며, 석동사(石洞寺)라는 이름도 전해오고 있다. 사찰에 전하는 기록이나 문헌이 없어 자세한 연혁을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절이 신라 때 창건된 사찰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 있다. 즉 『삼국유사』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는 ‘與石堀備虛師爲昆弟 奉聖 石堀 雲門 三寺連峰櫛比 交相往還爾’라는 기록이 있는데, 곧 보양(寶壤) 선사가 석굴사의 비허(備虛) 선사와 더불어 형제가 되어 봉성ㆍ석굴ㆍ운문 등의 세 절을 왕래하면서 서로 교분을 가졌다는 내용이다.
보양선사는 고려의 건국을 도와주기 위해 청도 대성(大城)에서 왕건에게 격퇴의 작전을 일러준 고승이며, 비허선사는 그의 법형제(法兄弟)로서 같은 시기의 인물이다.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르면 비허선사가 주석했던 석굴사는 적어도 왕건이 당시 후백제의 견훤을 치기 위해 원정을 나간 927년(신라 경순왕 1) 이전에 창건된 셈이다.
또한 절이 있는 주변의 위치나 산세 등을 고려할 때 큰 가람이 들어설 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석굴(石堀)이란 사명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당시의 이름 높은 선승(禪僧)이 개창한 산중의 조그마한 암자였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보양선사와 함께 신라말의 선승이었던 비허선사는 운문산과 가지산의 불적(佛蹟)을 찾아 이곳에 온 후 석굴에서 수행하다가 조그마한 암자를 이룩함으로써 개산조(開山祖)가 되었으며, 따라서 그 암자가 후일 석골사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오랜 역사가 흐르면서 많은 중창과 중수를 거듭했지만 전하는 기록이 없어 연혁을 알 수 없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밀양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해 놓은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임진왜란 때 석골사를 중심으로 인근 마을과 산에서 관군과 의병이 함께 주둔하여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따라서 이 당시에도 사격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은 1735년(영조 11)에 함화당(含花堂) 의청(儀淸) 스님의 중건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데, 당시 퇴락한 건물을 중창하는 한편 산 정상 아래에 있는 지금의 상운암(上雲庵)도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때 중창된 건물들은 근래까지 이어져 왔으나 6.25 때 공비를 소탕한다는 이유로 불태워지고, 1962년에 신도들의 성금을 모아 법당과 요사 1동을 재건하였다.
1989년에 삼성각을 건립하였고, 최근에 와서는 선운(禪耘) 스님이 1999년에 옛 법당을 허물고 새롭게 극락전을 중건했으며, 2003년에는 요사를 신축하는 등 가람을 정비하였다.
1) 위치
석골사는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 454번지 운문산에 자리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055 353-6557)
2) 찾아오는 길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석골사를 찾아가는 길은 경부고속도로 언양IC나, 구마고속도로 창녕IC를 빠져 나와 밀양방면으로 가는 길인 24번 국도를 이용해야 한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언양IC에서 밀양방면으로 가는 24번 국도를 타고 석남사를 거쳐 가지산을 넘으면 얼음골로 유명한 남명리가 나온다. 남명리를 지나 원서리에 이르러 우회전한 후 산으로 약 2km 정도를 오르면 석골사를 만나게 된다.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창녕에서 빠져나와 24번 국도를 타고 밀양시내를 거쳐 언양방면으로 가다보면 금곡리를 지나 원서리가 나온다. 한편 대구방향에서는 경산ㆍ청도를 거쳐서 갈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서울에서 밀양까지는 경부선 열차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며, 부산ㆍ대구ㆍ울산ㆍ마산 등지에서는 밀양행 직행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밀양에서는 남명리(얼음골)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원서리 마을에서 내리면 되는데, 밀양시내에서 원서리까지는 대략 50분 정도 소요된다.
경남 밀양시 표충사
삼국으로 나누어진 민족을 한국가로 통합할 수 있다는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고, 병마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는 치유할 수 있는 약과 의술을 주고, 외적의 침입으로 위협받고 있는 국가에 대해서 외침을 막을 수 있는 호국정신을 심어주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인재들을 기르기 위해 교육한 영산 명찰이 있습니다.
표충사를 품고 있는 재약산(載藥山)이 바로 그 영산이며, 표충사가 명찰입니다. 재약산은 신라시대때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연마했던 수련장입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께서 승병을 훈련시키며 호국정신을 계승한 호국불교의 본산입니다. 또한 한국 최고의 명의 허준에게 스승인 유의태가 자신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선물하며 더욱 깊은 의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표충사는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경내에 서원을 건립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경내에 유교의 상징인 사당과 서원이 있는 것이 바로 표충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약산이라는 이름은 표충사 경내에 있는 영정약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라 흥덕왕 셋째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약을 찾던 중 영정약수로 치유하자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영정약수는 아직도 표충사를 참배하는 사람들에게 심신의 피로를 해소해주는 감로수로서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효대사가 창건할 당시 표충사는 죽림사로 불렀으며, 흥덕왕때 황면선사가 재건하여 영정사로 부르다가, 조선 헌종 때 청허 사명 기허 대사의 진영과 위패를 옮겨오면서 표충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선조들의 나라사랑과 백성사랑이 가득한 표충사는 선조들의 수행력이 아직도 우리들을 감동시켜주는 사찰입니다. 사명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 비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땀을 흘려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갑오경장을 비롯 한일합방, 3.1운동, 8.15해방,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전에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하였습니다.
