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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찌는 듯한 더위가 조금씩 그 기세가 꺾여 가는 어는 늦여름,
사건 기록을 정리하는 동준에게 호상이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최경장님.. 저도 마라톤 시작했습니다.”
“소장님이 마라톤을 요..?‘
“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 열 바퀴 정도
뛰었습니다.”
“마라톤은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동준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에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제가 시작했죠”
“마라톤은 요. 기타 치는 거 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열심히 하면 저도 풀코스 완주할 수 있겠죠..”
“이왕 시작 하셨다니.. 말리지는 못하겠고.. 열심히 해 보세요..”
동준이 퉁명스럽게 대화를 끝낸다.
다음날 아침, 호상이 일어나자마자 동준에게 전화를 건다.
“야, 신림중학교 운동장으로 가면 되냐?”
“뭐라고?”
“신림중학교 운동장으로 가면 마라톤 할 수 있냐고?”
“진짜 달리기하게?”
“새끼...기다리고 있어, 금방 니네 집으로 갈 께”
호상이 조기축구 반바지를 입고, “원주경찰서 축구동호회”라고
써 있는 반 팔 티셔츠를 입고 동준의 집으로 왔다.
“야, 가자”
“야.. 너는 달리기 복장도 모르냐?.. 그게 모냐.. 축구 하러 가니..?
“히히... 아무렇게나 입으면 되는 거지.. 빨리 가자”
동준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두 사람이 신림중학교 운동장으로 간다.
운동장엔 벌써 여러 명의 회원들이 나와서 몸을 풀고 있다.
회원들 사이에 성경의 모습도 눈에 띄인다.
“안녕하세요”
동준이 먼저 인사를 하자, 모두들 인사를 건네며 동준을 반긴다.
성경은 아무도 모르게 동준에게 살짝 미소를 건넨다.
“오늘 새로 나오신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동준이 호상을 막 소개하려는 찰나에,
“어이구... 이거 소장님 아니십니까... 아이구.. 이거 반갑습니다...”
마라톤 클럽 회장이 먼저 호상을 아는 체 한다.
이어서 농협직원, 면사무소 직원, 학교 선생님까지도 호상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소장님이 어떻게 여길...”
“네, 저도 우리 최경장님 하고 같이 달리기 해 보려구 나왔습니다.
괜찮겠지요..”
“아이구.. 이거 괜찮다 마다요.. 소장님과 같이 달리게 될 줄이야...”
호상을 데리고 나온 동준의 소개도 없이, 그들끼리 알아서 인사를
나눈다.
역시, 계급이 좋긴 좋은 가보다.
동준이 처음 나왔을 때와는 회원들의 반기는 정도가 다르다.
동준이 멋쩍게 서 있는데, 성경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최경장님이 달리기 하자고 소장님 꼬신 거 아니에요...후훗”
성경이 웃으면서 동준의 멋쩍음을 달래준다.
“아..아닙니다... 지가 해 보겠다고 해서..”
“자,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 달리는 맛이 나겠는데요.. 몸들 푸셨으면
출발합시다.”
클럽 회장이 격앙된 목소리로 출발을 지시한다.
날렵하게 생긴 사내가 선두에서 달리고 성경이 중간에, 동준은
후미에서 호상과 함께 달린다.
동준과 달리, 호상은 달리기를 해 본적이 없는 터라 고르지 못한
호흡과 경직된 자세로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달리고 있다
“야, 너는 기타만 잘 치지, 운동엔 젬병이구나.. 달리는 폼이
그게 뭐냐..”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고 동준이 말한다.
“새끼.. 날 때부터 잘하는 놈 있냐.. 나도 기타 첨 배울 땐 우리형이
가야금 타냐고 했었다.”
호상도 작은 소리고 대꾸한다.
“마.. 허리는 세우고 어깨에 힘을 빼, 그리고 팔은 자연스럽게 흔들고,
호흡은 발걸음에 맞춰서 ..하, 하, 흐, 흐,... 두 번 들이쉬고,
두 번 내 뱉고.. 알았지?”
“이렇게...?”
