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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부 지역 지연 작전( 함양-합천 전투, 하동-진주전투)
# 진주함락과 부산교두보 확보 작전은 한국 전쟁사보다 일본측전사가 더 리얼하여 후반부에 기록함 #
제 1 절 개전이래 작전 진행 개요
1950년 6월 25일 일용일 아침 38도선 전역에서 전쟁의 불꽃이 튀었다.
병력 13만 5천명, 포 600문, 전차 150대의 북한군이 병력 9만 8천명, 포 89문의 한국군을 공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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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8선전투
개전 첫날 한국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서울은 개전 4일째인 28일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함락 당하고 말았다.
2. 미군의 작전개시
개전 이틀째인 26일부터 미 극동 해.공군은 지원작전을 개시하였고, 7월 1일에는 미 육군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미국의 작전목적은 남한에서 북한군을 격퇴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최초로 증강된 1개 사단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계속해서 증강된 1개 사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북한군을 협공하는 것이다.
3. 미 제24사단의 지연작전
"가능한 북쪽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여 반격작전에 유리한 지역을 확보한다"는 임무를 맡은 미 제24사단은 최초의 저지선을 평택-안성선으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전초로써 스미스부대(공수된 부대는 보병 제21연대 1대대장으로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보병 1개 대대와 경포병 1개 포대로 편성됨)를 오산에 배치한다.
1950. 7월 5일 08시 16분 오산에서 미군 포병의 첫 탄이 발사됨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북한군과 미군의 전투가 개시 되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차공격에 돌파되어 사단의 저지선인 평택-안성선을 점령하고 있던 제34연대는 스미스부대의 패전에 영향을 받아 다음날인 6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지선을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 저지선을 금강선으로 선정한 미 제24사단은 후속부대의 도착시간을 획득하기 위해 차령산맥에서 북한군의 전진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대대단위로 점령했던 사단의 축차진지는 북한의 침투식 공격에 후방이 차단되고 정면은 전차에 유린되어 미 제24사단은 12일까지 사용 가능한 병력 4개 대대중 3개 대대를 잃었다.
7월 12일, 미 제24사단은 제19연대를 투입하여 실병력 3개 대대로 금강선을 점령하고, 한국군은 실병력 3~4개 사단으로 소백산맥의 저지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4. 미제8군의 지연작전
7월13일, 주한미군의 지휘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금강-소백산맥선을 학보하고,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시키며, 그 사이에 공세 이전에 필요한 병력을 집결하기로 계획하고 미 제24사단으로 금강선 방어를, 미 제25사단은 소백산맥선에서 작전중인 한국군을 지원하는 한편 일본 동경에서 준비중인 제1기병사단의 출동을 서둘렀다.
북한군 제3.4사단은 주공으로 미군의 허를 찔러 다음날인 14일에 금강을기습도하 하여 먼저 공주방면의 제34연대를 돌파하고, 이어 16일에는 대평리의 미 제19연대를 격퇴시켰다.
북한군의 전술은 항상 미군진지의 간격으로 침투하여 후방을 습격하고, 퇴로를차단 격멸하는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예상 외로 금강선을 3일만에 돌파당한 제8군은 제24사단으로 대전을 확보케하고, 7월 18일 포항으로 상륙할 예정인 제1기병사단을 대전정면에 투입할 계획이었으나 대전은 이미 7월 20일에 북한군 2개 사단의 포위공격을 받아 함락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제24사단장 딘소장이 실종되고 전투력이 50%이하로 떨어졌으나 개전이래 최초로 신무기인 3.5인치로켓포로 북한군의 소련제 T-34전차를 파괴하게 된다.
가. 유엔군은 최후의 방어선을 낙동강선으로 결정한다.
이미 7월 8일에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 사령관이 되고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원수에 위임하게 되었다.
제8군은 미 제1기병사단을 영동정면을, 미 제25사단을 상주 정면에, 한국군에게는 함창-안동-영덕선을 각각 방어토록 하고 미 제24사단은 김천으로 이동시켜 군 예비로 했다.
따라서 영동에서 영덕에 이르는 160km 전선은 제 8군이 전개하지만 영동에서 대한해협에 이르는 120KM의 서측면에는 전투력이 약한 한국군밖에 없었다.
반면에 북한군은 미군이 증강되기 전에 부산을 점령하지 않으면 승리의 기회를 잃고 만나는 것을 알고 3개의 예비사단을 전선에 증강시켜 제8군의 정면을 공격하고 최정예 2개 사단으로 미군이 배치되지않은 서쪽 측면을 공격토록 했다.
이에 따라 7월 말경에는 김천-상주-예천-안동-영덕선으로 진출하여 낙동강 도하작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미군이 없는 서측방에는 북한군 2개 사단이 부산을 목표로 호남지방을 빠른 속도로 공격하고 있었다.
제8군은 정면의 적에 대해서는 관심을기울였으나 이 측면의 적에 대해서는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3백~4백만의 피난민이 사태를 이루면서 남하중에 있고, 북한군 게릴라(공비)가 사방에서 암약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군은 유엔군의 간격을 이용하고 아니면 피난민 대열에 끼여 유엔군 진지내로 잠입하여 유엔군의 병참선이나 통신망을 차단 하였다.
이로인해 유엔군은 테러,방하,파괴,습격 등을 당하여 미 제24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유엔군의 진지는 사방에서 총탄이 날아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이는 국민속에 게릴라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의 한 고급장교가 "한국전쟁은 종류가 다른 전쟁이다"하였는바 유럽의 1,2차 세계대전시에는 미군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는데 한국 땅에서는 게릴라와 간첩으로 습격만 받았기 때문이다.
나. 서측방 방어(함양-합천 전투,하동-진주 전투)
대전의 전투가 한창이던 7월 20일, 제8군 정찰기는 군산부근에서 남하중인 북한군 대부대를 발견했다. 하지만 북한군 제4사단의 광범위한 작전활동으로 오판하였고, 21~22일엔 비가 내려 정찰기가 뜨지 못해서 놓쳐 버렸다.
사실은 이때 북한군 제6사단이 우리 제7사 등 잔류 병력들의 저항을 돌파하고 7월 18일에 금강을 도하하여 19일에 군산, 그리고 20일에 전주에 진입하고 있었다.
당시에 국군은 호남지역 지연전을 위해 신태영 소장을 지휘관으로 '서부지역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제7사단(사단장 민기식 대령, 약 600명, 민부대라고도 함), 오덕준부대(진주에서 주로 학병으로 편성한 700명 정도의 민병대), 이영규부대(제5사단의 일부와 청방대로 약 500명), 그리고 해병대의 김성은 부대(371명) 등을 통합지휘하고 있는데 제8군은 이러한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가 그친 23일 미 공군은 대대적인 정찰활동으로 대부대가 군산에서 전주로 남하하는 것을 발견했으나 대전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북 제4사단의 일부라 판단하고 이대로 진출한다면 25일에는 안의-진주선으로 진출하여 병참기지인 부산이 위기에 빠질 것으로 판단한 24일, 미 제24사단장인 처치소장에게 "진주-김천선을 점령하고 군의 좌측 후방을 엄호할 것"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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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군은 이날 오키나와에서 부산에 상륙한 미 제29-1,3대대를 제24사단에 배속하고 대신 미 제24-제21연대를 군 직할로 돌렸다.
1)워커장군의 지도
가) 미 제24사단의 배치
미 제24사단이 방어해야 할 정면은 공비의 소굴인 지리산을 눈앞에 둔 약 100km의 광정면이었다. 호남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으로 오는 접근로는 전주와 남원에서 안의-거창을 거쳐 낙동강선에 이르는 것과, 순천에서 하동을 거쳐 진주-마산에 이르는 2개의 축선이 있다.
따라서 미 제24사단은 25일 제19연대의 주력(제2대대)을 진주로, 제1대대(320명)로 안의를 점령케 하고, 26일에는 제34연대를 거창에 배치하고, 사단 사령부는 합천에 두었다.
이 당시(7.25)에 미 제8군과 제24사단이 알고 있는 서측방 상황은 북한군의 선두부대 약 500명이 하동의 한국 경찰대를 공격중이고, 구례에는 전차를 동반하여 800명, 남원에는 트럭과 700명, 목포에는 전차 10대와 500명이 있으나 북한 제4사단의 일부가 동진하고 있다고 보았다.
함양에는 한국군 일부가, 하동에는 민병이 일부 있으나 전력으로는 기대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즈음 대전을 점령한 북 제4사단은 금산에서 거창방면으로 진격을 개시하고, 또 북 제6사단은 남한의 각 항구를 점령한 후 순천으로 집결하여 동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8군은 7월 말까지 서측방으로 북한의 정예 2개 사단이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던 것 같다."
나)미 제29연대의 증원
26일, 미 제29연대의 2개 대대가 진주에 도착하여 미 19연대장 무어 대령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이 제29-1,3대대 병력은 훈련수준이 6주도 않된 인원으로 미 본토에서 10일간의 항해로 20일 오키나와에 도착한 후, 지친 신병들이 다음날 21일 오키나와를 출발하여 부산으로 향했다.
이때까지 양 대대는 시사는 커녕 영점조정도 해보지 못하고 12.5밀리 기관총은 격납유조차 닦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제1대대는 안의지역 방어, 제3대대는 하동 공격)
제 2 절 함양-합천 전투
1. 양측의 상황
가. 부대 상황
북한군 제1군단은 제4사단으로 하여금 대구 방어에 주력하는 아군의 서남쪽 배후를 노려 주력을 장계-안의선에, 일부를 남원-함양선에 각각 전개하여 일거에 안의와 함양, 그리고 거창을 점령하여, 이를 발판으로 낙동강 서안으로 진출토록 명령하였다.
북한군 제4사단은 대전에서 미 제24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거의 무방비상태로 있는 소백산맥의 서측인 금산, 무주, 방면으로 진출, 제6사단의 순천 진출과 때를 같이하여 그 좌익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미 제8군은 이 지역에서 기동하고 있는 적들이 북한군 제4사단의 예하부대라 판단하고 제6사단이 호남지역과 경남지역으로 우회 기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7월 말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군은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에 불과 11일(7.16~26)만에 호남 전 지역을 상실하고, 또다시 영남지역 서남부마저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1개 연대규모에도 미치지 못하여 적의 접근로인 남원-함양간에서 접적을 유지할 따름이었다.
즉 운봉으로 철수한 민 부대가 남원 동쪽 내촌과 장교리 일대에 전개하였다. 그러나 부대는 지휘통제가 일원화가 어렵고 병력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미군의 오폭으로 어려움을 격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북한군 제4사단이 장계에서 육십령을 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병력은 계속하여 피난민대열에 들어가 이탈하고 부대간 통신망이 어려워 곤란을 겪고 있는 마당에 서해안지구 전투사령관 신태영 소장은, 민 부대가 남원 철수에 앞서 함양으로 이동하여 민 부대와, 진안.장수 간의 경찰 혼성부대로 덕유산-백운산-지리산의 산악지대에서 적을 지연시킨 다음, 시간을 벌어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로 구상하였으나 현실은 그것이 아니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육군본부는 채병덕 소장을 경남지구 편성관구사령관에 임명하여 지휘토록 함으로써 7월 24일 남원에 와 함양으로 철수하려는 부대의 철수를 불허하고 고수방어를 강조하였다.
2. 함양-거창 전투 및 지역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운봉-함양의 전황
운봉-함양 상황('50.7.25-26)
장교리
500 오부대 성산
561 오부대
양기리 해병대 서천리
해병대
운봉 민부대
덕산리
효기리
김부대 678 덕치리 680
김부대
민 부대는 남원에서 운봉으로 철수하였다. 7월 25일 오 부대가 운봉 서북쪽 운봉고개 일대 500고지를 점령하고 있었으나 26일 함양으로 철수하여 버렸다. 오 부대는 민부대의 예속은 아니였다.
이러 말미암아 운봉에 방어공백이 발생하자, 대신 김성은 부대를 운봉고개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오 부대의 전선이탈을 목격한 부대들이 동요가 발생하여 다른 부대들도 임의로 운봉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민부대는 함양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재 수습하여 해병대에게 다시 팔령재를 방어토록 하는 등의 노력을 경주했다.
이 시기에 하동방면은 채총장의 안내로 미 제29-3대대가 원전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정래혁 중령이 인수한 이 영규 부대 30명과 지역 청방대원 등 300명이 방어준비를 하다 북한군으로 부터 기습을 당해 와해 되어 각자 분산 철수하여 정래혁 중령은 집결된 인원을 이끌고 진주로 향했다.
민 부대장은 26일 함양으로 이동하여 철수병력을 인수하며, 먼저 이곳을 선점한 경찰 및 청년방위대를 흡수하여 방어병력을 재편성하는 과정에 마침 이곳을 방문한 신태영 소장으로부터 미군이 이곳을 지원하게 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한편 이 무렵 북한군 제4사단은 금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애 보수작업을 하면서 안의, 거창을 목표로 진격하고 있었다. 7월 26일 그 예하부대들은 금산을 거쳐 장계리까지 진출하고 있었으며 그 선두는 육십령 고개로 지향하고 있었다.
나. 안의 -거창의 전황
안의-거창 전황('50.7.26-29)
무주
고령
미34-1대대 거창 미24-34연대
미34-3대대
경찰대대
합천 미 제24사
미제29-1-A중대
468 오부대
장계리 적4-18연 안의 김부대
백운산
390 미 제29-1대대
화산리
김부대
운봉 함양 오부대 314
해병대대
미 제8군사령부는 서남부 방면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미 제24사단을 긴급히 투입하였다. 사단은 아직 대전지역 전투의 상흔을 미처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시 전선에 투입이었다.
미 제24사단은 사단장 딘 소장의 행방이 불명한 가운데 처치 소장이 사단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장비는 편제에 비하여 60~70% 정도였고, 병력은 3개 연대 모두 부족한 실정이었다.
처치 소장은 24일 야간, 제19연대(무어 대령)를 진주로 이동시키고, 동 연대는 제1대대를 화산리로 북상하도록 한다. 다시 사단장은 군위와 의성에 분산되어 있던 제34연대(비오챔프 대령)를 거창으로 이동시키고 사단 지휘소를 합천에 개소하였다. 이로서 사단은 26일부터 거창-하동간 90km 방어정면을 담당하게 된다. 보통 사단의 방어정면이 10-15km인 점을 고려하면 비상조치였다.
미 제24사단은 미 제34연대는 거창에서 제1대대를 안의-거창가도 간의 산악지대에 배치하고, 이 지역에 배치중인 거창경찰과 청년방위대의 혼성 1개 대대를 서남쪽 구릉지대로 진지를 옮겨 미군과 작전을 수행토록 한다. 미 제29연대는 화산리에, 그 예하인 A중대가 안의에 배치되었다.
당시에 김 부대(김병화소령지휘)는 운봉 남서쪽 60번 도로 주촌리 일대에서 산악도로를 따라 덕산리 남방 산악지대, 안의 전투시는 화산리(미 제29-1대대 좌측)로 이동 했다. 바로 김부대 좌측에 해병대, 그 좌측에 오 부대가 전개했다.
화산리는 위천과 주산천이 만나는 곳으로 바로 미 제29-1대대가 화산리-죽산리 중간 동남쪽 390고지 일대, 바로 그 좌측에 김 부대가, 위천강 아래 웅평리 일대를 해병대, 그 좌측 옥매리 일대를 오 부대가 점령한다
"육십령고개의 비밀"
당시에 전북과 경남의 경계로서 이곳을 넘어야만 부대이동이 가능했다. 이말은 결국 이곳을 잡아야 병력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사기가 저하된 국군과 대전에서 이탈된 미제24사단 장병 일부는 그 더운 여름날 걸어서 이곳을 넘어야 했다.
지역주민들의 증언은 경찰인지 군인인지 하는 사람들이 고개 마루에 와서 제대로 진지도 구축하지 않고 흩틀어진 상태로 있다가 북한군이 저멀리 오고 있는데 싸우지도 않고 안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전사에는(4권 509p) 경찰혼성대대가 도로를 따라 접근하는 적에게 사격을 집중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주에서 넘어오는 고개에는 많은 피난민과 철수하는지 도피하는지 알 수없는 병력이 얽히어 있고,이 속에 북한군 오열들이 들어와 사격을 가하여 많은 인원이 죽어서고개 주변에 널부러져 있었다.
[비오는 날에는 상이 군인부대가 행군을 한다]
우리는 탐사활동 중에 육십령고개 일대에서 신내림을 받았다는 점성가를 만나게 되었다. 하는 말이 기도를 하다보면 수많은군인이 부상당한 모습으로 우의를 입고 저벅저벅 행군을 하며 다가 와서 기도를 엄청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은 없지만 전쟁 직후에는 골짜기 여기저기에 전투화나 불발탄류, 어떤 경우는 시신 일부가 뼈만 남아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한다.
동네 분들이 몇몇 참여하여 고개마루 근처에 있던 유해는 몇군데에 모아서 묻었는데 나중에 길을 확장하면서 다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마루정상에서 무주 쪽으로 조금 내려오다 보면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이 있다.(작은 소나무) 모퉁이로 돌게되는데 이곳은 당시에 부역자들을 처형하여 경찰이 통제하여 많은 사람이 묻어 있다는 곳도 있다.
우리전사에는 신태영 서해사 사령관이 함양에서 지시하여 경찰혼성부대(대대규모)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주변을 탐사한 결과 개인호 등의 전투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운봉의 장교리, 팔령재(흥부마을)에 전투준비 흔적이 없다."
나는 행운아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곳을 내발로 직접 가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허무한 면도 있다. 주변의 지역민들에게 물어본 결과 그냥 지나간 것 밖에는 없고 동네에 들어와 있는 것을 다 먹고 가는 일만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전사자료에 보면 민부대와 경찰, 그리고 청년방위대를 합치면 무려 3,000여명이 된다. 사실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러나 동네 분들은 몇 명 보았다는데 어떻게 된것인지?
모두가 함양이나 합천, 거창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이 아니다. 이곳 운봉 함양 거창 합천 안의는 거의 동일 지역과 같다. 가서 들어보면 그런 대규모의 군인이나 경찰 학도병 아니면 청방대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운봉 조영호 대위와 비행기, 이 장군"의 비밀
남원 운봉에는 몇 번 탐사와 탐문을 갔다. 이유는 엉뚱하게도 대구 동명의 공동묘지에서 시작된다. 어느날 우리는 다부동전투 관련 유해발굴 지역을 탐사하려고 칠곡 일대 격전지를 다녔다.
그런 어느날 우리 단으로 전화 한통이 왔다. 동명 공동묘지에 국군 용사 대위의 묘가 있는데 관리가 안되어 보기 흉하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내용을 확인하기위해 동명의 공동묘지를 찾았다.
조영호 대위는 당시에 비행기 조종사로, 한양대를 다니다 군에 들어가 병기장교로 임관하며 '53.6월 24일 당시 남부지구경비사령관 이용배 준장을 태우고 비행하다 남원 운봉 상공에서 원인불상 추락하여 모두 순직했다.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그 묘지를 찾았다. 분명 육군 대위 조영호라고 씌여 있다. 정문에서 중간쯤 들어가 우측 산자락 부분이었다. 관리인 이야기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데 이곳이 일제시대부터 묘지였다며 그래도 군인의 묘라 함부로 누가 건드리거나 파묘는 못하고 관리되고 있다고 순수한 답변을 한다.
우린 전사망자 자료를 확인하여 어렵지않게 관련 사실을 학인하고 그 유족까지 찾을 수 있었다. 서울의 한 아파트로 찾아간 사람은 전사자의 여동생집이었다.
"혹시 오빠분이 6.25전쟁에서 전사한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그럼요, 나중에 우리 남편이 남원 운봉까지 가서 시신을 옮겨와 지금 동작동 현충원(과거는 국군 묘지)에 안장시켰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남편되는 분이 직접 가서 당시에 유해를 수습했습니까?"
"네, 확실합니다."
"지금 남편 분은 어디게신가요?"
"지금 조치원에서 사업하고 있습니다"
우린 조치원으로 달려가 직접 남편분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본인이 연락기가 떨어진 동네에 가서 직접 동네분들이 묻었다는 곳에서 발굴하여 왔다고 한다.그럼 도대체 대구 동명의 묘비는 어떻게 된 것인지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탑승하여 전사한 이 장군의 자료에서 당시에 대구에서 거창한 행사가 있었고, 그 묘지의 묻힌 곳의 위치가 그려진 것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이 후에 이장군의 유해는 유족들의 요청으로 옮겨져 서울 수유리로 왔다. 그런데 당시 비행기 조종사였던 전사자 조대위의 유해 관련 내용이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의아한 우리는 묘지를 발굴하여 신원확인 절차를 밟으려다 취소하였다. 어떤 연유인지는 우리가 잘 모르지만 현충원에 안장된 것은 명확하다. 다만 대구의 최초 유해가 묻힌 곳은 뭘가라는 의문만 남았다.
이용문 장군은 제9사단 부사단장으로 현리전투에 참여하며, '51. 6월에 이종찬 소장이 참모총장에 취임하면서 준장으로 진급한다. '52년 7월 11일에 수도사단장으로 취임하여 '52. 9.6~20일까지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쟁탈전 전투를 지휘했다. 그해 10월에 남부지구 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해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지휘하던 중에 '53년 6월 24일 전북 남원 운봉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전사한다. 사후 육군 소장으로 추서되며,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박정히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 대구근교에 있던 그의 묘를 수요리로 옮기는 이장위원화 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68년부터 매년 이용배 장군배 승마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지리산 전적 기념비, 뱀사골의 슬픈 이야기" 그리고 여수.순천 사건의 홍지회의 최후현장
뱀사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전적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상당히 정성을 기울여 만들어진 전적비다. 여기 반선교를 건너 바로 우측에 기념비가 있다. 남원시 산내면으로 이곳 탐방로로 올라서면 전북 전남 경남의 경계인 삼도봉이 위치항려 좌측으로 가면 명선봉 삼각고지(연하천 대피소) 형제봉 벽소령으로 이어지고, 우측으로는 반야봉 임걸령재 노고단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당시 반란군이나 빨치산들이 이동하기에 좋은 기동로였다. 따라서 이쪽 지역은 반란군과 빨치산에 관련된 비화가 많이 남아 전하고 있다. '12년도인지 나는 일행과 이곳에 탐사차 갔다. 사실 간 목적은 14연대 반란군 수괴중 한명인 홍지회의 마지막 죽은 장소를 보고 싶어서 였다. 이현상이 죽은 하동의 피아골도 근접해 보았던 나이기에 관심이 있었다.
[반란군 수괴 홍지회가 사살 된 반선]
다리를 건너기전 바로 등뒤로 낮은 건물이 있다. 몇해전 우리를 안내하던 지리산 탐방대 요원이 빨치산들이 머물던 곳에 설치된 모형도 등을 가리키며 설명하던 곳이다. 그 곳을 실제 발로 밟아 보기로 하고 나는 불과 10m여 밖에 안되는 거리를 수풀을 헤치며 들어가 마지막 숨져간 곳을 찾았다. 사전에 이미 위치 표식이 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았다.
어린 청춘의 장교가 남로당에 포섭되고, 좌익이 되고 반란군이 되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와 재산이 불타버린 여순사건의 주모자로 몰리면서 일부 추종자들을 데리고 숨어 밀리다 최후를 마지한 곳이다.
시대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하지만 대다수의 장교나 대한민국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누가 더 애국자이며 누가 더 악랄한 반동분자인지 분명하건데 아직도 일부 몰지각한 현인들이 미련 또는 아쉬움 속에 여순 반란사건을 일부 미화하려 한다. 그 엄청난 피해도 물론 아픔이다. 하지만 만약이란 단어를 사용해 본다면(어리석은 행동이지만) 그 당시에 남부지역이 반란군과 그 세력이 장악한 가운데 6.25전쟁이 발발 했다면 과연 지금의 나는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
다. 안의 전투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북한군 제4사단은 장계-안의 통로를 주력 공격로로 판단하고 있었으나, 국군은 단지 경찰 혼성대대만이 신태영 서해사 사령관의 지시로 육십령고개에서 방어준비를 했다.(사실 지역 주민들은 그저 머물다 갔다 함)
반면 북한군 제4사단은 대전을 점령한 후 이른바 의용군이란 미명하에 강제 징집한 1천여 명을 보충받아 7월 23일부터 금산가도로 남진하기 시작했다. 7월 27일 05시에 그 선두부대가 육십령에 배치된 혼성경찰을 격파하고 안의로 지향한다.
한편 민기식 대령은 경찰의 보고로 육십령이 돌파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곧 함양 우체국으로 달려가 육군본부에 상황을 알리고, 신태영 소장, 오덕준 대령과 협의하여 오 부대와 김 부대를 안의 방어에 전용하기로 하고 명령을 하달한다.
하동 전투가 있던 7월 27일, 제19연대는 제1대대를 주력으로 화산리 부근, A중대를 안의를 점령케하여 함양을 거쳐 동진해 오는 북한군을 대비하였다. 함양에는 국군은 민부대(600여명)와 해병의 김성은 부대(350명), 오 부대가 있었다.
27일 05시에 북한군 선두가 육십령에 배치된 우리 경찰대대를 공격하여 안의로 분산 철수하였다. 경찰로부터 상황을 보고 받은 민부대는 육본에 상황을 보고 하고 오 부대와 김 부대를 안의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육십령고개-안의간 도로에서 우측 맨 앞에 미군 제19-A중대, 안의를 가운데 놓고 좌측에 오 부대, 우측에 김 부대가 점령한다.
그러나 벌써 북한군 정찰대가 새로운 진지 점령으로 부산한 김 부대를 교란하기 시작하더니 27일 17:00시경부터 오, 김부대가 점령한 지역에 화력을 집중하더니 야간에 2개 대대 규모로 공격력을 강화하였다.
오 부대는 신병이 대부분으로 전장공포증으로 대부분 분산되어 많은 피해를 입고 화산리로 철수하고, 김 부대는 우측방의 붕괴로 함양으로 철수하였다.
육군 배동걸 특공대는 27일 대구로 복귀하는 도중, 거창에 머물고 있다 전날 미 제34연대 2개 대대가 진출하자 청방대와 경찰과 합동하여 미군이 점령한 남쪽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안의 이전리 공동묘지에 남겨진 전투화 1켤레"
이 지역에 대한 탐사 및 탐문 활동 중에 지역 주민의 제보가 들어왔다. 본인이 미군 전투화를 실제 목격했으며 그 유해를 동네 공동 묘지에 매장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의면사무소에 들러 공동묘지관련 기록을 확인하고 매장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려 했다. 마침 한 곳에 얼마되지 않아 이장하여 나온 무연고자를 매장한 기록이 있었다. 관련 공무원의 안내를 받아 현장에 올랐다.
