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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면서부터 못 걷는 병자 3:1~5
1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치유받음 3:6~10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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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나면서부터 못 걷는 이가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합니다. 베드로가 은금은 없지만 자신에게 있는 것을 준다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며 그를 일으킵니다. 그가 뛰고 걸으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심히 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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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면서부터 못 걷는 병자 3:1~5
성령 강림 후 사도들을 통해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단락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번째 치유 이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사도들에게 계승됨을 보여 줍니다. 제구시, 즉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병자를 만납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2절)라는 표현은 그의 병이 치료될 수 없는 절망적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구걸하거늘’(3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완료형으로, 그가 계속 구걸했음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보라.”라며 그의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병자는 일시적인 물질을 바랐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전인적이고도 영구적인 필요를 채워 주려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베드로는 구걸하는 병자를 주목하며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나요?
지금 내가 구하는 것은 일시적인 필요인가요, 영구적인 필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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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치유받음 3:6~10
베드로에게는 구걸하는 병자가 바라는 ‘은과 금’이 없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베드로의 말은 은금으로 장식된 성전 미문(‘아름다운 문’이라는 뜻)과 대조됩니다. 베드로가 가진 것은 가장 귀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라고 선포하며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과 권세에 대한 확신으로 선포하니,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던 병자가 걷고 뜁니다. 의사 누가는 치유받은 병자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 병자는 오랫동안 성전 미문에서 구걸해 왔습니다. 옛 성전은 그를 고칠 수 없었지만, 새 성전이신 예수님은 전인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그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 더 깊은 묵상
베드로는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무엇이라고 외쳤나요?
예수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확신하고 선포하며 기도할 일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고, 한 영혼이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안에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은과 금이 없음에 좌절했던 저의 영적 상태를 고쳐 주소서. 십자가와 부활로 제 안에 심어 주신 예수님 이름의 권능으로 연약한 자를 세우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94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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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제자들을 통해 역사한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성령을 보내셨음을 입증하는 사건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구원자이자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권세로만 구원을 얻고 진정한 회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도 은과 금을 구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 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하나님(예수님, 성령님) >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하여 주신 하나님
사람들의 필요를 더 잘 알고 계시고, 그들의 필요에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은과 금이 우선되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선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아서 구걸을 하던 못 걷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은과 금은 내게 없을지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서쪽 높은산깊은골 마을의 사람들에게 잘 전할 수 있게 될 날이 속히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바르게 전할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주님과 더 풍성한 나눔과 교제를 나누면서, 주님을 풍성히 경험할 수 있도록 하자
오직 주님의 이름만이 우선되는 삶을 살아가고, 섬김과 나눔을 통해 주님만을 높이고 찬양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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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은 치유의 능력입니다” 권준 목사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오후 3시) 기도시간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그 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다가와 구걸을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못 걷는 자에게 다가갑니다.
베드로는 영혼 구원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자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목해서 못 걷는 자를 봅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과 나를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을 절망의 눈에서 소망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베드로는 구걸하는 자에게 내게 은과 금이 없으나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못 걷는 자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하고 뛰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격에 넘쳐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걷고 뛰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사람은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만나면 구원의 날이 되고 은혜의 날이 됩니다.
우리와 이웃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백성이 못 걷는 자가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고 심히 놀랍게 여깁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많은 사람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교회와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 세상과 열방이 변화됩니다.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악한 세력과 절망이 떠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기적이 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기적을 체험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내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나를 살리시고 예배하는 자로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시선과 열정을 가지고 살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옵소서!
이 시간에도 힘들고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분들을 치유하여 주시고 새롭게 하옵소서!
일어나 걷고 뛰고 찬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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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과 금으로 넘치는 삶을 원합니다. 교회들은 화려한 예배당 건물과 세련된 예배 형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금이나 은 같은 재산은 없을지라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늘진 상처를 만져 줄 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세상은 성도들이 전하는 말을 믿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구걸하며, 사랑을 구걸하며, 명예를 구걸하며, 건강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그들이 구걸하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열심을 부립니다.
