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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의 <웰링턴의 승리>, 1부 <전쟁터>
* 2부 <웰링턴의 승리>
* 워털루 전투 그림
[ 워털루 전투의 배경 ]
지난번에 간략하게 살펴 보았듯이 1812년 나폴레옹 군은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참패를 당했습니다. 이어서 1813년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이때 스페인 군에 가담한 영국의 웰링턴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 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듬해 1814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파리를 점령합니다.
* 나폴레옹
이해 4월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되었습니다. 뒤를 이어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황제로 즉위하여 왕정이 복고되었습니다. 이때 웰링턴은 파리주재 영국대사에 임명되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프랑스 국민들은 무능한 루이 18세에 이내 실망했습니다. 그는 빈 회의에서 전후처리 문제를 놓고 연합군의 장단에 맞춰 춤을 췄습니다.
나폴레옹을 다시 옹립하자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자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엘바 섬을 탈출해 남프랑스의 주앙에 상륙했습니다. 충직한 부하 1,000여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이 18세는 네이 원수와 술트 원수에게 명해 군사를 이끌고 가 나폴레옹을 토벌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나폴레옹 군에 합세합니다. 3월 20일 나폴레옹이 7,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웰링턴은 황급히 루이 18세 일행을 이끌고 영국으로 달아났습니다.
* 웰링턴 장군
나폴레옹은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연합국들에게 공존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동맹국들과 나폴레옹은 이제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만 뒤였습니다.당시 영국을 비롯해 나폴레옹 타도를 외친 동맹국의 병사는 70만 명을 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초전에 이들을 각개격파하면 이들의 정치적 이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동맹관계가 와해될 것으로 판단했죠.
당시 나폴레옹이 동원한 프랑스 군은 12만 5,000명, 웰링턴이 총지휘하며 벨기에 브뤼셀에서 출발한 영국과 네덜란드, 벨기에,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 등의 동맹군은 9만 5,000명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발한 블뤼허가 지휘하는 프로이센 군은 12만 명가량이 되었습니다.
* 블뤼허 장군
나폴레옹은 신규로 징병한 병력을 더해 각 방향에 대한 방어를 준비하면서 주력군을 북쪽 방향에 집중시켰습니다. 병력면에서 보면 프랑스 군이 열세였으나 기동성을 살려 각개격파하면 승산이 있었습니다. 불패를 자랑하는 근위대도 건재했습니다. 질적인 우위는 나폴레옹에게 다소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군을 격파하기 위해 4명의 원수에게 병력 2만 4,000명을 맡겼습니다. 이들은 웰링턴이 이끄는 연합군을 상대로 카트르브라에서 접전했습니다. 나폴레옹 자신은 8만 병력을 이끌고 리니에서 프로이센 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6월 16일 나폴레옹 군사가 브뤼셀을 향해 신속히 진격해 카트르브라에서는 웰링턴의 군대를 밀어붙였습니다. 리니 전투에서도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프로이센 군은 블뤼허가 중상을 입을 정도로 크게 패했습니다.당시 웰링턴은 블뤼허와 합류한 뒤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으나 블뤼허가 퇴각한 까닭에 부득불 자신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4명의 원수가 나폴레옹과 합류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는 프로이센 군이 동쪽으로 완전 퇴각한 것으로 간주해 뒤를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때 여세를 몰아 프로이센 군을 궤멸시켰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공산이 크죠.
[ 운명의 워털루 전투, 1815년 6월 18일 ]
* 워털루 전장
이튿날인 6월 17일 밤새도록 폭우가 내렸습니다. 이는 대포 이동에 장애를 주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포술의 달인이었습니다. 조짐이 좋지 않았습니다. 6월 18일 아침 나폴레옹이 그루시 원수에게 3만 명의 별동대를 주며 프로이센 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에게 철퇴를 맞아 도주 중이던 프로이센 군은 웰링턴의 급한 요청에 의해 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다시 서쪽으로 행군 중이었습니다. 호우 속에 후퇴한 웰링턴 군은 몽생장 언덕의 방어 진지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군이 서쪽으로 우회할 것을 우려해 1만 5,000명을 우익에 배치해 수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 전투 지도
윗부분 몽생장 언덕에 웰링턴 본부가 있었고,아래 왼쪽에 우구몽 농가가 있습니다.