그리고 제보를 한 분의 집으로 찾아가 실제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그러나 본인이 그날 약주를 한잔 하셨는지 매우 불쾌한 답변과(조사로 오해) 현장 안내를 꺼려해서 다음날 다시 시도하여 묘지 입구 정자에서 겨우 만났다. 그랬더니 안의 북방 대밭에서 전투화가 나왔고(미군추정) 당시에 이곳에 미군이 주둔한 적이 있어서(미24-29-A중대로 추정) 미군으로 알고 유해는 없었지만 다른 유해를 묻으면서 별도로 묻었다는 내용을 들었다.
[안의에는 국군이 전투한 모습을 목격한 인원을 만나지 못했다]
전사에는 안의에서 오부대와 김부대, 미 29-a중대 그리고 안의 화산리에서 오부대, 해병 김부대, 미 제29-1대대가 전투했다고 상황도에 나온다(4권 507P) 오 부대와 김 부대는 27일 오후 17시경에 진지 편성 중 적의 공격에 20:00시쯤 오부대는 화산리로 김부대는 함양으로 축차 철수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 일대를 탐사하고 지역 경로당 등을 방문하여 전투지역을 확인하려 했지만 대다수 이야기가 병력이 오긴 왔지만 무슨산에서 전투하고 그런 것은 목격하지 못했고 이 일대 학교나 공터같은 곳에 모여들다 흩어졌다들 한다. 김 부대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찌된 내용인지,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도 이곳 안의나 육십령 관련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
더구나 화산리에서 미군 전투가 치열했다는 전사기록(뒤에서 설명)이 있어서 이와 관련하여 탐문했으나 마찬가지로 그저 들어왔다가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사실 전투도 없이 물러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저기 미군 차량이 불타고 미군이 전사하여 있는 모습은 몇군데 있었지만 북한군이 점령하면서 모두 부역자들을 대동하고 치워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어디에 가매장 했는지 아니면 북한군이 별도로 가져 갔는지는 당시에 알지 못했고, 부역하신 분들은 어른들인데 지금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라. 함양 전투
함양에서 작전을 지휘중인 민기식 대령은 함양으로 복귀한 김 부대원의 보고로 안의 저지선이 돌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곧 북한군의 공격이 이곳 함양에도 있으리라 보고 작일 오 부대가 임의로 운봉에서 함양으로 철수한 뒤 해병대도 함양으로 철수를 완료한 상황에서 지시한 상황에서 남원 인월 팔령재에 남아 있는 해병대를 1개중대를 남기고 28일 08시 30분경 함양으로 집결하였다.
김성은 해병부대는, 다시 민 부대의 지시로 안의 방향으로 4km 진출, 지곡면 평촌리 주곡일대에서 적과 교전하여 적은 23구의 시체를 남기고 후퇴하였다. 이에 민부대는 다시 팔령재의 1개 중대도 함양으로 이동시키고 여기서 연락이 두절된 오 부대를 인수하여 수동의 화산리 일대에서 미 제29연대 1대대(390고지일원)좌측으로 부터 김 부대, 해병, 오 부대(연락이 두절 되었다 여기서 인수함) 로 방어편성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 부대장은 현 상황(전투 피로, 보급 제한)으로는 병력 손실만 가중돨 뿐이라 판단하고 28일 20시 40분에 미 제29-1대대장과 협의한 후 산청으로 철수를 결정하였다. 이에 오부대는 병력 200명으로 산천-진주로 이동하고, 김부대는 당시 함양으로 출동시킨 병력을 차량으로 화산리로 이동시킨 후 축차적으로 산청으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철수 명령전달이 여의치 않아 우선 제2,1중대 그리고 본부 중대를 산청으로 보내고 축차적으로 철수한다.
" 화산리 일대도 탐사결과 전투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전사내용대로라면 이곳 화산리는 미군이나, 국군이 전투를 치열하게 벌인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장에 가서 390고지나 314고지, 안의의 468고지 등의 탐사에서 개인호나 전투유품 등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지역 주민들이 증언하기를 사실 병력은 오다가다 했지 진지를 편성하고 북한군과 전투하는 것은 목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전쟁이전에 빨치산 토벌작전이나, 국군이 다시 진격하여 북으로 진출하는 상황에서 산속으로 숨어들은 북한군 잔당들과 지역 프락치들을 소탕하는 과정에 민간인 피해같은 것ㅇ에 대한 증언이 더 많았다.
"함양 하백마을의 8인의 민병대"
서울의 김종완(유족)씨로부터 본인 아버지를 밝혀달라는 전화가 왔다. 유해를 못찾은 것이 아니라 함양지구 전투에서 청년방위대로 경찰과 함께 참여한 많은 인원이 전사하였으나 누구도 시신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까마귀가 날아 눈을 쪼아~]
그러다 보니 까마귀가 날아 시신을 훼손하고 부패하여 동네에 그 냄새로 입과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 시신이 너무 훼손되어 누가 누군지를 모르게 되었다. 그러나 2~3명의 유족이 본인의 형제라 하여 함께 묻되 묘비를 심었다고 한다.
나는 현장으로 달려가 주변을 탐사 및 탐문하였다. 마을 간담회를 실시한 결과 현재 하백마을 밭 둔덕에 묻혀 있는 분들은 당시에 경찰의 통제로 함양지역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전쟁 당시에는 누구도 시신을 찾을 수 없었고, 대신 어디에서 전사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상황이라 어쩔수 없었다. 그러다 북한군이 물러나고 동네에서 인원을 편성하여 전사했던 곳으로 달려가 보니 그대로 있었고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한다.
들개나 여우, 까마귀에 시신이 훼손되어 누가 누군지 분간이 어려워 일단 동네로 모셔왔고 여러 일가족이 참여하여 신원을 확인하는 노력을 단 2~3 유족이 명확히 본인관련이 맞다고 하여 그렇게 인정하고 합의하에 동네에서 땅을 일정부분 기증하는 형식으로 묘지를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요구사항이 무엇 입니까?]
이 관련 유해들은 이미 청방대원으로 참전용사로 인정되어 있었다. 다만 유해는 찾지 못한 상태로 기록되어 있었다. 유족들은 국가유공자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요구사항이 무엇입니까?"
"요즘 DNA라는 신원확인 방법이 있다하니 발굴하여 구분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맞다고 알고 있는 분들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발굴하여 확인을 원합니다"
우리는 상급부대의 승인을 거치고, 또한 민원인 포함 다른 유족들의 모든 동의를 얻어 발굴을 하게 되었다. 실제 8구가 묻혔다고 하였으나 발굴하다보니 9구가 되었다. 이유를 알고 보니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 전사(?)한 전사자가 있어 해당 마을 분이 이곳에 가매장했다고 한다.
[틀린 묘비]
발굴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모두 유해가 발굴 되었고, 유족들의 모발을 채취하여 유해와 함께 DNA감식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기막힌 결과가 나왔다. 실제 묘비에 실명으로 되어 있던 4분 중에 유족과 일치하는 경우는 단 한 분이었다. 나머지는 달랐다. 하지만 유족들은 슬픔보다는 서로가 인정하며 이제라도 제대로 확인되었으니 뭐가 문제냐고 고맙다고 한다.
내가 20여 년 동안 유해발굴사업을 하면서 가장 가슴아프면서 푸듯한 몇 사연의 하나였다.
"지곡 평촌 두동마을의 20~30기 군인묘(?)와 나의 왼발 30cm 피나다"(백암산621m의 진혼곡)
한양 지곡리 지역을 지나는데 마을에서 한 분이 우리 차를 세웠다. 우리 유니폼이 눈에 들어와 불러세웠다 한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관련 제보를 들었다.
"우리 밭이 이곳에서 백암산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바로 밭 위에 계단식 논처럼 휴경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직접 관여는 안했지만 동네 어른들이 경찰의 통제로 들것을 들고 산으로 들어가 시신을 들고 와서 이곳에 가매장했습니다. 이 휴경지는 일제시대부터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럼 아저씨는 언제쯤 매장지를 가보았습니까?"
"내가 11살때이니까 전쟁이 끝난 해였다고 봅니다. 당시에 이곳은 아직도 산속에 빨치산이 있어서 맘대로 산에 들어가지 못했고 우리집도 53년 봄에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들어오자마자 할아버지를 따라서 여기에 와 절을 했습니다. 그당시에 우리만 올라온 것이 아니고 당시 여러 명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럼 당시에 묻힌 유해들은 묻힌 곳에서 멀리 떨어진 백암산 정상 등에서 옮겨온 것이라 들었습니까?"
"그건 잘모릅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근처가 당시 북한군인지 반란군의 잔존세력인지 있었고 경찰이 청방대원들과 토벌한다고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역 제보자 김진철(08,45세) : 본인 할아버지가 백암산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했다. 30년 전에만 해도 산에 올라가면 전사자 묘가 능선으로 여러 구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철모, 탄피 등도 개인호 주변에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제보자를 모시고 현장으로 들어가고 일정 장소에서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계단식 휴경지를 돌아보고 이어서 주변 산속을 탐사하기로 하고 들어갔다.
[따뜻해지는 나의 왼발~]
그런데 얼마를 돌아다니는데 땀이 비오듯한다. 그러니 여름이니 당연한 것으로 알고 비오듯 흐르는 땀을 훔치며 한 1시간 여러 장소를 탐사했다. 모두가 지쳐가는 숨소리였다.
이때 나의 왼발 종아리 앞부분이 뜨거운 것을 느껴서 아래를 보니 전투화 밖으로 물같은 것이 흐르고 있고 입고 있던 바지가 찢어져 보인다. 무슨일인가 하고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니 핏물이다. 깜짝 놀라서 자세히보니 일직선으로 종아리 잎 부분이 찢어지고 찍힌 옷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길이는 약 30cm이고 깊이는 그리 깊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많은 출혈로 더이상 탐사를 못하고 제보자와 하산하였다.(잘려나간 뽀족한 나무가지에 찢어진 것이다)
[누가 여기서 죽은지 알아야 찾아가지, 경찰놈들은 도망치면 그만이야!]
마을에 내려와 연세가 좀더 많은신 분을 만나서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경찰이 주로 청방대를 데리고 다녔는데, 그 청방들은 이곳 출신도 있지만 많은 분이 다른 동네였다.
"그곳이 길목이야. 동네에 내려와 공비들이 약탈해 이곳을 통해 백암산으로 들어가는데, 경찰이 청방을 데리고 잠복하여 일망타진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전에 정보가 새어 나가 역으로 빨치산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경찰과 청방대를 몰아붙이면 그냥 경찰은 도망치고 청방대가 죽어있었지. 마을 사람은 마을에서 들것에 들어 왔는데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곳에 있다가 언젠가 너무 보기싫어 경찰이 통제해서 여기저기 모아서 그것에 갔다 묻었어"
"어르신도 참여 했습니까?"
"나는 직접 참여는 안했어도 묻는데는 가서 보았지"
나는 발굴가능성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여순반란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지리산 주변의 유해 매장지는 그 진위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청방대. 치안대.자치대, 피.아를 넘나든 부역자등 정리하기 힘든 단체나 조직들이 여럿이고 이와관련된 이익집단이 당시에는 존재하기에 전재에 참여한 직접적인 국군이나 경찰, 학도병을 구별해 내는 것은 힘든일이다.
어쩌다 발굴을 하게되는 순간 민원이 들어오고, 심지어는 현장에 들이닥쳐 때를 쓰는 경우가 많다. 왜 발굴하느냐, 아니면 여기는 하면서 저기는 왜 안하느냐 그리고 국가유공자나 유족으로 왜 안해주느냐 등의 보상문제가 발생한다.
마. 화산리 전황
북한군 제4사단은 일부 부대를 투입하여 민부대의 진지를 탐색한 수 시간 후인 27일 14:00시경 미 제19여대 제1대대의 A중대 진지 전방에도 출현하였다. 당시 A중대는 새로 투입된 미 제29연대 제1대대(미 제19연대 배속)와 진지를 교대하고 있었다.
27일 오후에 무어대령은 제19-1대대(리중령)를 제29-1대대(윌슨중령)로 교대시켰다.
이날, 27일 진주에 위치에 있던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이미 미 제8군의 조치로 미 제29연대 제1.3대대를 배속받게 되었는데, 그는 제1대대를 함양-안의에, 제3대대를 하동 방면에 각각 배치하기로 결심한다. 무어 대령은 제29-1대대장에게 화산리와 안의 부근의 미 제19연대 제1대대의 진지를 인수하고, 미 제19-1대대장은 진지를 인계하고 진주로 집결하라고 명령한다.
제29-1대대는 차량으로 화전리로 달려, 제19-1대대와 진지교대를 하게 되는데 포병이나 공중지원 없이 진지 교대를 해야했고, 이에 앞서서 B중대장에게 안의의 제19-A중대와 진지를 교대하라 했다. 그러나 이미 제19-A중대는 적과 교전 중이었다.
따라서 진지 교대가 3시간 가량 지연된 상태에서 27일 16:00시에 출발하여 본대로 이동 중에 적의 매복에 걸려 6대의 차량이 대파되고 병력은 흩어져 그 일부만이 28일 아침에 거창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거창
황석산
장수 장계
육십령 안의 371 교복리 합천
지곡 우명리 거창 신원
수동.화산리
백암산
남원 운봉 함양 산청 생초
지리산
"전령의 함흥차사, 215명이 사라지다."
한편 화산리에서 진지를 인수한 제29-1대대장 윌슨 중령은 인접부대와의 연결을 위해 거창의 제34연대와 접촉을유지하려 했으나 연락반이 적에게 기습을 받아 전사하여 연결하지 못했다.
북한군 제4사단은 27일 17:00시경 일부부대를 투입하여 오 부대와 김 부대를 공격과 더불어, 미 제29-1-B중대가 점령한 안의의 371고지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진지교대에 바쁘다 보니 인접 민부대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D중대의 효과적인 화력지원으로 한국전에서의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였다.
그러나 야간에 들어서며 적으로부터 3면에서 공격을 받으며, 위기를 느낀 중대장은 남강 건너 안의 동쪽 1km지점인 239고지로 철수를 명하고 선발대로 장교 2명과 사병 16명을 남강 너머로 보냈으나, 나머지 병력이 적의 포위에 걸려 18명 만이 돌파에 성공하고, 대부분 악전고투하다 24:00에 거창으로 후퇴하게 되는데 18명만이 살아오고 215명이 적 중에 갇혀 전사. 실종된 것으로 판단 되었다.
한편 새로 수동을 방어하게 된 제29-1대대는 몇번의 연락병을 보냈으나 도중에 실종 또는 전사하여 끝까지 이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금산에서 진안을 거쳐 동진하는 북한 제4사단의 포위공격으로 7월 28일 수동에서 철수하였다.
함양의 민부대는 포위되었다가 진주로 철수하였으며, 제29-1대대 윌슨중령은 우명리를 공격하는 북한군을 역습으로 일시적 격퇴하였고 포로를 잡아 안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정찰기가 북한의 대 부대가 함양에서 남진하여 산청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대는 화산리에서 산청으로 철수하게 된다.
[별로인 전투 목격 증언]
이상의 내용은 전사책 4권 515-6p에 수록된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역 탐사 및 탐문 결과로는 이렇게 대규모 전투 또는 미군이 북한군에 포로되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는 증언이 별로 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 소련 군사고문관 라주바예프의 보고서1권 212-3p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28일 정옹에 합천으로 진격을 개시하여, 29일 아침 6시에 거창 점령전투를 하고 오후 6시경 권빈리를 점령했으며 8월 2일 합천점령 전투를 했다고 기록한다.
민간인 증언으로는 우명리 도로변에서 차량 몇대가 부서진 모습을 목격했다는 정도이고, 이렇게 200명이 넘는 미군의 피해상황은 없는데 조금 나쁘게 표현하면 일시 점령했다가 북한군의 기습으로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결과가 아닌가 한다.
바. 거창전황
안의 방어선아 돌파된 7월 27일, 거창 일대에 배치된 미 제24-34연대는 전날에 이어 제3대대를 예비로 하고 제1대대로 하여금 거창 서쪽 능선을 계속 확보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에 항공관측장교로부터 "안의에 이르는 도로주변에 북한군 전차와 차량들이 빈번하다"는 정찰결과를 통보 받는다.
이 무렵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최초 북한군 제2군단에 배속하려던 1개 전차여단을 북한군 제4사단의 진출속도를 높이기 위해 제1군단에 배속하여 사단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미 제34연대장 비우챔프 대령은 연대 정찰대가 27일 자정에 북한군 전차 7대가 안의로부터 북상한다는 보고에 따라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 또한 방어정면을 좁히기로 하여, 제3대대를 안의 통로에, 제1대대를 합천 통로에, 그리고 제1중대를 김천 통로에 각각 배치하였다. 하지만 당시 연대병력은 절대부족한 상태였으며 진지 구축위한 삽이나 곡갱이 등의 개인장구도 없고 전투복과 철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28일 일몰 무렵 안의로부터 거창으로 접근하는 북한군 행군대열에 105밀리 곡사포 5문이 작열하였다. 사단으로부터 상황을 보고하라는 연락에, 합천으로 간 연대장은 제3대대를 거창 동남쪽의 준비된 진지 이동시키려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단의 통제로 철수시키지 못하고 다음날 29일 03시경 거창으로 복귀하였다. 이로부터 1시간 뒤에 북한군이 2개 방향에서 공격하여 북쪽의 1중대가 퇴로를 차단 당했다.
결국 1중대는 끝내 구출하지 못하고 29일 새벽에 제3대대마저 진지를 돌파당하여, 후방의 포진지까지 적의 소총사격에 노출되는 상황이 되면서 전세를 만회할 길이 없어 거창에서 축차적으로 산제리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 후에는 공병대들이 거창-합천간 도로를 파괴시켜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는데 크게 이여하였다.
"목숨이 아깝거든 달아나라~"
북한군은 사전 게릴라들을 침투시켜 퇴로를 차단하고 성동격서의 작전을 감행하게 되는데 게릴라 6~7명이 침투하여 "목숨이 아깝거든 달아나라" 외치고 다니자 포병부대와 일부 부대에서 공포감이 조성되어 전의를 상실케 해 버린다. 포병이 무너지자 화력지원이 없다는 이유로 서단의 방어부대가 임의 이탈이 되어 순식간에 거창방어는 무너지고 29일 산제리(합천 묘산면 : 경찰과 청방대도 이곳으로 철수) 삼거리를 점령한다. 이 거창의 상실이 미 제8군을 놀라게 했다.
한편 한국 경찰과 청년방위대 병력은 전날에 이어, 미 제34여대와 함께 거창 외곾에 진지를 점령하고 이날 29일 배동걸 특공대와 합류하여 진지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 무렵부터 북한군이 거창의 미군을 공격, 미군들이 철수할 기미를보이자 동요되어 지휘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들 경찰 및 청방대 병력은 산제리와 합천 등지로 각각 철수하게 되어 민 부대의 미군 지원은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4권 518p)
"거창에 경찰이나 청방대 전투 사실 들은 적 없다"
그러나 우린 거창지역에서 탐사 및 탐문 활동간 안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군의 전투에 대해서는 그저 머물다 북한군의 기습에 어물쩡거리다 모든걸 다 버리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련 군사고문관 보고서에도 이런 내용이 별로다. 29일 아침 6시에 거창 점령 전투를 전개했고 7시 40분에 미군을 몰아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후방으로부터 투입되는 예비병력의 저항을 극복하고 오후 6시경 합천 권빈리를 점령했다고 기록한다.
우리 경찰이나 청방대가 어디서 미군을 지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주민들도 국군을 본적이 없다고 한다. 국군제17연대가 산제리에 도착하여 미 제34연대의 우측방에 진지를 편성한 시간이 30일 02시였으니 29일 새벽에 미군진지는 돌파당한 이후였다.
우명리 일대에서도 나는 마을주민들을 상대로 탐문 활동을 주기적으로 실시하며 유해발굴과 더불어 우리 전사의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마을 길 옆으로 미군이 버리고 간 차량 몇대가 방치되어 있었다는 제보와, 북진시에 경찰이 피해를 입었다는 정도였다
[지역제보자 유미애(59.'08) :수동면 우명리 지역에서 뽕나무밭 경작시 주위에서 유해를 목격했다. 북진시 경찰이 많이 전사하여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창 신원리에서 죽다 살아오다. 1구 발굴, 조양호소위의 진실"
나는 신원리 양민학살사건에 대해 남아있는 증언을 듣고 싶어 신원리를 찾았다. 동네 이장과 만나 목적을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런데 동네에 탈북용사님이 한 분 살고 계신다 하여 만나 보기로 하고 우선 때가되어 인근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너희놈들 또 왜 왔어?]
그런데 갑작스레 한 명의 시골 노인이 달려들어 나의 멱살을 잡으려 한다. 힘이 워낙 센 어르신이다. 막무가내인 그분을 겨우 이장이 말려서 진정시켰다.
이장 : 이분들은 조사하러 온 분들이 아닙니다. 전사한 분들의 유골을 찾으려 다니는 육군 유해발굴단 입니다. 우리 동네를 지나다 신원리라 잠깐 멈춰 묵념을 하던 중에 나를 만나서 여기 식사하러 온 것이니 오해 마십시요
동네사람 : 이장이 이자들과 한통속은 아니겠지, 군복만 봐도 울화통이 터지니 안보였으면 하오.
이장 : 식사 후에 저기 산 밑에 살고 있는 탈북용사를 만나고 돌아갈 겁니다.
우리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서 도망치듯이 이장을 차에 태우고 식당을 떠났다. 그리고 탈북용사님을 대면했다.
[당신들 조창호가 영웅이라며...]
나 : 안녕하세요. 유해발굴단 이용석입니다.
참전용사 : 아 티빙에서 몇 번 얼굴을 본 것 같아요. 어떻게 여기를 왔소?
이장 : 동네 입구에서 만나 내가 이런 분이 여기 산다고 했더니 만나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왔서요. 오해는 마세요. 형님은 어디있어요?
참전용사 : 그래요, 내가 드릴 도움이 있을까요? 불쌍한게 북한에 있는 참전용사들인데 뭐 누가 힘을 쓸 분이 없잖아요.
나 : 아닙니다. 정말로 저희들은 용사님들이 영웅이란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다만 북한의 저 악랄한 지도부가 문제지요.
참전용사 : 그래도 너무 늦었어요. 50년이 지나서야 유골을 찾으려니 어디 있겠어요.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그래도.. .
나 : 맞아요. 그래도 이제라도 시작했으니 천만다행이고, 벌써 5천여 명을 발굴 했습니다.
참전용사 : 글세 티비를 보니 그러던데 정말 유골이 땅속에 남아 있어요?
나 : 네, 아예 묻히지도 않은 채로 개인호나 교통호 어떤 전쟁터는 그냥 땅바닥에 일부가 수류탄이나 탄피 등과 같이 남아 있어요
참전용사 : 그럼 내가 북한 황해도 포로 수용소에서 평양 인근을 거쳐 개천 지역 탄광에서 포로 생활을 했는데 그 당시에 돌림병으로 엄청 죽었고 부상당한 전우들이 죽어서 그 주변 야산에 묻었어요. 아마도 탄광이나 포로 수용소 주변에는 지역마다 몇 백명씩 될 것이요.
나 : 용사님은 소속이 어디였습니가, 그리고 어디서 포로가 되었습니까?
참전용사 : 나는 처음에는 학도병으로 3사단에 들어갔다가 다시 7사단이 되었고 북한으로 진격할 당시는 8사단으로 들어갔다가 영원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어 압록강 변 수동인가 어딘가 있다가 그들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미군이 비행기로 철도시설과 비행장 등을 폭파하게 되자 우리는 이들을 복구하는 복구대에 편성되어 처음에는 황해도 지역으로, 그리고 평양인근 공항과 철도 복구, 마지막으로 개천지역에 있으면서 탄광지역에 노동에 시달리다 탈북하게 되었지.
나 : 그럼 황해도나 평양지역에서 혹시 얼마전에 탈북하여 소위계급을 달고 신고식을 한 조창호 씨를 본 적이 있습니까?
참전용사 : 선생님 조창호 말도 하지마. 내가 그 소속으로 있으면서 밤마다 철로복구에 참여했어. 그런데 조창호가 견장을 차고 우릴 얼마나 악질적으로 통제하는지. 그러고선 지는 북한군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잘 대우 받고 살았어. 기막힌 노릇이야. 그가 어떻게 영웅이야. 죽일 놈인데... .
나 : 그렇습니까, 아마도 북한군이 시키니까 안하면 죽일테니 참 어려운 행동인 것 같습니다. 정말 고생하셨고 대단하십니다.
이러고 있는데 이장이 형님이라는 분이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목적을 듣고선 참 잘왔다며 신고하려 했다며 본인의 산밭 언저리 몇 곳에 당시 경찰인지 청방대인지 죽어서 묻어진 곳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발굴팀을 투입하여 3곳을 발굴하여 유해 1구를 발굴하였다.
바. 전투 결과
미 제8군은 거창전투가 종료된 직후인 7월 31일에서야 비로소 정면의 적이 북한군 제4사단이란 것을 파악한다. 진주 정면의 북한군 제6사단과 함께 적 2개 사단이 유엔군 좌측 넓은 정면에 배치되어, 북한군 제4사단이 대구 서방측을, 북한군 제6사단이 진주, 마산을 위협하고 있다는 상황을 판단하게 되었다.
구례 방향의 북한군 제6사단은 하동을 점령한 다음, 진주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 부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미 제19연대가 배속 받은 미 제29연대 제3대대의 잔여병력을 통합 이곳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국군은 민 부대장의 지휘하에 있는 오 부대, 김 부대, 해병대 등이 7월 28일 함양을 철수한 뒤 화산리 부근 수동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였으나 북한군에 밀려 다음날인 29일에 산청을 경유하여 진주까지 철수하게 된다. 민 부대는 계속 김 부대를 지휘하여 진주 북쪽 산청 가도에 진지를 점령하고, 김성은 부대는 30일에 미군에 배속되어 남강 남쪽 방어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수동지역에서 철수한 오 부대는 진주로 이동한 뒤에 부대 정비를 할 수 가 없으므로 31일 마산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편 민 부대와 함께 수동지역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자 했던 미 제29연대 제1대대는 같은 날(29일) 산청에서 부대를 수습하면서 진주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결국 진주로 이동 중에 연락기로부터 "함안으로 이동하라"는 통신문을 받고 함안으로 기동 중에 한국군 해군 첩보대로부터 모든 미군 부대가 철수해 버린 진주에 적이 침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진주를 피해 산길을 택하여 천신만고 끝에 30일 02시에 함안 서쪽 마상리에 진출한다.
또한 거창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던 미 제34연대는 산제리에서 합천으로 다시 철수해 마침 이곳으로 진출한 미 제21연대 제1대대와 함께 진지를 점령하고 30일에는 국군 제17연대와도 합류한다.
워커는 거창의 위기를 인정하고 가용한 전 예비대를 이곳에 투입키로 한다.