위치
표충사는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번지 재약산(載藥山)에 자리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055 352-1150)
찾아오는 길
1)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경부고속도로 동대구IC를 나와 만나게 되는 사거리에서 영천ㆍ경산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4번 국도를 타고가면 서호동 삼거리에 이르게 되고, 여기에서 경산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25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25번 국도를 타고 계속 달리면 밀양까지 가게 되는데, 밀양시내로 들어서기 직전에 24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24번 국도를 타고 언양 방향으로 가면 금곡리마을이 나오며, 금곡리에서 우측으로 빠지는 길로 들어서면 1077번 지방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 지방도는 표충사까지 이어져 있는 길로, 길이 끝나는 곳에 표충사가 있으며 거리는 약 11km 정도 된다.
2)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서울에서 밀양까지는 경부선 열차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며, 부산ㆍ대구ㆍ울산ㆍ마산 등지에서는 밀양행 직행버스 운행되고 있다. 한편 밀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30분마다 표충사행 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며, 운행시간은 7시30분부터 오후 8시10분까지이다.
경남 밀양시 만어사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만어사는 46년(수로왕 5)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이 창건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의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 기록되어 있는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로왕은 양산의 옥지(玉池)에 살던 독룡(毒龍)과 만어산에 살고 있던 다섯 나찰녀(羅刹女)의 악행을 막기 위해 주술을 사용했으나 실패하여, 석가여래를 청해 이들이 계(戒)를 받게 함으로써 재앙을 물리쳤으며,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다고 한다. 수로왕은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하였는데, 불법의 감화를 받아 돌이 된 물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이름을 만어사(萬魚寺)라 칭하였다.
사찰명과 관련한 또 하나의 전설이 이 지역에 전한다. 즉 옛날 동해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신승(神僧)에게 새로 살 곳을 묻자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 터’라 일러주었는데, 왕자와 수많은 고기떼가 함께 길을 떠났다가 잠시 머무른 곳에서 용왕의 아들은 미륵돌로, 고기들은 모두 크고 작은 화석으로 굳어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만어산ㆍ만어사는 모두 이러한 전설과 함께 탄생된 이름이며, 지금도 만어사에는 그때의 고기가 변한 돌무덤이 첩첩이 깔린 만어석(萬魚石)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1) 위치
만어사(萬魚寺)는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4번지 만어산(萬魚山)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055-359-5637)
2) 찾아오는 길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기차를 탈 경우 삼랑진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우곡리에서 내린 후 30여 분 걸어서 갈 수 있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밀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삼랑진방면 버스를 이용하여 삼랑진역 앞에서 내린 후, 마을버스를 타고 우곡리에서 내려 30여분 걸어서 간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밀양 영남루에서 밀양교를 건너 삼랑진으로 난 58번 국도를 따라 19km 정도 가면 삼랑진 읍사무소 앞 송지사거리에 이른다. 여기에서 왼쪽 삼랑진역ㆍ양산으로 난 1022번 지방도로를 따라 700m 가면 삼랑진역 못 미쳐 길 왼쪽에 삼랑진초등학교 입구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4.2km 들어가면 우곡리와 만어사 표지판과 함께 세 갈래 길로 나뉘는데, 가운데 길을 따라 5km 정도 가면 만어사에 이른다.
경남 밀양시 용궁사
경상남도 전통사찰(제113호) 대한불교조계종 용궁사절 055.354.4464
주소 - 밀양시 가곡동 692(용두로 31-8)
창건에 관한 사항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밀양시의 시가지 인근에 위치한 점, 요사 등의 몇몇 건물의 양식을 비롯하여 1938년에 조성 봉안된 용왕탱과 같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조왕탱, 일제강점기 범종, 칠성각 상량문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운영되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사명(寺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용궁사는 혼란한 조선말기에 민간의 신앙적 희구(希求)에 대한 방편으로 급격하게 불교가 토착신들을 수용했다. 이중에 용왕의 수용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응화(應化) 2962년 즉, 서기 1935년에 지어진 칠성각의 상량문을 보면 당시 용궁사는 용왕과 칠성을 부불전에 봉안하였다. 주불전은 여법한 인법당 형식으로 갖춰졌다. 현재는 노후한 칠성각은 없어지고 정면 5칸의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극락보전과 용화전, 삼성각 등을 갖추고 있다. 주변에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무량수각과 요사가 배치되어 있다.
