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주의 효행인 구두남 具斗南
1544년(중종 39) 4월에 이조에서 전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가 계문한 효행자들에 대한 상직문제로 왕에게 아뢰었는데 그 중 능주의 효행인으로 구두남의 행적이 거론되었다. 구두남의 행적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進士 具斗南은 능성 사람인데, 아버지가 죽은 이튿날 태어났다. 장성하자 애통과 사모가 더욱 극진하여 매양 忌辰을 만나면 10일 전부터 목욕 재계하였으며, 어머니 吳氏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뜻과 안색을 살피어 봉양했었다. 손위 누이 둘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이미 노쇠하여 재산과 전답을 분배할 적에 구두남을 치우치게 사랑하여 더 많이 주려고 했지만 구두남이 굳이 사양하며 자기 몫의 전답을 나누어 누이들의 生業을 돕게 하였고, 두 누이들이 먼저 죽자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여 두 생질을 한결같이 자기 자식처럼 敎誨했다. 어머니의 상사를 만나서는 애통해 하다 뼈만 남았고 초상 장사를 예문대로 하였으며, 여묘사는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복을 벗자 神主 받들기를 생존한 이 섬기듯 하여 나아갈 적에는 반드시 고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뵈었으며, 모든 제사 때면 기일 전부터 목욕 재계하기를 오래갈수록 더욱 삼가서 했다. 또 受業하던 스승을 위하여 그의 忌日에 반드시 제사하였고, 官衙의 문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기를 비록 눈이 내리는 어두운 밤이라도 더욱 경건하게 하고 변하지 않으므로, 鄕里 사람들이 모두 칭찬했다." 33)
의병에 참여하게 된 구희는 3구에서 “부채에 새겨진 유훈 가슴 속에 품었다”라고 했다. 갑자기 무슨 부채인가? 그리고 유훈이라니…. 부채는 여름철 날씨가 더울 때 시원하게 할 목적으로 쓰는 도구 중 하나이다. 그러나 구희가 시에서 말한 부채는 그런 보통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 특별한 무엇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
경상도 진주군 성 밖에 김춘룡(金春龍)이라는 한량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김춘룡이 진주 남강가에 있는 선산에 성묘를 하러 갔다가 노란색 자라 한 쌍이 머리에 부채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 부채를 얻었는데, 거기에 ‘구희 청풍의 부채(具喜淸風之柄扇)’라는 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당시 거기에 김춘룡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농부와 빨래하는 아낙 등 수십 명이 있었는데, 그 부채가 무슨 부채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들 중에 한 노인이 그 부채를 임진왜란 때 남강에 투신한 사람과 연관 지어 말했고, ‘구희 청풍의 부채’라 새겨진 것을 통해 부채의 원래 주인이 구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자손이 능성(綾城, 전남 화순의 옛 이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김춘룡이 직접 그 부채를 행장에 넣어 구희의 외생(外甥) 최호(崔鎬)를 찾아간다.
김춘룡은 최호에게 “능성에 구공(具公)이 있는가?”를 묻고, 이어 부채의 유래도 묻는다. 아마도 갑자기 부채 이야기를 꺼내니 최호 입장에선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호는 부채의 유래에 대해 “어느 해 3월16일에 공(公, 구희 지칭)이 ‘대학’ 한 부를 청계정사(淸溪精舍)에서 읽다가 그만 피곤해 한참동안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공의 할아버지 오봉(鰲峰) 구두남(具斗南)이 꿈에 나타나 부채 하나를 줬습니다.”라고 담담히 말을 했다. 이렇듯 부채 유래 이야기를 들은 김춘룡은 그때서야 행장에서 ‘구희 청풍의 부채’라 새겨진 부채를 꺼내 최호에게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