즉 한국 제17연대를 동부전선에서, 그리고 국군 제3사단을 지원하고 있는 미 제21연대의 주력을 영덕으로부터 차출하여 산제리로 전용시켰으며 미 제21연대장이 통합 지휘했다. 국군 제17연대는 30일 02시에 산제리에 도착하여 우측방 진지를 점령하는데 당시 28세인 김희준 대령(후에 소장)이 2천여 명을 지휘했다.
3. 권빈리-합천 전투
가.양측의 상황
북한군 제4사단은 대전전투 이후 현지에서 약 2천여 명의 신병을 보충하였다. 그들의 보급은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원활치 못하여 현지 조달에 의존하고 있었다. 7월 23일 금산을 출발하여 26일 안의를 거쳐 29일 새벽에 거창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바로 동진하여 낙동강으로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다.
한편 남쪽에서 미 제24사단을 위협한 북한군 제6사단은 26일 목포.보성.순천.여수 방면으로 각각 1개 연대를 나누어 투입하여 서남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순천에서 합류하여 27일 하동을 점령함으로써 진주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7월 24일 딘 소장의 후임으로, 이틀 전에 부임한 처치 소장을 대구로 불러 제24사단을 진주-함양-거창선에 배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처치 소장은 7월 25일 예하의 제19연대를 이른 아침 진주에, 그리고 17시를 전후아혀 제21연대도 진주로 이동시켰으며,다음날 26일에 미 제34사단을 의성~군위에서 차출하여 거창으로 전진하도록 명령하고 사단을 대구에서 합천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미 제8군은 병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맥아더 원수가 본국에 요청한 11개 대대 중 최초의 증원부대로 미 제29연대의 제1대대와 제3대대가 24일 보산항에 도착하자 25일 즉시 진주로 투입시켜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의 지휘를 받도록 한다. 이후 제19연대자은 제29연대 제3대대장 모트에게 즉시 하동으로 진출하도록 하고, 제1대대장 윌슨 중령에게는 안의 남족 음양리에 배치하여 제19연대 제1대대의 방어진지를 인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거창-함양-하동을 잇는 방어선이 3일도 버티지 못하고 돌파되자 적이 수일 내에 낙동강선에 도달할 것으로 판단하고, 7월 29일 마산을 목표로 안동에서 대구로 이동중인 국군 제17연대를 목표를 바꾸어 고령 서쪽 덕암리로 전진시켜 미 제34연대를 지원토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거창에서 철수한 미 제34연대 병력 수준은 예하의 제1.2대대 수준이 평균 350명 수준이고 대전전투 이후에 장비를 전혀 보충받지 못한 상태로 오직 소총만이 유일한 개인용 무기였다.
그러나 권빈리 부근에서 미 제34연대의 진지를 인수한 국군 제17연대는 옹진전투로부터 오산~진천~화령장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전투경험을 쌓은 고참병들이 많았고, 병력이 기간요원 1200명 외에도 대전에서 모집한 청방대원이 1,200명으로 총 2,400명이었고 81mm박격포 17정, 60mm박격포 13정, 기관총 27정 등으로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나. 전투 경과
제17연대는 수도사단 예하에서 배속해제되어 마산으로 진출하기 위해 대구로 이동했는데 다시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어 덕암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으로, 29일 대구를 출발, 고령을 거쳐 덕암리에 도착하였다. 이후 권빈리로 이동하여 황강 넘어 망일산 일원을 2대대가, 제1대대는 미 제34-1대대 후미 551고지 일대에 배치하였다.
29일, 거창에서 철수한 미 제34연대는 가천과 황강이 만나는 지역에 제1대대를, 황강 건너 월현산 하단부에 제2대대를 투입시켜 국군 제17연대의 전방에서 가천~명당산선을 방어하고자 했다.
권빈리-합천 전투('50.7.30-8.1)
가천
숙성산 899 고령 동쪽
거창(위로) 520 감토봉
국17-1대대
대야리 551 상현리 권빈리 국17연
미 34-1대대
적5연(-)
황강
적1개 대대 국17-2대대
383 월포동 미34연(-) 망일산 국17-3대대
616 합천(동)
월현산
북한군 제4사단은 제5연대는 7월 31일 17:00시를 기하여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미 제34연대가 적의 압력에 무너져 철수하고, 국군 제17연대가 주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적 사이드카 1대가 거창-권빈리 도로상에 나타나자 연대장 김희준 대령은 기습하여 포로로 잡아 그들의 암구어를 알아냈다.
북한군은 일부가 미군복장을 하고 있었고, 황강의 물소리에 피아간에 식별이 어려웠다. 적은 반면에 우리 제17연대가 이 지역에 투입된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8월 1일 부터 시작된 그들의 공격을 저지하여 무려 트럭 1대분의 무기와 적 1개 중대를 사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의 승리로 연대장 김희준 대령은 한국군 최초로 미국정부로부터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에도 북한군의 재공격을 역습으로 격퇴하고 저지선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 미 제24사단장으로부터 "제17연대는 현풍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아 8월 1일 자정에 미 제24사단에서 지원한 차량으로 덕암리를 출발하여 고령을 거쳐 낙동강을 건너 현풍으로 철수하게 된다.
4. 전투 결과
북한군 제4사단은 7월 29일에 거창을 장악한 후 대구를 목표로 동진하고자 기도했으나 권빈리 일대에서 국군 제17연대를 만나 8월 1일까지 공격이 돈좌되고 말았다. 그 후 제17연대가 낙동강선 이동으로 철수하자, 이들은 고령-합천을거쳐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게 된다.
북한군 제4사단은 조속히 낙동강을 도하하기 위하여 선발대를 은밀히 도하시켜 도하지점을 파악하고자 하였으나 그들마저 국군에 의해 전멸되어 진출이 지연되었다. 제17연대 제7중대는 비슬산 입구 월곡리에서 적 선발대를 기습하여 6명의 포로와 40명을 사살하고 소총 50정을 노획한다.
그러나 북한군 제4사단은 창녕 서쪽에서 낙동강을 도하하여 미 제24사단과 다시 전투를 치루게 되는데 국군 제17연대는 이 전투를 치룬 후 8월 7일 국군 제1군단 작명에 의하여 이곳을 떠나 밀양-대구를 거쳐 청송 남방의 구산동으로 전진하였다.
5.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권빈리 경로당 간담화 결과 : 동네 어르신들 10여 명이 참가하여 전쟁 당시의 모습을 증언했다. 국군이 이곳으로 올 때까지도 이곳은 전쟁이 뭔지 잘 몰랐다 한다. 전사에는 많은 전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황강을 연하는길이 그 당시도 길이 하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본인들은 미군이나 북한군은 보지못했고 국군이 길을 따라 죽어서 그대로 방칟되다가 한여름에 냄새가 너무 고약하여 당시 북한군이 통제하여 시신을 처리했는데 지금 대부분 그동안 수해사 모두 훼손되어 없다고 한다.
실제551고지군이나 망일산에 올라 개인호나 교통호를 조사했는데 사실 몇군데 식별하지 못했다. 오히려 압곡교 맞은 편에 있는 240 무명고지에서 일부 육박전이 있었고 하여 탐사했으나 흔적이 미미했다.
소련군 고문단장의 보고서에도 피해나 전과 기록이 미비한 점을 고려하면 큰 전투는 실시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나. 반포리의 북한군 훈련소 위치 : 3구 발굴
지역 제보자 백동대('08, 74) : 깃대산 548고지와 석가산(무명 350)에 미군이 북한군과 3일간 전투후 산에 올라가 보니 유해가 곳곳에 있었으며, 미군들은 그 후에 유해발굴을 위해 수차례 찾아와 발굴해 갔다.
지역제보자 우갑석('08,69) : 석가산과 싸리재에서 전투가 치열했고 , 전쟁후 약초 캐러 산에 갔다 수구의 유해를 목격했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은 보이질 않는다.
지역제보자 윤종수('08,76) : 18세 때 팔심리 지역 밭에 아군전사자와 M1소총과 전투호가 있어 유해는 매장해 주었고 칼빈소총 등 30저을 보국대 인원에게 반밥했다. (2구 발굴)
지역제보자 김금순('08, 72) : 봉산면 임하가세에서 13세 때 소골 먹이던 중 소가 놀라는 것을 목격하여 , 확인결과 미군추정유해 1구가 머리에서 정가이 부분까지 매장되어 있고 군화부분은 노출되어 있었다.(1구발굴)
지역제보자 송기출('08,66) : 상현리 마을지역 사찰부근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쑈엇으며, 유해는 피아를 구분할 수가 없이 많은 유해가 굴러 다녔다.
권빈리 바로 동쪽이 반포리다. 이곳에 당시에 북한군 훈련소가 있었고 지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강제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다고 하여 현장에 대한 정밀 탐사를 하였다.
다. "망일산(622)의 전투흔적"
국군 제17연대가 적과 전투하여 적을 일시적 격퇴ㅐ했다고 전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연대장 김휘준 대령이 한국군 최초로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봉산면 김봉리와 봉계리, 행정리, 강건너 상현리 지역에 대한 탐문과 망일산과 바로 남서족의 월현산(619) 능선을 탐사했다. 그러나 전투 흔적은 쉽게 찾기 어려웠다. 앞서 전사기록처럼 아마도 적이 무방비 상태로 국군이 없는 것으로 알고 진출하다 음성지구나 상주 동관리지역에서 당했던 것처럼 우리의 기습사격에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병력을 증원하여 밀어붙였다고 판단 된다.
라. 합천지역 전투관련
지역 제보자 안수산'07,73) : 합천 쌍백리 하신리 지역에서 2~3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당시에 유엔군 소속으로 추정되는 전사자들을 개울둑 근처에 매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제 4 절 하동-진주 전투
1. 전투 개요
가. 개 요
하동~진주 전투는 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가 민기식 부대 등과 합동으로 남해안 해안선을 경유하여 우회 공격하는 북한군 제6사단을 방어하여 진주가 피탈되기까지의 7일간 적을 지연시킨 전투이다. 하동은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으며 7월 26일 야간 와해된 국군 혼성부대(신편 제5사단 제15연대의 일부병력(이 영규 중령, 100여 명)가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으로 진주로 철수함으로써 하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 당시에 채병덕 소장은 육본으로부터 하동방어 명령을 받았으나 예하 부대가 없는 상태로 진주의 미 제19연대장을 만나 하동방어를 설득한다
이에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즉각 예하의 배속된 제29연대 3대대로 이 지역을 탈환하도록 하였으나, 하동으로 진출 도중에 27일 아침 쇠고개에서 적에게 기습을 받아 함께 갔던 채병덕 소장이 전사하고 대대장이 실종되는 등 많은 손실을 입고 철수한다.
나. 양측의 상황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23일에 광주를 점령한 뒤순천, 진주를 거쳐 낙동강선 서측에서 마산으로의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다. 7월 25일 주력으로 순천과 광양을 장악한 후 하동으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고, 일부 부대는 선발대로 지리산 서쪽의 종격실 능선을 따라 화개장으로 거치면서 신원리(하동의 대안)에 이르러 하동을 협공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동에 진출한 적은 적 6사단 예하 제1연대로 병력이 1,000여 명, 전차 2대, 122밀리 및 76미리 포 각 2문, 120밀리 박격포 2문 등이었다.
한편 북한군 제6사단은 제15연대와 제13연대로 목포와 나주를 각각 점령한 후 목포에 1개 대대와 1개 자주포 포대를 남겨두고 하동지역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당시에 북한군 제6사단은총 병력이 1만여 명이고, 전차 4대, SU-76자주포 18문, 122밀리 유탄포 14문, 76밀리 야포 38문 그리고 122밀리 박격포 22문 등이다.
한편 육본은 채병덕 소장을 경남지구 편성관구사령관에 임명하여 남원-하동에서 이응준 부대와 민기식 부대를 통합지휘토록 한다. 그러나 당시 통신 두절 상태에서 이응준 부대는 순천에서 여수로 철수 중이고, 민기식 부대는 운봉으로부터 함양부근에서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동부근에는 신편제5사단 제15연대의 일부병력(이영규 중령) 100여 명만이 집결하고 있었다.
이때 미 제8군 워커 중장은 7월 23일 정보참모로부터 호남방면으로 우회한 적이 시속 3.2km속도로 전진하여 적의 선두가 안의와 진주에 도달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고를 받았다.
이에 따라 전날 김천에서 집결하여 정비중인 미 제24사단을 급히 진주로 추진 배치시키기로 결심하고, 제19연대(-1)는 24일 밤에 진주로 이동하고, 25일 저녁에는 일본에서 출발한 제29연대(-1)가 진주에 도착하여 제19연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제19연대는 실제 전투 병력이 600명이고, 장비는 안편의 35%수준이고 연대장 무어 대령은 25일에 부임하여 아직 연대 사정에 익숙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또 제29연대(-)는 7월 15일 일본에서 출동명령을 받고 연대장과 연대본부는 연대편성을 위해 기간요워능로 잔류하고, 제1대대와 제3대대만이 25일 진주에 도착한다. 당시 병력과 장비는 100% 수준이지만 훈련 상태는 영점조준이나 박격포 시험사격도 못하였고 기관총은 손질마저도 미미한 상태였다.
2. 하동 부근 전투
가. 방어준비 상황
채병덕 소장은 7월 24일 경남편성관구사령관 임명 신고식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영호남의 관문인 하동을 방어하라는 당부를 받고, 지난 초전에서 패배한 책임을 통감하고 실의에 빠졌으나 다시 막중한 작전 임무가부여되자 생기를 되찾은 듯이 기뻐하고 다음날 25일 정래혁 중령을 대동하고 하동으로 달려간다.
하동 전투('50.7.25-27)
M중대
I중대
계동 미 제29-3대대 진주 미24-19연
181 K중대
하동
쇠고개
적6-1연
L중대
국30연
섬진강 적6사(-)
하동으로 달려간 채 소장은 하동-진주의 중요성을 재인식했으나 하동읍이 전혀 방어태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알고 실망한다. 이때 수행하고 있던 정래혁 중령이 "제가 이곳에 남아 병력을 수습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정래혁에게 맡기고 작전협의를 위해 진주로 떠났다.
채 소장은 그 길로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을 방문하여 하동방어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한.미 양자간 하동을 고수하기로 합의가 이루어 지고, 채 소장이 고문 임무를 수행하기로 한다. 이 무렵 영남편성관구사령관에게도 하동으로 진출하여 적을 격퇴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그러나 채 소장은 수하 병력이 없는 상황이고, 때마침 그의 곁에 있던 박현수 중령(신편 제3연대장)과 부관 이상국 소령 등이 있었다.
나. 하동읍 피탈
하동에 남은 정중령은 이날 일몰 무렵 화개장 쪽에서 분산 철수하고 있는 이 영규 부대의 일부를 만나 상황을 듣고 이들 30여 명을 인수하고, 또 현지에서 모병한 300명을 합쳐 1개 대대를 편조한 다음 하동교 동안에 배치하였다.
이날, 22:00시경 두곡리에 적이 나타나 일제사격으로 적은 주춤거렸지만 정래혁 부대는 탄약이 없어 철수명령을 내리고 본인도 10여 명과 함께 26일 23시경 하동을 빠져나와 진주로 향했다. 철수하면서 원전동에 이르러 채 총장을 만났다고 정래혁은 나중에 회고하였다.
한편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채총장(경남지구편성관구사령관)의 조언을 받아들여 새로 도착한 제29-3대대에게 하동을 공격하여 확보하여 진주방어의 시간적 여유를 얻으려 생각했다. 제29-3대대장 모트 중령은 대대는 전투경험이 없고 지원화기가 없어 전투임무를 당장 수행하기는 곤란하다고 건의 하였으나 연대장은 대대의 능력만으로도 적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대대장의 건의를 무시했다.
대대는 26일 24시 30분 경에 차량으로 진주를 출발하였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않고 차량들이 도랑에 빠지는 등의 악전고투끝에 원전동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동행하고 있는 채 소장은 철수 중인 정래혁 중령으로부터 하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되고, 정중령에게는 진주로 가 휴식하도록 한다.
하지만 도로망 등의 문제로 진주-원전의 도로는 기동에 많은 지장이 초래되고 우회도로 또한 상태가 좋지않아 차량이 논으로 굴러떨어지는 등 기동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원전에 접근했을 때 대대는 하동에서 철수해 오는 민병(이 영규 부대로 판단됨, 화개장터에서 전투한 학도병?)들을 만나 "하동에 있던 약 400명의 민병이 지난 25일 북한군 대부대의 기습으로 분산 되었다"는 정보를 얻었다.
모트 중령은 연대와 통신 두절로 부대대장을 버내 상황을 설명하고 진출을 중지하고 현 진지에서 방어할 것을 건의 하였으나 연대장은 추가 화력지원응 약속하며 진출할 것을 재 강조했다.
채사령관은 민부대 예하 제30연대 1개 중대가 진주에서 부대를 재편성한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연대장을 불러 출동을 명하였다. 중대는 26일 밤 안으로 섬진강 하구인 섬방까지 진출하여 야영하였으나 김용주 연대장은 이때까지 하동이 피탈된 사실을 몰랐으며 미군의 진출선에 대하여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김용주 부대는 다음날 쇠고개 마루에서 남쪽으로 400m지점인 151고지에 올라 미 제29-3-L중대와 연결한다.
횡천리에서 숙영에 들어가는 대대는 24일부터 26일 밤 까지 3일간 한잠도 자지 못했다.
다. 북한군의 매복기습(쇳고개 전투)
27일 08시 45분경 L중대를 첨병으로 전진을 개시, 계동에 이르렀을 때에 적 1개분대규모가 하동고개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즉시 첨병은 75밀리무반동총으로 사격한 다음 고개로 급진하여 그 양측 고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K중대장에게 180고지를 점령하라고 명했다. 그 사이에 대대장 주변에 채병덕 소장등 일행이 몰려들어 복잡해졌다. 얼마 후에 180고지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를 대대장은 K중대가 점령하느라고 그러는 줄 잘못 판단하게 되었다.
얼마 후 500m 정도의 꼬부라진 모퉁이에서 150명 정도가 진출중인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이 북한군 복장이지만 일부는 미군 전투복을 입고 있었으며 40m까지 근접해 왔다.
그때 채장군이 "너희들은 아군이냐, 적이냐?" 라고 고함을 질렀다.(당시 채총장을 수행한 박현수 중령의 회고는 이 영규부대 일부가 아닌가 했다고 함)그들에게 소속을 묻자 당황하여 길 옆 도랑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미샤라대위가 사격을 명하였다.
[하동의 함정]
미 제29-3대대가 횡천리에서 숙영 후에 쇳고개에 이르는 과정에, 이미 북한군은 고개 정상의 좌우측 주요 고지에 매복병이 대기하고 일부 병력이 항복하여 귀순하는 것처럼 미군의 진전으로 접근하여 오판한 지휘부가 직접상황을 확인하겠다며 앞으로 나섰다가, 채병덕 소장이 현장에서 두부 관통상으로 전사하고 대대장은 부상 당하면서 지휘체계가 무너져 무질서한 후퇴과정에 무려 350여 명의 희생이 발생한다. 이를 미군은 하동의 함정이라하며 어떻게 진출하는 것을 알았고, 숙영지를 기습하지 않고 자루 모양으로 끌여들여 결정적 타격을 하려 했는지 지금도 의문이라 한다.
"채총장 두부 관통상 전사, 못트 대대장등 다수 부상!"
곧이어 적의 박격포탄이 집중되고 아군의 전술항공통제반 무전차량과 대대 지휘차량이 파괴되어 대대지휘 조차 마비 되었다. 항공기가 출격해도 연락 방법이 없어 소용이 없었다. 채소장이 현장에서 전사하고 다수의 피해가 발생하면서 대 혼란이 발생했다.
이미 쇠고개 좌우측에 쐐기모양으로 북한군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미군은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계동에 본대로 철수가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국군 제30연대 김용주 부대는 161고지를 점령하고 독전으로 방어토록 하여 몇번의 공격을 격퇴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물러나는 미군을 보며 동요가 내부에 발생하여 전열을 회복하지 못한 채 하나, 둘씩 각개로 분산된 상태에서 진주로 빠져 나갔다.
"99명의 별동대, 노량진에 이르다"
미 제29-3대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삼삼오오, 알지 못하는 지역에서 철수하다 보니 많은 희생자와 실종자가 생겼다. I중대의 어프리게이트 상사는 99명의 병사를 이끌고 횡천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 남해대교가 시작되는 하동 금남면 노량진에 가서 어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구사일생으로 한국 초계정에 구출되어 부산으로 수송되기도 했다.
횡천강 지류에 쌓인 미군 313구 : "하동의 함정"
계동에 대기하던 병력은 살기위해 모두 흩어졌다. 지형도 모르고 훈련도 되어있지 않고 대부분이 처음 기동해 오던 방향으로 뛰었으나 북한군의 기관총세례에 대부분 전사했다. 바로 횡천강 지류인 무명천의 높은 장애물을 넘지못하고 전사 2명, 부상 52명, 무려 349명의 실종자가 발생하고 말았으며 반격시 그 무명천에서 313구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북한군이 계획적으로 고개를 개방해 놓고 미군을 유인 괴멸시킨 뼈아픈 현장이 되었다
라. 전투 결과
미 제19연대장 무오 대령은 이날(27일) 오전가지도 하동 진격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야 상황을 인식하고 아연실색하여, 사단장 처치 소장에게 보고하고 상황을 정리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원전동-곤양 서측지역은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제19연대장은 즉각 제29-3대대의 수습에 나서 대대 잔존병력 354명을 재편성하여 K 및 L 중대에 보충하게 된다.
이날 단 하루의 전투에서 미군은 350여 명의 많은 손실을 보았다. 국군은 채 소장이 전사하고, 김용주 중령이 지휘하는 제30연대도 50여 명이 전사했다.
마. 유해발굴 관련 탐사 및 탐문결과
(1) 화개장터 학도병 전투의 진실
[넋두리부터~~]
요즘 일부 지역전사가들의 강력한 드라이브로 많은 잊혀진 전사기록이 솓아지고 있다.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다만 경험되지 않은 사실에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포장하거나 축소해서는 안된다. 요즘 번지고 있는 서울의 봄이란 영화속 이야기도 전쟁사는 아니지만 먼 시간을 놓고 보면 한 순간의 전쟁이고 역사다. 나는 그 당시 현장의 한 곳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근무하던 소위였다.
얼마전 천만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도 그 배경이 되는 유해발굴과 유가족이 오열하는 광경의 실제 모습이 내가 담당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제고하는 의미에서 할 말이 많았던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인데 그걸 100% 리얼로 받아들이는 의식의 조작을 통해 또 다른 불행을 안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 속에 숨어있는 사실은 얼마나 될가, 아니면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혹시나 이용되고 그시대를 잘 모르는 모두는 분노와 징투로 아니면 허망으로 무너져 화합이나 미래로가 아닌 보복과 원망으로 그저 인간 본능에 머무는 역사 단절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서울의 봄에서 군부의 욕망만이 부각되지만 어린 소위의 당시 눈은 주군을 시해하고도 또 그 옆 자리에 머물던 인원들의 행동이 아리송하고, 혹시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알 수 없는 사연이 깃들은 것은 아닌지 궁금한 사건인데 그런 파헤침의 노력이나 접근은 별로 없는 감정 호소용 이거나 역사의 심판마냥 마치 잊혀진 것을 들춰내는 것 같은...
아프다고 무조건 환자는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마치 그걸 사랑하는 것이 본인이 순국자로 둔갑하는 나르시스로 포장된다. 역사는 냉정한 가정으로 들여다 봐야 한다. 정설이란 내가 경함한 것도 없다. 그속에서 유영하는 수많은 당사자들의 경험과 판단 중에 하나 일 뿐임을 알아야 하는데 특히 우리처럼 전쟁과 억압으로 얼룩진 역사는 승자 독식이었다. 그 역사가 지나면 그 다음 역사 주인공들이 각색과 도색으로 진짜 가짜를 만들어 못을 박아 버리고선 눈으로 보지도 못하게 하고 비판도 못하게 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또다른 역사 파괴다.
"역사는 과거를 알아 현재를 보장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되돌림이 아닌 심판이 아닌 타산지석이다.
[참전용사 정 효명용사님의 민원제기]
화개장터에서는 이영규부대(여수순천지역 학도병이 참가) 또는 일부 민병들이 북한군 선발대와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전사에는 특별한 기록이 없다. 여수 돌갓이 많이 생산되는 곳에 사시던 참전용사 정 용사님이 발굴단에 민원을 내셨다. 본인이 이곳 전투에 친구들과 참여하여 살아났다며 유해를 발굴해 달라는 것이다.
나는 바로 조사탐을 대동하고 화개장터러 달려갔다. 그리고 용사님과 현장에서 만나기로 한다. 그런데 용사님 거동이 불편하다 하여 직접 여수로 가서 정확한 증언을 청취하기로 하고 여수로 갔다. 여수는 동백섬이 있는 곳에 보도연맹원 수천명이 학살된 곳이라 하여 비공식 탐문을 해보았던 곳이다.
용사님은 학도병으로 참가했다가 '51년 초에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면서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집으로 복귀하게된 경우였다. 그러니 용사님이 참전한 전투는 이곳 하동지역에서 화개장터 전투와 철수하여 진동 어딘가에서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는데 적과 전투를 하고 진주로 철수해 가고 그 다음에는 주로 행정분야에 근무하다 전역하여 은행 지점장까지 되었다.
[돌로 쌓은 개인호가 그대로 무너진 상태로 존재하다]
나는 하동 화개장터 바로 위에 있는 추모비를 찾았고 가묘역을 찾았다. 이곳은 정회장이 일부 전우들과 사비를 들여 조성한 추모공간이었다.
마을주민들이 증언을 기피하는 눈치라 정확한 발굴장소를 찾기는 쉽지않았다. 이곳은 전쟁이전에도 여순사건 반란군 토벌작전간에도 군경이 점령하던 곳이다. 그런데 악양지역에서부터 피난민들이 줄을 지어 내려가고 있는데 사실 전쟁이 무언지도 모르고 또 토벌군이 들어오고 있나 보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가묘지역은 사실은 유해가 없다. 주변에 남겨진 유품 등을 모아서 만들어진 곳이다. 현장에 들러 어디를 발굴해야 할지 막막한 가운데 동네를 찾아가 탐문을 해봤지만 그전의 반란군 시절때문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분이 있어 세우고 혹시나 하여 관련내용을 말했더니 본인이 직접 낫을 들고 파인 구멍 속으로 집어넣어 긁어서 시계를 주어찾다는 것이다.
지역 제보자 김영근(74. '07) : 이곳에도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 내가 열다섯인가 해서 끌려갈 수도 있었는데 키가 작고 왜소하여 12살이라 하여 끌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인민군이 시켜서 밤에 등에 뭔가 지고서 진주방면으로 몇 번이가 갔다가 돌아왔지. 여긴 여순반란사건 때 많은 사람이 학살되어 사실 군에 대한 인식이 별로야. 전쟁 후에 인민군이 물러갔는데 전라도 여수에서 유족이란 분들이 와서 발굴도 해갔어.
