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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견디는 비결"
(하박국 3장 16-19절)
이번주 새벽 예배 설교 본문은
느헤미야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뿌리인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민족의 아픔을 듣고
슬퍼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부탁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의 눈 앞에는 불타버린 성문과
무너진 성벽만이 남아있었습니다.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죠.
이런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는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과 함께 성벽 재건을
실행합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힘을 보탰습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고
있던 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사마리아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지역 유지인 산발랏과 도비야가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성벽이 재건되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와
겁을 주었습니다.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거라면서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당장이라도 쳐들어가서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예전에 해드렸던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어느 날 사탄이 자신의 사업을
그만두고자 하여
그동안 사용했던 모든 연장들을
경매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크고 화려한 양탄자 위에
인간들을 미혹하고, 망하게 하고,
나약하게 만들면서 타락으로 이끌던
도구들을 진열해 놓았습니다.
그중 눈에 띄게 반짝거리는 커다란
쐐기(도끼의 머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저것은 무엇이며
어떨 때 쓰는 건가요?”
사탄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도구는 제가 가장 아끼는 것이며,
가장 많이 사용한 것입니다.
저것의 이름은 ‘절망’입니다.
아무리 뜨겁게 은혜를 받았던 사람도,
저 쐐기 하나만 마음에 박아버리면
이내 낙심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스스로 아무런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우리의 마음에도 절망이라는
쐐기가 박힌 분 계십니까?
‘도저히 안 될 거야.
이건 희망이 없어.’ 라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적은
없으신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박국 선지자도
절망의 쐐기로 괴로워했던 인물입니다.
‘하박국’이란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껴안는 자’, ‘매달리는 자’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껴안고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때는 북이스라엘이
이미 앗수르 제국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습니다.
이와 함께 신흥국가인 바벨론의 세력은
날로 강해지고 있었죠.
하박국 선지자가 보기엔 악인들이
점점 강성하고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악인들이 잘되는 꼴을
봐야 합니까?”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 16절이 등장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박국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박국 선지자 입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너무 더딘 것처럼 느껴졌죠.
심판의 날을 기다리다가 점점 몸은
지쳐만 갔습니다.
하박국의 분노가
갑작스러운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에게
당하는 걸 보며 답답해했습니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고,
깜깜한 현실의 벽 앞에 초조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 소리만 들릴 뿐,
돌아오는 대답이 들리지 않아
힘들어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상황을 17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함께 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니다.
하박국 3:17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지금 이스라엘은 처참한 상황이었어요.
무화과나무며, 포도나무, 올리브나무며
할 것 없이 열매가 없어요.
밭에 식물이 없어서 굶어야 합니다.
우리에도 양이 없고,
외양간에도 소가 없어요.
이게 우리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상황이라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런 거예요.
아침에 눈 떴는데 카드값이 나갔다고
문자가 와 있어요.
통장 잔고를 봤는데 돈이 없어요.
회사에 가봤더니 임금이 밀렸다는 겁니다.
영끌해서 집도 장만했는데
이자가 계속 올라요.
집 값은 떨어집니다.
사두었던 코인과 주식도
계속 파란줄입니다.
이제 막 시작한 사업은
더 이상 대출이 안 되어
부도가 난 상황이에요.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상황이죠.
입에 풀칠하며 살기도 빡빡한 삶을
살아야 해요.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
이찬수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교회를 위해
40일 금식기도 중에 17일만에
소천하셨습니다.
그 후 가족들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처음에 미국에 도착해서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너무 힘들었다고 해요.
버스를 기다리는데 미국 사람이
자꾸 뭘 물어보더랍니다.
몰라서 입다물고 있었는데
우리 같으면 그냥 갔을텐데
미국 사람들은 대답할 때까지
물어보더랍니다.
겨우 학교에서 도착해서 수업을 듣는데
들리질 않는 거에요.
어느 날 시험을 봤는데 학생들이 모여서
"이번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정답이 뭔지 도대체 모르겠어"라고
떠드는 겁니다.