그래서 고객 중심의 교회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심리 치료를 하며, 긍정적 사고로 전하며, 건강한 재정 관리에 대하여 가르치길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고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잠시 기분 좋게 하는 것이 교회의 업무인 것처럼 기독교의 이름으로 가장한 다양한 사이비 종교들일 뿐입니다”
과연 우리는 은과 금을 세상에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사렛 예수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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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이기게 하고 회개를 가능케 했던 성령의 권능은 평소에 바라보지 못했던 저는 자를 긍휼히 여기게 하고 그를 온전한 삶으로 일으키는 회복의 능력으로 계속 새로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하루 먹을 양식의 금전의 구걸로 만족하려 했던 앉은뱅이가 베드로의 손을 잡고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예배를 드리는 겉으로만 온전해 보이는 이들처럼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변화된 일은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져 성령의 권능으로 상상할 수 없었던 기쁜 예배자로 세워지고 거룩한 나라의 백성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날마다 그 불가능한 구원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노래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혼의 저는 자로부터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마태복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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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집이요 미문은 아름다운 문인데, 현실은 거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걷지 못하여 소망 없이 구걸하고 있는 모습을 누가 거룩하다 아름답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더 큰 아이러니는 아무도 이 현실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이름만 있고 권능은 없는데,
성도라는 이름만 있고 거룩하지 않은데, 예배라는 이름만 있고 영광은 없는데, 구원이라는 이름만 있고 기쁨은 없는데,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 그런 것 아니야?
왜 그럴까요? 보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사44:18)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로 보고 깨닫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107:43)
그때 베드로는 그가 일어서서 걷고 뛰는 것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깨닫았고,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뛰며 찬양하는 예배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선포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3:6~8)
참으로 우리 주의 이름으로 간구하며 선포하면 우리의 교회가 권능 있는 교회 영광 있는 예배가 되어, 성전이 성전답게 미문이 미문답게 되며, 우리의 광야가 무성하게 되어,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우심을 확실히 보게 될 줄 믿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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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 성전 미문에 있는 걸인에게 베드로가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주겠다는 선포입니다. 앉은뱅이 거지는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봅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도들의 손을 바라 본 것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늘 사람들의 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그는 지나가는 사람의 손만 바라보고 산 사람입니다. 거지 근성입니다.
주고 베푸는 것은 없고 받아서 챙기는 습성입니다. 없기는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을 줍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과 일심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안에 계신 주님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임재가 강했는지 그 이름을 선포했을 뿐인데 그런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능력을 행하기 이전에 주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주님을 구하지 않고 능력만 사모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 그렇죠. 이에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임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생의 현장에서 실체화되기를 소망하며, 여태껏 주님의 손을 바라보고 살았다면 이제는 주님 안에 있기만을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임재에 대한 확신은 우리 신앙수준을 가리키는 바로미터이며 믿음의 현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은 그 안에 주님이 계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며, 또한 예수님의 인격으로 자랍니다. 그렇게 사는 자는 비록 이 세상의 삶일지라도 천국의 지평이 넓혀집니다. 그런 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외칠 수 있습니다.
능력은 그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안에 계신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미문의 걸인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선포하듯이, 우리도 그런 권세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후에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가장영적인 것은 가장육적인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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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복음 예수.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던 걸인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고 계속 이렇게 구걸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으니 얼마나 비참하였을까요?
이 땅에서 마지막 육체의 고통을 겪는 모습은 참 안타깝습니다. 혼자 걷는 밤길이 두려워 떠는 모습, 이 땅을 마치고 지옥에 갈 때의 그 모습과 끝없는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그 모습은 얼마나 비참할까요?
그들에게 소망은 잠시 걷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웃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다시 마지막 죽음 앞에 선 고통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가 아니라 영원한 구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부터 오는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복음입니다.
우리의 복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것이 있다고 교만하지도 말고 없다고 좌절하지도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가’입니다. 충만하게 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의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복음인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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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하여 본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들을 보라고 말한다. 뭔가 얻을까 바라보자 베드로가 말한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은 먼저 주목하여 그를 보았다. 관심을 가졌다. 이렇듯 이 땅에서 나는 이들을 주목하여 보아야 한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무엇을 말해주어야 할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한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없는 것과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은 성전에게 구걸하는 그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는 예수님을 나누어준다. 그래서 일어나 걷게 한다.