[지금도 가고 있는 시계]
그런데 그때는 걸어서 학교를 다니는데 지금 저 고지 좌측으로 밭 사이에 계곡이 있는데 그곳으로 넘나들었는데 언제 보니 구멍이 크게 생기고 빗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는데 말하기를 그곳에 시신이 묻혀있다는 것이다. 무섭지도 안했어. 그때는 . 그래서 학교갔다온 다음 어느날 낫을 들고 가소 땅에 엎드려 긁어봤더니 달가닥거려 어떻게 빼내니 시계야. 그런데 가고 있어. 시간이 맞는거야. 하지만 유족이 찾아온다는 등의 이야기에 그 후로는 한번도 그곳에 오르지않았지.
나는 그 분을 모시고 차밭을 지나 그 현장으로 올라섰다. 고지에서 한 20m 떨어진 곳인데 황토흙밭이다. 학도병 용사님이 증언한 지역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나는 바로 시굴을 하여 가능성을 타진한 결과 유해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07년 4월 말에 발굴을 개시하여 10구의 유해를 발굴헸다. 이중 한구는 유전자 감시을 원한 유족과 일치하여 신원까지 확인하게 된다.
발굴 당일에는 정회장님을 모셔와 현장으로 모셨다. 기막힌 현장이다. 탄포를 그대로 메고 전사하신 모습, 예수상, 학교 박클에 탁구와 복싱마크 모습 등 여수순천지역 학교의 그 당시를 재현한다. 함께 참여한 그곳 현재 학생 대표단도 함께 참가하여 대선배님들의 장렬한 모습을 실제 목격하고 수습도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11년도에 다시 지역에서 저를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보니까 이곳 하동 탑리의 '50.6.25일 07:00시 전투가 6.25당시 학도병이 참가한 최초 전투라며 전쟁사 고증을 위한 토의를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여수의 한 해병대 출신 예비역이 추진하고 있고 많은 증언과 제보자를 모시고 국방부 관계자와 검증을 거쳐 포항지구 학도병 전투보다 여기가 더 빠르고 위국헌신의 모범으로 여수순천 학생들의 뜻을 헌양하겠다는 것이다.
그후로 몇번의 이런 노력이 진행되더니 나는 야인이 되었는데 방송에서 관련 다큐를 지켜보아야 했다. 하지만 학도병 전투사는 단일 제대가 아닌 당시 처음으로 김석원 장군이 진천지구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이미 학도병이 참가하였으니 누가 처음인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 또한 역사속에서 정치적 압력이 작용한다던지 아니면 그 힘을 이용하여 포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정효명 용사님의 증언대로라면 당시에 제5사단 제15연대에서 통제하여 훈련도 받고 22일 밤 10시 경에 비상소집 되어 혈서를 쓰고 입소에 응하여 개인화기도 없이 순천역에서 화물열차편으로 남원역으로 가서 역 구내에서 M1 칼빈 소총을 지급받고 총기 사용법을 배웠다 한다. 남원에서 열차편으로 임실에 올라갔다가 다시 순천까지 열차로 내려왔다가 또 열차로 구례로 올라가 걸어서 구례읍내로 가서, 그날이 26일인데 23시 경에 다시 하동으로 가라는 명령에 걸어서 화개파출소 뒤 야산에 주둔하게 되는데 현역이 인솔하고 있었다 한다. 27일 07시경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차포와 박격포가 솓아져 대응할 겨를도 없이 피해를 입어 180명의 인원이 진주로 철수하여 보니 110명이었다고 한다. (625학도의용군 자료집 126-132P)
그리고 '11년 하동 비파리에서 한 제보가 들어왔다. 나는 발굴과장에서 조사과장이 되어 조시팀을 보내 사항을 확인했다.
지역주민 정병균('11. 78) 제보 : 전쟁 후에 시신 7구를 밭 주변에 묻었는데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다시 인근 공동묘지로 옮겼다.
발굴팀이 '11. 5월에 투입되어 박클과 전투복 바지 고무줄 등 유품과 함께 5구의 유해가 발굴된다.
나는 탑리 마을주민 간담회를 다시 하였다.('11.11.28)
이광섭(80) : 순천 학도병들이 모여들었고 점심시간대 인민군이 기습공격하여 많은 피해발생한다. 바로 뒤로 후퇴하여 전쟁은 오래하지 않았다. 순천 유가족들이 나중에 들어와서 유해를 일부 발굴해 갔다. 찾아가지 않은 유해는 나중에 모아서 계곡 한 곳에 묻었다. 하동 쇳고개 지역은 미군과 인민군이 전투햇다. 당시는 유해가 많아서 걸어 다니지도 못했다.
주우호(74) : 화개 대성리 세석 평전(약수터) 일원에서 공비토벌작전이 있었고 일대에서 가장 많이 죽었다. 당시에 공비로 사살ㄷ된 자는 목을 잘라서 처리했다. 현 칠불사에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 상태에서 국군이 불을 질렀다. 공비들이 골자기로 이동하며 크게 죽었다.
이강문(71) : 여순사건 진압 때도 9연대가 진압하러 왔다가 정금리 앞산에 군인이 11명 전사해서 나뒹글고 있었다. 그 후에 군인이 들어와 시신을 수습했는데 나중에 가보니 M1소총. 대검.철모. 유해가 그대로 있었다.
한병화(75) : 목통골에서 연동마을 위로청사골이 있는데 대량으로 전사, 15년 전에 기보니 큰바위 밑에 유해가 그대로 있더라
여기서 비파리관련 내용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전쟁의 주도권이 초기 전투는 북한군에 있었고, 이 시기에 전사한 국군이나 미군을 발굴하거나 가매장하여 준다는 것은 어려웠다. 다만 한 여름에 부패하여 너무 악취가 진동하다 보니 북한군이 부역자를 데려다 여기저기 가매장하게 한다.
(2) 채병덕 소장(육참총장)에 얽힌 의문점
지금도 수수께끼의 하나가, 북한군이 어떻게 미군이 하동을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았으며 횡천리에서 숙영시 기습하지 않고 하동고개에서 매복하고 있었느냐?
하동에 매복을 한 부대는 북한군 제6사단이었으며 이런 상황속에서도 미 제8군은 북한군 제4사단이 동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 쇳고개 정상 오르는 길 중간에 쇳고개 전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2000년도에만 해도 없었던 곳이다. 얼마전 타계한 손희선 예비역 소장이 주관이 되어 채총장의 비석도 크게 자라 잡았다. 하지만 원래 채총장 비석은 계동 마을 대나무 숲 안에 묘지와 함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채총장이 고개에서 계동으로 내려오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00년도에 탐문을 하고 다녔던 시절에는~.
"채총장에 엃힌 비하인드 스토리"
채총장은 몸무게가 120kg을 넘나드는 거구였다. 그는 앞에 다가서는 북한군을 보고 항복하는 북한군으로 착각하여 "이리 와라"고 바로 눈 앞까지 다가선 그들을 부르다 전사했다.
미군 짚차가 고추밭 고랑에 뒤뚱거리는 모습을 모두가 보았다. 그런데 그 대나무 숲에 있던 채총장 비석이 사라졌다. 원래는 무덤까지 있었다. 과연 총장의 육체는 온전히 손중위(손장군)의 이야기대로 부산에 운구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아직도 저버리지 못한다.
과연 누가 총장님의 비석을 넘어뜨리고 이제는 그 흔적마저 치워버렸을까? 동네분들도 모른다. 물론 굳이 알려고 할 필요는 없지만 비운의 총장인지 능력이 부족한 총장인지 온갖 추측만을 남기고 채총장은 지금 현충원 장군묘역에 잠들어 계신다.
(3) 하동 보도연맹 피해('50. 7.10~24) : 경찰과 특무대에 의해서 수백명이 피해
당시 하동군에 활동중인 보도연맹원 수는 3천명에 달했다. 그러나 여수.순천 반란사건 관련자 색출과정에서 대부분 지리산으로 들어가 실제 많은 사람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50.7.10일 양보면과 읍등지에서 15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전남 광양 진월면 매티재, 마산형무소, 진주 형무소(사실은 육십령 고개에서)등으로 끌려가 죽었다.
(4) 하동 화산리 마을회관 간담회('11. 5.3, 13명 참가)결과
북한군이 사전에 들어와 주요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채병덕 총장을 여러명이 들고 후퇴하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미군 지프가 와서 싣고 나갔다. 국군은 일부 있었으나 전투도 못하고 후퇴해 갔다. 미군은 '50. 9월부터 유해를 발굴해 갔으며 지금도 잊을만하면 찾아 온다.
화산리 일대에서도 전투가 있었으며 북한군도 많이 죽었다. 당시는 복장이 이상하여 국군인지 북한군이지 같은 옷을 입고 있고, 게중에는 민복으로 입고 길가에 죽어있어 누가 누군지 몰랐다. 도로망 확장시 많은 유해 매장지역이 훼손되었고 일부는 공동묘지 초입에 매장되기도 했는데 현장을 안내해 주겠다. 당시는 북한군 치하에서 부역으로 끌려가 시신을 치웠기 때문에 혹시라도 무슨 불이익을 받을까 증언을 기피한다.
화산리 커브도는 곳에서 산쪽으로 매실밭이 있는데 미군 3~4구가 매장되어 있어 지난번에도 미군이 찾았으나 찾지를 못했다.
우리는 제보자를 동행하여 공동묘지 입구에 가서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하여 탐사를 해본 결과 몇곳에서 발신음이 탐지되어 발굴 결과 5구의 미확인 유해를 발굴 했다.
3. 진주 전투( 마산의 위기)
가. 방어준비 상황
미 제8군은 7월 28일 아군 방어선의 서측방, 즉 거창과 진주 방면으로 2개 사단규모의 북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계속하여 북한군 제4사단이 동진하고 있는 것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미 제8군은 전투력이 반감된 미 제24사단을 서측방에 급파하였으며 거창이 돌파되었다는 보고에 동부전선의 국군 제17연대와 미 제21연대를 합천 방향에 배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방향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은 거창을 탈취후 계속 동진하고 있었고, 하동을 탈취후 원전에 이르러 진주를 목전에 두었다.
진주 전투('50.7.28-31)
진주 미 제24-9연
민부대 남강
미 제29-2대대 해병대대 남강
평거리 미 제19-1대대
적기갑
남강 삼계리
미 제19-2대대 장좌리
개양리
내평리 유수리 신율리
북6사(-)
하동(서쪽) 율곡리
탑골 미 제19-1대대
검정리
구호리
적6-12연
이 무렵 진주부근에 방어준비 중인 미 제19연대 지휘부는 읍내에 위치하여 제2대대 G중대로 진주가도를 차단하고 있었으며 하동에서 극심한 피해를 본 제29-3대대는 읍내에서 재편성 중이다.
한편 민 부대와 미 제29-1대대는 안의에서 적의 진출을 지연하면서 진주 서북쪽으로 철수 하고 있었고, 하동에서 분산 철수한 이영규와 김용주 부대는 거의 와해되어 재편성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진주가도를 차단하기 위해 미 제19-1대대가 구호리, 제19-2대대가 내동, 미 제29-2대대가 남강 북안의 판문남동, 민 부대가 유곡동 일대에 배치되었다.
28일 20시 30분경에는 국군 해병대가 내동 신율리에 배치되어 정비에 들어갔다.
나. 원전-유수리 상황
북한군은 7월 29일 10시 무렵 1개 대대 규모가 모터사이클 3대를 앞세우고 미 제29-2대대 진전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적은 추진 중대인 F중대의 기습사격으로 많은 피해를 받고 일시 철수하였으나 다시 재차 공격을 해 옴에 따라 중대는 철수하여 본대와 합류한다.
이때 공군기가 출현하여 접근하는 북한군을 타격하여 200여 명을 사살하고 차량 25대를 파괴하여 그들의 진출속도를 지연시키키게 된다.
7월 28일 아침, 미 제19연대는 하동가도를 방어하면서 안의에서 복귀한 제29-1대대에게 사천 서쪽 고지를 점령케 한다. 진주에는 연대본부와 하동에서 철수한 못트 대대의 잔존병력, 민부대 등이 있으나 전투력이 문제였다. 군에서는 한국전 처음으로 중형전차 퍼싱3대를 진주로 증파했다. 그러나 아주 낡은 고물 수준으로 실제는 사용도 못했다.
한편 민 부대가 축차적인 지연전을 하면서 산청에 이르렀을 때에 육본에서 제17연대도 산청으로 이동하여 29일 늦게 진주로 진출하여 남강 북안 판문동 일대를 점령했다. 이때 민부대 지휘소는 유곡에 위치하고 제3연대(박현수 중령, 채병덕 총장 수행)를 주 방어지대로 편성하고 제2대대(김병화 소령) 병력 700명을 우수리 일대에 배치하였으나 사실 이들은 소화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무렵에 민부대 예하 제3연대장 박현수 중령이 하동에서 부상으로 마산으로 후송되고 제9연대(유해준 중령)는 선박편으로 여수에서 부산으로 향하고, 제30연대(김용주 중령)는 하동에서 전투를 치룬 후에 진주를 거쳐 마산으로 향하여 사실 민부대는 김 부대밖에 전투를 할 수 없었다.
민부대는 7월 29일부터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의 작전통제 하에 들어갔다. 이 당시에 민부대 병사들은 각 지역에서 모병한 신병이었기 때문에 훈련이 전무한 상황이었고, 계속된 전투와 행군 그리고 보급이 미흡한 실정으로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ㄷ다.
다. 내평리~평거동 상황
미 제19연대는 7월 30일 미명, 2개 연대규모의 북한군이 진주를 남.서 양면으로 포위하기 위해 접근해 옴으로써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날 연대는 사단으로부터 신병 755명을 보충 받고 날이 저물기 전에 소대까지 긴급히 배치해야 했다.
그러나 신병들은 결국 전투가 한창일 때 진지배치가 이루어짐으로써 중대진지에 이르기도 전에 전사상자와 실종자가 속출하여 오히려 기존 병력들에게 공포분위기만 조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 제19연대 제2대대는 30일 연대로부터 적이 산청에서 진주에 이르는 가화리에 출현했다는 정보를 통보 받았다. 또한 내평리 남쪽에 나가 있는 G중대로부터 정곡리에 1개 연대규모의 적이 접근중이라는 보고를 받는다.
이때 상공에는 아군 공군기가 선회하고 있었으나 강우로 타격이 어렵고 포병도 포탄이 고갈되어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대의 지시로 평거동으로 축차 철수하여 31일 02시에 이르기까지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다 고립되면서 새벽에 평거동을 철수하게 된다.
라. 구호리-개양동 상황
이곳에는 제19-1대대가 방어중에 있었으며 이 부대는 금강방어전에서 경험이 있는 병사들로 1개 연대 규모, 적의 파상공격을 몇차례 격퇴하였다. 제13포병대대는 처음에는 포사격으로 적을 강타하였으나 포탄이 없어 더이상 지원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대대는 신유리 지역으로 축차 철수하여 국군 해병대가 우일선에 전개하여 연결되었다.
그러나 해병대쪽으로 우회 공격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었다. 이유는 오인사격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우리 해병대가 진전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 했으나 실제 그건 무리였다. 결과적으로 적에게 접근할 수있는 시간을 허용하고 말았다.
우리 해병은 30일 13시 40분에 진주교를 건너 진주역에 이르렀으며 15시 40분경 저지진지를 점령했다. 결국 적 1개연대 규모가 미군부대를 공격하게 되면서 해병도 적 1개 대대규모와 백병전가지 전개하며 주저항선을 지켜냈다.
한편 민기식 부대장은 30일 08:00시경 미 제19연대장으로부터 수미상의 적이 가화리에 진출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 진지 강화에 열중하면서 안의에서 산청을 거쳐 철수중에 있는 미 제29-1대대의 철수로를 개통하도록 제3연대 제2대대장 김병화 부대에 지시하였다. 31일 01:00시경 1개 중대를 단성부근까지 진출시켰으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다시 본대로 복귀하였다.
31일 06:00시경 김병화 소령은 복장이 이상한 병사들이 진지전면을 배회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너희들은 어느 부대냐?고 물었으나 재차 같은 질문에 바로 사격이 가해져 중대는 분산되고 대대장도 행방불명(전사기록에는 하동지구에서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음)되고 말았다. 중대는 함안으로 분산 철수하여 겨우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한편 31일 06:00시경 적 1개 대대규모가 진주 북방 사천리로 진출하고 있으나 대항할 병력이 없고, 더구나 죄일선 미 제19-2대대가 적 1개 연대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주저항선이 무너지자 민 대령은 의령으로 철수를 명하게 된다.
이에 앞서 화개장 전투 이래 진주에서 재편성을 하고 있던 이영규부대(병력 100명 미만)는 31일 퇴로를 경계하다 09:00시경 의령으로 빠져나갔다.
마. 진주의 피탈
북한군 제6사단은 주력을 진주로 향하여 서측과 남쪽,북쪽에서 포위마을 형성하였다. 평거동의 미 제19-2대대는 40여 명의 전사상자를 내면서 고군분투했으나 연대규모의 적에게 밀리면서 진주로 축차 철수하게 되고 연대장은 처어치사단장에게 철수를 건의하여 31일 06:00시경 군북과 의령일대로 철수하라는 구두명령이 하달 되었다.
이 무렵 진주 읍민들이 부대의 철수계획을 알고 술렁이기 시작하여 피난민들이 도로를 가득 메워 부대 철수를 어렵게 했다.
한편 신율리에서 망진산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해병대는 적 1개 대대규모를 물리치며 고군분투했으나 강건너에 철수하는 부대를 보고 철수명령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09:30분경 임의로 군북으로 철수했다.
한국전에 처음으로 투입된 전차 3대는 진주역에 위치하여 철수하는 제19-1대대를 엄호하고 있었으며 전차를 후송할 수 없으면 파괴하라는 명령을받은 "포울러 중위"는 철수 지원후에 마산을 향하여 3번도로-2번도로를 따라 질주중 개양동(장좌동)에 이르러 다리가 파괴되어 전차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즉시 하차하여 파괴준비를 할 때에 다리에 잠복하던 북한군에의해 샤퍼상사 한명(탈출성공)만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하였다.
이 결과로 7월 31일 적에게 진주를 내어주게 되었다. 미 제24사단장 처어치 장군은 새로 배속된 미 제25사단 제27연대(마이켈리스 대령)를 진동리에 배치하는 한편, 진주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군북에서 수습하여 급편진지를 편성했다.
사. 전투 결과
미 제24사단장 처치 소자은 7월 31일 진주를 적에게 내주게 되자. 새로 배속된 미 제25사 제27연대(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를 진동에 배치하는 한편 진주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군북에서 수습하여 급편진지를 편성하였다.
진주부근 전투를 마치고 삼삼오오로 군북에 집결한 국군 각 부대는 그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병사들의 피로, 부족한 보급, 그리고 소총도 없는 대부분의 병력 등이었다.
육군본부에서는 상황이긴박하기 때문에 미군과의 연합작전으로 현재 동쪽으로 진출하고 있는 북한군을최대한 방어하기로 하고 그 임무를 이응준 소장에게 부여하였다.
이날(31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이 모든 유엔 지상군에게 "8월 1일을 기해 낙동강선으로 철수하라"고 명령을 하달함으로써 마산 서측으로 철수해 새로운 방어선을 갖추게 된다. 민부대는 미 제24사단 제19연대와 군북선에, 해병대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와 진동리선을 점령하고 오 부대, 이 부대, 김 부대는 후방지역 경계임무로 전환하였다.
아.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 진주 신율리의 유해와 경상대 신축공사"
(가) 제보자 유우식(63, '07) : '72년 경상대 건립 당시에 땅을 미는 과정에 많은 유해가 나와 공동묘지로 옮겨갔다. 지금도 그 봉분이 남아 있으며 땅을 밀을 때에 전투화 탄피 등이 함께 나왔다. 당시의 이야기로는 진주 등 이 지역 일대에서 전사한 군인을 수습하여 묻었었다고 들었다. 공동묘지에 봉분이 총 47개다.
[유해발굴과, 논으로 굴러 떨어진 엠브런스의 탑승자 피해 무]
우리는 발굴작전을 개시하여 8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제보자가 이야기한 경상대 신축시 신율리에서 나온 유해는 공동묘지에 별도로 관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2차 가매장이 이루어진 관계로 대부분 유해가 녹아서 흔적마저 남지않았고, 발굴된 8구도 뼈 몇조각씩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용사님이 보우하사~]
그런데 발굴기간 2주 동안에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발굴되는 유해를 임시보안소로 봉송하는 엠브런스가 둑방길에서 논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이다. 당시에 군의관.운전병. 운구병 등 5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차가 아닌 말로 두바퀴를 돌아 그대로 논바닥에 떨어졌고 린치차로 견인하여 글여 올렸더니 그대로 기동하였다.
(나) 제보자 유제만, 김호경(74): '50년 10월경 인민군이 물러간 뒤에 대동 마을 회관뒤 야산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신을 묻었다. 이곳에 제27야전병원이 있었는데 당시 소문에 병원에서 치료하다 죽으면 야산에 묻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야산은 지금 일부 개간되어 있으며 밭주인도 여러 번 바뀐 관계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 소문으로만 그렇게 난 것이고 우리가 탐사를 해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2) "유수역 터널(정동터널)을 공격하는 미군 비행기, 그리고 부역자 자식이란 소리에 병들고~~"
탐문을 다니다 보면 별별 일들이 생기곤 하는데, 유수리 지역 탐문간 대형 사고가 날뻔 했다. 우리가 동네 마을에 많은분들이 모여 마을잔치를 하고 있어서 찾아가 목적을 이야기하니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모두가 당시는 있었는데 모두 치워서 지금은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치운 사람들은 모두 죽어서 현재 그걸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한다.
이러는 과정에 어느 분이 "부역자 새끼들이 날고 뛰다가 북한군따라 도망갔는데 그 자식들 몇몇이 지금 살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우린 부역자 관련 증언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도중에 갑작스레 한분이 소주 병을 들고 콘크리트 바닥에 깨뜨려 들고 고함쳤다
"야 0새끼야, 그래 우리 아버지 부역자다"
깨진 병을 들고 달려드는 순간 내가 앞으로 나가 막아셔야 했다. 사건이 나면 큰 일이 된다. 아니 싸움붙이려 하는 유해발굴 사업이 아닌데 이렇게 동네사람이 갈라지면 근본취지에 역행하는 것이다
"아저씨 참으세요, 아저씨를 욕하는 것이 아니니 이해하세요"
"아냐, 저리 비켜. 저 놈이 가끔 꼭 그래요"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때 완장찬 놈들이 동네에서 날뛰었잖아. 괜한 사람 잡아다 대창으로 죽이고 집에 있는 것 다 빼앗아 가고. 그러다 경찰에게 총맞아 죽기도했고, 뭐 틀려?"
"잠깐 병을 내려놓고 제 말을 들어 보세요, 예 어서 병을 놓으시고 아저씨도 막말을 하시면 안됩니다"
단 몇 초의 시간인데 한 10년만큼 간 느낌이었다. 결굴 병을 내려 놓았고 부역자 자식이란 말을 한 아저씨도 사과했다.
(3) 민간인 패해 현황
가. 진주 명석면 보도연맹 피해"('50.7.29): 특무대 진주 파견대가 1천5백여명 학살
진주와 당시 진양군 일대 보도연맹원 718명, 진주형무소 수형인 500여 명이 명석면 우수리 갓골내 등 여러 곳에서 학살
나. 진주 주약동 약골 미군 폭격('50.8.3) : 미군기가 기총소사와 폭탄 투하로 피난민 50여 명 사망, 50여 명 부상
진주지역이 북한군에 점령되자 진주시 강남동.망경동.주약동 주민 등 수백명이 약동 약골의 진치령 터널(길이 240m)에 대피했다. '50.8.3일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 기총소사와 폭탄 투하로 많은피해가 발생했다.
다. 사천(삼천포) 보도연맹 피해(''50.7월) : 경찰이 보도연맹원들 500여 명 학살
'50년 7월 하순에 사천과 삼천포의 보도연맹원 800여 명이 소집되었다 이중 100여 명이 밧줄에 묶여 고기잡이 배에 실려 고성군 하면 장구섬과 용현면 석계리 옥골에서 학살되었다. 이 외에도 삼천포 서금동 노산공원 ㅎ해안가에서 국군이 보도연맹원300~400여 명을 학살했다.
라. 사천 역에 남아 있는 국군 유해, 48구
어느날 여름 혹서기로 유해발굴작전이 잠시 휴시기에 들어간 싯점이다. 사천시 복지과 공무원이 육본으로 전화가 왔다. 사천시 공군비행장인근에 사천역이 있고, 여기에 48명이 묻혀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관리가 잘되고 있고 유족들도 대부분 사천인근에 살고 있는데 어떤 이유인지 상이군경협회에서 "현충원으로 옮겨가라"는 요구에 담당 공무원으로서 뭐라고 조치할 수 없는 상황이라 내려와서 의견을 제공해 달라는 것이다.
[이익집단의 계산된 요구]
나는 사천으로 달려가 사천역에서 관련 공무원과 요구사항을 내건 상이군경협회 회장 등 보훈단체 10여 명의 대표와 현장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경관도 수려했다. 불과 20분도 안되어 현충시설에 도착하였다. 일정한 넓이에 잘 정돈되어 묘비가 60여 분이 있었다. 6.25 전쟁 전사자가 48인이고 기타는 전쟁이후에 이곳에 묻힌 인원들이었다.
나 : 회장님 이곳이 어떻게 조성되었습니까?
회장 : 전쟁 당시에 자가봉송된 유해가 유족들에게 봉송되지 못하고 이곳 일대의 사찰이나 동네 어귀에 방치된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서 당시 군수를 찾아가 매장장소를 요구했더니 어렵다고 하기에 군수 책상을 때려부셔버렸어요. 상이용사분들이 몰려가 집단행동을 한 결과로 이곳 땅을 받게 되어 임시 매장장소가 되었습니다.
나 : 잘하셧습니다. 그러면 현재 48명이 6.25전사자인데 이분들은 유가족이 다 있습니까?
회장 : 처음에는 다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부모형제들이 죽거나 거동이 불편하여 찾아오는 분은 한 30명 정도가 되고 매년 현충일과 국군의 날에 추모행사를 진행합니다
나 : 그런데 묘지 외곾도 잘 정돈되고 방벽도 구축되어 있는데 이것은 용사님들이 하신겁니까?
회장 : 아니요. 60년대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국가에서 지원하여 주셔서 이렇게 잘되어 있습니다. 이 땅도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잇습니다.
나 : 그러면 지금 유가족들에게는 옮긴다는 사실을 알렸고 동의는 다 받았습니까?
회장 : 일부는 알고 있고 결정한 다음 알리려고 합니다.