사찰의 입구는 솟을대문으로 지어졌는데 현재 구재(舊材)는 찾을 수 없고 신재(新材)로 일신(一新)되어 있다. 정확한 창건연대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이 절의 초창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역사적 기록은 추후 계속 발굴되어야 하겠지만, 용궁사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밀양시내에 세워졌다. 백성의 위무를 담당하는 포교당의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직선거리 용두산 뒤쪽 2km 지점에 고려시대의 영원사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용궁사 또한 고려시대의 한 사찰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 부산출발 ~ 대구부산고속도로 ~ 삼랑진 ~ 남밀양IC ~ 가곡동 (1시간 소요)
※ 대구출발 ~ 대구부산고속도로 ~ 청도 ~ 밀양IC ~ 가곡동 (50분 소요)
경남 밀양시 무봉사
무봉사는 신라 36대 혜공왕 9년(불기1317년) 법조선사께서 영남사(지금의 영남루)에 주석하던 중 하루는 하늘나라 큰 봉황새가 춤을 추며 이 절터에 내려앉는지라 대중이 환희하며 큰 상서라 하여 선사를 맏들어 모시었다.
때마침 혜공왕이 영남사에 참배차 왔다가 선사의 법문에 발심하여 그 법은(法恩)을 갚고자 영남사 옆에 암자를 지어 무봉암이라 이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산 이름을 무봉산이라 부르게 하였다.
지금의 영남루는 예전에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영남사는 신라 35대 경덕왕 2년 왕이 초창한 신라5대 사찰 중의 하나였는데 1359년 고려 공민왕 8년에 실화로 전소되자 본존 석가모니불상을 영남사의 암자격인 무봉암에 옮겨 봉안하였고 이때부터 무봉사로 승격하여 불렀다고 한다.
이후 영남사가 전소된 자리에는 누각이 하나 지어졌는데 사찰의 이름을 따 영남루로 부르고 있으며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봉사는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전소되었으나 선조 38년 혜징선사에 의해 법당, 칠성각 수월루 및 요사가 중창되었으며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호국성사 사명대사의 탄생지인 밀양에 나라를 위한 기도처로 정하고 나라의 근심이 생길 때 마다 정성을 쏟아 오고 있다.
1.위치
무봉사는 밀양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밀양 최고의 명소 영남루와 인접한 탓에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시립도서관 앞을 거쳐 푸른 물이 사시사철 넘실거리는 밀양강을 지나면 강 상류쪽에 KTX가 달리는 경부철로가 시원스레 뻗어있다. 이곳에서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절벽 위에 아랑의 전설이 깃든 아랑각이 있고 계단을 올라서면 우리나라 3대 누각중의 하나인 훤칠한 영남루와 무봉사가 있다.
이곳에 가면 무봉사 참배 후 영남루와 밀양 박물관, 아랑각, 박시춘 생가지 등을 함께 둘러볼 수 있으며 강 아래로 펼쳐지는 대나무 숲과 강가 맞은편 공원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2.찾아가는 길
보물 제493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무봉사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밀양 영남루를 찾는 것이 쉽다.
교동삼거리 신호등에서 좌회전하여 시내로 진입하면 밀양택시 사무실 옆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좌회전해서 내일동 사무소에서 직진하면 대중철물이 나타나는데, 이곳으로 진입하면 영남루가 나온다.
시외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나오면 도로 맞은편에 버스정류소가 있는데. 시내로 들어오는 어느 버스를 타든 영남루를 지나게 된다.
대구남부, 마산, 부산사상터미널, 창녕에서 밀양행 직행버스 수시 운행하며, 밀양역, 밀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 시내버스 이용 (약 20분 소요)
경남 밀양시 홍제사
속성 임(任). 본관 풍천(川). 자 이환(離幻). 호 사명당(泗溟堂/四溟堂) ·송운(松雲) ·종봉(鍾峯).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유정은 법명. 경남 밀양(密陽) 출생.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휴정(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1) 위치
홍제사(弘濟寺)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2번지 영축산(靈鷲山) 자락에 소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055-352-0125)
2) 찾아오는 길
대도시에서 홍제사를 찾아가는 빠른 길은 경부고속도로나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 또는 창녕 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경부고속도로 언양IC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밀양시내로 진입하여 무안으로 들어가는 방법과 구마고속도로 창녕IC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가장 빠른 길은 창녕에서 진입하는 길로, 창녕IC에서 좌회전 후 직진하여 20번 국도를 따라 밀양ㆍ청도방면으로 진입하면 창녕시내를 통과하게 된다. 그곳 터미널 사거리에서 24번 밀양방면 국도를 따라 천왕재를 넘으면 안산주유소를 지나 동산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30번 지방도로 무안ㆍ부곡온천방면으로 들어서면 양효리가 나오고, 그곳에서 가나안농군학교를 지나 신법삼거리로 직진하면 밀양공고를 지나 무안초등학교 앞을 지나게 된다.