나에게는 은과 금이 없다. 나는 은과 금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이곳에 은과 금을 나누어 주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나에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어주려고 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을 전하러 왔다.
그렇기에 내가 주님께 구할 것은 은과 금이 아니다. 나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이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내가 나누어주어야 할 것이 내 안에 풍성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 그것을 구해야 한다.
아버지!
제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가 제 안에 더 풍성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제 안에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가 가득 차게 은혜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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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 중심의 잘못된 습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때 그 앞에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도들이 자신에게 돈을 줄줄로 알고 쳐다 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사람은 사도들이 가진 능력을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의 수준에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도들이 행할 일을 알았다면 그는 돈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생각속에 제한 하고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만 바라볼때가 많습니다. 정작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하시지만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장 자기손에 아무것도 들려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화를 내기도 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습관지어져 있는 나 중심의 틀에서 성령의 관점으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관심으로 접근하시는데 우리는 항상 우리의 작은 시야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습관을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그릇된 습관에 매여 더 큰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2. 앉은뱅이를 통한 기적이 주는 교훈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이런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요한복음에 보면 한 소경을 두고 제자들이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누구로 인함인가를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우리의 삶속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 문제는 분명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심으로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많은 소경과 앉은뱅이가 있었지만 이들을 택하신 것은 이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돌릴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분의 기적은 그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임하십니다.
묵상하기
나는 내게 주신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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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치유 사건은 사도들이 행한 기사와 표적(2장 43절)의 살아있는 실례이고, 복음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새롭게 하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6~8절 나면서 걷지 못한 자의 치유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진 ‘첫 번째’ 치유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은금이나 유대교의 성전이 무능하여 할 수 없는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로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동정의 대상이던 그를 동경의 대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세상의 비극은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그 이름의 권세를 믿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비극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절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기도 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향합니다. 본문의 치유 사건은 사도들이 기도하러 가던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누가는 치유의 역사가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누가복음 5장 15,16절). 기도의 결과가 능력 있는 표적과 기사입니다. 능력 있는 삶을 원한다면 규칙적으로 꾸준하게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능력입니다.
2~5절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결에 큰 관심이 있었기에, 성전 미문 곁에서 구걸하는 이 부정한 사람은 늘 관심 밖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를 주목합니다.
단지 자선의 대상이 아닌 구원의 대상으로, 이용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세(6절)가 나타나기 전에, 사도들의 긍휼 어린 ‘시선’이 있었습니다. 주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작은 시선이 큰 기적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시선과 발걸음이 머무는 곳은 어디(누구)입니까?
9,10절 구걸하던 자가 찬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돈 한 푼을 애처롭게 동냥하던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한 사람의 신체와 영혼 모두를 구원한 것입니다.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한다”(이사야 35장 6절)는 예언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놀라 묻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경이로운 역사에 합당한 반응은 경계가 아니라 경외이고, 경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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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문의 앉은뱅이에게 필요한 것(행3:1-10절)
오후 세시의 기도가 가지는 의미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생긴 사건을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제 구시 기도시간은 유대교의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습관 중에 오후 세시에 기도하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고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좋은 습관은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버려야 할 잘못된 습관들은 단호하게 떨쳐 버려야 합니다. 어쨌든 구약의 관습을 따라 기도하러 가는 길목에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리고 행4:22절에 의하면 이 앉은뱅이의 나이가 사십 여세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구걸로 생계를 이어왔을 것입니다. 그에게 자선을 베풀었던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인들이었을 가능성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지 자선만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또한 앉은뱅이는 사십 여세가 되도록 구걸을 하고 있지만 그의 관심은 성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앉은뱅이의 관심은 누가 더 많은 돈을 자신의 구걸함에 넣는가에 있을 뿐입니다.