바로 그때 목사님은 속으로
'너는 정답이 뭔지 모르냐?
나는 문제가 뭔지도 모른다'고 했답니다.
이런 고민을 집에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경제적으로도 너무 어려우니까
닥치는대로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안 해본 일 없이 별의 별을 다했데요.
열심히 일했던 곳에서는 갑자기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며 해고통지를
받기도 했답니다.
앞이 캄캄하고 절망이었죠.
자려고 누우면
"하나님 이대로 영원히 눈뜨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절규가 나왔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이찬수 목사님을 만나주십니다.
목사 아들로 교회만 다녔지,
구원의 확신도 없었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라고 여겨지고
퇴로가 차단되었다고 느껴지는
비참한 상황 가운데 주님이 오셨어요.
그러자 그때부터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전히 눈뜨면 바퀴벌레와 함께
눈 마주쳐야 했어요.
그럼에도 학교에 가면
항상 맨 앞자리에 앉습니다.
지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교수님께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대체 과제를 받아서
밤을 새워 열심히 해냈습니다.
그렇게 일리노이 주립대학을
무사히 졸업했다고 해요.
다음은 이찬수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 바뀌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환경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와 시각이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찬수 목사님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죠.
하지만 상황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중요합니다.
상황보다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박국 선지자는
귀한 롤모델이 됩니다.
우리 함께 본문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박국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아무것도 없는 현실 앞에서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주 여호와 때문이랍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길래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까?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전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부활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걸 믿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큰 위기를 맞습니다.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 바다가 있고,
뒤에는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애굽 군대가 있었습니다.
진퇴양난의 위기 가운데 놓인 이스라엘은
모세를 원망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때 모세는 이런 고백을 하죠.
출애굽기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위기는 기회라고 합니다.
성도에게도 위기는 기회가 맞습니다.
무슨 기회일까요?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보는
기회입니다.
구원을 경험하는 기회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기성 목사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군목 훈련을 받던 중에
다리를 크게 다쳤어요.
절단 수술까지 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수술실에 누워 주님의 이름을 불렀답니다.
그렇게 울다가 하나님을 만났어요.
이전까지는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날 이후로 자신이 죄인임이
깨달아졌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은혜가 믿어진 겁니다.
그렇게 다리 부상의 위기는
영혼 구원의 기회로 변환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찾아온 위기는 무엇인가요?
그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 속에서
구원의 은혜로 쓰임받을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의 고백이 달라집니다.
본문 19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하박국 3:19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미국의 그랜드캐넌 같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내리쬐를 강력한 햇살에
풀 한 포기 자라질 못해요.
그저 흙이 굳어서
딱딱해진 골짜기만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깊고 거대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힘차게 오르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사슴이에요.
이 사슴의 발을 보며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하는 거죠.
“하나님이 나의 발을 사슴처럼 만드신다.
그래서 나를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나의 힘이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힘은 오직 하나님 한분입니다.
세상의 무화과열매, 양, 소가 아닙니다.
돈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인물이 좀 없어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고 소망입니다.
시편 146편 3-5절을
함께 힘있게 읽겠습니다.
시편 146:3-5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탄이 절망의 쐐기를 박을 때
소망을 보여주지 않아요.
소망 따윈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절망에 쓰러지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는 자는
소망을 봅니다.
소망이 무엇인가요?
꿈입니다.
비전입니다.
이런 자는 같은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진서가
갑자기 뛰어왔습니다.
“아빠 형아 큰일 났어요.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는데
자전거가 이상해졌어요.
큰일 났어요.”
얼른 아들에게 갔습니다.
진우가 자전거 앞에서 끙끙대고 있었습니다.
“아빠, 이거 이상한 소리가 나요.”
알고 보니 자전거의 기어가 바뀌면서
‘드르륵’ 소리가 난 거였습니다.
진우가 자전거를 탄 지 얼마 안 되어
처음 겪어보는 일에 당황했던 거죠.
저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기어를
다시 조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가 넘어지면서
뒤틀린 핸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놔 주었죠.