나 :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실 것이 지금 이곳에 있어도 추모행사에 참가하는 유족이 적다는 것은 여러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 발굴한다면 이미 유해는 없고 화장된 흔적만이 있을 건데 그 마저도 오래되어 식별이 안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묘비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자칫 무명용사처럼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여기에 계시면 유족들이 필요한 시기에 찾아 볼 수도 있고, 주변 학생들도 찾아와 영웅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겁니다. 서울로 가면 그게 가능할까요?
이 질문에 다른 보훈단체 소속 한분이 내말에 동의한다며 서울에 가면 솔직히 이곳에 계신 유족이 서울까지 간다는 것은 무리가 많다고 하셨다.
그러자 다른 몇분도 내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요구를 한 회장님이 주춤하게 되고 나는 같이 시설을 둘러보자고 제안했다. 결정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회장님에게 개인적으로 물어 보았다. 옮기고 나면 이 땅은 뭘로 쓰려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움칫하시더니 솔직히 답변하신다 한다
[땅을 개발하여 보훈가족 복지회관도 짓고, 수익사업을 하여 지원하려 합니다]
회장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영리사업을 잘 될 것 같아도 누가 주체가 되고 관리할 것이며, 어르신들이 사후에는 또 누가 관리하겠습니까. 이익사업은 문제가 큽니다. 더구나 그나마 잊혀지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구심점을 잃어버려 잠들고 계신 호국용사님들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겁니다. 이 분들은 서울 현충으로 가면 더 외롭게 됩니다. 지금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인데 누가 찾아와 꽃 한송이 올리겠습니까라고 말을 이어갔다.
[듣고보니 우리가 섯부른 결정을하려 한 것 같아요. 없던 일로 합시다]
이렇게 하여 현장을 보존하기로 하였다. 다른 보훈단체 회원님들도 모두가 내 의견에 찬성하셨다. 상이군경협회 회장님은 나에게 미안하다 하신다. 젊은 사람한테 교육받았다 한다. 사실 이분이 없었으면 이 현충시설은 없었다.
나는 어르신들에게 추가하여 말씀드렸다. 굳이 옮기시려거든 한가지 방법이 있다. 사천과 삼천포 통합에 따른 현충탑을 별도로 건립하게 되면 그때가서 탑 지하에 납골당을 만들고 그곳을 현충시설로 하여 여기 계신 분들을 모시게 되면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유족들의 친척들이 지나가다 여기 누가 있다면서 얼마나 뿌듯하게 여기고 묵념하게 되겠느냐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시 공무원도 좋은 내용이라며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마. 남해 보도연맹 학살 ('50.7월) : 특무대와 경찰이 162명 학살
남해군은 해방 공간에서 인민위원회. 좌익단체들이 결성되어 활동했다. 전쟁 바발 후에는 북한군이 주둔하면서 인민위원회가 복원되고 치안대원들이 활동하기도 했다.
전쟁발발 후 남해군 보도연맹원이 모두가 남해경찰서 광장에 집결했다. 이후 심사로 호명된 사람들이 유치장과 차고에 갇혔다가 운천면 월곡 문항 창선마을 앞과 비드섬, 진섬(긴섬) 앞 등에서 29명이 수장됐다. 수장당한 보도연맹원은 2,3구씩 줄에 묶여 인근 섬으로 떠내려 갔다.
며칠 후 7월 25일 이동면 신전리 복곡 골짜기에서도 학살이 진행되어 유족들이 33구의 시신을 찾았으나 경찰이 장례를 허럭하지 않아 유족들은 거적으로 시신을 말아 산에 묻어야 했다.
해상 수장 목격자 증언(보도연맹원) : 전쟁이 터지자 지서에서 잡아들였다. 지서 정문에 대한청년단원과 민보단우너들이 보초를 서고 강진만 해상에서 수장을 시켰는데 그때 배는 경찰서 소유의경비선이었다. 수장은 20~30명식 밤에 이루어졌다.
바. 거제 일대의 학살('49.4~50.7) : 비호부대, 백골부대, 툭무대, 경찰 우익단체 등에 의해 좌익 도는 보도연맹원으로 878명 학살
거제도는 일제가 물러간 후에 치안과 행정력을 건국준비위원회가 접수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인민위원회 해산을 명한다.이어 군인과 경찰을 파견해 치안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인민위원회. 치안대 인원들이 군경에 밀려 섬 각지의 산속으로 들어간다. 야산대라 불리는삘치산이 된 것이다.
그 숫자는 50여 명이지만 '49년 10월의 여순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지역 빨치산이었다. 그러나 지역 부호들이 군경과 결탁하여 거제도의 보도연맹원 수가 1천 명을 넘어 큰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거제 지역은 '49. 4월과 '50. 4월, 7.25일 3차례에 걸쳐 발생한다.야산대를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백골.호림.백호.비호부대들이 들어와 민간인을 학살했다. 죽어간 민간인 800여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 동부먄 구천계곡에서 310명이 집단 총살됐다. 이 당시에 들어온 군인들은 비정규전 부대도 포함하여 대부분 서북청년단원이었다. 동부면 선양. 평지. 구천마을 청년들을 야산대와 관련(식량제공)이 있다하여 잡아들여 구천계곡에서 학살했다.
사. 거제 하청. 장목. 연초면 학살(('49.4~'50. 여름) : 호림부대. 특무대. 경찰. 민보단 등 우익단체에 의해서 200여 명 학살
'46년 10월 정부의 보리 수매공출에 반발한 농민들의 집단항의가 시작되면서 보도연맹원이 대거 양산된다. 반대시위에 참가한 농민들응ㄴ 사찰기관과 방첩대에 의해 보도연맹이 대거 양산됐다.
'49년 4월부터 '50년 여름까지 호림부대가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하청면 하청중학교에 주둔했다. 지역 청년들을 강제로 검거하여 빨갱이로 색출하여 하청면 송정 고갯갈 등에서 총살한다.
아. 거제 지심도 학살('50.7-8월) : 국군, 첩보대가 보도연맹원 400여 명 학살
거제 경찰서 사찰계에서는 보도연맹원들 수백 명을 3-4명씩 철사줄로 묶어 배에 태워서는 지심도 앞바다에서 수장했다. 주민들은 동풍이 볼 때마다 시신이 바닷가에 더밀려 왔다. 바닷가로 말려온 시신들을 주민들이 손으로 거둬 수백 구즘 됏는데 한곳에 합장시켰다고 한다.
자. 통영 보도연맹 학살('50.8.14-15, 17-22일) : 해군, 헌병, 군 정보기관, 경찰, 우익단체(민보단.대동청년단.대한청년단.해상방위대 등) 에 의해 한산도 구이포 앞바다, 산양면 영월리 앞바다, 충렬사 맞은 편 안산, 등에서 최소 932명 학살
'50.7.15일부터 보도연맹원에 대한 검속이 이루어지고 학살이 이루어졌다.
피학살자들은 대부분 한산도 앞바다 구이포로 끌려가 머리에 돌을 매단 채 수장됐고, 또 일부는 멸치부대를 머리에 쓰고 "이적행위"라는 글이 새겨진 채 충무 시내로 끌려다니다 충렬사가 마주 보이는 안산에서 학살된다.
이양조(해군헌병대 수석문관) 증언 : 내손에 들려 있던 명단만도 800명이 넘었다. 처형은 오덕선이가 전적으로 했고 오덕산아 명단을 나한테 넘기면 문관들이 창고에 가서 사람들을 끌고 나온다. 학도병들한테 돌멩이 40-50개를 주워오라 시킨 뒤에 즉격처분할 사람들을 멸치부대 매는 새끼줄로 묶어 배에 싣고 나갔다. 한 번에 47-48명 정도 였다.
마산의 위기와 부산 전면방어진지 편성(일본육전전사연구회편(2권)에서 요약함)
(우리전사책 기술보다 판단하기에 더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어서 올리는 것임)
마산의 위기
1. 진주의 실함
7월 28일 아침, 미 제19연대는 맥그레일 중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에게 하동가도를 방어케 하고, 안의에서 복귀한 리 중령의 제2대대에게는 사천 서쪽 고지를 점령케 한다. 당시 대대는 약 300명 정도였다.
진주에는 연대본부와 하동에서 철수한 못토 대대의 잔여 병력과 민부대들이 있었으나 제대로 된 건재부대는 없었다.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이때까지도 상대가 북한군 제4사단의 일부로 판단, 상당 기간 진주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은 여기에 중형전차 3대를 진주로 보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한다.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한 북한군]
7월 29일 정오경 북한군이 진주 서남쪽 10km 지점의 F중대를 격파하고 하동 방면의 맥그레일 대대를 포위하려한다. 이에 대대는 우군기를 요청하지만 북한군이 나뭇가지 등으로 위장하여 식별하기 곤란했고 , 포병부대의 사격은 20발에 그쳤다. 포탄이 없어서다. 결국 제2대대는 남강 동쪽의 새진지로 철수했다.
30일 저녁, 미군기가 돌아가자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북한군의 추격하여 격투하는 광경은 마치 서부극 같았다고 한다.
7월 31일 06시경 진주시내는 3대의 전차와 3문의 자주포 사격을 받게 되고 북한군 2천여명 진입하였다.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리대대'로 진주고개를 확보하고 중암리로 주력을 철수토록 06시45분 철수명령을 내렸다. 기대했던 퍼싱중전차는 불량하여 쓸모없이 유기되고 말았다.
[보충병의 위기]
진주방어때 본국에서 온 보충병 약 500명이 연대에 도착했다. 언제 중대에 보충시킬 것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귀찮은 존재로 전투력 발휘가 제한되기 때문인데, 잡역이나 노무에 쓰일 수 있도록 각 대대에 150명씩 할당하여 30일 해질 무렵에 중대로 출발했지만 중대에 도착하기전에 적의 사격을 받아 중대별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2. 마산의 위기
마산은 부산서쪽 45km 마산만 안쪽에 위치한 인구 15만의 상업, 항구도시로 부산으로 관문이다.
7월 30일, 유엔군은 주력이 김천-영덕선에서 격전을 치르고 있을 때, 진주가 위급해 지자 마산의 방어가 시급을 요하는 상황이 되었다.
미 본토로부터 증원부대가 부산에 도착하기 직전으로 7월 31일에 하와이의 미 제5전투단, 미 제2사단 29연대, 8월 2일에는 미 제1해병여단, 3일에 미 제8072중전차대대, 5일에는 미 제23연대, 7일에는 3개 중전차대대가 부산에 도착토록 되어 있었다.
"북한군이 부산에 먼저냐, 증원군이 먼저 부산에 상륙하는가?"
워커는 이러한 긴박성을 알고 7월 30일 보은 가도에서 지연작전을 끝내고 왜간에 집결한 미 제8군의 유일한 예비인 미 제27연대(미카엘리스 대령)를 마산 정면으로 투입시키고, 31일에 상륙예정인 제5연대 전투단을 마산에 증원키로 한다.
미 공간사에는 이 "시간과의 싸움"을 묘사하기를 워커 장군은 북한 제6사단이 목포, 여수를 경유하여 호남지역으로 우회하는 것은 전투부대들의 보급문제를 항구에서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 했을 때에 "워커"는 "북한군 제6사단이 우회없이 바로 부산을 향해 진격했다면 이 적을 저지할 병력조차 투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한다. 북한군은 이 우회로 2일간의 여유를 유엔군에게 선사하여 주었다.
7월 31일 저녁때, 미 제19연대는 주력이 중암리에 집결하기 위해 리대대로 진주고개를 점령시켰기 때문에 국도는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천-고성-진동리-마산간의 도로는 무방비 상태였다. 이에 처치 사단장은 양 연대장을 불러 마산국도와 해안도로를 방어하기로 했다.
[방어지역을 반대로 알아들은 연대장)
당시 무어의 제19연대는 중암리를, 제27연대는 진동리를 방어하는 것으로 제19연대장은 알고 있었고, 제27연대장은 자기부대가 중암리를 제19연대가 해안도로를 방어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8월1일 새벽 무렵에 제27연대도 중암리로 집결, 해안도로는 무방비가 되는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8월 1일 06시경 27연대장은 진지 정찰 중에 제19연대 작전과장을 중암리 서남방고지에서 만나 잘못되었음 알고, 제27연대가 진동리 서해안 도로를 방어하기로 한다.
미 제27연대는 진동리 서쪽 옥녀봉-야반산을 잇는 선을 방어하기로 하고 일부 부대는 곡안리 서쪽의 험로에 배치하기로 했다.
8월 1일에 미 제27연대는 진동리 부근을 방어하고 제19연대는 중암리 부근을 방어토록 하였다.
제27연대장 미카엘리스 대령은 진동리 서쪽 옥녀봉-야반산을 잇는 선을 방어하기로 하고 일부 방어부대를 곡안리 서쪽의 험로에 배치했다. 하지만 이미 북한군 이 산속으로 진출하여 아군의 수색대를 침투시킬 수가 없었다.
부산 전면방어진지 편성
제 1 절 결 심
7월 31일 아침 진주가 함락되고 김천.산제리에 대한 북한군의 압력이 강해지고 있을 대,제8군은 포로심문과 무선도청으로 겨우 "북한군은 제4사단이 안의와 거창으로 제8군의 좌측방을 에워싸고, 제6사단이 마산을 거쳐 부산을 나아가기 위하여 아군의 후방병참선을 끊어버리려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7월 초순이후 전혀 행방을 모르던 북한군 제6사단의 위치가 확인되고 북한군은 1개 사단이 아닌 2개 사단으로 서측방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정보는 동경과 워싱턴까지 놀라게 하여 최초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인 블루하트계획이 7월 10일에 중지되고 새로운 상륙작전 계획인 크로마이트계획(미 본국에서 증파된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2사단이 9월 중순 인천이나 군산, 또는 동해안의 주문진에 상륙하는 계획)을 7월 23일에 입안중에 있었으나 유엔군 사령부는 크로마이트계획에 상륙부대를 부산방어에 사용키로 변경시킨다.
이에따라 미국은 북부 일본에 있는 미 제7사단과 유럽에 증파 예정인 미 제3사단까지 한국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미 공간사에는 "북한 제6사단의 기동은 한국 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동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1. 최대의 결심
워커는 북한군 제6사단(제105기갑사단 제83기계하연대 배속)이 마산정면에 진출한 사실은 "마산지역 방어의 성패가 군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음을 갖고, 8월 1일 미 제25사단을 마산정면으로 전용하는 한편 전전선을 낙동강선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심했다. 이 판단은 미 공간사에서 한국전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판단을 했고 또 결심을 했고, 실행을 했던 것이다"라고 평가 받고 있다.
"미 제25사단은 신속히 삼랑진으로 이동하여 적의 전진을 저지 시킨 후, 서측방을 향하여 역습할 준비를 하라"
서부 및 남부지역 작전 상황도('50.8.1-9.14) 미25사
남지 미24사
미25사
의령
검암리
중암리 게릴라 마산 미25사(8.3)
미25-35연
미19-2대대 함안
미29연(-) 김부대(8.4집결)
승산동
민부대 미24연
괘방산
첵정찰대
8.2일 15:00철수 여항산
진주 진주터널 무촌리
적6사 적6사 서북산
발산리 수리봉
인황산
적7사(8.15)
봉암리 임곡리 야반산
사천
장천리 진동 미25-27연
김부대
적104치안연 미27-1대대
고성 적105전차83연
2. 미 제25사단 전진
미 제 25사는 8월1일 저녁때 삼랑진으로 이동 개시, 그러나 2일 미명에 제8군은 목적지를 마산으로 변경 시켰다. 이것은 지금 서측방에 미 제24사단이 중암리와 진동리를 학보할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미 제24사단 제19연대와 배속된 미 제25사의 제27연대가 중암리와 진동리를 점령할 수 있도록, 이를 위해 부산에 상륙한 제5연대 전투단을 이 정면에 증원 시켰다.
제25사단은 왜관까지 도보로 행군하고, 왜관에서 마산까지는 철로로 이동했으며, 이 기동에 문제점이 4가지가 있었다.
가. 만약 북한군이 기동사실을 알고 김천을 공격한다면 전선이 붕괴될 위험이 있다.
나. 사단의 퇴로와 제1기병사단의 주보급로가 동일한 도로로 그 교통량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의 문제
다. 동해안에서 산제리로 이동중인 제21연대 등의 교통혼잡 처리문제
라. 철도 수송수단 확보문제
그런데 가번 문제는, 북한군이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공격부대인 북한군 제3사단이 공격해 오지 않았다. 이유는 북 제3사단이 김천 정면에서 7월 31일 무모한 주간공격으로 대 타격을 받았고, 미 제25사단과 접촉하고 있는 북한군 제15사단도 미군 포병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나.다 문제는, 미 제25사단에 도로사용의 우선권을 주고 미 군사령부 모든 장교를 차출하여 교통 통제반을 운용, 이동을 통제시켰다. [36시간에 240km를 이동한 것으로, 워커는 "유사이래 초유의 이 기동이 부산을 구했다"고 자주 자랑한다.]
이 기동은 제2차 세계대전중에도 보지 못했던 가장 신속한 기동으로 북한군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이런 작전의성공 이면에는 유엔 공군과 한국 경찰 및 경비대대 등의 철도안전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무시할 수 없다.
라번 문제,는 당시 철도는 군의 보급품, 피난민, 환자수송과 산제리로 가는 국군 제17연대와 미 제21연대 등의 수송을 위해, 미 제25사단을 수송하기 위해 별도 열차를 편성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대구로 온 열차 전부를 징발하여 왜관으로 보내고, 다른 수송은 취소했다. 이렇게 해 마지막 적재가 끝난 것이 8월 2일 07시였다. 이리하여 사단은 2일 09시 15분부터 3일 19시 30분에 걸쳐 마산역ㅇ에 도착했으며, 킨 사단장은 3일부터 남강 남안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부대를 통합 지휘한다.
제 2 절 전면적방어진지 편성과 병력
각 사단은 8월 1일 저녁에 하달된 낙동강 진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에 따라 다음날인 2일에 철수를 시작하여 3일부터 4일 아침까지 지시된 진지로 이동, 이른바 낙동강진지, 부산교두보 등으로 불리는 방어선을 형성했다.
1. 마산정면의 저지
계방산진지
8월 1일 진주고개를 점령하고 있던 미 제24-19연대는 북한군과 접촉을 유지하며 중암리 서남방에 있는 계방산 능선을 점령했다. 축차적인 철수를 주장하는 참모들도 있었지만 무어 연대장은 가장 좋은 진지를 빨리 점령하여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방어준비를 할 수 있고 병력을 집중 운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8월 1일 저녁, 미 제19연대는 제1대대를 우1선, 민부대(600명)를 좌1선으로 배치하고 , 전투에 지친 제2대대와 산청에서 돌아온 미 제29-1대대, 그리고 하동에서 타격을 받은 미 제29-3대대를 중암리에 집결시켜 예비로 했다. 하지만 밤에 진지를 점령하게 되면서 다음과같은 착오가 일어나고 있으나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민부대진지의 관련된 착오"
민부대 진지는 고개의 동쪽 능선에 있었는데 이 능선은 오봉산(525m)에서 뻗어내린 지맥이었다.
그러나 민부대가 고지의 높은 곳으로 점령을 하다보니 전진지가 좌측으로 치우쳐 우측방 리 대대와 2.5km의 간격이 발생하였다.
또 리대대는 그 우측방을 계방산(455m)에 두어 그 정상을 점령토록 되어있는 B중대는 가파른 정상을 올라가지 못하고 다음날 점령토록 하고 8부능선 부근의 은폐된 지점에서 숙영에 들어가 연대는 큰 구멍이 생겼다.
"위력수색"
처어치 미 제24사단장은 8월 1일 오후에 곡안리 전초진지에서 적지에 대한 지형과 적정을 살펴보며 정말 북한군 제6사단이 이 정면에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마침 중전차중대가 마산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위력수색을 결심하여 워커 장군에 보고 하자, 적극적인 노력이 중요하다고 격려를 받았다.
"각 연대는 2일 06시를 기해 가용한 모든 전차를 이용, 진주를 향해 공격하면서 위력 수색을 실시하라."
미 제27연대장 미카엘리스 대령은 제1대대에게 정찰을 시키기로 하고 이를 지원하러 E중대를 발산고개에 추진시켰다.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않았으나 윌슨대대에 전차소대, 공병소대, 트럭 22대를 배속하여 정찰을 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발산고개 점령부대에는 이 사실이 전달되지 않았다.
서부 및 남부지역 작전 상황도('50.8.1-9.14) 미25사
남지 미24사
미25사
의령
검암리
중암리 게릴라 마산 미25사(8.3)
미25-35연
미19-2대대 함안
미29연(-) 김부대(8.4집결)
승산동
민부대 미24연
괘방산
첵정찰대
8.2일 15:00철수 여항산
진주 진주터널 무촌리
적6사 적6사 서북산
발산리 수리봉
인황산
적7사(8.15)
봉암리 임곡리 야반산
사천
장천리 진동 미25-27연
김부대
적104치안연 미27-1대대
고성 적105전차83연
"충 돌"
윌슨 대대는 8월 2일 06시 30분에 중암리를 출발, 07시에 리 대대의 제1선을 통과하여 고개를 내려갈 때, 적 기관총 3정이 사격을 가해 왔다.
그러나 이미 북한군이 숨어 들어 죽음을 무릎쓴 전투가 도랑속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넘던 13~14대의 트럭과 장갑차가 모두 파괴 또는 소실되고 말았다.
피곤한 리 대대장이 고개 밑에서 잠을 자다 깨어 고개 위로 올라가 보니 윌슨 대대장이 와 있었다. 이 두 대대는 북한군의 함정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북한군은 포로로 잡은 미군을 방패로 삼아 서서히 전진하고, 또 밤사이에 계방산 정상을 점령한 북한군은 눈아래 은폐지역에서 잠들어 있던 미군을 사살하고 도로근처까지 진출하였다. 리 부대와 민부대 사이로 침투한 북한군은 박격포포진지를 유린함과 동시에 국도를 차단한다.
리 대대와 윌슨 대대는 고개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서로 뒤섞인 상태에서 교란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군기의 오폭까지 받아 혼란에 빠진 채 곳곳에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윌슨 대대의 C중대가 계방산 정상을 탈환하면서 1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데 이는 아군의 오인사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 민부대가 앞뒤에서 협격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철수해 버렸다. 그래서 무어 연대장은 그 자리에 못트 대대를 투입하여 위기를 모면하지만 고개 주변에는 모두 5개 대대의 병력이 혼합되어 있었다.
오후가 되자 북한군은 공격을 멈추었다. 돌파를 체념한 북한군은 우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첵대대의 정찰(미 제 27-1대대)
포병 1개 포대를 배속받아 전차 4대로 2일 04시에 진동리를 출발했다. 무촌리에 이르렀을 때 약 30명의 북한군이 길가에 잠을 자고 있었다. 대부분 사살과 포로 획득하고 09시에 무촌리에 이르렀는데 북한군 차륜종대가 진주고개를 넘어오고 있어 매복으로 기습하여 10대의 트럭 노획했다. 계속하여 진주고개 방향으로 진출중에 북한군의 대전차포가 사격을 가해오는 등 적의 위협이 증가하여 진출이 어려웠다.
미카엘리스 연대장은 07시가 되어서야 무어 연대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발산고개, 진주고개 첵 대대 등 모두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15시경 "북한 제6사단의 주력이 진주고개에 있으며 곧 첵대대를 공격하리라 판단하여 복귀명령을 내렸다.
첵 부대가 철수하는 과정에 북한군이 추격하여 왔으나 좌충우돌하며 2일, 한밤중에 연대본부가 있는 진동리 국민학교에 도착하여 야영에 들어갔다. "위력수색중 피해는 약 30명 발생했으나 행불자는 없어 대대장은 공훈으로 십자훈장을 받았다."
진동리 사건
미 제27연대본부와 첵 대대가 야영하는 진동리 국민학교는 255고지에서 뻗어내린 능선 바로 아래인, 해안도로와 함안도로의 교차점에 있다.
8월 3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할 때 적의 기습이 시작되고 255고지에서 적 기관총 사격이 치명적으로 집중되었다. 원래 이곳에는 첵대대의 분초가 있었지만 접근해 오는 북한군을 이웃 분초로 나가있는 한국병사로만 생각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교정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고 한 병사가 발광하여 기관단총으로 주위에 있는 전우들에게 난사하기 시작하여, 장교가 병사의 팔을 쏘아 겨우 난동을 저지 시켰다.
이후 255고지를 공격하여 탈환하게 되며 20~30대의 차륜중대가 남하하여 하차하기 시작했는데 제8야전포병대대의 맹렬한 사격을받아 시체를 400명을 남기고 흩어 졌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재래식 전화선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도청한 미카엘리스연대는 북괴군의 의도를 파악하면서 전투를 할 수가 있었다. 이 도청을 통하여 북한군의 부대가 제6사단이고 본대가 산속에 있는 광산촌인 둔덕과 오곡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전투는 개전 이래 무패를 자랑하던 북한 제6사단에게 일격을 가해 그 예봉을 꺽어 버린 전투였다."
이 전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미 제25사단과 부산에서 직행해온 미 제5연대 전투단이 8월 3일에 마산에 집결을 완료했다. 제8군의 서측방에 대한 최대의 위기는 이렇게 하여 모면 되었다.
[미 공간사에는 당시 이 사건을기록하고 있다]
북한군 제6사단은 8월 2일주간에 경계배치가 되어 있지 않은 진동리의 지휘소와 포병배치를 발견하고 마산에는 전투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북한군은제6-13연대를 주력으로 계방산을 공격케 하고, 제14연대를 서북한 일대로 침투시키는 한편, 제15연대를 예비로 하는 등 후방에다 광범위하게 분산배치 하고 있었다. 첵대대의
무촌리 진출은 그야말로 의외였고, 저녁때에 이 부대가 철수하자, 적장 방호산은 제14연대로 하여금 다음날인 3일에 진동리와 마산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북한군 제4연대는 일부병력으로 진동리를, 그 주력으로 마산으로 공격하기로 하고, 8월 3일 아침 1개 대대로 진동리를 기습한 것이다.그런데 뜻밖에도 진동리에 보병이 주둔(체대대)하고 있었고 역습을 가해 오자 큰 피해를 입고 격퇴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북한군 제14연대장은 1개 대대를 차량으로 증원하지만 전개지점을 잘못 선정하여 하차장면이 포착되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서 북한군 제6사단은 병력 수준이 반으로 감소되었고 전차와 기계화부대는 휘발유 부족으로 운용이 제한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미 제25사단과 부산에서 직행해온 미 제5연대 전투단이 8월 3일에 마산에 집결을 완료하게 된다. 미 제8군의 서측방에 대한 최대의 위기는 이렇게 해서 모면되었다.
2. 낙동강 다리
미 제24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일부병력으로 치열한 교전을 하면서 철수하여 8월 3일부터 4일 아침에 걸쳐 낙동강 동안에 진지를 점령했는데, 이때 낙동강 다리를 처리하는 문제에서 몇가지 에피소우드가 있다.