누가 성전으로 들어가는지 왜 성전으로 오후 세시만 되면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앉은뱅이의 눈에는 기도하러 성전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그저 배부르고 할 일없어서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줄 수 있는 것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빵도 주고 사랑도 주고 현실적인 필요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전부 현실적인 것들이요, 당장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문제는 세상이 정말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즉물적인 것들을 전부인줄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이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앉은뱅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 돈이나 재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그랬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 말은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 말고 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마 과거에도 그 앉은뱅이를 보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 때는 자신들에게 있는 몇 닢의 동전이나 물질로 그 소경의 마음을 달래주고 자신들도 선행을 베풀었다는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해서 다시 그 길을 지날 때 그 앉은뱅이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동안 베풀었던 자선이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현실적인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는 그야말로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다시 그 앉은뱅이를 보게 되었을 때 그의 근본적인 필요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제자들의 시각이 변하고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정말 앉은뱅이에게 필요한 것이 돈이나 재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들이 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재산목록 1호는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러므로 제자들은 앉은뱅이에게 그리스도를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능력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러분!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는 말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필요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그것을 주는 것만이 진정한 도움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현실적인 필요들을 채워줄 돈이나 재물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능력이었습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안정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의 풍요를 잃어버렸습니다. 계몽을 부르짖으며 신을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그 결과는 아주 비참한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서 헤매다가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한 편에서는 모든 것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에게 그것이 있음을 아시고 계십니까? 그들에게 물질적인 필요,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근본적인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평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것은 앉은뱅이가 이 사건으로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에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의 삶
앉은뱅이는 자신이 걷게 된 사실에 놀랐습니다. 성경은 그 일로 인해서 그 앉은뱅이가 그리스도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앉은뱅이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으며 믿게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자신을 치료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이 사건을 성경은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힘을 얻어 걷게 된 앉은뱅이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수도 없이 자선을 베풀면서 위로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 앉은뱅이에게 약간의 자선을 베풀면서 마음으로 만족을 얻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묵상할 것은 이런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 사역이 지금도 계속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바톤을 이어 받은 초대교회 사도들은 교회가 이제 이 땅에 막 시작할 때입니다. 지금은 복음이 편만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치유는 지금도 계속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시대 사역의 본질 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치유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권적인 역사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서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필요하다고 느끼신다면 지금도 죽은 자를 살리실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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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이 교회는 지금 십 년 된 교회도 아니고 몇 년이 지난 교회가 아닙니다. 이 교회는 말 그대로 이제 막 싹이 난 어린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우리의 고향이며 우리의 모델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현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졌던 처음 교회는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자발적인 교회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지금도 우리들의 거울이 됩니다. 저는 이들이 자발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과 온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싶습니다.
의외로 복음에 강한 적대감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칭송 받지 못할 엉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라는 사실을 종종 경험하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첫 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음, 십자가의 복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현상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복음을 들어야 변화되는 것입니다.
둘째 헌신과 희생 없이 교회는 자라고 성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룬 교회에서 여기 120명의 성도들처럼 멀리서 온 사람들을 위해 물건을 통용하고 삶을 나누고 베풀고 섬겨 교회를 이루려는 의지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손님처럼 고상하게 교회를 섬기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교회를 떠나는 자들에 의해 복음은 그 영광의 빛을 잃고 세상 앞에 맛 잃은 소금이 되고 맙니다. 어려움을 견디고 이긴 사람, 헌신과 희생의 맛과 멋을 아는 사람, 그 삶이 주는 기쁨과 감사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루는 교회가 힘이 있고 세상이 보고 싶어 하는 교회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만이 어찌할꼬 하고 찔림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파생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그 말씀 앞에 어찌할꼬 하는 것이 성경 묵상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꾼을 임명하면서 목회자의 마음은 자갈밭이 되고 있습니다.
헌신하고 섬기겠다는 자발적인 일꾼들이 그립고 그리운 계절입니다.
