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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0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사도 22,30; 23,6-11
복 음 : 요한 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 프로야구 선수인 유격수 라파엘 퍼칼이 FA 시장에 나오자
많은 구단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라파엘 퍼칼은 어떤 구단과 계약을 했을까요?
돈을 많이 제시한 구단이 아니었습니다.
집이나 자동차 등의 편의 시설을 제공하는 구단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조건을 제시했던 LA다저스 구단이 선택되었습니다.
퍼칼의 고향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소방차 한 대를 보내주겠다고 구단주가 제안한 것입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가난한 마을이었던 퍼칼의 고향에서는
소방차가 없어서 불이 났을 때 마을 전체에 큰 피해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늘 퍼칼의 짐이었는데 이를 구단주가 해결할 수 있는 제안을 한 것이지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줄 때 상대는 비로소 변화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알아주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안아주십니다.
비록 돈도 안 주시고 높은 지위를 허락해 주시지도 않지만,
사랑을 통해 당신과 하나를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으며, 큰 기쁨과 행복을 갖게 됩니다.
문제는 이 주님의 사랑을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돈이 좋고 물질이 좋다면서 세상의 기준에서 높고 큰 것만을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믿는 이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치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충실히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알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믿는 이들이 하나를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알아야 한다고만 외칠 것이 아니라
(물론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워 두고 계실 정도로 모든 것을 당연히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주님의 뜻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나’를 벗어나, ‘우리’에 집중할 때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보면 ‘나’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신 ‘우리’만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서 일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만의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 이루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가장 큰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최후만찬 후에 아버지께 드린
“대사제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으로, 믿는 이들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이는 당시의 믿는 이들이 “하나” 되어 있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음을 반증해줍니다.
그렇다면, “하나”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어울려 친하게 지내라는 것을 말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격 좋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를 이루기에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란 “우리”
곧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아들 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가 부자관계로 “하나”를 이루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 1,4)하게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것은 곧 ‘사랑 안’에서의 이루는 ‘믿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하나 됨”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곧 먼저 내적 결과로서 믿는 이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 세상에 하느님을 알리는 외적 결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를 이룬 이에게서는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분 안에서 함께 세워져서 영 안에서 하느님의 거처가 됩니다.”(에페 2,22).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우리도 당신 ‘안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받게 됩니다.’(요한 17,22 참조).
그리하여 세상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고(요한 17,21),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3).
이처럼,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
‘대사제 기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사실 당신께서는 <마태오복음>에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태 12,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누구나 당신이 계신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당신 ‘사랑 안’에, 당신의 진리 안에 ‘함께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행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우리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을 보게 될 것’(요한 17,24 참조)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형제들과 ‘하나’를 이룰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분이 ‘있는 곳’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일치하여 있으면,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주님!
당신과 함께 하나가 되게 하소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을 받아들여 하나 되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을 실현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건네주게 하소서.
똑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작년에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이 사망했습니다.
1년이 지났고, 피의자인 경찰에 대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배심원은 모두 유죄를 판단하였습니다.
유죄 판단의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과 현장을 담아낸 영상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판 결과를 지켜본 바이든 대통령도 인종차별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법정에 출석해서 증언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증언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불법과 불의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1972년에 사이공의 작은 마을이 폭격 당했습니다.
미군은 살상력이 큰 화염 무기 ‘네이팜탄’을 투하했습니다.
당시 9살이던 소녀는 발가벗은 채 절규하며 도로를 뛰었습니다.
이 모습이 AP통신 사진기자 닉 우트의 카메라 앵글에 잡혔습니다.
이 사진 한 장은 베트남 전쟁을 멈추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이 무고한 시민들, 어린이들까지 죽음으로 내몬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런 전쟁은 멈추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녀의 이름은 판티 킴폭이었습니다.
소녀는 신체 30%에 3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닉 우트는 소녀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14개월 동안 17번의 피부 이식 수술 끝에 소녀는 살아남았습니다.