가. 왜관교 : 이 다리는 한강교와 비교될만큼 중요한 다리라 파괴시기는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에게만 주어졌다. 이때 유엔군은 게릴라와 편의복을 입은 북한군이 피난민에 섞여서 진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피난민이 낙동강 동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다 보니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도강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8월 3일 해 질 무렵 후위의 미 제8기병연대가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자 그 뒤를 피난민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사격을 하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넘는 피난민을 막을 방법이 없이 날이 저물고 드디어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 되었다. 게이 장군의 생애중 가장 어려웠던 판단의 하나였다고 한다.
나. 용포교 : 미 제24사단은 초계-창녕간의 다리를 모두 파괴했으나 고령-대구간의 용포교는 반파상태로 남겨 두고 그 부근에 화망을 구성하여 함정을 만들어 놓았다. 이 책임을 맡고 있던 미 제7기병연대는 8월 12일과 14일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린다.
3. 낙동강 진지선의 선정 이유
부산교두보는 부산을 기점으로 남북 약 135km, 동서 약 90km로 낙동강에 의해서 엄호되고 있다.
최후의 방어선을 선정하는데 있어서 미 제8군은 다음의 데이비드선(울산 북쪽에서 경상남.북도의 경계 산맥을 따라 밀양을 거쳐 마산 동쪽 산에 이르는 정면 90km의 선을 말한다. 맥아더 원수는 8월 초에 이 선에 예비진지를 구축해 놓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제8군은 8월 11일 공병 출신인 데이비드슨 준장에게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을 따 데이비드슨선이라고 했다.)과 낙동강선을 비교하여 보았다.
데이비드슨선은 정면이 좁고, 험준한 고지대를 이용할 수가 있다. 또 군사기지인 부산과 가깝고 북한군의 후방을 낙동강의 도하지점에서 차단하기 쉽다는 잇점이 있는 반면 결함도 있었다.
가. 병력의 횡적 이동에 곤란하여 반격시 자유로운 병력 운용에 불리하다.
나.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산악전투는 북한군에 유리하고 유엔군에 불리했다.
다. 천애의 장애물인 낙동강을 이용하지 못하고 연일 비행장을 포기해야 하고, 대구.마산 등을 포기해야 하므로 정치적. 심리적 손실이 크다.
라. 진지가 협소하여 공격병력을 집결시킬 공간이 부족하다
워커장군은 낙동강선을 선택했다. "낙동강이라는 장애물을 이용할 수 있고 기동과 반격이 용이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4. 병력 배치
위와 같은 판단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반격을 위한 예비대의 확보였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마음대로 되지않았다. 서측방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도착하는 증원부대를 차례로 마산정면에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은 7월 31일 부산에 상륙한 미 제2사 사령부와 제9연대 전투단(미 육군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부대로 1900년 북청사변에 참가하여 '만주연대'라는 별명을 가진 정예연대)을 경산에, 제5연대 전투단(하와이에 상주, 독립 전투단으로 M-26퍼싱중전차 14대로 편성된 전차중대와 제555 야정포병대대 배속. 인원구성은 일본인 2세가 많았다)은 마산정면에 투입하는 한편, 8월 2일 상륙한 미 제1해병여단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예비로 창원에 배치시켜야 했다. 해병여단은 7월 14일 켈리포니아를 출발할 때는 미 제25사단을 대신 일본 방어에 임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토록 되었지만 7월 25일 서측방 위협에 대처하려 부산으로 직항하게 되었다.
8월 4일 현재, 부산교두보 편성 증원부대의 도착 상황과 운용
(1)부대의 증원 현황과 운용
가. 7월 31일 : 미 제8072전차 대대 A중대 / 미 제5연대 전투단, 7월 23일 하와이 출발, 3개 대대로 편성, 퍼싱 전차 14대 보유
마산정면으로 이동하여 미 제24사단을 지원하다 미 제25사단장의 지휘를 받는다.
* 제5연대 전투단 : 하와잉에 상주해 있던 둑립 전투단으로 M-26퍼싱중전차 14대로 편성된 전차중대와 제555야전포병대대 등이 배속된 부대로 인원구성은 일본인 2세가 가장 많았으며, 그중에는 이탈리아전선에서 공훈을 새운 제442부대와 제100대대 전투단에 있던 고참병들이 있어 보전포공 협동훈련과 단결력이 강한 군대였다.
나. 7월 31일 : 미 제2사단 사령부. 미 제9전투단, 7월 17일 타코마 (미) 출발, 제15FA배속받은 완편부대경산에서 군예비
다. 8월 2일 : 미 제1해병여단, 7월 17일 샌디에이고 출발, 여단사령부와 제5해병연대 전투단으로 편성, 마산 정면으로 진출하여 군 예비
라. 8월 3일 : 미 제8072전차대대 주력, 일본 요코하마 50대로, 후에 제89전차대대로 개칭, 미제25사단에 편입
마. 8월5일 : 미 제23연대 전투단 (미 제2사단), 미 타코마에서 7월 22일 출발, 완편 부대로 밀양에서 군 예비
바. 8월 7일 예정 : 미 제6전차대대(군 예비후 미 제24사단에 편입).미 제70전차대대(최초 군 예비. 8월 12일 미 제1기병사단 편입). 미 제73전차대대(경주.대구.북방의 전투지원과 병참선 엄호, 군예비), 7월 23일 센프란시스코 출발
사. 8월 16일 예정 : 미 제72전차대대(미 제2사단)
아. 8월 19일 예정 : 미 제38연대 전투단 (미 제2사단)
부산교두보는 개전 이래 처음 형성된 일련의 전선으로 이 전선의 양쪽 끝은 동해와 진해만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그동안 병사들이불안해하던 거점방어의 고수하면 곧 포위되고 퇴로를 차단당하여 아무리 열심히 방어를해보앙야 소용없다는 풍조에서 벗어나, 이제는 좌우와 후방에서 어느정도 우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사병들의 사기가 진작되었다.
그러나 워커는 "이 방어선에서 가장 위험한 정면은 미 제24사단의 영산정면"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는 미 제8군의주요 보급로이고 종심이 앝고 거기다 부대는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8월 초 유엔군의 현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2) 유엔군 현황
가. 미 제25사단 (마산 정면 37km 방어) : 병력 16,928명으로, 제5연대전투단 3,793명을 포함
나. 미 제24사단(영산-창원 정면 직선거리 34km, 하천거리 52km) : 전력은 40%수준, 병력 9,685명
*8월 4일 까지 전사 85명, 부상 895명, 실종 2,630명 계 33,610명
다. 미 제1기병사단(대구 서측방 직선거리 40km, 하천거리 56km) : 전력 80%이하, 병력 10,276명
라. 한국군은 당시 82,570명으로 제1군단(국1.6사(대구북방정면 48km) , 제2군단(국8.수도사(의성정면 48km), 직할 제3사(동해안 16km)
군예비로
마. 미제 2사 (경산) : 사단 사령부와 제9연대 전투단 병력 4922명
사. 임시 미 제1해병여단(창원), 여단 사령부와 제5해병연대 전투단 병력 4,713명
병력이 총 137,650명으로 국군 82,570명 미군 55,080명이었다.
5. 보급과 보충
재해.재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군은 긴급 즉 3.5인치 로켓트포와 공군용 신형 5인치로켓트탄 등은 태평양공로로 수송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수송되는 보급품은 매일 요코하마에서 특급열차편으로 사세보항까지 운반되고 ,여기서 선박을 이용하여 부산까지 운송되는데 총 소요시간은 평균 60~70시간으로 수송량은 최대 949톤이었다. 항공편은 다치가와로부터 공수되고 1일 106톤이었다.
병력보충은 8월에 11,400명, 9월에 13,00명, 10월에 17,200명을 예정하고 있었는데 1일 평균 손실을 미 육군성은 450~570명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제 3 절 7월말의 북한군 현황
7월말 북한군은 부산공격 때문에 뭄이 달아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제공권하에서 1개월여 작전으로 제1선부대들의 피로도가 누적되고 3.5인치로켓포와 네이팜탄 등 신무기의 등장으로 T-34전차가 위력을 상실하고 공격력은 대단히 저하 되어 있었다.
1. 병력 .전차
전후 조사에 북한군은 개전 이흐후8월 초까지 북한군의 손실은 5만 8천에 달했고, 화포와 장비 수는 1/3로 감소된바 전차는 150대나 되었던 것이 40대로 줄었다.
그들은 점령지에서 강제징집 등 수단으로 제7.9.10사단의 창설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2. 군 수
병참선의 신장과 해상 수송이 불가능하게 되자 수만명의 서울시민을 동원하여 한강교를 보수하고, 유엔군의제공원하에서도 최소한의 야간에 열차와 자동차를 운행하여 보급품을 운반했다.
북한군은 약 30만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보급수송에 동원시켰다. 노동자들에게 기상에 관계없이 1인당 20kg를 하룻밤에 20~24km씩 운반토록 했다.
식량은 현지조달로 해결해야하는데 작전지역이 산악지역이라 쌀을 입수하기가 어려워 정량의 1/2수준 밖에는 보급이 않되어 장병의 체력저하로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한국의 공간사에 따르면 "북한군은 부상병들이 급증함에 따라 현지의 의사들을 징용했다가 그 후 입북시켰는데 그 수는 한국 의사 수의 2/3에 달했다"고 한다.
3. 북한군의 점령지 행정
북한군이 점령지에서 실시한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하나는 점령지에서 인적.물적 동원을 강행하여 재빠르게 전력화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점령군의 군정이 가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반발하는 집단적인 행동이나 게릴라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 행정조직
(1) 사전에 남한 출신 당원으로 점령지의 군정요원을 양성하여 조직해 두고 있었다.
동이나 리의 위원들은 그 대부분이 현지에 잠복하고 있던 공산당원과 용공분자들이 말단세포로써 활동하였으며 미리 치안부대(약 2만 4천명으로 12개 연대, 48개 대대로 편성하고 기간요원은 북한주민으로 기타는 현지의 당원,게릴라,동조자,노조원 등으로 조직하고 장비는 소총외에 죽창, 곤봉, 검도, 창 등)를 준비하여 배치하여 군정 시행을 강화하였다.
*인공 당시에 서울특별시 인민위원장이던 이 승엽은 남한 출신의 월북하여 북한 전 사법상이었다)
7월10일, 상륙작전식으로 동해안 울진에 상륙한 "2천-3천명의 민간인 대집단"은 그러한 조직요원 도는 게릴라의 일부였다
(2) 동이나 리의 위원들은 그 대부분이 현지에 잠복하고 있던 공산당원과 용공분자들이었기 대문에 그만큼 말단조직 침투가 빨랐다.
(3) 미리 준비했던 치안부대를 배치하여 군정 시행을 지원토록 했다.
* 치안부대는 2만 4천 며으로 12개 연대, 48개 대대로 편성, 기간요원은 북한 주민들로 충당하고 기타는 현지의 당원. 게릴라. 동조자. 로조우ㅏㄴ 등으로 조직했다. 장비는 소총외에 죽창, 곤봉,검도,창 등이고 제1선에서 가까은 사천의 제104치안연대, 전주의 제102치안연대는 경기간총으로 장비하여 전투에도 투입되었다.
점령지 북한군 치안부대 배치도
서울-경기 107연 주문진.강릉.옥계.삼척 108연
정선.제천 112연
이천.안성.청주 111연 울진.평해.영덕 흥해
101연
당진.아산.홍성 106연 논산.대전.보은.김천 109연
전주.김제.줄포.법성포.남원 102연 거창.합천.삼가 110연 포항.대구. 마산.부산 ?
광주. 함평. 장흥.해남.벌교 105연 사천.고성.삼천포. 104연
(4) 특이한 것은 주민 감시 및 반동분자를 적발할 수 있도록 각 부락, 직장 단위별로 밀고제도를 도입하였다.
공산당의 검찰조직으로는 군 등에 다섯 종류의 기관이 있어 감찰부는 내무서에서 송치한 자를 조사하고, 중범자는 예심부에서 조사, 사상범은 검사국에서 치급하고, 정치보위부는 정치와 군사범을 취급하며, 비밀경찰은 독일의 게슈타포나 게페우같은 당 직속의 최고 검찰 기관이었다.
결국 한국민은 리.동.면의 위원들에게 짓눌리고 치안부대나 비밀경찰, 그리고 각종 검찰조직에 감시를 받아야 했고, 밀정이나 당세포, 자식에게까지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했기에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 인원동원
사람의 동원은 징병, 노역, 부역, 각종 조직의 결성 등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동원의 대상이었으며 징병은 7월 중순부터 시작 되었는데 16~25세까지의 정예주의를 택하게 되는데 이때가 1차모집이다.
제2차 모집은 7월 말이 되어 병력 손실이 급증하자 군중궐기대회 등을 이용하여 청년들에게 전원이 의용군에 참가할 것을 강요하고 나이도 30세로 연장시켰다.
그러나 한번 속은 사람들이 참여가 미흡하자 제3차 수단으로 부락과 직장, 학교단위로 의용군 응모자 환송회를 연다는 명목으로 회합을 갖게하여 35세까지 강제동원하게 된다.
제4차는 40세까지의 남자들을, 제5차는 이른바 "젊은이 사냥"이라하는데 가택수색을 통해 47만명을 징모하여 병사나 노역으로 사용하는데 전선으로 보내진 인원이 6~12만명이었다 한다. 따라서 청년이나 장년들이 도망쳐 인원이 부족함에 따라 부인이나 노인들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계산법으로 북한군 사단병력은 1/3이 남한에서 강제로 잡혀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의 앞잡이가 된 민청 소속의 남녀 공작대원은 인적, 물적 동원의 집행기관으로 활동하여 남한의 2천만 동포를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다. 물자동원
식량은 모두가 당국의 통제하에 두었고 배급 등록부가 작성되었는데 말단까지는 한번도 배급이 없었다. 한국의 7~8월은 한국 자체가 식량이 부족하여 배급을 줄 수 없었으며 그 당시의 한 농부의 술회로 대변된다.
"이 승만은 쌀은 거두어 갔지만, 잡곡까지는 가져가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은 논두렁에 심은 콩까지 수탈해 갔다."
마. 치안유지
경찰망, 밀고제, 주민조직, 생활고 등으로 꼼짝을 못했다.
8 월 의 공 방 전
제 1 절 작전환경
북한군은 8월 5일부터 부산교두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그 당시의 작전환경은 초목이 별로 없는 지형과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혹서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 특징으로는 첫째 북한 게릴라의 출몰이었고, 둘째는 유엔 해.공군이 절대적인 재해.재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 게릴라와 치안유지
북한 게릴라는 '48년 여수.순천 반란이래, 지리산과 영천의 보현산을 근거지로 하여 할동하는 지방게릴라와 북한에서 교육받은 요원으로 편성된 제766게릴라연대와 제402.제100대대 등의 집단게릴라를 비롯하여 사단에서 운용하는 편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게릴라를 유엔군은 총병력을 약 3만, 핵심요원은 약 5천명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들의 전방에서의 주요활동은 정보수집, 통신망 절단, 병참선 및 지휘소으 습격, 요인 습격, 테러 등으로 특히 마산지역에서 활발했다.
대표적인 예로 마산지역에서 미군들로부터 '귀부인'으로 존칭되는 노 부인이 치마속에 뻰찌로 통신선을 자르고, 묘령의 부인이 두목으로 하는 게릴라 15명이 '50.9.3일 마산 북방의 천지산(639m)무선중계소를 습격하여( 미군 6명, 국군 2명 근무) ㅣ군 사살, 1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알려졌으며 비가 내려 보초를 세우지 않았다.
또한 주요 신문기자 2명이 간첩, 마산형무소 간수가 죄인을 무장시켜 폭동을 기도하다 발각되는데 공산당원이었다.
후방기관이나 지휘소 습격은 주로 피난민으로 가장한 게릴라가 2~3명 단위로 피난민 속에 끼여서 들어와 일정 장소에 모여 분해된 장비를 조립하여 무기로 활용한다.
대표적인 통신소 파괴 사건은 제8군과 동경간의 교신에 이용되는 대구 남방 915고지(달성군 가창면의 최정산으로 판단됨)중계소 습격 사건이다. 이 중계소에는 한국 경찰 70명, 미군 7명이 근무하는데 8월 11일 05시 15분에 약 100정도의 게릴라가 기습하여 미군 4명 사상에 3명 실종, 시설은 다 불타 버렸다.
가. 제2전선
마산, 대구, 부산 등의 철도, 통신, 항만 노조 등에게 반전 동맹파업 사주 등이지만 미미했다.
다. 철도
철로구간에 터널과 교량을 파괴하는 것으로 개전초에서 9월까지의 현황은 철도 경비대 638명이 피해를 입었다.
라. 게릴라 토벌
이러한 게릴라를 토벌하기 위해 경찰 대대가 편성되는데 치안 전담대대로써 미군장교 지휘하에 약 500명식 편성되어 경박격포와 및 소화기로 장비했다. 개전 직전에 21개 대대를 목표로 착수했으나 겨우 개전시에 2개 대대만 편성되었다. 그 후 8월 상순에 대구에서 6개 대대, 9월 초에는 14개 대대가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8월~9월 중순에 걸쳐 부산교두보 내에서 체포 또는 사살된 게릴라 수가 약 4천명에 달했다.
마. 주민조직
7월 22일 대통령령으로 경찰의 관할하에 17~50세 남녀로 부락과 직장 단위로 자위대를 조직하여 경계, 보고 들은 것 통보 의무 부여
바. 피난민 통제
제8군은 한국 경찰대(200~300명)를 각 사단에 배속시켜서 피난민 이동을 통제하였다. 경찰대는 먼저 피난민을 연대 수용소에 집합시켜 신문, 신체검사, 소지품 검사 등을 한 다음, 군에서 지정한 경로로 호위하도록하여 주간에만 이동 시켰다.
제8군은 피난민을 낙동강 동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수십만의 피난민이 낙동강 서안에서 우왕좌왕하고 미군 포병의 탄막 사격에 걸려 피해를 보고, 북한군으로부터 반동분자로 몰려 학대를 받는 등 그야말로 진퇴 양란이었다.
사. 주민소개
제8군은 작전지역내에 게릴라 온상을 없애려 낙동강 동에서는 강변에서 8km 이내의 주민들이 소개 되었으며, 남강 남안에서는 진내의 전주민을 소개 시켰다. 마산에서는 공공 기간원을 제외한 전시민 약 12만명을 열차, 자동차, 상륙용 함정으로 부산과 거제도로 강제 소개시킬 정도 였다.
아. 피난민 구호
8월초 진지내에는 약 70~80만명의 피난민이 방황하고 있었다. 대구의 평시 인구는 약 30만명인데 이때 약 70만명이 증가했다.
정부에서는 피난민 수용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여유있는 주택과 여관, 요전 등에 수용토록 하고 유엔은 쌀과 의료품, 방역자재를 급송하여 정부의 구호 활동을 원조했다.
2. 해.공군의 지원상황
워커장군은 "부산교두보의 방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해.공군의 덕분이다."라고 했다.
가. 해군
북한군의 해안 병참선 차단과 그 후방에 대한 위협으로 함재기에 의한 근접지원이었다.
함포사격은 주로 구축함의 125밀리포와 순양함의 200밀리포로 대부분 동해안에서 포격을 했다.이에따라 북한군 제5사단의 진출속도가 둔화되고 영덕의 공방전과 국군 제3사단의 해상철수 보장 드을 들 수 있다.
나. 공군
7월에 실시한 근접항공지원출격기 수는 4,346대였는데 8월에는 7,028대로 증가하고 9월에는 6,219대 였다.
사단에 대한 지원출격기 수는 세기의 대작전이라고 불리는 노르망디상륙 작전에서 브래들리 집단군의 각 사단이 받은 지원 출격 수보다 많은 지원이 있었다.
7.30일 미 제5공군의 보유 전투기는 590대 였으며 F-80 제트기 626대, F-51무스탕기 246대다.
미 공군이 근접항공지원에서 가장 효과적인 공격은 대전차공격이었다. 신형 5인치로켓포로 자주 사용하고 보고에 의하면 로케트에의한 전차의 파괴한 수가 네이팜판으로 파괴시킨 전차 수의 10배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나 전후의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네이팜탄에의해 파괴된 전차가 로케트로 파괴된 숫자의 3배였다.
네이팜탄은 11갤런들이 네이팜의 연소시간이 50초로써 45미터평방의 지역을 전부 소각해 버렸다. 네이팜은 그 화염으로 전차를 소각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화염으로 괘도의 고무부문에 불이 붙어 적재탄약을 폭파시키거나 연료에 인화되기도 하고 엔진에 화재를 일으키어 무력화 시켰다.
특히 북한군 포로 심문결과 공중폭격에의한 보급문제로 그들은 사기저하에의한 극도의 불안정성 속에서 전투를 하게 되는데 주요 사기저하 원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식량부족이 21.4%, 공중공격의 공포 17.9%, 흔련부족 11.3%, 무기.장비 부족이 9.8% 등이고 전쟁간 미군은 전투기 93대, 폭격기 9대 등의 피해를 입었다.
제 2 절 북한군의 공격계획
북한 공간사에는 대전과 소백산맥 남쪽 기슭의 요충지인 문경과 풍기를 점령하는 단계를 제3차작전이라 하고, 그 이후 낙동강을 향한 진격과 부산교두보에 대한 8월 20일까지의 공격단계를 제4차작전이라 한다. 이러한 북한군의 8월공세는 미리 계획된 공격이 아니고 추격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미 본토에서 증원군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7월말 김일성은 수안보의 전선사령부에 나타나 "해방 5주년 기념일인 8월 15일까지는 부산을 점령해야 한다. 유엔군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말고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라."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이 격문을 받는 전선부대는 추격의 여세를몰아 진격을 게속, 각기 부산교두보로 육박해 갔다. 따라서 어떤 특별한 표면적 이유가 붙은 것이 아니라 일제히 공격을 가한 것처럼 보였기에 항간에서는 "8월 공세"라 부르기도 했다.
북한군 제1군단
제6사단 : 마산-삼랑진 경유, 부산 점령
제4사단 : 신속히 낙동강 도하, 영산경유, 밀영탈취, 부산-대구간 도로 차단
제3사단 : 왜관 남쪽에서 낙동강 도하, 제10사단과 협력하여 대구공격
제10사단 : 왜관북쪽에서 도하, 제3사단과 협력하여 대구 공격
북한군 제2군단
제15사단 : 선산부근에서 도하 유학산거쳐 대구 공격
제13사단 : 낙동리부근에서 도하 다부동 경유, 대구 공격
제1사단 : 신속히 군위 점령, 제13사단 좌측방 부대와 협조 대구 공격
제8사단 : 정면의 적 격멸, 영천으로 진출후에 경주 또는 대구 공격
제12사단 : 포항으로 진출, 연일 또는 경주 경유 부산 공격
제5사단 : 영덕 탈취후 포항 진출, 12사단과 협동, 부산 공격
제 3 절 제8군의 작전지도
1. 워커 장군의 작전개념과 지휘통솔
워커 장군의 작전개념은 "역습만이 방어의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부산을 방어하는 동안 장군의 할 일은 언제 어디에나 예비대를 투입할 것인가, 또는 새로운 예비대를 어떻게 편성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부산교두보 방어에서 제8군이 가장 괴로운 것은 역습을 반복실시하기 위한 예비대를 차출해 내는 일이었다. 미 공간사에 의하면 워커 장군은 매일 아침 인사로 "랜드럼(군 참모장), 오늘은 어느 정도의 예비대를 확보해 두었나?"라고 했다고 한다.
또 그는 어느날 전쟁터에서 돌아온 모 장군에게 "싸움터에서 철수해 온 자네와는 만나고 싶지가 않아, 자네가 관 속에 들어 있다면 별 문제지만......"하고 말했다 한다.
2. 킨작전의 태동
워커 장군은, 8월 6일, 미 제 25사단장 킨 소장에게 해병여단을 배속시키고, 8월 7일 남강, 남안지역을 따라 진주를 향해서 공격한 후, 부산교두보의 남측방인 남강 남안-진주고개--사천선을 확보 하라"고 명하고 이 작전을 킨작전이라고 명명했다. 유엔군의 최초의 공격작전이었다.
8월 4일, 마산정면에는 다음과 같은 부대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미 제25사단(제29연대의 2개 대대를 편입하여 각 연대 공히 3개 대대로 편성, 제87중전차대대), 미 제5연대 전투단(미 제25사단에 배속), 임시 미 제1해병여단(군 예비)으로 인원 2만여 명, 전차 100대, 포 100문 이상이었다.(군 예비로는 제25사에서 제27연대를 지정함)
그런데 정면의 북한군은 8월 3일 진동리전투 이래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너무 손실이 많아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8군은 이걸 탐지하지 못했고 오직 북한군이 주공을 대구로 지향하고 대구정면의 서쪽과 북쪽 지역에 6개 사단을 투입되어 있다는 것을 탐지하고, 남하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신편의 제7.9.10사단이 어느 방면으로 증원될 것인가에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이때 워커는 부산에 최대의 위협을 주고 있는 마산정면의 북한군을 격멸함으로써 군의 좌측방을 안전하게 하는 동시에, 대구 정면에 집중하고 있는 북한군과 서울부근에서 남하중인 후속부대를 마산정면으로 유인하여 대구에 대한 압박을 완화시키려 "킨작전"을 구상하였다.
3. 전반적인 작전개황
8월 5일 : 북한군이 부산교두보에 공격 개시
영덕의 북 제5사단이 국 제3사단을 압박하여 오십천 남안의 주요고지인 181고지 점령, 대구 북방에서는 북 제13사단이 국 제1사단의 저항을 격퇴하고 낙동리부근에서 도하 개시
8월 6일 : 영덕은 국군이 역습으로 181고지 탈환, 대구 북방은 북 제1사단이 도하에 성공하여 남하, 영산지역에서는 북 제4사단이 도하하여 공격 개시, 이에 미 제24사단은 예비대로 영산서쪽 돌출부로 침투한 북한군 역습 실패
8월 7일 : 대망의 킨작전 개시, 마산국도의 공격은 정상으로 진행, 진동리정면에서는 북 제6사단과 격돌로 주보급로 차단되는 등 혼돈
영산 서측방에서는 북 제4사단이 미 제24사의 역습을 격퇴하고 교두보 구축
대구정면에서는 국 제1사가 유학산-가산선으로 철수, 대구 북방 위기로 미 제24사에 배속된 국 제17연대가 대구로 이동
8월 8일 : 주보급로 미개통, 공격돈좌, 영산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제8군은 제9연대의 주력을 미 제24사에 배속시켜 역습, 실패. 부산에 중전차 3개 대대 상륙 완료 됨.