파묵칼레입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그 유명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던 그 비유의 장소입니다. 히에라볼리로 알려져 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물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목화의 성이라는 이름이 파묵칼레의 뜻입니다. 이 석회암들 때문에 생긴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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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제 구시는 오후 세시로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의 경배 시간에 정기적으로 참석을 했습니다. 매일의 기도는 습관입니다. 예수님도 습관을 쫓아 새벽에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운명을 바꾼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생각이 운명을 바꾼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복음에 직면한 양심으로 말미암아 회개에 이르게 된 생각이 믿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박제가 된 믿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생각을 활성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게으르거나 안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부정적이고 죄 된 생각으로 쉽게 끌고가곤 합니다. 이러한 게으르고 악한 성향이 있는 우리의 생각을 어둠 속에 방치하지 않고 밝은 곳에서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환경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우리 자신의 내면을 노출시킬 때 우리의 생각 역시 그 가운데에서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 왕도는 없습니다. 그 누구도 마음만 먹으면 기도가 자연스럽게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기도의 습관을 갖는 것입니다. 습관을 들이는 것은 어렵지만 일단 습관이 들면 그것만큼 편한 것은 없습니다. 새벽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하려고 애쓰면 자신뿐 아니라 보는 사람까지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참석하면 우리의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일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제 작은 신앙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냐고 묻는다면 저는 새벽기도, 아니 정기적인 기도의 습관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새벽기도만큼 기도의 습관을 지속시켜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낮 시간에도 정기적으로 기도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일상의 연속을 깨는 변수들이 자주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새벽은 일상의 흐름과 또한 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의 생각을 구원이라는 운명을 바꾸는 것으로 연계시키는 것은 습관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습관을 가지려는 의도와 열심 마찬가지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열심히 운동하는 습관을 가지면 건강해진다는 믿음 없이 어떻게 운동 습관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초대교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기둥과 같은 인물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을 뿐 아니라 그의 입술의 고백(마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의 기초 위에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입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의 고백, 즉 예수의 주 되심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만 왕의 왕이시며 성자 하나님 이심을 고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베드로의 고백의 입술이 아니라 그 입술을 통하여 선포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에 대해 고백을 했다면, 요한은 교회의 마지막에 대해 선포한 자입니다. 교회의 마지막은 종말이 아니라(비록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지만) 새 에덴으로 입성하는 관문입니다.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새 에덴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상의 천국의 임재입니다. 다만 죄 가운데 있기에 저들의 눈에는 교회가 역으로 귀찮고 가까이 하기 싫은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안의 성도들은 세상 가운데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별이나 심지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딤후 3: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3: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성전 미문에 많은 자들이 지나쳤지만 아무도 성전 미문에 있는 연약한 자(장애인)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더럽고 구걸하는 장애인은 그저 아름다운 미문의 미관을 해치는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의 눈은 그를 주목했습니다. 그 영혼은 바라본 것입니다. 이전의 육신의 눈으로는 그들 역시 지나칠 뻔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눈이 그를 주목하게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할 때 바뀌는 것은 우리의 시선입니다. 전에는 부럽게 바라보았던 물질이 휴지조각처럼 보이고 대신에 가난한 자들의 옷과 그들의 형편에 주목하게 됩니다. 부자들의 고급 외제차는 그냥 스쳐가는 풍경일 뿐입니다. 대신에 하루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피자를 배달하는 청소년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판검사나 의사의 명예보다는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의 연약함을 주목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적 시선을 머무는데 그치게 하지 않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주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이미 주님으로부터 긍휼함을 입은 자들이기에 성령을 통해서 긍휼한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당장 무어라도 주고 싶었지만 그들 역시 가난하였기에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마음에 강력한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를 잡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는 일시적인 만족을 줄 수밖에 없지만, 먹어도 곧 배고픈 것이지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은 은과 금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은 가장 천하고 불명예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오르신 그 분의 이름은 온 세상을 덮고도 나는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낮아지셨기에 어느 누구라도 그 이름으로 영과 육신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별 능력이 없는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들지만, 우리의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며 병든 자을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교만으로 가득 찬 세상의 권세자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군왕, 정복자인 나폴레옹처럼 말을 타고 오지 않으시고 겸손의 나귀를 타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 22:42-46,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어리석인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자신에 대해 다윗이 자신을 향하여 주라고 하신 것에 대해 묻자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께서 다윗의 자손, 즉 육신으로 오신 것은 지극히 낮아지심으로 우리에게 친구로 오시기 위함이며, 다윗이 주라고 부른 것은 겸손의 왕으로 오신 분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7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하여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선포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혈관의 피가 소생되어 힘차게 흐를 것입니다.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이기신, 즉 사망을 이기신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롬 10:13). 오해하지 마십시오.