그랬더니 즐겁게 자전거를 타더군요.
설교를 준비하려고 다시 앉았는데
오늘 본문과 연결되어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박국이 두려운 이유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구나.
사람은 누구나 처음 겪는 일로 인해
막연할 때가 있습니다.
첫 시험, 첫 연애, 첫 직장, 첫 아이 등.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나에게 ‘처음’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상황 속에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시험을 도와줬던 선생님,
연애 때 조언을 해준 형님 누나들,
첫 사역을 할 때 든든하게
힘이 되어주었던 선배님들 등이 있죠.
우린 모두 처음을 겪습니다.
그러나 혼자 겪진 않습니다.
누구보다 우리 주님이 우리 곁에
달려오심을 기억하십시오.
제가 우리 아들에게 달려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우리의 문제는
자전거 체인이 바뀌는 것밖에
되지 않을 수 있어요.
우리는 소리만 난다고
두려워하고 있던 건 아닌가요?
하박국도 그랬습니다.
그러다 그가 깨닫습니다.
무엇을 깨닫습니까?
바로 이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지금 힘을 낼 수 없는 절망의 상황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힘이시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답니다.
저는 여기서
‘왜 하나님은 사슴의 발’이라고 했을까
질문해 보았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힘 있는 발은 사슴 발보단
사자나 호랑이 발이 더 어울리지 않나요?
맞습니다.
사자나 호랑이 발은 제 얼굴보다
크거나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땅에서는 강할지라도
가파른 절벽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좁은 바위 사이를 비집고 올라야 할 때
크고 두꺼운 발은
제대로 서 있기 조차 힘들죠.
특히 이스라엘 지형은
바로 이런 바위가 가득한 가파른
산악지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산을
오르는 동물이 바로
‘사슴’임을 보았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깎아지는 절벽이 가득한
바위산 같을 때 하나님은 이에 맞는
사슴 발을 주신다는 거죠.
우리 인생의 문제를 넘을 수 있는
딱 맞는 발은 사자 발이 아니라
사슴 발이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지금 우리의 모습이
비록 작고 평범해 보여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여러분을
그 가정에 두셨을까요?
그 직장에 두셨을까요?
그 학교에 두셨을까요?
다른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자리에 두신 이유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를
외칠 사람이 여러분이라 두신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어떤 문제라도 능히 뛰어넘게 하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함께 외쳐볼까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예전에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지선 자매가 나왔어요.
23살 꽃처럼 아름답던 나이에
오빠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상대편 운전자는 음주 상태였습니다.
그 사고로 얼굴과 온 몸에
극심한 화상을 입고 말았죠.
화상을 입고 처음에 깼을 땐
자신의 얼굴을 보고 절망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수술을 통해 예전과 같이
회복될거란 희망을 품었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수술을 여러 번 해도
자신의 얼굴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슬픔이 밀려왔답니다.
그때 딱 두 갈래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지금 옥상으로 올라갈까?
아니면 교회를 찾아갈까?’
두 갈래 길에서 지선 자매는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울부짖었어요.
“왜 이런 상태로 저를 살리셨나요?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살도록
저를 살려주신 겁니까?
살려 놓았으면 무슨 대책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절 어떻게 하시려고
이렇게 절망의 골짜기로
밀어 넣으신 건가요?”
바로 그때 분명한 하나님의 감동이
밀려왔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나의 사랑하는 딸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과거에 예쁜 대학생 얼굴이던지,
그게 아니라
지금의 흉터 가득한 모습이던지
관계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지선 자매를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이제 너는 세상 어두운 곳에서
빛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될 것이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지선 자매는
완전한 회복을 경험했다고 해요.
그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골짜기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지선 자매가 그날 교회가 아닌
옥상으로 올라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혹시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지선자매처럼
‘옥상으로 올라가고 싶은’ 분들이
계십니까?
절망의 한가운데서 끝가지 견디는 비결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임을
기억하는데 있습니다.
그분이 보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사랑받는 아들이요, 딸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고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