8월 9일 : 북 제3사단이 왜관 남쪽에서 도하 개시. 미 제1기병사단이 주력도하 저지 성공, 일부인 북 제7연대가 금무봉으로 진출, 대구 포위 위기 직면. 미 제1기병사단 역습 실패
공격 3일째를 맞은 킨작전은 겨우 보급로 개통, 공격작전 개시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반면 낙동강 돌출부의 전투는 지지부진하여 오히려 북한군의 활동이 활발한 편이었다. 북한군 제4사단이 유엔군의 항공과 포병에 의한 저지를 피해가며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방어선 남쪽의 상황이 호전되는 상황에 북쪽의 영덕의 국군 제3사단에서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조그하게 오십천의 교량을 파괴하여 영덕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 단대호 미상의 북한군 대부대가 기계북방에 나타났다. 국군은 신편제인 제25연대로 공격을 시켰으나 격퇴당하고 마는데 바로 북한군 제12사단이었다.
8월 10일 : 장사동으로 철수한 국군 제3사단은 퇴로가 차단당할 위기에 빠지고 포항과 연일기지에 위기가 다가와 제8군은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연일 비행장을 방어하고 국군 제17.26.25, 유격1대대, 포항해병 대대, 미군 포병75밀리곡사포 포대 등을 편성하여 "포항부대"를 편성하여 안강정면을 방어토록 한다.
이시간 낙동강 돌출부는 미 제24사단이 총공세를 폈으나 진전이 없는 반면 왜관의 미 제1기병사단은 금무봉으로 진출한 적에게 괴멸수준의 피해를 주어 대구 서측방의 위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킨작전도 미 해병여단은 고성 북방으로, 미 제5연대 전투단은 봉암리로 각각 진출하고, 제35연대는 진주고개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8월 11일 : 포항정면에 위기가 왔다. 경산에서 연일로 이동하던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가 게릴라의 매복 기습을 받아 분산 되고, 기계를 향해 공격하던 포항부대는 반격을 받아 혼란상태에 빠지고 , 북한 제12사단이 포항에 진입했다. 워커는 해.공군을 긴급지원하여 적 12사를 격퇴시켰다. 브래들리부대로 형산강 이남에 대한 방어력을 보강했으나 미 제5공군은 연일에서 철수할 준비에 들어갔다.
낙동강 돌출부는 전세역전되어 오히려 북한군이 미 제24사단을 영산 남쪽으로부터 육박해 옴으로써 창원에 대기하고 있던 군 예비인 제27연대에서 1개 대대를 증원하여 적을 공격케 했다.
이날의 킨작전은 해병대는 고성을 점령했고, 제35연대는 진주고개를 점령했다. 하지만 중앙의 제5연대전투단은 봉암리 협곡에서 병력 미상의 북한군과 교전하게 된다. 그러자 제8군은 예비명령으로 영산지역으로의 투입을 예고하기에 이른다.
8월 11~12일 : 대구 서남방에서 북한군의 도하가 시작된다. 신예 제10사단이 현풍 남쪽 돌출부와 용포교에서 기습적인 도하가 이루어졌다. 용포교일대는 미 제7기병연대의 역습으로 격퇴되었지만 현풍 서쪽 돌출부는북한군이 암런 방해없이 교두보를 학보하고 대구와 영산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8월 12일 : 낙동강 돌출부에서 북한 제4사단의 2개 대대가 영산 동쪽으로 진출, 영산-밀양간 도로 차단, 즉시 창원의 미 제27연대 북상토록 명령했으나 현풍의 북한군이 언제 어디를 공격할지 위기에 몰렸다.
킨작전도 난관에 부딪쳤다. 해병대는 사천 남쪽에서 매복에 걸렸고 제5연대 포병이 봉암리 협곡에서 포위 되었다.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은 3면에서 포위망이 좁혀지고, 대구 북쪽의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압박에 위기를 맞고 있다. "바로 8월 12일, 8월 공방전의 최대 위기였다."
워커는 이러한 문제가 킨작전 부대가 정면의 적을 격파하지 못한데서 비롯 되었다고 판단하여 12일 저녁 킨작전의 중지명령을 하달했다.
8월 13일 : 동부전선의 위기였다. 북한 제12사단, 제5사단의 일부가 포항쪽에 출몰하여 제8군은 다시 함포와 폭격으로, 국군 제17연대를 출동시켜 적을 소탕시켰다. 워커는 국군 제3사단의 장사에서 구룡포로 해상철수를 결심하게 된다.
이날 영산은 증원되는 군 에비인 밀양의 제23-1대대와 남지교에서 북상중인 제27연대가 협공하여밀양-영산간 도로 개통 및 영산 남쪽의 적을 소탕하였다.
이 무렵, 대구 북방의 국군 제1사단도 유학산일원에서 북한군의 제1.13.15사단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8월 14일 : 왜간 북쪽에서 도하한 북한군 제3사단이 왜관의 303고지, 작오산 압박, 북 제10사단은 주력으로 용포에 대한 기습도하 감행했으나 미 제1기병사단의 역습으로 격퇴하였다.
반면 국군 제1사단이 있는 대구 북쪽 정면은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제8군은 영산돌출부 작전을 끝낸 제27연대를 대구로 이동 시켰다.
한편 킨작전이 중지된 상황에서 미 제25사는 지시된 전선으로 복귀하고 해병여단은 밀양으로 이동했는데 다행히도 북한군 제6사단이 추격해 오지 않았다.
이 사이 동부전선은 위기가 한층 고조되어 의성에서 선전하고 있던 국군 수도사단이 경주로 이동하여 15일 아침부터 포항부대와 북한군 제12사단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8월 15일 : 대구정면의 왜관 303고지가 적에게 포위되고, 영산서쪽의 돌출부는 아직도 미 제24사단이 수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워커는 해병여단을 영산에 투입키로 결심한다.
8월 16일 : 동부전선에서 수도사단과 포항부대가 안강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남쪽에서 견제하는 사이 국군 제3사단이 독석리 일대에서 해상철수 단행해 성공한다.
그러나 대구 정면에서는 303고지가 피탈되고 북한군의 대구 공격이 눈앞에 다가와 제8군은 98대의 B-29폭격기로 왜관 서북방에 융단폭격을 실시했다.
8월 17일 : 동부전선에서 수도사단과 포항부대가 안강을 포위하여 북한군 제766부대를 격파하고 제12사단도 격퇴시켰다.
대구전선에서는 미 제1기병사단이 303고지를 탈환했으나, 대구-상주간 도로로 남하한 북한군 제13사단이 다부동정면에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날 영산돌출부는 해병대의 역습이 성공할 기미가 보이고 마산정면의 북한군 제6사단은 국지적인 공방전을 전개했다.
8월 18일 : 동부전선의 위기는 사라졌다.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부대는 잔류병력 약 2천명을 데리고 비학산으로 퇴각하고 수도사단은 기계를 향해 추격개시, 구룡포로 상륙한 제3사단은 포항남쪽으로 진출하여 포항 탈환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구 북쪽은 다부동을 중심으로 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으로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워커는 군 예비인 제27연대를 다부동에 투입시켰다.
이날 밤부터 전후 7회의 북한군 야간공격이 시작되고 이날 처음으로 대구시내에 북한군 포탄이 떨어졌다. 정부는 부산으로 옮겼고 피난민은 역으로 몰려들어 위기일발 이었다.
그런데 이때 북한군 제15사단이 의성-신령-영천간의 돌를 따라 공격하던 북한군 제8사단이 국군 제6사단의 반격을 받고 공격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부대를 교대시키기 위해 영천정면으로 전용되어 국군 제1사단이 살아났다.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미 해병여단이 북한군 제4사단을 낙동강 서안으로 퇴각시키고 재기불능상태로 만들었다.
8월 19일 : 동부전선은 국군 제3사단이 포항을, 수도사단이 기계를 탈환했다. 그러나 다부동에서는 아직 잔날밤의 야간전투의 냄새가 남아 있고 워커는 밀양에 대기하던 제23연대의 주력까지 다보동으로 투입시켰다.
마산 정면은 국지저긴 전초전만 계속 되었다.
8월 20일 : 동부전선이 정리되어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와 포항부대 해체, 민부대는 대구로 이동시켰다. 미 해병여단은 다시 군 예비로 창원에, 미 제2사단 마지막 부대인 제38연대가 전투단이 밀양에 도착하여 제8군은 미 제24사단과 교대를 명했다.
8월 21~23일 : 미 제27연대에 대한 북한군의 6번째 야간공격 격퇴
8월 24일 : 전전선이 소강상태로 들어감
제 4 절 킨 작 전
1. 공격계획
킨작전의 목적은 마산정면의 북한군을 격파하여 부산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대구정면으로 집결하고 있는 북한군을 유인하여 대구정면의 압력을 완화함며 부산교두보 남측 방어선을 진주고개-사천선으로 추진하는데 있었다.
가.공격은 8월 7일 06시 30분에 세 갈래의 도로를 다라서 진주를 향해 병진 공격하는 것이다.
1) 제35연대(우일선) : 중암리에서 무촌리로
2) 제5연대 전투단(중앙) : 진동리-장성점-봉암리-무촌리
3) 해병여단(좌일선) : 장성점-고성-사천가도(진주의 동남쪽)
또한 함안 서북산(738m)과 마산의 주산(763m) 속에 잠복하고 있는 게릴라를 미 제24연대(민부대 배속)로 하여금 서북산 일대를 소탕시키는 것이다.
나.공격 전야
8월 6일 각 공격부대들이 공격선으로 진출하고서 서북산의 정찰을 맡고 있는 제24연대의 L중대는 함안 북쪽에서 게릴라의 매복기습으로 순식간에 12명의 전사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내어 괴멸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서북산 정상과 필봉, 중암리를 감제할 수 있는 오봉산에 북한군이 이따금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날 밤, 북한군은 서북산에서 뻗어내린 여우고지(야반산)를 돌파한 후에 지산리 고지로 올라섰다. 그러나 야간이라 아무도 이러한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2. 충 돌
킨특수임무 부대는 예정대로 8월 7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였고 동시에 북한군 제6사단도 공격을 개시하여 충돌하였다. 이러다 보니 우익의 제35연대는 계획대로 공격이 진행되데 좌익의 진동리는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혼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익부대
7일 아침 미명과 함께 제35연대는 계방산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역습으로 탈환토록 했으나 약 500명의 북한군과 충돌하여 5시간이나 백병전을 방불케하는 격전을 벌여 강력한 항공지원으로 적을격퇴한 후에 저녁때에 무촌리 북쪽 삼거리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적 사살 350명, 전차 2대를 파괴하였다.
진동리의 혼전
8월 7일 아침은 짙은 안개로 항공지원이 중지되었다. 공격부대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질서정연하게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고 안개가 걷히자 진동리 동북쪽의 255고지 일대에서 북한군이 출현하여 마산도로를 차단했고 해병 3대대와 제24연대 2대대가 항공과 포병으로 하루종일 255고지를 공격했지만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북한군을 돌파하지 못했다. 무려 7~8일에 1,600발의 포탄을 퍼부었으나 해병대가 돌격하면 수류탄과 기총소사로 버텼다.
한편 야반산(여우고지)일대는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해병대 한 장교의 표현에서 제5연대 2대대와 교대하러 해벼우2대대가 지산리에 이르자 인근 고지에서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섭씨 44도나 되어 더위와 싸우는 격이였고, 이때 여우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5연대 2대대는 날이 밝을 무렵 북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해병대를 지원해줄 여력이 없었다.
"첫번째는 적에게, 두번째는 중간에, 세번째는 아군에"
보급은 공중투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협소한 관계로 제대로 투하도 못하였다. 진동리는 하루종일 박격포가 날아다니고 군의 예비였던 제27연까지 이 혼전 속에 말려들어 포병은 동서남북으로 사격방뱡을 돌려 지원해야 했다. 이것은 북한군이 이미 킨부대의 위치를 알고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날인 8일, 여우고지의 포위망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해병 제2대대는 정오경 정상의 우군과 연결이 가능해졌다. 공격의 주역을 받았던 D중대의 피해는 전사 8명, 부상 28명이었으며 북한군은 150~400명으로 추정 되었다.
"한국전 최초의 야간공격 : 제5-2대대의 서북산 공격"
여우고지에서 내려온 제5연대-2대대는 서북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는데 벌써 1주일째 전투로 피로도가 증가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킨 장군과 제5연대장이 현장에 나와 지켜보는 가운데 제5-2대대장은 야간공격을 결심하고 2개중대를 병진으로 돌격하여 성공을거두웠다.
그러나 255고지는 이날도 탈환하지 못하고 항공 및 포병사격 지원을 2개 대대 공격으로 고지를 확보해 나갔다. 공격 3일째인 8월 9일 255고지를 공격한 제24연대 2.3대대와 해병 3대대는 항공지원을 받으며 정오가 지나서 탈취하게 되는데 주역을 맡았던 해병 H중대는 전사 16명, 부상 36명의 피해가 발생한 반면 고지 정상에는 북한군 시체가 120구나 있었으며 북한군의 피해는 약 600명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제35연대는 이날 목표인 무촌리로 진출, 주변에 정찰대를 운용하였다.
분진 협격
8월 9일 오후, 좌일선의 해병대는 3개 대대로 고성을 향해 공격을 개시히여 해군의 함재기의 호위를 받으며 무난하게 진출중 무명천의 다리가 전차의 중량으로 파괴되어 진출이 중단되었다,
중앙의 제5연대는 처음적의 저항이 미약하다 점점 강화되어 2개 대대로 좌우를 제압하면서 병진공격으로 속도가 떨어졌다
8월 10일, 미 해병대는 순조롭게 진출, 그러나 중앙의 제5연대는 수 미상의 북한군의 저항으로 시달리고 우군기는 봉암리 북방과 북한군의 보급기지로 판단되는 둔덕 부근을 맹폭하였지만 어느정도의 적이 있는지 모두가 제각각으로 대대에서 사단 주력까지 판단하였다. 정오경에 봉암리에 진출하여 3대대를 초월시켜 무촌리로 진출시키는데 저항없이 발산고개를 통과했다.
연대주력이 통과하려는데 봉암리 북쪽지역에 북한군 대부대가 나타나 연대는 기동을 중지하고 봉암리 협곡에 부대를 집결시키고 다음날 공격 준비를 했다.
이날 밤, 북한군이 야영주인 연대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11일 새벽에 공군의 공격으로 북한군은 산으로 도주했다.
피로 물든 협곡 "그리고 증원부대는 오지도 않았다"
8월 11일 아침, 제5연대 3대대는 무촌리로 진출하여 제35연대와 병진으로 진주고개를 공격하고, 해병대는 정오경에 고성 근교에서 북한근 제105사단 83기계화 연대의 차량종대 200대를 급습하여 200명사살, 트럭 31대, 소형차륜 24대를 파괴하였다.
이 무렵, 낙동강 돌출부는 북한 제4사단이 영산동쪽으로 몰려왔고, 대구 서북방에서는 북한 제3사단이 금무봉으로 도하하고, 동해안은 국군 제3사단이 장사동에 포위를 당하는 등, 예비대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리하여 킨작전은 곧 종료될 것으로 판단하여 킨부대에 예비명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봉암리에 제5연대는 지난 밤에 있었던 적의 기습으로 혼란해진 부대를 오전중에 수습하여 오후부터 전진하려 했으나 불가능 했다. 북한군이 4면에서 사격을 가해오고 발산고개 북쪽에 대부대가 잠복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급부대는 대부대가 있다는 것을 믿지않고 바로 전진토록 요구했으나 연대장의 설득으로 제24연대 3대대를 증원하여 고개의 적을 퇴치하고 일몰 후 21시경 출발하는데 주력이 계곡에 남아 내일 새벽까지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증원부대는 오지도 않았다.
"사방에서 들리는 총성, 완전히 포위 되었다."
사실 증원부대는 이동중 서북산 남쪽에서 북한군에 저지를 당하고 있었고 고개 위 산에는 보병이 계곡에는 포병이 산재해 있었다. 연대장은 이대로 있다가 날이 새면포병부대들이 큰 변을 당할 텐데라고 생각하고 출발을건의했으나 상부지시는 "그대로 있으라"였다.
그러나 연대장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8월 12일 04시에 전진을 명했다. 그러나 구급차가 길 도랑에 빠지는 등의 문제로 진퇴양란이 되었다. 그러다 어떻게 구급차가 빠져 나오고 본대가 전진을 하여 발산고개를 넘었다.
얼마 후, 뒤떨어진 제555야전포병대대가 전진을 위해 차량을 정열 시키는 순간 북한군의 포위부대(제13연대)들이 화력을 집중하여 "포병의 무덤(묘지)"을 만들어 버렸다.
제555포병대대(105밀리곡사포) : 2개 포대 8문, 전사 100명, 부상 80명, 전차량
제90포병대대(155밀리곡사포) : 포6문, 전사 100명, 부상 60명, 실종 30명, 차량 26대
북한군은 이 전과를 "155밀리 9문, 105밀리 12문, 전차 13대, 차량 157대를 획득 또는 파괴했다고 방송했다.
구출을 위한 눈물겨운 작전은 계속되어 해병은 남쪽에서 제3대대가 봉암리로 진격하려 했으나 사방의 고지마다 북한군의 사격이 있고, 미 제25사단 포병사령관 공병을 지휘하여 진출하다 곡안리 남쪽에서 저지되었다.
미 제5해병연대장은 헬리콥터로 내리려고 했으나 이것마저 불가능했다. 산 위에서 우군의 시체를 내려다 보는 미 해병대원들의 눈에는 북한군들이 쥐새끼처럼 시체를 뒤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사천의 함정
12일 아침, 미 해병대는 사천을 향해 급진하고 있었다. 제3대대는 봉암리로 투입하였으며 해병대 주력이 13시경 사천 동남쪽 6km 지점의 U자형으로 되어있는 장천의 협로 입구에 이르렀을 때에 병풍처럼 가파른 산위에 북한군의 움직임이 보였는데 이것은 북한군 제15연대 2대대와 제83기계화 연대등이 미 해병대를 매복, 기습하기 위한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해병 제1대대는 함재기의 지원을 받으며 좌우 고지를 탈취하여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8군은 예비대를 전부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었다. 8월공방전의 고비는바로 이날 이었다. 제8군은 12일 저녁, 킨작전의 중지를 결의하고 킨특수임무부대를 서북산으로 이동시켜, 방어태세로 전환한 다음, 여유병력(해병여단)을 예비로 차출키로 한다.
13일 0시, 각 부대에 철수를 명령했다.
보급품의 유지
작전기간중 미 제24연대는 북한군의 집결지로 예상했던 서북산을 공격했으나 산정상을 탈환하지 못했다. 아니 산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북한군은 서북산을 전진거점으로 하ㅕ 킨부대의 후방을 반복적으로 공격했다. 이 일대의 주요도로는 그들의 공격목표로써 지뢰가 매설되고, 교량은 항상 적의 통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보급차량은 보병을 동반한 전차로 전후를 호위시켜야만 했다. 따라서 킨부대의 전차는 100대가 넘었지만 제1선에 투입된 전차는 그일부에 불과했다.
작전에 대한 평가
미 공간사에는 특수임무부대는 7일간에 걸친 공세작전으로 목표인 진주고개는 탈환했으나, 작전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정면의 적을 돌파하지 못했고 서북산의 적도 격퇴하지 못했다.
방어선 진주고개-사천선으로 추진도 못했고 오히려 후방을 습격당해 의외의 피해만 보았다. 작전의 주 목적인 대구정면으로 증원되는 적을 유인하지도 못했다. 북한군은 대구정면에서 한명도 이곳으로 전용하지 않았다.
북한군 제6사단의 7,500명에 비해 제공권하에서 24,000명이 지형과 북한군의 전법의 특이성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마산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장병들에게 공격전투의 경험을 체득케 하는 한편, 부산교두보으 남쪽이었던 남강-서북산-진동리선을 쉽게 점령할 수 있게 한 것이 작전의 성과였다. 이 작전에서 북한군도 4,000~4,500명의 손실이 있었다.
3. 방어로의 전환과 산악전의 개시
8월 14일, 킨부대의 주력은북으로 부터 미 제35.24.5연대 순으로 남강의 남안으로부터 십이당산(271m)-전투산(665m: 네이팜산 또는 피의 산))-필봉(743m)-서북산(738m)-여우고지(342m)-옥녀봉(181m)선을 점령했다.
그러나 700m나 되는 산 정상에 보급지원을 해야하는유일한 방법은 인력이기에 사단은 400~500명의 한국인 노무자를 고용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게릴라와 불순분자들이 끼여 재앙을 불러일으켜켰다. 킨부대는 16일에 편성이 해체되고 이후로는 미 제25사단이라 불렀다.
한편, 북한군 제6사단은 제14연대가 서북산을 점령하여 미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킨작전에 많은 손실이 있어 8월 12일에 보충된 약 2천명의 신병을 합쳐도 실병력은 5천~6천명에 불과 했다. 더구나 보충병은 1주 내지 10일 정도의 훈련을 받았을 뿐이고 반수 이상은 무기도 휴대하지 못했다.
북한 제6사단장 방호산은 8월 18일 밤 갑자기 십이당산에 대한 야간공격을 대대적으로 전개 했다. 진주-마산 가도를 확보하고 전투 부대를 동진하려면 이 고지를 탈환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었다. 이로부터 야간 공격은 9월 20일 까지 계속된 산악전의 서곡이었으며 진해만으로 돌출된 해발 600~700m고지 일대에서 북한군 제13.14연대장이 돌격하다 죽을 정도로 "시산혈해"의 쟁탈전이 계속 되었다.
제 5 절 낙동강 돌출부 방어
1. 미 제24사단의 방어준비
판 단
북한군의 주공방향은 창녕정면이 될 것이다. 창녕정면이 도섭이 가능한 지점이 많고 지형도 공격하기에는 유리하나 방어하는부대는 도로가 부족하기 때문에 기갑부대에 의한 반격이나 증원이 제한된다. 따라서 창녕정면으로 공격할 것이라 생각했다. 즉 "적은 8월 상순 말 이후에나 주공을 창녕방면으로 지향하여 공격해 올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배 치
이미 제24사단의 전투력은 40% 수준으로 주공방향으로 판단되는 창녕 정면에 미 제21연대를, 현풍 정면에 국군 제17연대, 영산 정면(낙동강 돌출부)에 미 제34연대를 배치하고 기동예비로 제19연대와 수색중대를 창녕에 집결 보유했다.
진지는 8월 2일~3일부터 구축한 것으로, 개인호는 완성이 되어 있었지만 자재 부족으로 철조망과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곳은 창녕정면의 일부에 불과 했다.
주민소개
사단은, 오산전투이후, 주민과 피난민들 때문에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기 대문에 이번에는 진지 점령에 앞서 강안으로부터 8km이내에 거주하는 전주민을 소개시켰다.
이때 사단은 전단이나 출력이 강한 확성기로 "지시된 지역에서 퇴거하지 않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하여 사살한다"는 내용을 포고했으며 창녕이나 영산부근으로 집결시킨 약 30만명을 부산으로 호송했다. 또 낙동강 서안에서 동안으로 들어오는 피난민 수는 약 10만으로 이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게릴라를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피난민 대열 앞에 탄막을 설치해 피난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한다.
2. 북한 제4사단의 침입
서울, 영등포, 대전공략에 수훈을 세우고 소위 영웅 칭호를 받은 북한군 제4사단은 8월 4일까지 전사단을 합천에 집결시키고 낙동강 도하준비를 하고 있었다. 후일 조사에 의하면 이때의 병력은 7천명 수준으로 평시 편제의 70% 수준이었으며 포도 12문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왜관 북쪽에서 제15사단의 도하와 제6사단의 마산공격에 호응하여 5~6일 밤에는 도하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6일 0시, 낙동강에 적색과 황색 신호탄이 올랐다. 북한군 제4사단은 오항과 부곡리일대 도선장에서 은밀 도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부곡리로 오른 병력은 강변에 살치된 지뢰지대에 봉착하고 포사격과 12.5밀리 중기관총의 사격으로 격퇴되고 말았다.
하지만 오항으로 도하한 부대는 아무런 제한을 받지않고 내륙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곳에 배치된 제34연대 I중대는 전원을 표고 130m의 고지 정상에 병력을 배치하고 오항 도선장에는 감시병 한명도 배치하지 않았다.
"I중대의 웃기는 행동"
중대는 일 아침, 북한군이 전면의 오항 북쪽 고지에 나타나자 포위된 것으로 착각, 우측의 제21연대 방어지역으로 철수. 그러자 부연대장이 급히 달려가 진지로 돌려 보낸다. 이 사건은 후에 처어치 장군이 미 제34연대를 해체하게 된 주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도하를 끝낸 북한군 부대는 북 제4-6-3대대 600명이었다. 그들은 총과 옷은 머리에 이고 장비와 경하기는 뗏목에 싣고 어깨까지 빠지는 물속을 건넜다.
8월 6일 01시경, 4.2인치 박격포중대가 기습을 받았고 고곡리에 있던 3대대 본부가 습격을 받아 분산 되었다.
3. 연대의 반격
미 제34연대장 뷰쳄프 대령은 02시경 대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강안중대에 상황을 파악했으나 북한군 침투 흔적이 없다고 한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어떻게 확인할 방법도 없다.
그런데 이때 돌출부의 첨단(박진나루쪽)에 배치된 L중대로부터 중대 좌측방이 적의 공격을 받아 격퇴했다는 보고를 받아 적이 박진나루로 도하하는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사단장의 승인을 받아 연대 예비인 제1대대장 '아이레스중령'에게 "영산-박진가도를연한 지역을 역습하여 강안진지를 회복시키라"고 명령을 하달 했다.
아이레스 대대장은 트럭에 승차한 C중대를 직접 지휘하여 고곡리 북쪽의 북한군을 공격했으나 실패가 반복되면서 10시경에는 중대 병력이 겨우 35명만 남았다.
"두곡산의 총소리"
이때 갑자기 10시30분경 두곡부근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잠잠해졌다. 이는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곳에 배치된 제13야전포병대대 B포대가 포 4문, 차량 9대를 유기하고 철수하면서 벌어진 총성이었다.
"너무 더웠던 그날의 여름, 섭씨 40도를 넘나들다"
이 무렵, 부대대장이 대대주력을 인솔하여 진출중 동정리에서 북한군의 정찰대를 격퇴시키고 너무나도 더운 한여름날 낮에 더딘 진출을 하고 있었다. 도로 북쪽 165고지(일명 클로버고지 : 주변의 모습이 같은 모양으로 3개의 고지가 있다하여 미군이 명명함)를 공격하던 B중대가 동쪽 고지를 점령했다.
한편, 도로 남쪽으오 전진하는 A중대는 부분적 피해를 받으며 진출, 포병짅를 지나 C중대가 괴멸당한 고곡리 동쪽을 진출하여 제분공장에 남아 있던 잔류병력을 구출하였다. 이 잔류병력은 공장의 방어벽을 보강하기 위해 '전사자의 시체를 방탄용 마대 대신으로 사용'했다. A중대는 계속 진출하여 20시경 강변에 도착하고 철수중인 L중대 일부병력과 칠현리의 강안고지를 점령했다.