호상은 동준이 일러준 대로 달려보지만,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동준이 호상의 옆에서 달리며 자세를 고쳐주고 잔소리를 하는 사이,
동준은 앞서 달리는 성경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나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탄력 있는 둔부와 잘록한 허리, 바람결에
날리는 성경의 머리칼을 바라본다.
한시간 여를 달린 후, 신림중학교 운동장으로 다시 돌아오자 회장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오늘, 새로 파출소장님도 나오시고, 먼저 오신 최경장님 환영회도
없었으니....오늘 점심에 클럽 사람들끼리 회식을 했으면 하는데,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오늘은 음주운전에 걸릴 일이 없겠네요”
누군가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친다.
동준과 클럽 회원들이 신림면에서 제법 이름 있는 가든으로 모였다.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만 해도 제천-원주간을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로 북적거렸던 휴게소다.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오가는 차량이
뜸해지면서 장사가 여의치 않자, 휴게소를 가든으로 개조해 규모를
줄였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삼겹살과 갈비를 구워 놓고 술잔이 오간다. 술잔이 몇 번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클럽 회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에.. 주목... 오늘 이 자리는 처음 나오신 분들을 환영하고, 회원들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입니다. 우리클럽에서는 신입 회원들의 노래를
들어보는 전통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요?.. 네, 지금부텁니다...
누가 만들었냐고요?... 네, 제가 만들었습니다....이의 없으시겠죠?”
클럽회장의 익살에 모두들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돋운다.
“에.. 그럼.. 먼저 파출소장님의 노래를 들어보겠습니다.
정호상 소장님 앞으로 나오세요”
박수소리와 함께 호상이 앞으로 나서며 마이크를 잡는다.
“반갑습니다. 정호상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제가 여러분들과
같이 달릴수 있도록 이 자리까지 저를 이끌어 주신 우리 최경장님은
고교시절에 장거리 육상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분이십니다...
우리최경장님이 학교 운동장을 뺑뺑이 돌며 달리기 할때, 저는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만 보았었지요... 그리고, 기타를 쳤습니다..
여기에 기타가 있을 리는 만무하겠지만...옛날을 생각하며,
그 시절 노래를 한 번 불러 보겠습니다.”
호상이 동준보다 먼저 소개를 받아, 미안한 마음에 동준을 한번
띄워 준 후, 노래를 막 시작하려는데, 가든 사장이 통기타를 들고 온다.
“이거 우리 아들이 치다가 군대갈 때 놓고 간 건데... 줄이나 맞을라나
모르겠네요”
동준이 가든 사장이 건네주는 기타를 받아 몇 번 튕겨 보고는
“사장님.. 좋은데요”라며 흡족해 한다.
호상이 의자에 앉아 기타 줄의 튜닝(tunning)을 시작한다.
모두가 호상의 기타솜씨를 기대하며 숨을 죽이고 기다린다.
“..띵.. 띵.. 띠딩.. 띵...”
호상이 익숙한 솜씨로 기타줄의 음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동준은 호상의 노래가 끝나고, 동준에게까지 노래 순서가
돌아오지 않을까 내심 불안해 한다.
동준도 아주 못하는 노래는 아니지만, 반주도 없이 생으로 하는
노래는 부답스럽다. 더구나 노래를 너무나 잘하는 호상의 뒤에서
부르는 노래는 더욱 부담스럽다.
불안한 마음에 목이 타들어간다. 물컵에 물을 따라 몇 잔을 들이킨다.
이윽고, 튜닝을 끝낸 호상이 연주를 시작한다.
“띵..띵..띠..띠딩.. 띵띵...”
스콜피온스의 “holiday“.....
호상의 가늘고 긴 손끝에서 스콜피온스의 holiday가 감미롭게
흘러나온다.
어쿠스틱 기타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고 맑은 소리..
아르페지오 주법으로, 스콜피온스의 음악을 단 한 음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원음에 가까운 솜씨로 연주를 한다.
감미롭게... 애간장을 녹이며, 기타줄이 튕겨진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let me take you fa~r away..... you'like a ho~li~day...."
호상의 맑고 섬세한 목소리가 맑고 애절한 기타선율과 함께 흐른다.
맑고 섬세한 호상의 목소리와 감미롭고 애절한 기타의 선율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그 소리는 꿈속에서 천상의 소리를 듣는 듯 하다.
