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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애와 진리의 입맞춤 (시2-85)
2026년 4월 13일 (월요일)
찬양 : 오직 예수 뿐이네
본문 : 시85:1-13절
☞https://youtu.be/V4BPU6gQkD0?si=O2EcdZbFP63xqcD_
거룩한 주일을 보내고 또 맞이하는 한 주간이다. 하나하나를 제자리 잡아 전반전 사역을 마무리하고 내려가야 하기에 마음은 바쁘다. 또 후반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주님께 물으며 주님의 인도함을 따라 순종된 삶으로 나가야 한다.
요즘 나의 키워드는 순종이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순종되어 가려고 몸부림을 친다.
전반전 달려온 길들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마무리하는 일에 내 생각을 내려놓고 겸손히 기다린다.
그 어떤 것이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만 가는 순종이 되기를 기도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 시편 85편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로 추정된다.
조상들이 꿈꾸던 귀환은 이루어졌으나(1-3절), 막상 돌아온 조국은 폐허가 되었고
경제적 기근과 영적 침체가 가득한 상황(4-7절)에서 부르는 호소의 시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1절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여기 ‘은혜를 베풀다’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다시 기쁨으로 용납하셨다는 의미다. 그래서 3절에서는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선언한다.
분명 포로에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다시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현실은 '희망 고문'이었다.
"돌아오게 하셨으면서(1절), 왜 여전히 우리는 배가 고픈가?"라는 이 처절한 모순,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이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그러나 이들은 이 한숨에 절망이 아닌 소망을 담아 이렇게 외친다. 7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여기서 시인은 헷세드 즉 하나님의 언약적 실실함을 보여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비록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주님이 맺으신 그 약속을 붙들고 부르짖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반응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주의 구원>을 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표현된 주의 구원은 영혼의 구원만을 뜻하지 않는 단어다. 좁은 공간에서 넓은 곳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압박과 곤경으로부터 실질적인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인적인 구원의 모습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구원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해방을 선언하신 것이 그저 법적으로만 선포된 해방이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이 실행된 것으로, 전인적인 구원임을 믿고 이렇게 외치며 놀라운 환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10-13절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메시지 성경으로 이 부분을 다시 묵상한다.
<사랑과 진실이 거리에서 만나고 정의로운 삶과 온전한 삶이 얼싸안고 입 맞추네. 진실이 땅에서 파릇파릇 싹트고 정의가 하늘에서 쏟아지네! 그렇다. 하나님께서 선함과 아름다움을 내리시니 우리 땅이 넉넉함과 축복으로 응답하네. 정의로운 삶이 주님 앞을 걸어나가며 그분 가시는 길을 깨끗게 하리라.>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묵상의 재료를 발견한다.
바로 ‘주의 구원이 무엇인가?’이다.
죄는 우리를 자기중심성이라는 좁은 감옥에 가두지만,
주의 구원(Yesha)은 우리를 타자와 세상을 품는 넓은 평원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죄는 끊임없이 우리를 상처의 언저리에서 맴돌며 살게 한다.
해방이 주어져도 여전히 불안하며, 두려움에 주저앉도록 우리를 밀어붙인다.
아무리 해도 안될 것 같아 포기와 좌절의 언덕에 멈추게 한다.
나에게 지금의 라마나욧선교회는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다.
이제 다음의 리더를 세웠지만, 그 무엇도 생각처럼 되어지지 않는 상황들이다.
분명한 사실은 ‘진리가 없는 자비는 방임이고, 자비가 없는 진리는 폭력이다.’
그런데 내 힘으론 방임이 되고, 폭력이 되는 악순환만을 자초할 뿐이다.
그러나 주의 구원은 우리를 그 상처를 넘어 아니 상처가 도리어 세상을 품는 거룩한 통로가 되게 한다. 이 놀라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묵상하게 된다.
나의 전반전의 처참한 실수와 상처들에 주저앉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주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의 구원을 통해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수 없는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세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아닌가?
세상의 힘으로는 인애와 진리가 만날 수 없다. 의와 화평은 서로 등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의 구원은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어 이 놀라운 진리와 사랑이 만나고, 넉넉함과 정의로움이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포로에서 귀환하여 그 막막한 세상에서 불안과 두려움, 초조함과 소란함의 언덕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이 놀라운 시편을 외친 고라의 고백이 큰 울림을 가지고 들려진다. 그리고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내 영혼에 퍼져간다.
라마나욧선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 드리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방임이 되고 폭력이 되어 깨어진다면
그야말로 부끄러움에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주의 인자와 주의 구원을 고백한 고라의 시가 오늘 내 고백이 되는 것이다.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주의 인자를 베푸소서.
그리고 주의 구원을 주소서. 간절히 외친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처절한 실패의 자리에 선 자에게도 주의 인자와 주의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이 계셔서 오늘도 믿음의 눈을 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주여, 오늘 하루도 오직 주의 인자와 주의 구원을 구합니다.
한줄 묵상 :
<구원이란 나의 실수라는 좁은 감옥을 부수고,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드넓은 평원으로 나를 옮겨놓으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적용 질문 :
1. 지금 내 삶과 사역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여전히 배고픈’ 희망 고문의 현장은 어디입니까?
2. 사역의 전반전을 갈무리하며, 내가 누군가에게 ‘진리 없는 자비(방임)’나 ‘자비 없는 진리(폭력)’를 행하고 있지는 않나요?
3. ‘주의 구원’이 나를 좁은 상처의 감옥에서 넓은 평원으로 옮기실 것을 믿는다면, 오늘 내가 겸손히 내려놓아야 할 ‘내 생각의 껍데기’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