4. 사단의 반격
사단은 아이레스대대의 반격을 주시하고 있다 09시경 사단장은 "북한군 도하지점은 박진부근이며, 약 800명이라고 판단, 예비인 미 제19연대에게 "영산가도를 연해서 역습을 하되, 우선 강리로 전진하라"고 명하였다.
사단은 당시에 엘중대와 고곡리에 있던 제3대대가 습격을 당했다는 것, 아이레스 대대가 고곡리에서 고전을 하고 있다는 것, 두곡의 포병진지가 유린당했다는 것,북한군이 박진나루와 영산가도에 연해 할동하고 있다는 정도 였다.
그러나 도중에 보고를 종합하여 도하지점이 오항의 도선장이라는 것을 알고 제19연대에게 목표를 오항으로 변경, 먼저 후속 도하를 저지키로 한다. 먼저 오항에 대한 협공으로 청단부락에서 북한군 300명을 격멸한 후 오항 북쪽과 청단 남쪽 고지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사단에서는 제9연대 1대대를 미 제24사단에 증원시켰다.
정오경, 사단장은 부곡리 동쪽에 남아 있는 북한군을 수색중대와 I중대에게 소탕토록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북한군 후속부대들이 박진과 오항, 그리고 부곡리로 도하시도 했으나 사단 전화포로 탄막사격을 실시하여 도하를 저지 시켰다.
8월 7일 새벽, 북한군 일부가 현풍정면의 국군 제17연대정면으로 도하 공격했으나 저지 되었다.
이날 제8군은, 국군을 재편성 하기 위해 제17연대를 대구로 이동시켰다. 따라서 제24사단은 급히 "하이져특수임무부대(제3공병대대, 미 제78전차대대(전차 결), 미 제24수색중대)"를 편성하여 국군 제17연대지역을 점령 시켰다.
사단의 공격은 무더운 날씨와 식량 식수문제, 제한된 전투력, 여기에 공군의 오폭 등 여러 요인으로 진척이 둔했다. 이 시기를 이용하여 북한군은 공세로 이전하여 B중대(역습부대)를 격퇴하고 클로버고지(165고지군)를 점령한다음, 지대내에 미 제A,I중대를 남겨둔채로 다시 남하하여 대붕리 능선까지 진출하여 교두보를 편성했다.
5. 군의 반격
제8군은 돌출부에 대한 북한군의 진출은 옆구리를 비수에 찔린 것과 같았다. 또한 사단의 역습도 실패하고 북한군은 교두보를 확보했다.
마산정면에서 진행중인 킨작전도 성공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더군다나 왜관 북쪽에서의 북한군 제15사단의 도하는 대구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따라서 우선 서측방의 위협을 격퇴시킬 필요성을 인식하여 경산에 의치한 제9연대를 영산으로 증원시켰다.
그런데 같은시기인 7일 밤, 북한군도 2개 대대를 추가 증원하고 있었다. 계속하여 도선장에서 나루배에 10~12명식 태우고 안개속에서 도하하였다.
8일 08시30분, 미 제9연대장 힐대령이 밀양의 제24사단 지휘소에 나타나자 "곧 공격하라"
힐대령은 지형도 모르고 전투경험도 없는 부대라고 했으나 결국 공격개시는 16시로 결정되었다.
제1차 반격, 그리고 실패
제9연대는 영산-박진가도 양측으로 전개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클로버고지군과 대붕리 고지군에 대한 포병사격으로 시작하여 주간에는 일시적 전진하였으나 밤에는 일거에 철수하고 말았다.
북한군의 대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하여 강변의 A,L중대의 철수가 이루어지고 이에따라 북한군은 수중교(수면에서 30센티미터 정도의 깊이에다 주로 암석과 목재 등으로 낮은 다리를 만들어 도섭장으로 사용, 중화기를 운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3차례공격도 무위로 끝나고 오히려 그나마 일부 점령했던 165고지(클로버고지군)에서도 격퇴되는 등 장교의 손실이 너무 커서 제2대대는 중대의 장교는 1~2명으로 줄었다.
한편, 우측방의 제19연대 2대대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감행하여 오항 북쪽 고지를 탈환했으나 소총수가 약 100명(중대별 30~40)에 불과 했다.
"힐특수임무부대 편성", 그리고 영산 위기~!"
지금까지의 실패에도 굴하지않고 처어치 장군은 10일 밤에 제19연대, 제34연대, 제21연대 1대대,사단포병(105밀리 29문, 155밀리 12문), 공병 1개 중대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11일에 일거(5분안에)에 돌출부를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반면에 북한군도 이날 밤 수중교를 완성시켜 화포 14문, 수미상의 전차를 비롯한 중장비와 예비인 18연대를 도하시켜 11일 아침에 공격을 준비 시켰다.
"공산군 제4사단의 공격준비파괴사격~?"
힐부대는 이러한 북한군의 증강된 상황을 알지 못하고 11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려 했으나, 도리어 적의 맹사격을 받아 공격개시선에 그대로 묶여 버렸다.
적들의 포병은 6문, 4문, 4문씩 세 곳에 포진지를 점령하여 전쟁이후 처음으로 탄막사격을 실시했다. 또한 영산 시가지까지 포격하여 힐부대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그리고 일부의 북한군과 게릴라가 영산-밀양가도에 출현하고, 다시 사단과 미 제25사단의 유일한 연락 수단인 남지교를 공격하여 K중대 1개분대를 격퇴시켰다.
기선을 제압한 북한군은 힐부대의 정면에 압력을 가하고 측방으로 우회하여 후방을 공격하는 전형적인 전법을 사용하였다.
처어치 장군은 군예비인 제14공병대대로 영산부근을 방어토록 했으나 전세의 회복은 어려웠다.
제8군은 사단의 위급에 따라 마산에 있는 군 예비인 제27연대 2대대를 사단에 배속하고 남지교 탈환과 영산 남쪽지역 소탕작전 임무를 부여 했다.
"소달구지에 실려온 북한군 소총 12정~!"
그러나 칠원-남지도로는 피난민(미 제25사에서 전선에서 철수시킨 인원으로 120,335명)으로 메워져 진출이 어려웠다. 피난민의 소달구지가 전복되면서 소총 12정과 탄약통이 쏟아져 나와 일대소동이 벌어졌는데 북한군 12명이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진입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남지교 남쪽 2km지점의 이룡리에 200명의 게릴라가 잠복하여 부대이동 등에 많은 제한적 요소가 되자 소탕작전을 명받은 2대대가 결국 남지교 근처의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8월 11~12일 밤에 영산 동쪽 고지를 점령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곳에 침투한 병력은 도하를 전부 완료한 북한군 제4사단은 모든 연대가 클로버고지 일대에 배치 되고 제18연대(-1: 두곡리 배치)가 영산에 진출했다.
여기에 이날 밤, 북한군 제10사단의 일부가 현풍 돌출부에 도하했다. 여기서 남진을 하면 창녕으로, 동진을 하면 청도, 북진을 하면 대구로 가는 위치다.
"12일, 영산 남쪽과 동쪽 지역은 전선도 없었고 전투정면도 없었다."
12일 아침, 힐부대장은 전선에서 즉시 F중대를 차출하여 영산 동쪽 고지를 공격시키고 적이 밀양으로 돌진 하는 것을 막기위해 처어치 사단장은 전차 2대와 사령부의 행정병, 취사병, 헌병 등의 인원 150명을 임시 편성한 "하페멘툭수임무부대"로 영산-밀양간 도로를 3차례에 걸쳐 방어시켰다.
남지교에 내려갔던 머어치대대(2대대)는 공군의 지원하에 남지교-영산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북한군 100명을 사살하고 기관총 12정을 노획하였다. 피아 부대가 혼합되어 식별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마산정면의 킨특수임무부대가 중간에 종료된 상황에서 군 예비인 미 제27연대(미카엘리스 대령) 주력으로 영산 남쪽 지역을 공격토록 명령했다.
8월 12일, 킨작전이 북한군의 반격을 받아 밀리고(봉암리 포병의 묘지, 서북산, 진동리 255고지 등), 대구 서남측의 용포에서는 북한 제10사단이 도하하였고 (국군제17연대 빠지고 제3공병 대대를 주력으로 하이저특수임무부대 투입),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도 장사동에서 포위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등 모든 방면에 상황이 극히 불리하였다. 제8군은 돌출부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제27연대와 머어치 대대를 영산탈환에 전용하였다.
그러나 워커는 이곳에 투입된 적의 규모가 2개 연대규모인데 반격이 지지부진하자 밀양으로 힐연대장을 불러 "귀관은 영산 동쪽의 적을 격퇴할 수 있겠는가?"묻자 힐 "할 수 있습니다."였다. 보고를 받은 워커는 상황이 처어치 사단장 판단(북한 제4사단 전부가 도하)이 옳다고 보고 제23연대 1대대를 미 제24사단에 증원시켰다.
8월 13일 아침, 머어치 대대와 미카엘리스 연대 주력은 영산을 향해 공격, 기습작전으로 15시경 영산 동쪽 고지 탈환하고, 증원된 제23연대 1대대와 미 제14공병대대가 주변의 적을 완전히 소탕했다. 따라서 제27연대는 대구로, 제23-1대대는 현풍으로 하이저부대를 증원했다.
제2차 반격
처어치 장군은 영산주변의 적을 완전히 소탕을 끝냈으므로 다음 날인 14일 아침 힐부대에게 제2차 총고격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4일 아침 비구름이 낮게 깔링어 100대 전폭기의 폭격은 중지되고, 영산에 집결한 105밀리 33문, 155밀리 12문으로 10분간의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공격을 개시한다.
"하사가 5회 중대를 지휘하다"
그러나 각 부대는 정원의 70%수준을로 공격력이 약하여, 대봉리고지나 클로버고지 일부지역에 진입하는 것으로 전과확대를 기대할 수 없었다. 클로버고지에서는 "조르단 하사가 다섯번이나 중대를 지휘한다"
결국 야간에 적이 총공세를 감행하여 다시 고지를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항복, 살려주시요~!]
그런데 적진에도 상당히 사기가 저하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8월 15일, 공격을 개시하다 돈좌되어 클로버고지 일각에 있는 홋 속에서 갑자기 뛰어나온 북한군에게 생포된 것으로 알았던 미군 하사는 이제 죽었구나 체념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북한군이 항복을 하고 빌고 있는 것이다.
. "주여 어린 양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북한병사가 손을 들고 항복을 하지않은가, "GIVE UP~!"
힐부대도 전투력이 소진되고 있지만 북한군도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미 제24사단장으로부터, 공격의 실패와 일시적으로 방어를 하겠다는 보고를 워커 장군은 처어치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밀명을 내렸다.
[귀관에게 해병여단을 배속시킬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 돌출부에서의 전투를 빨리 마무리짓고 싶다. 빨리 말야... .]
이 밀명은 사실 사단장의 방어 계획에 실망하여 노기에 찬 답변으로, 그러나 사령부로 돌아온 워커는 결국 이 말을 지키기 위해 '킨 작전"을 끝내고 15일 13시에 밀양으로 이동 중인 미 해병여단을 터어치 장군에게 배속하여 17일 아침부터 반격을 개시하도록 지시한다.
이시각에 북한군 제4사단은 비참한 상태로 영산에 진출햇던 제18연대의 경우 14일 이후에 한 발의 탄약도 보급을 받지 못한 실정이었고, 식량도 정량의 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부상자가 치료할 수 없어서 그대로 죽어 갔다. 여기에 탈영병이 격증하여 그 수는 무려 보충 수의 40%에 달하였으며, 다만 중공군 출신의 분대장과 소대장들이 간신히 제1선의 붕괴를 막아내고 있었다.
반격 : "클로버고지, 대붕리 고지의 악몽"
처어치 장군은 힐부대가 영산주변의 적을 완전히 소탕을 끝냄으로써 다음 14일 2차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전투기 100대로 폭격을 하고 실시케 하였으나 기상관계로 지원이 않되고 포병이 105밀리 33문, 15밀리 12문으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겨우 클로버 고지 일부분만을 점령하는 것에 불과 했다. 클로버 고지를 공격한 제9연대 E중대 경우 장교와 하사관이 사상을 당하여 조르단 하사가 다섯번이나 중대를 지휘했다는 사실에서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알 수 있다.
15일, 비가 계속내려 힐부대의 공격은 공군의 지원이 어려웠다. 하지만 공격정신만큼은 대단했다. 아이레스 대대의 A중대 2소대는 콜린스 중사가 지희하는 병사는 35명뿐이었지만 이 소대는 대붕리고지 중앙으로 돌입하여 수류탄으로 백병전까지 감행하여 10명 밖에는 남지 않았다. 결국 적을 격퇴하는 대는 실패하게 된다. 예비대가 없었다.
. 미 제24사단이 기진맥진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상대방인 적도 마찬가지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같은 15일, 현풍의 서쪽 돌출부에 숨어서 움직이지 않는 부대가 북한군 제10사단 제29연대란 것을 알아냈는데 도대체 이 부대는 움직이질 않아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고 한다.
6. 교도보 돌파
공격계획
미 해병여단을 배속받은 처어치 장군은 17일 아침에 공격을 실시할 예정으로 가용한 모든 화력으로 공격준비사격을 시리한 후에 미 해병대와 제19연대를 주공으로 양측방에서 돌파하여 협격하려 했다.
이 계획은 북한군의 주진지가 오항-클로버고지-대붕리고지를 연하는 선으로 특히 클로버고지와 대붕리고지간에 상호 지원할 수 있는 위치라 동시에 공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해병대 머레이 연대장은 북한군의 주진지를 대붕리 정상에서 남쪽의 206고지로 보고 먼저 그들의 전초기지가 있는 대붕리 고지를 해병대 단독으로 탈취한 후에 사단 주력의 공격이 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사단장은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주었다.
미 해병대의 공격작전
가. 1차 진격전
17일 07시 35분,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되었다. 해병대를 직접지원하는 코르세아 전폭기 18대가 대붕리 능선을 폭격하고 총 49문의 포는 머레이 연대장이 주진지로 생각하고 있는 206고지를 강타했다.
그리고 주력이 공격을 개시하자 클로보고지 남단의 두곡부락에서 기관총 사격과 대붕리의 부락으로부터 배후사격을 받아 가며 정상에 돌격을 감행해 갔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정상에 오른 부대는 싱어소대 12명이었으며 이들도 북한군의 수류탄 백병전에 5명이 부상하여 이 부상자를 옷에 싸서 질질끌고 정상을 내려와야 했다.
나. 2차 진격전
이번에는 전차로 두곡과 대붕리 부락으로부터 오는 측방이나 후방사격을 받지 않도록 사격을 가하게 해놓고 다시 공격해 갔으나 이번에도 제2대대 싱어소대의 9명만이 정상에 올랐다. 대대는 전사 23명에 119명의 부상으로 제1대대와 교대시켰다.
후일 조사에 의하면 북한군은 대붕리 능선에 제18.16연대에서 1개 대대를, 클로버고지에 제16연대의 주력을 배치하여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를 확보할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다. 당일 16시에 3차공격이 진행되었다.
오판을 인정한 해병대 연대장 머레이는 사단장 처어치의 의견에 따라 전 전선에서 동시전투를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대붕리와 클로버에 포평사격을 집중하되 엄체호등을 고려 VT신관을 사용하였다. "대붕리 고지군이 허공에 뜬 것처럼 보였다"는 증언에서 그 효과는 대단했고 제9연대는 클로버고지를 탈환하여 후방으로 북한군을 협격함으로써 대붕리고지에 해병이 올라섰다. 해병 제대대는 순차적으로 대붕리 능선의 고지들을 점령해 나가고 일부는 야간에 적의 저항으로 철수도 했다. 우측방의 제19연대와 제34연대는 오항 북쪽의 고지를 점령했으나 배후로 부터 사격을 받아 공격은 돈좌된상태였다.
"생지옥같은 클로버, 그리고 대붕리 고지군~?"
너무 많이 죽었다. 북한군은 결사적으로 물러나지 못했다. 무기도 별로 없는 주로 방망이 수류탄이 전부였다. 불을 뿜는 기관총은 그들의 정예간부들이 운용하고 말단 병사들은 남한에서 강제 징집된 인원으로 채워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목을 묶어 놓는 등, 무자비한 희생을 강요했다. VT신관이 엄체호를 파고들어 터지면서 마치 그 포연이 능선이 허공에 뜬 것처럼 보였다.
당시에 동네에는 사람이 없었다. 강제로 모두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죽기를 각오하고 나가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 나이드신 분들의 이야기는 미군 해병대 대단하지만 죽어도 물러나지 않던 북한군이 불쌍하다 한다.
라. 대전차전
저녁무렵 적의 역습에 대비하는 대붕리 능선 북단의 해병 1대대 B중대가, T-34전차 4대와 수백명의 북한군이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즉시 M-26퍼싱중전차 3대와 75밀리 무반동총, 3.5인치로켓트포 2문이 준비되고 항공지원도 준비된다. 고개를 넘는 전차에 먼저 항공공격이 있었지만 효과는 없다. 이어서 로켓트포가 90m거리에서 캐터필러에 명중시키고 75밀리무반동총도 명중되어 주저앉아 있으면서 사격은 계속한다.
이번에는 퍼싱전차가 100m 거리에서 불을 뿜자 사격을 멈추었다. 2번째 전차는 3.5인치로켓포 단 합 발로 끝났다.세번째는 퍼싱전차가 , 네번째는 무스탕기가 파괴하여 끝났다. 보병도 괴멸 되었다. 102고지 정상의 미 해병들은 이 통쾌한 승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25명전사, 180명 부상이다.
마. 대붕리의 야간전투
17일 밤, 해병대는 역습에 대비했다. 병력의 1/4이 배치되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병대의 무선전화에 북한군의 전파가 잡혔다.
"대장님, 실탄이 없습니다. 철수를 승인해 주십시요?"
"야, 너 죽을래. 다 죽을 때까지 역습해. 빼앗긴 곳 찾아라. 만약 못찾으면 너가 책임져라?"
"너무 합니다?"
"북한군의 무자비한 제파식 공격"
북한군은 빼앗은 미군 무전기로 통화하고 있었고 운좋게 이것이 걸려들었다. 즉시 해병은 바로 병력을 비상배치하고 때를 기다렸다.
02시 30분, 청색 신호탄이 오르고 적의 야간공격이 시작되었다. 때를 맞추어 해병대의 조명탄이 오르고 북한군의 움직이는 모습이 대낮처럼 보였다.
몇개의 제파로 나누어, 제1제파는 수류탄을 들고 10~20m를 뛰고 엎드리고, 그 뒤로 제2제파, 제3제파가 계속적으로 따르고 마치 파도가 치듯 밀려들었다.
이 제파식 공격을 이겨내니 좁은 고지에 시체가 183구가 되었다. 해병대의 손실도 180명에 달했다. 하지만 한명의 행방불명도 없었다. 이것이 미군 해병대의 전통이다.
18일의 날이 밝은 후, 아직 확보하지 못한 117고지에 500파운드의 폭탄이 투하되고 끝이 났다. 북한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10~100명식 무리지어 그들이 건넜던 그 길로 강을 건넜다.
미 해병대는 구진산에 대한 공격도 감행하여 탈취하고 우측의 제19연대, 제34연대도 강안의 고지들을 제압하였다.
19일 아침, 미 제24사단은 돌출부에 대한 소탕을 끝냈다. 해병대가 노획한 무기는 122밀리 포를 포함한 포 34문, 중기관총 18정, 경기관총 25정, 가관단총 63정, 매장시체 약 1,200구 였다.
이후에는 북한군 제4사단은 낙동강 전투에 다시는 참여하지 못했다. 제기불능이 된 것이다. 이후에 중공군이 개입한 후에 재편성을 거쳐 등장하게 된다.
지역 탐사 및 탐문 결과
나는 영산-밀양간 도로의 한 위치에 올라갔다. 사단 직할병으로 구성된 "하페멘특수임무부대"가 이 고개를 지키어 냈다는 곳이다. 지역 주민의 제보로 이곳에 많은 유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판단컨데 북한군이고 아마도 징집된 학도의용군이 많이 죽었을 것이다.
현장에 가니 부족국가 시절의 왕묘가 한두군데 있고 고개 좌우측은 헝하게 아무 것도 없다. 이미 도로가 2배로 확장되어 아무 것도 남은게 없다. 우리는 인근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듯이 남자분 한명이 앞으로 다가서 꾸벅 인사를 하며 반갑다고 한다. "여기서 만나뵙게 되어 고맙습니다. 제가 TV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차를 몰아 창녕 대합 태백산으로 갔다.
"창녕 태백산의 소년병"
창녕 대합면 합리에 있는 산은 284m 높이로써 5번도로 바로 옆에 있었다. 제보자 이야기는 본인이 어렸을 때에 이곳에 소먹이 풀을 하러 갔는데 해골이 굴러다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로 올라서니 정상부근에 큰 바위군이 있고 깊게 굴토된 곳이 있다. 탐지결과 요란한 소리에 놀랐다. 2002년도의 일이다. 이곳은 원래 발굴지역은 아니였는데 동네분의 열열한 제보에 발굴을 하기로 한다. 그런데 9명의 유해가 나왔는데 모두 15세 정도의 어린 유해라 한다. 다른 개인호도 아니고 한 방공호에 모두가 들어가 있었다.
동네 분들은 당시에 어린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산에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럼 국군이 이곳에 오넉이 있느냐의 질문에는 경찰은 왔다 갔지만 국군은 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다른 동네분들은 본초리에 가면 야산에 뼈가 널려 있어 긴뼈를 들고 칼사움도 하고 그 당시에 형들이 일부는 불에 태워 몸에 바르는 모습도 보았다고 한다. 이 어린 시신들은 공산군한테 도망치다 붙잡혀 죽은 학도병인지 아니면 극렬분자가 되어 마자믹까지 수류탄을 던지고 포탄이 낙하되어 죽은 북한군 의용군인지~~~
"우포늪의 영혼들"
이곳 일대는 경찰과 국군의 전투 사실이 미흡하다. 제17연대가 머물다 간 곳도 현풍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태조사를 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북한군은 8월에 들어서 보급거리 신장에 따른 문제점과 유엔군의 계속되는 항공폭격으로 후방에서의 병력지원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징집병을 보내거나 포로가 된 군인이나 경찰을 사상교육을 시켜 전쟁터로 보내게 된다.
이방면 세진리로 들어가, 마침 우포늪에 배를 띄워 그물을 걷고 있는 얼굴이 정말 까만 분을 만나 혹시 이 일대에 국군이나 경찰 또는 미군이 죽어서 묻혀 있는 곳은 없는지 물었다.
"그걸 지금와서 찾아서 뭐한데요?"
"유가족을 찾고 현충원에 안장하여~"
"아니 미국놈들은 전쟁때부터 지금까지 찾고 다니는데, 얼마전에도 왔다 갔어요."
"죄송합니다. 우리는 아직 그렇게 정신문화가 높지는 못합니다;"
"그게 아니고 할 일은 않하고 않할 일에 쓸데없이 싸움질 하니까 그래요. 이곳 늪지대에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군인만이 아니고 민간인도 많이 죽었어요."
"민간인은 왜 여기서 죽었습니까?"
"노무자로 끌려와 어디가 어딘지 모르다보니 도망치다 그만 빠져죽었지요... ."
"박진나루 뻘 속에 1,000명도 넘게 묻혔다"
이곳에 살고 있는 어느 분이 국방부에 제보를 해왔다. 본인이 직접 묻는데 참여했고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곳 낙동강돌출부 전투는 국군이 직접적으로 참여한 전투는 없다고 봐야 한다. 현풍지역에 일시적 제17연대가 점령한적이 있지만 전투는 없었다.
이렇게 보면 결국 북한군이거나 미군인데, 당시에 미군이 이렇게 많이 전사하여 뻘속에 묻혀질 정도로 전사하거나 수습되지 않은 유해가 없다. 반면에 북한군은 몇 백명 아니 천여 명이상 죽어가는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대면 북한군이다.
다시말해 북한군은 미군의 폭격 등으로 시신을제대로 수습하기란 곤란했다. 더구나 병력이 없는데 시신을 들고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또 한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혹시나 북한군이 지역유지나 포로들을 납치해 가는 중에 상황이 긴박하니 모두 죽이고 도망갔다고 보는 판단이다.
그래서 우리는 포크레인까지 동원하여 제보자가 묻었다고 하는 박진교 바로 대안상 우측편의 강변을 발굴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혹시 우리가 연세 많은 어르신의 공허한 증언에 말려들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그동안 세월 속에 수해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다고 판단해야 했다.
"수곡천의 미군차량과 한국인 제보자"
참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어려운 것이 전쟁놀이다. 이긴자의 독식이라 전쟁에 진 자는 설 곳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미화한다며 잘못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아마도 지난 20여 년의 발굴작전을 통제하면서 이곳 영산이나 창녕 지역은 적어도 2~3개월은 머물렀다. 별별 제보나 지역민들의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이야기는 대부분 슬픈 이야기였다.
특히 미군이 전투지역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부여한 것은 비록 우리를 공산군으로부터 지켜준 엄청난 사실도 있지만 도 그 한편으로는 그 도움의 뒷편에는 피난민 통제라는 미명하에 어느 개인에게는 씻기 어려운 상처도 많이 주었다고 본다. 충북 영동의 노근리 사건이 그 대표적 사건이라 하지만 미군이 전투한 곳엔 많은 사연들이 있다.
이곳의 사연은 이렇다. 미군이 정보를 얻기 위하여 지역주민을 한명 짚차에 태우고 작일 밤의 북한군의 동향을 알아보려 했다. 그런데 동네 개울가를 지나는데 그만 북한군이 매설한 대전차 지뢰에 짚차가 반파되며 승차하고 있던 모두가 길거리에 나뒹굴게 된다.
헌데 차에 타고 있던 제보자 한국인이 일어나지 못한다. 미군들은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하며 다음 차를 이용하여 뒤로 퇴각해 가면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로 있는 있다. 누구도 일으켜 세우지 않는다. 북한군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총알받이가 되어 숨졌다. 파리들이 몰려들었다. 가맣게 변해가는 시신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골안골의 아주머니와 어린아이"
이미 소개령이 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고향 땅을 버리고 나가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일 수도 있었다. 대부분 고향을 떠나 부산이나 거제 마산으로 흩어져 갔다. 하지만 고령의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일부 인원이 남아 있었다.
미군은 이런 사실에 아랑곳 없이, 하늘에서는 비행기로 지상에서는 포병 등이 엄청난 화력으로 북한군을 강타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아주머니 한분이 등에 아기를 업고 미군의 고함소리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뛰기 시작했다.
[아기를 앞으로 돌려서 안고 뛰는 아주머니]
뒤에서 총알이 난무하자 아주머니는 아기를 돌려서 안고 뛰기 시작했다. 요행이도 피하며 잘 가던 순간에 넘어지고 말았다. 글기고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뛰다 이내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젠 일어서지 못했다.
등을 총알받이로 하여 아기를 살리고 엄마는 총에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