가운데< 라 페이 상트>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집니다.그 옆으로 네이 기병대의 무모한 돌격이
이루어졌고,오른쪽 아래에서 오후 늦게 블뤼허의 프로이센군 주력이 들이닥칩니다.
이 방어 진지는 브뤼셀로 진격하려는 나폴레옹을 저지하기 위해 워털루 남쪽 몽생장 언덕배기에 만든 진지였습니다. 동맹군은 언덕배기 진지에서 프랑스 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북상하던 나폴레옹 군은 이내 웰링턴 군의 정면에 포진합니다.
보병사단을 전면, 기병여단을 양익에 배치했습니다. 중앙 후방에는 근위대를 결전용 예비 병력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웰링턴도 보병대를 전면에 배치하고 중앙 후방에 기병사단을 집중 배치했습니다. 프로이센 군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에 치중할 심산이었습니다.
전날 밤 내린 비로 인해 땅은 진흙탕이 되어 있었습니다. 대포의 이동이 더뎌 프랑스 군의 장기인 포격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나폴레옹도 부득불 공격개시 시간을 아침에서 오전 11시로 미루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프랑스 군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프랑스 군 7만 2,000명이 웰링턴이 이끄는 동맹군 6만 8,000명과 워털루에서 맞붙었습니다. 프랑스 군은 연속으로 포격을 가해 동맹군을 압박해 보병사단의 진격로를 열고자 했습니다.
* 나폴레옹 본부였던 건물
동시에 좌익에 위치한 우구몽 농가 저택에 공격을 집중해 짐짓 그곳을 교두보로 확보하는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웰링턴의 주력군을 유인해낼 심산이었죠. 그러나 웰링턴은 이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방어에 주력하면서 부대를 언덕배기 너머로 후퇴시켜 프랑스 군의 포격을 피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군을 추격하기 위해 보냈던 그루시 원수를 불러들여 화력을 집중시키고자 했습니다. 당시 그루시는 3만 명을 이끌고 프로이센 군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의 후퇴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적을 궤멸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이 보낸 전령을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그루시가 이끄는 3만 명은 워털루 전투에 끝내 참여하지 못했고 이것도 나폴레옹의 패전에 큰 요인으로 작용합니다.당시 나폴레옹은 몽생장 언덕배기에 맹포격을 지시했으나 언덕 너머로 후퇴하여 바짝 엎드리고 있던 동맹군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 워털루 전장에 있는 기념 사자상
정오를 지나면서 프로이센 군의 선봉대가이미 전장에서 멀리 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각개격파 전략을 구사하려면 양군이 합류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저지해야만 했습니다.
오후 1시를 넘기면서 포격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나폴레옹 휘하의 에르몽 원수가 지휘하는 중앙의 4개 보병사단이 밀집횡대로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웰링턴은 전면의 라에상트에 있던 농가를 거점으로 방어에 주력했으나 이내 탄약이 떨어져 대열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때를 놓치지 않고 기병대를 풀었습니다. 웰링턴은 이에 맞서 중무장한 기병 2개 여단을 출격시켰으나 이들은 프랑스 포병의 십자포화를 맞고 이내 후퇴했습니다. 그 사이 에르몽이 이끄는 보병 4개 사단은 동맹군의 제1방위선을 분쇄했습니다. 이들은 제2방어선까지 전진하다 영국의 픽톤이 이끄는 동맹군의 주력과과 맞붙었습니다.