판티 킴푹은 이 사진이 싫었다고 했습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당시의 끔찍했던 고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과거라면, 이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엔 평화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자신의 경험담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있고,
1997년부터는 평화 자선단체를 만들어 전쟁고아를 위한
병원과 학교, 집을 지어주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분노 대신, 용서와 평화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녀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2월 독일 드레스덴에서 인권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미국의 한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인생을 사는 동안 갑자기 화염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저 또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드러낸 증거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순교한 사람을 증거자(martyr)로 부르고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은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martus)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증인'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만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복음의 내용을 보증한다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며(사도 10:41)
스테파노(사도 22:20)와 바울로(사도 22:15)에게 적용되었고
묵시록에서는 예수님께서 증인이라 불립니다(묵시 1:5, 3:14).
그밖에 묵시록(6:9, 12:17, 19:10)에는 예언자의 신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내는데
위험한 시대에 증언을 한 증인들이(묵시 2:13, 11:3, 17:6)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용감하게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구원의 열쇠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누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빵이 되셔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를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눔은 우리가 하나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면
그런 모든 것들도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이 증거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미워하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장엄한 기도입니다.
먼저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드리시고 그다음은 당신 제자들,
그다음은 그 제자들에게 믿음을 이어받은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당신과 아버지, 또 당신과 제자들이 아버지 이름 안에서 하나인 것처럼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도 당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십니다.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뜻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먼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이는 큰 신비를 내포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방울토마토’(2008)는 가난의 참상을 보여주려 노력한 영화입니다.
아버지에게 버려진 6살 손녀딸과 철거 직전인 집에서 함께 사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는 폐지를 주워 손녀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설회사 사장은 폭력배들을 동원해 할아버지의 손수레를 망가뜨리고 집까지 허물어버립니다.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그 사장의 집에 몰래 들어갑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들을 실컷 먹습니다.
그리고 몰래 나오려다 보니 개에게 준 갈비찜이 보입니다.
할아버지는 개밥인 갈비찜을 가져와 손녀에게 주며 먹는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봅니다.
손녀는 갈비찜을 먹으며 너무 맛있어합니다. 그리고 또 그 갈비찜이 먹고 싶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또 몰래 그 못된 사장 집에 들어가
개에게 손을 물려가면서 개밥을 가져와 손녀에게 먹입니다.
그런데 손녀는 계속 몸이 아파져 옵니다.
병원에 갔더니 그냥 영양제만 맞으면 나을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손녀는 더욱 약해지며 계속 갈비찜을 원합니다.
할아버지는 온몸이 물려가며 피를 흘리면서 갈비찜을 훔쳐 와 손녀에게 먹입니다.
그런데 손녀는 이유도 모른 채 갈비찜을 먹으며 죽어갑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실은 그 집의 집사가 사장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개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는 사장이 미워서
개밥에다가 약을 조금씩 타서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그것을 훔쳐서 계속 손녀에게 준 것입니다.
만약 할아버지가 그 사장을 미워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 집에 침입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독이 든 음식을 손녀에게 먹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보자면 할아버지는 가난과 고통의 이유를 그 사장에게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손녀를 사랑하려 하지만
그 사랑 안에는 미움의 독이 묻어 손녀와도 계속 관계가 멀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을 미워하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 사랑 밖에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랑의 방은 하느님 울타리 안입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는 사랑의 법을 지키는 사람만 머물 수 있습니다.
남편을 미워하면서 자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미 사랑을 공급받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이지만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어떤 사랑의 열매도 자녀에게 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결국엔 자녀와의 관계도 좋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신부님을 미워하면서 성당 소공동체 사람들과는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점점 멀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교회 밖에 머물며 교회 안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미운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1시간이고 10시간이고 그리스도께 붙어있으며 사랑을 청해야 합니다.
그런 후 미운 마음이 사라졌을 때 누군가를 만나십시오.
