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의 지관(止觀)의 상태에서, ⟨또 한 사람의 내⟩가 이탈할 때는, 다시 한번 돌아올 수 있다고 하는 가벼운 마음이니까,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다시 이 현상계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결론이 났을 때는, 육체주(肉體舟), 가족, 재산 등, 현상계의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이 떠나야하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서, 지금은, 일체 마음에 걸림을 갖지 않도록, 언제 실재계로부터 귀환 명령이 오더라도, 응할 수 있는 심경이 되어 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그것은 1971년의 최대의 깨달음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실행하려고 하면, 이것도 상당히 힘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가, 이와 같은 생활을 보내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결점을, 용기를 갖고 수정하고, 팔정도를 실천함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우리들의 수행이라는 것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라 해도, 그 당시의 권력자인 양심없는 악마들의 손에 의해서,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과 같이..... 비록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 해도, 그 죽음의 원인을 만들면, 인류는, 언제라도 무상한 바람에 휘날리고 만다는 것이다. 실재계, 저 세상에서 보면, 죽음은, 이 현상계로부터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실재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낡은 상처투성이의 육체주(肉體舟)를 이 현상계에 방치하는 것뿐으로, 우리들은, 지금의 육체주와 동거하고 있는 새로운 육체주, 즉 우리들의 육안에 보이지 않는 광자체주(光子體舟)를 타고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신체가, 얼마나 광명에 싸여 있는가에 따라서, 자기가 돌아가야 할 장소가 정해지고 마는 것이다. 마음의 광명(光明)도, 자기자신의 일상의 마음과 생활 상태가, 얼마나 올바른 것이었던가' 하는 것으로 광자량에 차이가 생기고, 사후에 가야 할 단계도 또한 거기 비례하여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는 것은, 정도를 깨닫고 실천하지 않는 한 매우 어려운 것이다. 정법을 깨닫지 못하고,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고 생활하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함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면, 어김없이 지옥계로 떨어지고 만다.
말법의 세상으로 되면 마음속의, 법등(法燈)은 꺼지고, 마음이 상실된 시대가 되어, 인간은 물질경제의 노예로 타락하고 말기 때문에, 즉신성불은 아득한 꿈으로 되어 끝날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이라고 하는 생활의 지식이, 자연의 환경을 파괴하고, 스모그는 태양의 빛을 가로막아, 광화학 스모그라는 부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마음을 상실한 문명은 이 지구상에, 혼란한 아수라계를 만들어 내어, 신의 자식끼리의 자비, 사랑을 잊고, 인류는 모두 형제라고 하는 신의 마음을 잊고 만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낸 마음의 스모그를 털고 닦아내는 일이 시급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일일생(一日一生)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를 정진하지 않는 한, 완수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거듭 쌓아가는 노력으로, 참된 유토피아가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 깊숙이 잠재하고 있는 위대한 불지(佛智)를 풀어내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반성에 의해 마음의 구름은 맑게 개이고, 위대한 광명의 세계로 통하여, 빛의 천사들의 협력을 얻도록 된다.
부조화한 마음의 세계는, 영위기(靈圍氣)는 흐리고, 어두운 세계의 지옥령들에 의해서 점거되어 있다. 스스로 만들어낸 부조화한 행위에 의해, 인간이 혼란한 사회를 형성한다고 하면, 괴로움의 가담자가 될 것이다. 인간은, 일초, 일초, 경과해 가는 시간 속에서, 마음과 행위가 얼마나 중대한가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4. 일념삼천(一念三千)
사람의 마음은, 본래 자유이다. 마음의 넓이는, 우주대까지 이르고 있다. 보통은 그 넓이를 체험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대우주는 넓구나~~’ 라고 느끼는 마음은, 우주대(宇宙大)로 넓어진 그 마음을 객관적으로 느끼고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와 같은 마음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넓은 마음이 실제의 생활에 나타나지 않고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육체라고 하는, 오관(五官)에 마음이 빼앗겨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매우 작거나, 혹은 이지러져서, 본래의 넓고, 둥글고, 넉넉한 마음이 살려지지 않은 채로 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에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말이 있다. 일념삼천이란, 사람의 마음은 어느 곳에라도 통한다는 말이다. 악(惡)을 생각하면 악(惡), 선(善)을 생각하면 선(善)으로 통하는 것이다.
마음의 바늘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저 세상의 세계로, 그대로, 스트레이트로 통하고 만다. 그러므로 오관(五官)에 좌우되어, 자기보존의 마음을 움직여서, 남을 미워하고 성내고, 시기 질투하면, 그러한 상념들이 모여 있는 지옥계로, 의식이 통하여, 이윽고 자기 자신이, 그와 같은 상념의 와중에 빠져들어, 온갖 장애가 되어 생활상의 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른다.
반대로 넓은 마음으로 되어, 사랑과 자비의 생활, 남을 살리는 정도를 실천하고 있으면, 천상계로 의식이 통하여, 수호령, 지도령의 빛을 받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둥글고 크고, 넉넉한 것이다. 넓은 마음은, 빛의 천사의 인도를 받는다. 언제 어디를 가도 통신을 보내어서, 그 사람을 선도(善導)해 준다. 육체 인간은, 내일의 생명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만큼 방황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황 속에 있더라도, 정도를 지켜 신불을 믿고, 넓은 마음을 잃지 않으면, 반드시 그 사람의 앞길에 희망을 보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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