* 우구몽 농가
픽톤은 자신이 전사하는 혈전을 치르며 에르몽의 진격을 저지했습니다.보병의 정면 돌파가 좌절되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군의 합류 이전에 결판을 지을 생각으로 포격을 재개했습니다. 웰링턴은 병력 소모를 막기 위해 전선을 언덕 너머로 후퇴시켰다. 이를 본 네이 원수가 직속 기병에 근위기병을 합쳐 5,000기의 기병 돌격대를 구성한 뒤 과감한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보병의 지원을 받지 않은 기병의 돌격은 위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제지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웰링턴이 26개 대대의 보병을 토대로 13개의 방어진을 구축해 맞서는 바람에 결국 이 돌격은 실패로 끝났습니다.오후 3시경 네이 원수가 다시 한 번 돌격을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는 보병까지 동원했습니다.
* 네이 원수 기병대의 돌격
이 공격은 주효했습니다. 동맹군의 전선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다만 진로에 있는 여러 참호로 인해 전과가 예상보다는 크지 못했습니다. 당시 네이 원수의 공격에 호응해 우익에 있던 에르몽 사단이 동맹군의 좌익으로 돌입했습니다. 웰링턴 군은 다급한 상황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네이 원수가 곧바로 전령을 나폴레옹에게 보내 증원을 요청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는 예비 병력으로 남겨둔 무적의 근위대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최후의 결전용으로 남겨두고자 했던 것이죠.
이때 예비 병력을 아낌없이 투입했다면 웰링턴이 이끄는 동맹군을 섬멸할 수도 있었습니다.
* 네이 원수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웰링턴이 이끄는 동맹군은 물론 프로이센 군도 제압치 못한 채 싸움을 질질 끌고 말았던 셈입니다. 협공을 자초했던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오후 6시 프로이센 군 주력이 합류하면서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동맹군의 무너진 좌익을 보강하자 웰링턴은 보병을 4열 횡대로 산개시켰습니다. 프랑스 군이 격전 끝에 능선을 확보한 순간 웰링턴은 아껴두었던 기병대를 내보냈습니다.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 6만 명이 이에 호응해 반격을 가하면서 전세는 일거에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 우구몽 농가에서의 전투
나폴레옹은 최후의 시도로 비장의 카드인 근위대를 출격시켰습니다. 그러나 때가 늦었습니다. 불패를 자랑하던 근위대도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던 고참 근위대의 일부가 정연히 방진(方陣)을 구축해 나폴레옹의 퇴각을 엄호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나폴레옹은 “그루시는 어디 있는가? 어디 있는가?” 하고 애타게 외치면서 그루시의 복귀를 애타게 기다렸으나 그루시는 그 때도 하염없이 불뤼허의 프로이센 군의 행방을 쫓느라고 여념이 없었습니다.
*웰링턴 군의 스코틀랜드 기병대의 돌격
고참 근위병들의 사투덕분에 나폴레옹은 전장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전장을 빠져나가자 프랑스 군이 일제히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래는 종전 이튿날인 6월 19일 웰링턴이 자기 형제에게 한 언급입니다.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투였다. 이때까지 살면서 내가 경험한 전투 가운데 가장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의 전사자는 4만 명, 영국군은 1만 5,000명, 프로이센 군은 7,000명가량이었습니다. 결국 재집권을 노렸던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는 이로써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포로가 된 나폴레옹은 영국군의 감시 속에서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 파죽지세로 들이닥치고 있는 프로이센 군
< 나폴레옹의 결정적 패인 4가지 >
하마터면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냈을 뻔한 워털루 전투가 나폴레옹의 패배로 귀결이 난 것은 크게 다음 4가지 원인으로 요약됩니다. 이중 한 가지라도 성공했었더라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거라고 후대의 사가들은 말하곤 합니다.