홍제사는 이곳 무안면 무안초등학교 초입에 있으며, 표충비각 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창녕IC에서 밀양 홍제사까지는 18.3㎞ 정도의 거리로, 자동차로 30여분 정도가 소요된다.
▶경주ㆍ울산방면 : 언양IC → 석남사(국도24호선) →산내면사무소 → 금곡삼거리 → 긴늪삼거리(국도25호선) → 밀양(시청) → KT밀양지점(지방도1080호) → 무안삼거리 → 표충비각(홍제사)
▶대구방면 : 경산IC → 청도(국도25호선) → 상동면사무소 → 긴늪삼거리(국도24호선) → 밀양(시청) → KT밀양 지점(지방도1080호) → 무안삼거리 → 표충비각(홍제사)
▶창원ㆍ마산방면 : 동창원IC → 진영(국도25호선) → 하남읍(지방도 1008호) → 미리벌민속박물관 → 인교교 → 무안면사무소 →표충비각(홍제사)
경남 밀양시 표충비각
표충비 [간략정보]
경상남도 밀양시 부안면 무안리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사명대사(泗溟大師)의 충정심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비.
표충사에서 동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있다. 현종(顯宗)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서산대사(西山大師)·사명대사(泗溟大師)·영규대사(靈圭大師)의 충령을 표창하는 뜻으로 그 진영을 봉안하고 ‘表忠詞(표충사)’로 사액하였으며,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조사(南鵬祖師)가 이를 중수하면서 표충비를 세웠으며, 지금은 단층 팔작지붕의 보호각 내에 서 있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이고, 규모는 전체 높이 4m, 탑신 높이 270㎝, 비 폭 96㎝, 두께 54.5㎝이다. 비 전면에는 송설대사비명(松雪大師碑銘)으로 시작하는 사명대사의 행장이, 후면에는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으로 시작되는 서산대사의 행장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좌측면에는 밀양영취산표충사사적비(密陽靈鷲山表忠詞事蹟碑)가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선현(李宣顯)이 지었고,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김진상(金鎭商)이 썼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유탁기(兪拓基)가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 전면의 내용은 사명대사의 출가 행적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선조로부터 8도 도총섭으로 임명된 내용,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와의 담판 내용, 갑진년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포로 3,000명을 데리고 온 사실 등으로 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도 이 비에 남아 있어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경남 밀양시 대법사
역사가 오랜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이 다 그러하지만 이곳 대법사 만큼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자리를 지켜온 사찰 또한 드물 것이다. 대법사의 이 모든 흥망성쇠는 모두 사명대사와 관련되어 있는데 사명이 수차례 박뀌는 동안에도 그 정신만은 올곧이 남아 오늘날 대법사의 청정한 승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법사는 신라 문무왕10년(670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고찰이다. 영주 부석사에서 남쪽으로 학 3마리가 날아와 영취산에 앉았다 하여 백하암(白霞庵)이라 불렸는데 그 후 900여년간은 별다른 기록이 없다. 그러다 조선 선조에 이르러 사명대사가 57세 되던 때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마을 뒷산의 암자에 머물렀는데 그곳이 곧 백하암이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사명대사가 그런 한가한 곳에 오래 머물게 두지 않았다. 1604년 61세 때는 묘향산에서 서산대사가 열반했고 그해 이어 조정의 영을 받아 일본에 강화사로 파견됐기 때문에 백하암에는 다시 돌아올 기회가 없었다.
사명대사가 백하암을 떠날 당시 앞마당에 은행나무와 모과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는데 은행나무는 자취를 감추었고, 모과나무는 아직도 고목처럼 굵어져서 열매를 맺고 있다. 사명대사가 1610년 입적하자 다음해인 1611년(광해 3년)에 유생들과 제자들이 그의 충성과 불법으로 남긴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절이 아닌, 사명대사를 신주(神主)로 모시는 사당을 창건해 표충사(表忠祠)라고 이름 지었다.
대법사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중산리 산50-6번지 영취산 중턱에 위치한다.
사명대사의 고향인 이 무안면 일대는 밀양시에 속해 있지만 부곡온천으로 유명한 창녕과는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밀양의 서쪽 끝부분에 있다.
대법사는 밀양 시내에서 부곡온천으로 가는 길목인 무안면 무안리 입구 오른쪽에서 영취산 자락으로 난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야 한다. 땀흘리는 표충비로부터는 8km 떨어져 있다.
대중교통이용시
밀양버스터미널에서 무안면 서가정 방면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이곳에 내려 대법사 까지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으므로 도보를 해야한다.
