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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Ruiz Picasso (1881년 ~ 1973)
칠순을 훌쩍 넘긴 1955년경 영화배우 게리쿠퍼와 함께 익살스러운 선글라스를 끼고(왼쪽)
1973년 2월 15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었던 피카소( 오른쪽)
본명은 파블로 피카소의 본명은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스 시프리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마르티르 파트리시오 클리토 루이스 이 피카소(Pablo Diego Jose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i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isima Trinidad Martyr Patricio Clito Ruiz y Picasso)"이다.
1881년 (1세)
10월 25일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으며, 소묘를 가르치던 아버지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와 어머니 마리아 피카소 로페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교사였고,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급학교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했고 졸업이 어려울 정도로 학습능력이 저조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891년 (10세)
가족은 라코루냐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울 때부터 피카소는 이미 남달리 뛰어난 소묘 실력을 발휘했다. 아들의 비범한 재능에 놀란 아버지는 자신의 야망을 온통 아들에게 쏟으며 어린 피카소에게 모델을 구해주었다.
1894년 (13세)
아버지가 첫번째 개인전을 열도록 도와주었다.
1895년 (14세)
이해의 가을 피카소의 가족은 다시 바르셀로나로 이사했으며, 그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소묘를 가르치던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학교 규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다시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Pablo Picasso. The Barefoot Girl. 1895
Pablo Picasso. First Communion. 1895/96.
1897년 (16세)
가을, 피카소는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의 교수법이 따분하다고 느낀 피카소는 카페, 사창가 등을 배회하며, 그곳의 생활을 그리는 데 더 열중했으며, 프라도 미술관을 자주 찾아가 스페인 회화의 진수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벨라스케스가 최고이며, 엘 그레코는 위대한 몇몇 대가들 가운데 속하는 반면, 무리요는 별로 감동을 주지 않는다"라고 썼다. 이곳에서 감상한 작품들은 평생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모델로 그린 〈과학과 자선, Science and Charity〉이 마드리드 미술 전시회에서 가작 입선하자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Science and Charity 1897, 유채
19세기 말, 과학화되어 가는 의학에서 의사의 이미지의 변환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림의 무대는 흰 벽으로 둘러 싸여 밝은 느낌을 주는 병실이다. 침대에 환자가 누워 있는데 환자는 젊은 여인이지만 수척한데다가 창백한 얼굴에 병색이 짙어 얼굴만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환자의 병상 옆에 앉은 의사는 지금 시계를 들고 환자의 맥박수를 측정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서 시계는 의학의 과학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물이며 이 덕분에 의사는 냉정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 더구나 지금 의사의 시선은 시계의 초침에 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의사는 환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데 열심인 것이다. 마치 환자에게 손 한 번 잡아 주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 주는 것보다는 환자의 검사 결과를 파악하는데 더 열심인 요즈음의 의사와도 닮았다.
1898년 (17세)
봄, 피카소는 병에 걸려 바르셀로나에서 사귄 마누엘 파야레스와 함께 카탈루냐 지방의 오르타 데에브로에 가서 1년 내내 휴양을 하며 보냈다.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으며, 이 무렵부터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르누아르, H.툴루즈 로트레크, E.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이곳에서 묘사한 고야의 작품들, 즉 〈투우사 페페 이요의 초상, Portrait of the Bulfighter Pepe Illo〉과 한 뚜쟁이가 젊은 여인의 스타킹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묘 〈됐어, Bien tirada esta〉에 나오는 인물들이 피카소의 후기 작품에도 등장한다.
1899년 (18세)
18세가 되던 해의 초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는 미술학교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또한 어머니의 성을 더 선호하여 작품에 종종 P.R. Picasso라고 서명했다.
Lola, Picasso's Sister. 1899.
1900년 (19세)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였고, 파리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미술의 천재가 프랑스의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 혁명을 일으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 파리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출품했다.
A Spanish Couple in front of an Inn. 1900.
Pastel on cardboard
청색시기 - 1901년부터 1904년 중반까지 피카소의 회화는 청색이 주조를 이룬다.
1901년 (20세)
파리를 다시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세계적인 도시 파리의 모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였으며, 질병과 성병이 가득한 도시의 가난을 두려워하였다. 피카소는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으며,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하지만 당시의 요절한 화가들에 비하면 피카소는 단기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2월 바르셀로나에서는 첫번째로 전시회를 가졌는데, 전시된 작품들은 그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양한 재료로 그린 초상화 50여 점이었다. 이때 그의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또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지낸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비극적인 자살을 함으로써 그의 충격은 더했다.