구원은 실제입니다.
구원의 결국은 천국, 즉 새 에덴에 입성하는 것이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는 순간 우리의 삶에 천국이 임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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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여는 묵상 (행 3:1~10절)
-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중에 늘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봅니다. 그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명하니 그 사람은 곧 일어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니 사람들이 놀랍게 여깁니다.
_ 예수의 능력은 믿고, 소망하는 것입니다(1~5절).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제구 시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중에 미문이라는 성전 문 앞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한 한 사람이 구걸하는 것을 주목하여 봅니다(1~4절a).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믿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입니다. 도움의 손길을 뻗는 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주목’하였습니다. 날마다 그를 보고 지나쳤을 것인데, 오늘은 그를 주목하게 됩니다.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걸인을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보라...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4절b~5절).. 서로 바라보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하늘의 만나를 그리고 앉은뱅이는 육신의 만나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능력과 기적은 믿음을 가지고 소망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시선이 마주할 때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나에게 고정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해 있기만 하면 됩니다.
썩어 없어질 이 땅의 것들에 나의 시선을 고정하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삶이어야 합니다. 당장 눈앞에 넘어야 할 인생의 높은 장애물들이 즐비하게 펼쳐져 있을 지라도 믿고, 소망할 때 그 장애물은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는 장애물이 아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시선과 앉은뱅이의 시선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힘든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그 문제를 대하며 그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까?
_ 예수의 능력은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6~8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6절a).. 은과 금이야 말로 지금 앉은뱅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 순간 앉은뱅이는 실망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은 은과 금을 최고로 여기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맘몬주의 사상이 교회와 성도들과 내 자신을 유혹합니다. 마치 금방이라도 망할 것처럼 내 삶을 조여 옵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진정으로 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을까요? ‘일어나 걸으라’ 였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힘을 가지 자라도 이 앉은뱅이를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참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소개해 주지 못합니다. 삶을 조여 들어오는 상황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7~8절). 앉은뱅이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을 겪습니다. ‘미친X’라며 베드로의 손을 뿌리쳤다면 이런 기적을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놀라운 치유를 경험한 그는 제일 먼저 성전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은혜를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세상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은과 금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입니다.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 또한 그 이름에서 나옵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 가운데 처해 있을지라도 그 이름을 믿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손을 붙잡고 계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진정으로 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환경을 이길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_ 예수의 능력은 믿고, 행동하는 것입니다(9~10절).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앉은뱅이가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심히 놀랍고, 또 놀랍게 여깁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그가 ‘일어나 걷는다’라는 것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그들이 보는 눈앞에서 일어났습니다.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은 단순히 그것을 체험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목격한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치셨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쓰임 받는 도구임을 잊지 말고, 우리는 그 주님의 능력을 믿고, 당당하게 행동으로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일어나 걷게 되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한 앉은뱅이가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쓰이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습니까?
오늘도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믿고, 당당하게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 됨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행 3:1~10절)... 빛이 있으라...
주님,
믿음으로 소망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신뢰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행동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만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를 붙드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해주시는 은혜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연약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담대하고
주님의 은혜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며 진정한 예배자로 설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고,
한 영혼이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안에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은과 금이 없음에 좌절했던 저의 영적 상태를 고쳐 주소서.
십자가와 부활로 제 안에 심어 주신 예수님 이름의 권능으로 연약한 자를 세우게 하소서.
주님, 이제 더는 세상 것에 매여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참된 생명과 도움과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주목하고 전하는 제자된 삶을 살게 하소서.
긍휼의 마음과 사랑으로 도움이 필요한 영혼들이 없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예수님 이름을 의지하며 선포하는 인생을 살아내길 원합니다.
내게 기름 부어주시고 지혜와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불쌍한 마음에 선을 행하는 것을 넘어 그 영혼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은혜의 강가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영광을 올려드리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