서울 출발시 - (항공) 부산공항 - 부산 구포역 - 밀양역 - 시외버스터미널 - 무안
(철도) 밀양역 도착 - 시외버스터미널 - 무안
승용차 이용시
구마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중산리
남해고속도로 - 서창원 I.C - 수산 -초동 -무안
경부고속도로 - 언양IC - 24번 국도 - 밀양 - 무안
창녕, 부곡 방면에서 - 무안
밀양시 방면에서는 무안 소재지를 거쳐 중산마을을 경유하여 고라리에 중촌마을로 가면 된다. 인교방면에서는 무안소재지 입구 문화마을에서 좌회전하여 중산마을을 경유, 사명대사 생가지를 지나 영취산 중턱으로 오르면 된다.
경남 창녕군 법화사
창녕 영취산(靈鷲山) 기암절벽 아래에 법화암이 산수화처럼 걸려있다. 창녕군 영산면의 영취산은 원래 영축산(靈鷲山)이었다. 인도의 승려인 지공(指孔)스님이 중국을 거처 고려시대 말엽 영산 보림사(寶林寺)에서 법화경을 강독할 때 영축산 산세를 보고 천축국(天竺國, 인도의 옛 이름)의 영취산과 그 모습이 닮았다 하여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취산 상봉의 고깔봉 기슭에는 신라 경명왕 7년에 창건되었다는 보림사가 있었다. 신라인들은 영산 구계리 영취산에 연화세계를 펼치기 위해 총림 보림사를 고깔봉 기슭에 짓고, 절벽에는 고봉암, 고령암, 법화암을 지었다. 여기에 서림암, 적조암, 죽림암, 석천암, 대흥암를 각각 지어 영취산에 아홉 절을 배치하여 연화세계를 펼치고자 했다.
하지만, 수백 명을 넘었다는 가람은 폐사지로 변하여 절터의 주춧돌은 땅에 묻혀 버리고, 보림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다층석탑은 법화암에, 삼층석탑은 영산초등학교 화단에서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서 있을 뿐, 보람사지에는 부도만이 천년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영취산 보림사의 대가람은 모든 것이 인연 따라 흘려갈 뿐 어느 것 하나 멈추어 있는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도를 찾아 헤매었던 보림사 수도승의 독송소리는 천년세월과 함께 허공에 사라지고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은 법화암이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1)위치
법화암이 있는 영산면은 창녕군의 중동부에 위치하며, 북동쪽에는 밀양시 무안면을 경계로 북서쪽에는 계성면, 동쪽은 부곡면, 남으로는 도천면과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별도로 현청이 있었던 영산은 애향심과 긍지가 높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던 날 경상남도에서 만세운동이 가장 처음으로 시작했다고 믿고 있다. 여기에 영산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가 영산 사람들의 긍지를 더하고 있다.
영산면에서도 9개의 내와 골짜기가 있어 구계라 불리는 마을의 영취산 중턱에 자리한 법화암은 옛 보림사 등 9개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또 구계리는 삼재구난(三災九難)이 없는 곳이라 하여 6.25 동란 때에는 피난지가 되기도 한 곳이다.
구계리는 함박산과 영취산 사이에 있는데, 영산면 소재지로 빠져나와 계속하여 직진을 하게 되면, 구계리가 나온다. 구계리에서 높이 솟은 암봉이 눈에 들어오는데, 암봉을 바라보며 산길을 돌고 돌아 오르면 바위산 아래 법화암이 고요히 숨 쉬고 있다.
2)찾아가기
승용차 이용 -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영산 I.C를 빠져 나와 영산 면소재지에서 구계리 방향으로 직진하면 된다. 구계리까지는 법화암의 이정표가 없으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9호로 지정된 구계리 석조여래좌상 이정표를 따라 구계리까지 가면 된다. 구계리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법화암이 있다.
경남 창녕군 삼성암
삼성암(三成庵)을 품고 있는 화왕산은 산 위 6만여 평의 대평원에 펼쳐진 십리의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어,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억새지만 멀리서 보면 마치 하얀 솜이불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화왕산 끝자락에 자리한 삼성암은 옛 신라시대에 조성된 이곳 토굴에서 세 사람이 큰 깨우침을 얻었다고 하여 삼성암(三成庵)이라고 부르다가, 이후 어느 시점부터 삼성암(三聖庵)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천년 전 성인들이 탄생한 길지여서 그런지 지금도 많은 이들이 삼성암에서 올린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 울산의 문수암(文殊庵)ㆍ미타암(彌陀庵) 등과 함께 통도사(通度寺)의 3대 기도도량으로 회자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사제지간이었던 우홍(宇洪)ㆍ(文察) 두 스님이 나란히 중창하면서 사찰의 기반을 다지게 되어, 사찰이 법등을 잇게 된 데는 두 스님의 공덕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우홍스님이 보광전(寶光殿)을 새로 지으면서 봉안한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은 지금도 삼성암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서깊은 문화재로 전해지고 있다.
