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이유궁전』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 가운데 하나인 베르사유는 루이 14세의 질투심 때문에 지어졌다.
루이 14세가 어느날, 재무 대신 푸케의 파티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파티가 열린 푸케의 집이 너무나도 크고 화려했다.
프랑스 궁전인 루브르보다 훨씬 사치스러웠다
루이 14세의 심기가 매우 불편; 결국 루이 14세는 푸케를 처벌했다. 푸케의 집을 지었던
건축가를 불러 파리 인근에 엄청난 궁전을 짓게 된다.
이 궁전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다.
실제로 절대주의는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가장 잘 실현되었다.
정치에 관한 한 마지막 결정권은 베르사유 궁전에 있었고, 귀족과 의회는 모든 권력을 박탈당했다.
루이 14세는 각 지방의 영주들을 불러 이 궁전 안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당시 이 궁전에는 약 천 명의 귀족들과
4천여 명의 궁신들이 살았다.
[루이 14세]
1638년 생제르맹앙레에서 루이 13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이 13세가 1643년에 사망했을 때 루이 14세는 겨우 5살이었다.
루이 14세(프랑스어: Louis XIV,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는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라[1]의 군주이다.
본명은 루이 디외도네(프랑스어: Louis-Dieudonné)이고, 공식 칭호는 루이 드 프랑스-나바라(프랑스어: Louis de France et de Navarre)다.
그는 다섯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지만, 그러나 아직 정치를 개인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 추기경 쥘 마자랭이 1661년 죽을때까지 사실상 맡겼다.
루이는 1715년 9월에 죽을때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4일 전이었다. 그의 치세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이었는데,
유럽의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루이 14세가 그때까지 살던 파리의 루블 궁전을 버리고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옮긴 이유도 루부르 궁전이 오물로 뒤덮여
더 이상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왕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화장실 외에는 베르사이유 궁전 안에
화장실이라고 불릴 만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화려한 무도회가 열렸으니
이들은 부득이 정원의 꽃이나 잔디를 밟고 용무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궁중 무도회에 초대된 귀족들은 휴대용 변기를 지참하여 생리적인 응급 대비를 하기도 했으나
오물을 비우는 일은 하인들의 몫이었다. 이들이 오물을 버리는 곳 역시 으슥한 정원 구석이었고
오물로 덮힌 궁전의 실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도회에 참석할 때 여성들은 커다란 모피 주머니에 휴대용 그릇을 넣고 다녔다
<출처:위키백과>
섭정을 맡은 모후 안 도트리슈는 국사 운영을 로마 가톨릭 추기경인 마자랭에게 맡겼다. 뛰어난 협상가였던
마자랭 추기경은 전임자인 리슐리외 추기경과 동일한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절대 군주제를 성립시켰다.
귀족들에게 눌렸었던 왕의 권력이 마자랭 추기경의 지도로 강해진 것이다.
마자랭 추기경은 당시 왕자였던 루이 14세의 정치수업을 지도하였는데,
덕분에 1661년 마자랭이 죽자 22살의 어른이 된 루이 14세는 재상과 같이 프랑스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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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는 세간에는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이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루이의 치세 상당부분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힘과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3번의 주요 전쟁─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2번의 작은 분쟁─상속 전쟁, 재결합 전쟁─을 치렀다.
루이 14세는 그의 전임자가 만든 중앙 집권화의 일을 계속 추진하여 프랑스의 지방에 끝까지 남아 있던
봉건제도의 잔재를 청소하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그의 성과를 방해한것은 지방의 힘있는 귀족들로 많은 이들이 반란으로 일어났고,
그들 소수를 가리켜 프롱드라고 불리었다. 루이는 이들 힘있는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게 하면서 서서히 약화시켰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힘을 제어했다.