첫째, 당일 전투개시를 너무 늦게 시작하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전날 내린 비로 대포의 기동이 부자유스러워 땅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는 점이 감안되더라도 한창 때의 나폴레옹 같았으면 안 그랬을 거라는 겁니다. 오후 늦게 프로이센 군이 몰려오기 전에 웰링턴 군의 숨통을 끊고 전열을 가다듬어 블뤼허군을 맞아 싸웠더라면...그리고 그루시 군은 뒤로 협공을 해왔더라면 완전한 승리가 확보되었을 겁니다.
둘째, 네이 원수의 무모한 돌격으로 알토란같은 기병대가 몰살당했다는 점입니다. 기병의 돌격은 당연히 포병과 보병의 지원이 함께 있어야 함에도 네이는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돌격으로 나섰던 거지요. 뒤에서 바라보던 나폴레옹도 아차 싶었습니다. 원래 용감하기로는 프랑스군 원수 중에 따를 자가 없었지만 영리함이 뒷받침되지 않은 장군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루이 18세에 의해 네이는 총살형에 처해집니다.
셋째, 네이의 두 번째 돌격으로 웰링턴 군이 결정적으로 불리해졌을 때 네이는 나폴레옹에게 급히 지원병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혹시 하는 마음에서 근위병 투입을 망설이다 절호의 기회를 상실합니다. 이 점도 한창 때의 나폴레옹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후세의 사가들은 말합니다.
넷째, 가장 안타깝게 놓친 기회가 바로 3만명을 이끌고 블뤼허를 쫓아다니던 그루시 원수의 아둔함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것이죠. 정신없이 블뤼허의 행방을 쫓던 그루시 군은 워털루 방향에서 들려오던 대포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루시의 참모들은 빨리 그쪽으로 병력을 이동해야 한다고 충언을 거듭하지만 그루시는 황제가 블뤼허를 추격해야 한다고 명령했다고 끝끝내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결정적인 지원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이 때 블뤼허가 이끄는 6만명의 프로이센 군은 그루시를 따돌리고,막 숨이 넘어갈 것 같던 웰링턴 군에게 오후 늦게 구세주같이 나타난 겁니다.
첫댓글 아슬아슬 하늘의 군신들간에 체스! 나폴레옹의 패전으로 귀결....전장과 역사 앞에 무정한 가정법 과거..이프 오아 낫!
나폴레옹과 워터루 전사 고지찬관장님 덕분에 완죤 정리 끝! 수고 하셧읍니다..
사실 전투가 시작된 오전,나폴레옹은 술트 원수에게 그루시 군을 불러오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런데 술트는 달랑 한사람의 전령만을 보내고 맙니다. 이런 큰 전투에서는
만약을 위해서 서너명의 전령을 보내야함에도 불구하고...나폴레옹은 급히 합류하라
는 지시가 그루시에게 전달되었다고 전투 막바지까지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많은 전투를 통해 역량있는 장군들을 잃어버린 것도 나폴레옹의 패인의 원인이 되었죠.
10년전 오스트리아 빈에 관광 갓을때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나폴이 오스트리아 공주와 정략 결혼 후 출생한 아들이
20세때 사망 아들의 관을 본적이 있읍니다만....죠세핀을 사랑하는 나폴의 순애보. 프랑스 어떤 치즈 냄새와 죠세핀 음부 냄새와 같아 나폴이 전쟁터에서 드르렁 주무실때 깨는 방법은 보좌관이 죠세핀 음부냄새와 흡사한 치즈를 나폴콧구멍에
갇다대면 오우! 죠세핀하고 벌떡 일어낫다라는 미확인 카드라 통신이 잇섬다 ㅎㅎㅎ
변대감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나폴레옹은 센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가끔 시중들던 부하(구르고)에게 조세핀의 음부가 이뻤었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고 하
죠. 구르고는 나중에 프랑스로 돌아와 <센트헬레나의 나폴레옹>을 써서 돈벼락을 맞
기도 했답니다. 그게 이쁘다고 하는데 잘 이해가....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