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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창 월정사 중대사자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 1 오대산)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에 있는 암자이다. 사자암이라고도 불리며 현재는 중대사자암이라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산내암자이다.
상원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308-5 오대산. 월정사와 함께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 창건, 성덕왕 때 중창하였으나, 1946년에 불타 1947년에 새로 지은 절이다.
이 절에는 신라 성덕왕 24년에 만든 높이 1.67m, 지름 91cm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제36호)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또한 세조가 직접 보았다고 하는 문수동자의 모습을 조각한 문수동자상, 상원사를 중창하기 위해 세조가 쓴 친필어첩인 중창권선문이 있다.
입구에는 관대걸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 역시 오대산과 얽힌 세조의 전설 중의 하나이다.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서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지나가던 한 동승에게 등을 밀어줄것을 부탁하였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승에게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고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요."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 때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며, 목욕을 할때 관대를 걸어두었던 그곳이 지금의 관대걸이다.
오대산의 중대(中臺)에 있다. 성덕왕때 창건하여 진여원(眞如院)이라 하였다. 이 진여원은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가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 가운데 형인 보천은 중대 남쪽 진여원 터 아래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스레 예배를 드렸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하였다. 마침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추대하였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웠다. 그 뒤 보천은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였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복전(福田) 7원(員)을 두게 하였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에서 주었다고 한다.
고려 이후 역사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문선』의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려 말 이 절은 극도로 황폐해 있었다. 그때 나옹(懶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은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보고 중창(重創)의 원을 세웠다.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가 그 뜻을 듣고 재물을 희사하였으며, 1376년(우왕 2)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가을 낙성을 보았다. 그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째인 1381년 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목도하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여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되었지만, 오히려 이 절은 더욱 발전하였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3칸 집과 2칸의 목욕소를 만들었다. 그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때 태종은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記文)하여 구원(久遠)한 세대에게까지 알게 하라.”고 하였다. 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다. 1465년(세조 11) 학열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경상감사(慶尙監司)에 명하여 쌀 500석을 내어 강릉부(江陵府)로 운반하게 하고, 비단 1,000필을 함께 내어 공사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1466년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졌는데, 크게 동서로 나눈 가람형식에 각각 상실(上室)을 지었다.
남쪽에는 다섯 칸의 누각을 짓고 범종을 안치하였으며,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을 지었다. 청련당의 서편으로는 재주실(齋廚室)을 지어 승당(僧堂)과 선원(禪院)으로 삼았다.
석조(石槽)와 집기(什器)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물들은 이때에 마련된 것이다. 그 뒤 인수대비는 탱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다시 조(租) 150석을 하사하고, 신미를 초대 주지로 모시게 하였다.
이 후 세조도 상원사에 들러 의발(衣鉢)과 좌구(坐具) 등 수선(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그 해 52명의 선객을 모아 수선을 시작하였다.
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라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서는 조세(租稅)하는 것을 금하였다.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년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 이 후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하였다. 동북 45도 방향의 이 절은 전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6·25전쟁 때는 이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면하였으며, 현재까지 전국 수도승들의 요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ㄱ’자형 선원을 중심으로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靈山殿),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후원(後院) 등이 있다. 선원은 청량선원(淸凉禪院)이라고 하는데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선원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각문수동자상, 3구의 소형 동자상, 서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목각의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이 상은 세조가 직접 친견하였다는 오대산 문수동자의 진상(眞像)을 조각한 목조좌상이다.
이 동자상의 자세·수인(手印)·의문(衣文) 등은 불상과 동일하지만 얼굴 부분만은 동안(童顔)으로, 두발을 위에서 두 가닥으로 땋아 동자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동자상에서는 총 23점의 유물이 나와서 보물 제79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선실 바깥 마루에 안치되어 있는 신중상(神衆像)은 일명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신중들이 탱화로서 봉안되어 있는 데 대해, 이곳만이 유독 조상(彫像)으로 조성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높이 85㎝, 무릎폭 35㎝의 목조상으로서 머리에는 구름무늬의 보관을 썼고, 좌우 손은 문수동자와 같은 수인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의문은 투박하고 굵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전신을 무겁게 감싸고 있고, 가슴과 무릎, 다리 부분 등 여러 곳에 영락 등의 장엄구를 드리우고 있다.
형태는 완전히 의자형으로서 목제의자에 앉아 있다. 두 발 역시 투박한 신발에 싸여 군의(裙衣) 밖으로 나와 있으며, 조각수법은 대체로 경직된 맛을 보이고 있으나 특이한 신중상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이 상의 조성연대는 세조의 상원사 중건연대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적멸보궁(寂滅寶宮)과 선원,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 종각인 동정각, 후원 등이 있다. 영산전은 선원 뒤쪽에 있다. 선원 화재시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으로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전내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고, 또 세조가 희사한 『고려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39함이다.