그전에는 누구를 만나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고 해도
그것이 그 사람과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폼페이의 수도관을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폼페이는 수준 높은 상수도 시설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다 단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수도관이 납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납중독에 걸려 모두 죽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사랑과 관계에서 옵니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관계가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그 행복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채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과도 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에게서 미움의 납이 내가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빨리 그 미움을 없애야 합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기도 안에서 나를 봉헌하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 살게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바로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계획이 드러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요한 17,20)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통해 주님의 길을 걷게 될 모든 이들,
곧 우리들과 미래 신앙의 후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온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품고 계십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요한 17,23)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홀로 오시지 않고 성부, 성령과 함께 오시어 거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받아들인 이들은 모두 성삼위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니,
저마다의 시대와 민족, 문화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인 이들은 가히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신 하느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모든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는 사랑과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그 사랑으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이 하나의 사랑이 퍼져나간 자리에 믿음이 자라나고
우리는 시대와 민족을 넘나들며 하나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특정 지역, 특정 민족에게만 향하는 편협하고 폐쇄적인 '선호'가 아니라
'보편적 사랑'이 탄생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시작된 그 사랑은 그래서 하나이고 완전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사명이 드러납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사도 23,6)
수석 사제들, 최고 의회 의원들을 향한 사도의 외침은 거센 논쟁을 촉발시킵니다.
그는 유다인 종교 기득권자들이 적대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하기보다
그분을 통해 인류에게 주어진 보편적 희망과 사랑을 선포하지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 23,11)
최고 의회와의 호된 만남이 있던 그날 밤 주님께서 친히 바오로 앞에 나타나셔서 이르십니다.
주님은 지금 바오로에게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잘 아십니다.
사도 바오로의 증언은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의 담장을 넘어
온 인류가 알아들을 보편적인 사랑의 언어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바오로는 총독에게 호송되고 판결이 미뤄지다가
결국 황제에게 항소하는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가게 되지요.
이 일련의 과정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될 제자의 제자의 제자...
그렇게 우리에게까지 이어질 신앙의 계보로 엮일 겁니다.
온 인류는 한 민족, 한 문화에 갇힌 신앙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을 향하는 보편적 사랑으로 초대되어
한 하느님의 자녀, 곧 형제자매로 서로 연결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은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듯 우리도 하나 되길 바라시지요.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지요.
한 분이신 주님을 모신 우리는 아무리 삶의 조건이 달라도 하나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안에 하나가 된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사랑으로 구원되었습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송영진 모세 신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0-21)
1)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이 말씀을 좁은 뜻으로 생각하면, ‘이들’은 사도들이고,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은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신앙을 갖게 된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이들’은 이미 신앙인이 되어 있는 사람들로,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은 신앙인들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새로 신앙인이 될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8,19-20).
‘모든 민족들’, 즉 ‘모든 사람’이 복음 선포의 대상이고,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미 신앙인이 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실상 모두 다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2)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말씀에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와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로 합해서 생각할 수도 있는 기도입니다.
두 기도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 ‘안에서’(함께) 살기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일,
즉 사람들이 갖춰야 할 자격 조건이 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됨으로써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두 기도를 하나로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기도는,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함께 살게 해 달라는 기도로 해석됩니다.
(“그들이 모두 우리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 살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와 예수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 아버지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그곳에서는
당연히 사람들끼리도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3)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일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치, 사람과 자연 사이의 일치를 모두 깨뜨린 일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난 일은(창세 3,23)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일치가 깨진 것을 상징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와에게 하신 다음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치가 깨진 것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다음 말씀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일치가 깨진 것을 나타냅니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창세 3,17)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는 깨져버린 그 일치들이 모두 회복되어 있는 나라입니다(묵시 22,1-5).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하려고,
즉 죄로 인해 깨져버린 일치를 모두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4)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이 말씀은, 모든 일치의 회복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모든 일치가 회복되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먼저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분이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고,
죄로 인해 깨져버린 모든 일치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때에 하느님과의 일치가 회복됩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일치가 회복됩니다.
<‘믿음’은 ‘사랑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랑 실천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야고 2,17).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 실천’을 해야만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는 일치도 없습니다.
어떤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서 사람들이 모이고,
모인 사람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는 일이 많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 안에서 생기는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금방 다시 흩어져 버립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여기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만”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라는 뜻입니다.
뜻에 따라서 예수님 말씀을 풀이하면,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그래서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집에서 저와 함께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한다는 뜻이고,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고, 동시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
즉 우리 자신에게도 큰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