삼성암에는 보광전(普光殿)을 주전각으로 명부전(冥府殿)과 삼성각(三聖閣), 그리고 3동의 요사(寮舍)가 있다. 중앙에 자리하고 보광전은 옛 법당을 허물고 2003년에 새로 건립된 건물이다. 법당의 내부에는 중앙에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보살상은 1838년 삼성암이 중창되면서 그 이듬해인 1839년에 조성하여 봉안한 것이다. 현재 삼성암에 남아 있는 성보문화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위치
삼성암은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사리 78번지 화왕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055]521-0018)
찾아오는 길
1) 자동차를 이용할 경우
삼성암을 찾아가는 길은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창녕IC를 통해 창녕읍을 거쳐 계성면으로 들어서는 길과, 영산IC를 빠져나온 다음 계성면으로 들어서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우선 창녕IC를 통해 창녕읍으로 들어섰을 경우 5번 국도를 이용해 함안 방향으로 약 10Km 정도를 가다보면 계성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 어귀의 다리를 지난 다음 좌측으로 진입한다(진입로에 삼성암 표지판 있음). 그 다음 계성천을 따라 나있는 1080번 지방도를 타고 관룡사(觀龍寺) 방향으로 2.9Km 정도 가면 왼편에 작은 다리가 나타나는데(삼성암 표지판 있음), 다리를 건너 산으로 1Km 정도를 더 올라가면 삼성암이 자리잡고 있다.
영산IC를 이용할 경우 영산면에 들어서 5번 국도를 이용하여 창녕 방향으로 가는 길에 계성리가 나온다(약 7Km).
2) 버스를 이용할 경우
창녕읍에서 마을 입구까지 하루에 5~6회 정도 운행 중이다.
경남 창녕군 청련암
처음 청련사는 영취산에 있던 대흥사의 작은 암자인 청련암(靑蓮庵)으로 창건되었으며, 대흥사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암(東庵)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러한 초기기록은 1880년대에 절을 중창하면서 기록된 여러 현판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1842년(헌종 8)에 기록된 「영산현 영취산대흥사 청련암 법당이건중창기(靈山縣靈鷲山大興寺法堂移建重創記)」 현판에 의하면, 대흥사는 신라 때 원효스님이 세운 절로 이후 폐사되었다가 1628년(인조 6)에 중창하여 양수암(兩水庵)이라 하였다.
1676년(숙종 2) 대흥사의 옛 터로 옮겨 대흥사라 불렀는데 100여 년이 지나 다시 폐허가 되고 그 중 청련암만 어렵게나마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에 덕암(德庵) 스님이 고을 사또와 신도들의 도움으로 1840년(헌종 6) 법당을 중창하기 시작하여 2년 후 초여름에 새로운 면모로 출발하게 되었다.
법당이 중창되는 이 시점을 전후하여 청련암에는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는데, 현존하는 현판기록에 의하면 1830년(순조 30)에 산령각을 건립하고 1834년(순조 34)에 법당을 보수하였으며, 1836년(헌종 2)에는 쾌엽(快曄) 스님이 법당의 상단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련암은 근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법등을 계속 이어왔고, 근래에 들어서는 1983년에 옛 법당을 허물고 극락전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1993년 산령각ㆍ종각ㆍ요사ㆍ천왕문을 짓고 다보탑과 비로자나불상 등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위치
청련사(靑蓮寺)는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사리 852번지 영취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055 521-2185, 2315)
▶교통편
청련사를 찾아가는 길은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창녕IC를 통해 창녕읍을 거쳐 계성면으로 들어서는 길과, 영산IC를 빠져나온 다음 계성면으로 들어서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우선 창녕IC를 통해 창녕읍으로 들어섰을 경우 5번 국도를 이용해 함안 방향으로 약 10Km 정도를 가다보면 계성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 어귀의 다리를 건너 청련사 표지판에 따라 바로 좌회전한다. 계성천을 따라 관룡사(觀龍寺) 방향으로(1080번 지방도) 약 2.7Km 쯤 가면 왼편에 청련사 표지판이 크게 나타나고, 오른편에는 ‘화왕산 맷돌순두부’라는 음식점이 보인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약 700m 정도를 더 가면 청련사가 자리잡고 있다.
영산IC를 이용할 경우 영산면에 들어서 5번 국도를 이용하여 창녕 방향으로 가는 길에 계성리가 나오며, 약 7Km의 겨리이다.
경남 창녕군 관룡사
관룡사(觀龍寺)는 신라시대 8대 사찰 중의 하나로서 많은 문화재와 경관이 수려한 사찰로 널리 알려졌지만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관룡사의 ‘관룡(觀龍)’은 사적기에 화왕산 정상의 삼지(三池)에 숨어 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절이 창건될 때 구름 위로 승천하는 것을 많은 무리들이 목격하였다 하여 ‘용을 바라본다는’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라 전한다.