영산전의 옆에서는 화강암 석재들이 출토되어 현재 법당 옆에 쌓여 있다. 이 탑은 사방에 삼존(三尊)의 불보살을 가득 새겼으며, 옥개(屋蓋) 등에 층급을 나타내지 않고 낙수면에는 단순히 연화를 조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청량선원 옆에는 희귀한 당우가 있다. 승사(僧舍)로 사용되는 소림초당으로서 전면 6칸, 측면 4칸의 일반형 팔작집이다. 소림초당 앞에는 종각이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이 있다.
적멸보궁의 수호 암자인 중대 사자암은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상원사에서 적멸보궁 가는 길을 이십 여분 올라가다보면 만나게 된다. 조선 태종 1400년 11월 중창되었으며 이후 왕실의 내원당內願堂으로 명종 대에 승영僧營사찰로 보호되기 시작하였고 1644년부터 1646년 사이에 중수되었다.이후에는 왕실보호로 사세寺勢를 유지하고 건물을 보수해 나갔으며, 1878(고종 15년)년 재건되어 요사채로 사용되던 향각香閣이 낡고 헐어 1999년 퇴우 정념스님께서 제불 보살님께 발원하고 오대五臺를 상징하는 오층으로 향각을 신축하여 2006년 8월에 완공하였다.
중대 사자암의 법당인 비로전毘盧殿은 화엄경의 주불이신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셨으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로 조성했다. 비로전 내 벽체 사방의 8면에 각각 다섯 사자좌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상계上界에 500문수보살상과 하계下界에 500문수동자상 세계가 펼쳐져 있다. 세계최초로 조성된 양각으로 새긴 극락보수 삼존불상 후불탱화의 장엄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외경심을 느끼게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신문왕의 왕자 보천(寶泉)과 효명(孝明)이 오대산에서 출가하여 수행하다가 오대산의 오대를 참배하던 중에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만인의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중대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닌다 하여 사자암이라고도 칭했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태종은 불교를 심하게 탄압하였지만 이 절만은 극진히 보호하였다. 1401년(태종 1) 왕은 권근(權近)에게 절의 중건을 명하였는데 불상을 봉안하고 요사채와 목욕소를 만들게 하였다. 이해 11월에 태종은 절에 거둥하여 성대한 법요식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때에 태종은 다시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그 이로움을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부처님의 은혜를 입고자 하니, 경은 이 일을 글로 적어 후세에까지 알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 뒤의 연혁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이 봉은사를 떠나 이 절에 들어오면서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입적할 때까지 26년간 산문을 나서지 않고 수행하였다. 이 암자는 본디 상원사의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속한 향각(香閣)이었으며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해 왔다. 근래에 정념(正念)이 주지로 머물면서 크게 중창하여 중대사로 확장시켰다. 전각으로는 산자락을 정비해 건축한 5층의 건물과 그 위에 자리 잡은 법당이 있다. 한암이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단풍나무는 죽고 그 옆에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있다.
월정사 적멸보궁은 643년(선덕여왕12) 자장율사(590~658)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 하던 중 지혜의상징인 문수보살을 친견하시고 얻은 석가모니 정골 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은 오대산 비로봉 중앙에 위치하는 중대에 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대산의 오대는 중대 진여원(사자암 및 상원사). 동대 관음암. 남대 지장암. 북대 나한암(미륵암). 서대 미타암(염불암)을 이르며 신라 정신대왕의 태자로 보천과 효명에 의하여 득도하던 장소로 중대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고 문수보살이 상주하시는 곳이다.적멸보궁에는 석가모니의 정골 사리를 모셔 불상이 없으며 보궁 뒤에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대신하고 있다. 보궁의 조선 전기의 다포식 목조건축 양식으로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오래된 사진과 차이가 난다. 사자암의 중창은 태종(1401년)이 권근을 시켜 중건하고 상원사는 세조가 신미대사의 권유로 중창하였으며 문수동자를 만나 괴질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월정사와 달리 6.25때는 고승 한암에 의하여 사찰과 문화재의 전화를 면하였다.
적멸보궁은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영취산의 통도사. 오대산 월정사로 네 곳이었는데 태백산의 정암사는 임진왜란을 피해 통도사의 사리 일부를 사명대사에 의하여 이전 봉안한 것으로 자장율사가 입적을 하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