또한 절대 군주의 자리를 다져 “짐이 곧 국가니라(L'État, c'est moi)”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학계에서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나 볼테르가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증축과 사치스러운 궁정생활 그리고 말년의 계속된 패전으로 이 막대한 부는 모두 사라지며
루이 15세 때에는 몇차례의 국가부도나 그에 버금가는 경제위기 등을 겪는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착공한 지 20년 후인 1682년, 아직 완공 전이었으나
루이 14세는 왕궁과 정부를 베르사유로 모두 옮겼으며 그때부터 베르사유 궁전에는 프랑스의 왕족들 뿐만 아니라
대귀족들 전부가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고, 왕과 귀족들의 궁정 생활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민중들의 희생과 부담으로 구축되었다.
민중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위한 부역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수탈당했으며,
사고로 죽은 자들은 보상과 사과는 커녕, 시체가 암매장되었다.
그럼에도 루이 14세는 정사를 돌보는 한편, 사냥과 기마 경기를 개최하였고,
트럼프와 당구 그리고 춤을 즐겼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대정원-그랑띠아농(100ha:300만평)】
1715년, 76살의 늙은이가 된 루이 14세는 72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
경제를 파탄시킨 자신의 정치행적에 대해 자각과 후회를 가져 임종을 맞기 직전에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라는 간곡한 유언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77세. 루이 1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들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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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방》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진 방으로 전체길이 73m, 나비 10.4m, 높이 13m로 정원을 향하여 17개의 창문이 있으며, 반대편 벽에는 17개의 대형 거울이 배열되어 있으며 궁전 중앙 본관의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북쪽으로 전쟁의 방 남쪽으로 평화의 방이 자리잡고 있으며 왕족의 결혼식, 외국사신의 접견 등을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장이 되었고
실제로 앞서 언급한 대로 이곳에서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국왕인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베르사이유 궁전 2층 거울의방은 가장 유명한 방으로 찬란한 크리스탈샹들리에와
천정, 벽화의 실제 명작들은 화려하고 눈부시다.
거울의방의 스테인레스 냄비를 소재로한 현대작가 조각한 하이힐이다.
조아나 바스콘셀로스 / 표현주의 예술가
"앙투아네트뿐 아니라 이 곳에서 살았던 모든 여성과 아이들을 떠올리며 만들었습니다."
1711년 4월, 도팽 루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부르고뉴 공작이 새 도팽이 되었다.
루이 14세와 펠리페 5세는 불안하긴 했지만, 부르고뉴 공작의 두 아들,
즉 2남(男)인 브르타뉴 공작 루이와 3남(男)으로 훗날의 루이 15세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상황이 급변하는데, 마리 아델라이드가 천연두(또는 홍역)에 걸려 1712년 2월 12일에 세상을 떠나자 늙은 왕은 망연자실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병을 앓는 동안 줄곧 그녀의 옆을 지켰으며, 아내가 죽자 비탄에 잠겼다.
그리고 주간이 끝나기 전에 그 역시 아내와 같은 병에 걸렸다.
부르고뉴 공이 죽은 지 일주일 만에 두 아들 또한 감염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맏이인 브르타뉴 공작 루이는 계속적으로 사혈 치료를 하며 애를 썼지만 결국 1712년 3월 8일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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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망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1714년에는 그랑 도팽의 막내아들 베리 공작이 사냥하던 도중에
사고를 당해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리하여 루이 14세는 겨우 3년 만에 연달아 네 명의 후계자를 잃어버렸다. 이제 왕조의 운명과 유럽의 평화는 네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의 생존 여부에 달렸었다.
<출처 : 위키백과>
첫댓글 나이들어 가며 역사나 세계사가 더욱 재밌어요!.
유럽여행 사진들 다시또 가보고 싶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잘보고갑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베르시이유궁전
사진보니 다시가보고픈 곳입니다
프랑스는 모든건물이 예술이었던것 같아요
잘보고갑니다
마저 그들도 인간이니..칠투와 시기가 없었겠어~ 나라의 운명도 실은 그런 사소한것에서 좌우되기도하지...^*^
멋진곳을 구경시켜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