그 선율은 때로는 끊어질 듯, 쓰러질듯 연약한 아르페지오로...
때로는 폭풍과도 같은 강력한 스트록크로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인다.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하고, 호상의 연주와 노래에 심취해 있다.
호상의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동준은 물 컵을 집는 척 하면서 성경을
훔쳐본다.
성경은 호상의 기타와 노래에 완전히 빠져든 듯 동준의 시선도
알아채지 못한다.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호상이 만들어 내는 선율에 완전히
녹아 내렸다.
이윽고 호상의 선율이 멈추었다.
호상의 마지막 손가락이 기타 줄을 튕기고, 기타를 내려놓을 때까지
어느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호상이 기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 비로소 모두들 꿈에서
깨어난 듯 요란한 박수가 터져 나온다..
“와... 소장님...대단하시네요... 도둑놈은 안 잡고, 맨날 기타만
쳤어요.. 와...정말 대단하시네요..”
모두들 입을 모아 감탄사를 연발한다.
호상이 간단히 답례를 하고 자리에 앉은 후에도 감탄사가 계속
이어진다.
클럽 회장이 일어서며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
“아..., 요즘 경찰은 멋진 순서대로 뽑나 봅니다. 소장님이 이렇게
멋진 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멋진 분이 아직
총각이라니... 저나 여러분들은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클럽 회상의 익살에 다시 한번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쏟아진다
“다음은 우리 클럽의 써브쓰리 주자... 최경장님이십니다.”
호상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에 흥분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동준에게 박수를 보낸다.
동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마이크를 이어받는다.
동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소장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저는 달리기를 하느라, 기타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감히, 우리 소장님 만큼은 안되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동준이 말을 끝내자 우렁찬 박수가 쏟아진다.
그 박수들 사이로, 기대에 찬 성경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동준이 목청을 가다듬고 반주도 없이 노래를 시작한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 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 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동준이 “청춘”을 부른다.
동준의 노래가 계속될수록, 사람들의 분위기가 산만해 지기 시작한다.
애절하게 들려야할 이 노래가 군가처럼, 애국가처럼 아무런 맛도 없이
건조하게 들린다.
건조하다 못해 씩씩하기까지 하다.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의 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동준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진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성경의 모습도 보이고,
말없이 동준을 바라보는 호상의 얼굴도 보인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얼른 노래가 끝나기를 바랬지만, 짧다고 생각되던 이 노래가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동준은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노래를 끝내고, 마이크를 내려놓고
도망치듯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호상이 노래를 끝냈을 때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호상이 먼저 박수를 친다.
이어서 성경도 박수를 치고, 클럽 회장이 박수를 치니 모두가
마지못해 박수를 친다.
동준은 그 박수소리 조차 귀에 들리지 않는다.
캄캄하고 아득하던 눈이 부옇게 개어 오는 가 싶더니 동준을 바라보는
성경의 눈빛이 보인다.
애써 미소를 짓고 있지만, 애처로운 성경의 그 순간의 눈빛을 동준은
놓치지 않았다.
그 눈빛을 참을 수 없다.
성경의 얼굴에서 그런 애처로운 표정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얼른 고개를 돌려 술잔을 찾는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클럽회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역시, 하느님은 너무나 공평하십니다... 안 그렇습니까...여러분?”
클럽 회장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우스개 소리를 해 보지만,
아무도 그 말에 웃지 않는다.
그 이후로, 클럽 회장을 비롯해 몇 명의 회원들이 노래를 불렀지만,
그들의 노래는 동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동준은 호상이 따라주는
술잔을 연신 비울 뿐이다.
성경의 그 애처로운 눈빛 그 눈빛을 지워버리고 싶다.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지워버리고 싶다.
첫댓글 쉬지않고 단숨에 10편을 모두 읽었네요 얼마나 오랫만에 읽어보는 소설이던가! 그것도 마라톤 이라니 왠지 더 정감이느껴지네요! 앞으로 동준과 성경의 사랑이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기대하며 왜하필이면 찢어진 운동화일까 궁금?시삽 빨리 다음편 보내주오...사랑이 깨졌다는것인가? 동준의 운동화가 찢어져서 성경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