초창시기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약사전에서 발견된 묵서에 ‘영화오년기유(永和午年己酉)’라고 기록하였으며, 절에 비장된 사기(寺記)에도 신라 349년(訖解王 40)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가야(伽倻)에 전해졌다는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예증이 되기도 한다. 반면 『창녕군지(昌寧郡誌)』에 따르면, 583년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초창하여 신라의 8대사찰로서 원효대사가 제자 1천여 명과 더불어 화엄경을 설법한 도량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오더니, 화왕산 마루인 월영삼지로부터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하는 것이 보이므로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 역시 사기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 일반적으로 관룡사의 창건을 583년(신라 진평왕 5)으로 보고 있다. 이후 748년(경덕왕 7)에 추담(秋潭)이 중건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관련기록이 전하는 바 없어 알 수 없으나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519호)과 관룡사 부도(유형문화재 제 19호) 등 고려시대 유물들이 전하여 고려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401년(태종 원년) 대웅전이 중수되고, 1507년(중종 2) 약사전이 중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당우가 소실되었다. 사적기에 의하면, “불전(佛殿)ㆍ승사(僧舍) 등이 독봉(毒蜂)의 피해 불에 타버리고 …유일하게 약사전만 불에 그을 린 흔적이 있는 채로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경내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이후 관룡사는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된 사역을 17세기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게 된다. 1617년(광해군 9) 영운스님의 대웅전 재건을 시작으로 1619년(광해군 11) 향적전을 창건하고, 1622년(광해군 14) 금당을 건립하는 등 전각과 승사를 중창하여 17세기 관룡사는 불전ㆍ누각ㆍ부속건물 등 13개의 건물 및 6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로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위치
관룡사(觀龍寺)는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번지 화왕산(火旺山) 자락에 소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055-521-1747)
찾아오는 길
(1)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서울에서는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창녕행 버스를 이용하면 되며, 하루 5회 운행 된다. 이외 대구ㆍ부산ㆍ마산ㆍ합천ㆍ밀양 등지에서 올 경우 영산행 직행버스를 이용하여 계성에서 하차해 택시나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기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서울에서 밀양 구간의 경우 KTX를 이용한 후 동대구에서 밀양 구간은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로 환승하는 방법이 있다. 밀양에서는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창녕으로 쉽게 갈 수 있으며, 창녕 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버스나 택시를 이용할 수 있다.
창녕에서 관룡사로 가는 마을버스는 계성면을 경유하여 가는 버스로,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2시간 간격으로 하루 6회(06:50, 09:30, 11:30, 14:00, 15:30, 17:30) 운행한다.
(2)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서울ㆍ부산ㆍ대구ㆍ광주 등 대도시에서 관룡사를 찾아가는 빠른 길은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창녕IC나 영산IC를 이용하는 길이다. 창녕IC에서는 5번국도를 타고 오리정을 지나 계성으로 진입하여 옥천으로 가는 길이 있으며, 영산IC에서는 영산면소재지에서 계성으로 진입하여 옥천으로 가는 길이 있다. 특히 영산IC로 진입할 경우 79번 대구ㆍ창녕 방면 국도를 따라 진입하다가 1080번 화왕산 방면 지방도로로 진입하는 길이 가장 찾기 쉬운 길로, 계성 삼거리에서 화왕산 또는 관룡사 표지판을 따라 8㎞정도 들어오면 된다.
경남 창녕군 창녕포교당
통도사창녕포교당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요사채 문설주 위에 죽 걸려있는 현판 가운데 '불찰통도사본말사창녕포교당창건대시주공덕기'에 나와 있다.
이를 살펴보면 불기 2966년(1939) 7월 7일에 포교사 춘담(春潭)스님께서 인왕경(仁旺經)을 교화하기 위하여 당시 창녕지역의 대지주였던 하준석(河駿錫, 당시 곤양, 현풍, 비안군수를 지냈던 통정대부 하재구의 2남이자 진양 하씨 30세손)의 슬하에 자녀가 귀하여 득남원(得男願)을 발원하여 세운 절이라고 나와 있다.
당시 창녕포교당에 처음 주석했던 춘담tm님은 사찰을 준공한 후의 심정을 노래한 송(頌)에서 창건 불사가 얼마나 어려웠음인지 이렇게 적고 있다.
建立何歲月:어느 세월에 다 지으랴!
龜毛爲棟樑:거북의 털로써 기둥을 세우랴!
經營空劫前:세월이 다 가기 전에 운영이나 해볼까
兎角作柱椽:토끼 뿔로 기둥 서까래를 삼을까나
또‘창녕지명사’에 전하는 창녕읍 신당마을 유래에 대해 '창녕여고와 포교당(仁旺寺)이 있는 일대로 말흘리의 동북부에 위치한다'라고 적고 있으며 창녕군의 전통사찰현황에 창녕포교당은 1920년도 창건하였는데 “신라시대 창녕읍 술정리에 ‘인왕사’라는 포교당 전신인 대사찰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자 동산선사가 옛 인왕산사를 재현한 포교당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절에 초창시부터 지극정성으로 다니고 있는 법왕자(法王子, 85세, 신당리 거주)보살의 증언에 의하면 곤양군수를 지낸 만석군의 모친인 김선명화(金善明華)보살과 아들 내외인 하준석(河駿錫), 서공덕화(徐功德華)보살이이 아들을 낳기 위해 원불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아들 영달(永達)이 범종을 시주하였다는데 지금도 적멸보궁에 ‘하영달’이라는 명문이 있는 당시의 범종이 남아 있다. 따라서 창녕포교당은 1939년 창건이 확실해 보인다.
통도사창녕포교당은 경남 창녕군 창녕읍 말흘리 123-1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게종 제 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승용차편:창녕포교당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록 금호분기점에서 마산방면으로 가는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해 마산 쪽으로 내려오다 창녕IC에서 빠져나온다. 통게이트를 빠져나와 창녕읍, 화왕산 방면으로 향하면 사거리가 나온다. 전면의 세갈래 길 중 오른쪽으로 틀어진 가운데 길로 몇 백m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창녕군청이 나오고 조금더 가면 왼쪽에 창녕읍경찰서 나온다.
여기를 지나 오른쪽 2블럭 지점에는 진흥왕척경비가 있는 만옥정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오는데 여기로 우회전해 들어가면 곧 말흘마을이 나오고 공원이나 100m 지점 왼쪽 마을에 통도사창녕포교당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인다. 부산에서 찾아갈 때도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대중교통편:창녕읍 터미널에서 도보나 택시를 이용하면 10-20분 정도 소요된다.
경남 창녕군 도성암
2003년 9월 당시 한반도를 할퀴고 간 태풍 매미는 수많은 인명, 재산 피해와 함께 우리들의 가슴에도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안겨주고 떠났다. 더구나 수해와 산사태, 강풍으로 인한 각 사찰의 피해도 커 불교계가 합심해 복구에 박차를 가하는 결집된 힘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창녕 화왕산의 도성암은 재산피해와 더불어 흙더미가 요사채를 덮쳐 인명 사망피해까지 생겨 불자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불자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든 것은 몇 개월 전 대구지하철 참사 사고로 읽은 두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도성암을 찾은 어머니가 산사태로 목숨을 잃게 된 사연이었기 때문이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한동안 도성암은 피해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매우 험한 상황이었으나 태풍에 대비한 수로를 건설하고 새로운 전각을 세워 신라고찰 도성암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도성암은 신라 현덕왕 2년(810)에 창건한 고찰로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한 때 역사가 끊어진 사찰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도성암은 아미타부처님의 위신력에 기대어 창녕의 주산이자 절경으로 잘 알려진 화왕산 중턱에 자리하면서 현묘한 자성을 찾는 염불기도 영험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도성암은 2년 전의 악몽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느 산사와 같은 평온을 되찾았다. 최근에는 보제루 불사를 마치고 단청불사 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또 얼마 전에는 대웅전의 석조여래좌상이 도유형문화재로 지정을 받게 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비온 뒤 땅이 굳는다는‘케케묵은 진리’를 다시금 재확인하는 장면이다. 부디 앞으로의 도성암이 굳은 반석 위에서 튼실하게 정법을 수호하는 도량이 되길 바란다.
도성암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8번지 화왕산 내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 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승용차편:도성암에 가려면 경부고속도로 금호분기점에서 마산방면으로 가는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해 마산 쪽으로 내려오다 창녕IC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창녕읍, 화왕산 방면으로 향하면 사거리가 나온다. 왼쪽은 대구방면이므로 세 갈래 길 중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진 가운데 길로 직진해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창녕군청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왼쪽에 창녕읍경찰서 나온다.
여기를 지나 3백여m 정도 직진하면 도로가 오른쪽으로 휘어져 돌면 곧 화왕산 군립공원 입구의 노점상들이 진을 치고 있고 그 사이에 공원 입구가 나온다. 공원 입구 맞은 편에는 창녕여중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공원 매표소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도보로 오르다보면 음식점이 즐비하고 도선암이 나오는데 여기를 지나 곧장 오르면 오른쪽길은 화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이며 왼쪽의 다리를 지나면 도성암이 바로 나온다,
대중교통편:일단 각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창녕읍까지 가는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창녕읍에서 화왕산까지는 가까우므로 두 구간 사이를 운행하는 버스는 현재 없다. 다만 도보로 10-20분 정도 소요되므로 도보를 이용하는 편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