말경에는 피카소의 서명에서 Ruiz를 완전히 빼버렸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파리를 동경하고 있던 카탈루냐 미술가·작가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그들은 파리의 카페 '검은 고양이' (Chat Noir)를 본뜬 그는 '4마리의 고양이' (Els Quatre Gats)에서 자주 모였다. 그밖에도 죽어가는 여인의 임종을 지키는 한 사제를 주제로 하여 그린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임종의 순간, Last Moments〉도 전시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해에 열린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렸다.
Death of Casagemas 1901 Oil on wood
Child with a Dove 1901 oil on canvas
The Absinthe Drinker. 1901. Oil
Yo, Picasso 1901 Oil on canvas
Woman in a Blue Hat. 1901. Pastel
Le Gourmet. 1901. Oil on canvas
Self-Portrait in Blue Period. 1901. Oil
푸른 옷의 여인
1901년 마드리드에 머문 피카소는 일련의 부인상을 연작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모자를 쓴 무용수 같은 여인들로서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콤포지션도 대담 하지만 묘사력도 능란한 작품이다. 피카소의 부친이 피카소에게 인물을 묘사할 때는 특히 손을 정확히 그리라고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서도 왼쪽 손의 묘사가 뛰어난다. 피카소의 '청색 시대' 때 작품 가운데 대부분은 인물이 주제로 되어 있는 데, 그 많은 인물 작품들에서 보여 주는 것은 손의 멋진 묘사력이다. 90도 각도로 뻗은 팔과 양산을 잡은 왼손만 보아도 이 모델의 활달한 성격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The Visit (Two Sisters). 1902.
Oil on canvas pasted on panel
1903년 (22세)
제작된 《인생, La Vie》은 당시 피카소의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La Vie (Life), 1903) Oil on canvas
이 그림의 스케치에는 남자의 얼굴이 피카소 자신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인생>에는 피카소의 얼굴이 없어지고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얼굴로 변했다. 카사헤마스는 바르셀로나 시대의 동료 화가이며, 1900 년 가을 피카소와 함께 파리의 땅을 최초로 밟은 사이인데, 실연한 나머지 자살 미수 소동을 벌인 장본인이다. 이 사건 때문에 피카소는 카사헤마스를 데리고 급히 파리를 떠나야만 했고, 피카소는 이 쓰라린 경험을 잊을 수 없어 <인생>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배경 위의 그림은 고갱풍이고, 아래쪽 웅크린 여인은 고호풍으로 그려졌다. 그의 청색 시대의 중요한 모티브인 부성애와 청춘의 격렬한 사랑의 표시를 표출시켜 '인생 축도'의 한 다면을 보인 또 하나의 걸작이다.
Breakfast of a Blind Man. 1903. Oil
이 당시 피카소의 작품의 주제 중 하나는 '실명'이었다. 그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 눈 먼 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깊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게다가 심한 성병을 앓고 있었다. 낭만적 파리 생활과는 또 다른 얼굴인 궁핍한 삶의 잔인한 고통과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과 소위 민중적 삶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몸소 체험하며, 그 고통을 짙푸른 청색으로 표현했다.
The Tragedy. 1903. Oil on wood.
피카소가 청색시대에 그린 <비극>이란 작품이다. 그는 마드리드 시절부터 가난한 이들과 곡예사, 거리의 악사들을 즐겨 그려왔다.
장님의 식사
이 당시 그의 작품의 주제 중 하나는 '실명(失明)'이었다. 피카소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 눈 먼 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깊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게다가 심한 성병까지 앓고 있었다. 낭만적 파리 생활과는 또 다른 얼굴인 궁핍한 삶의 잔인한 고통과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과 소위 민중적 삶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몸소 체험하며 그 고통을 짙푸른 청색으로 표현했다.
늙은 기타수
피카소의 이 시기가 그레코에 심취하던 때였다. 굶주리고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성자의 그늘이 있다. 왼쪽 어깨를 강조한 것은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피카소의 '청색 시대' 인체는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손가락도 뼈만이 앙상하다. 이 손으로 기타를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타는 노인의 신체의 일부처럼 달라붙어 있다. 노인은 장님이다. 그를 둘러싼 세계와는 이미 창문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이 밀폐된 상태의 사나이의 조형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다림질하는 여인
1901년 피카소가 파리를 떠나기 전 이 <다림질하는 여인>을 제작하여 사바르테스에게 헌정했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있어서 화면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왼쪽 어깨를 강조한 것이 마치 사원 실내의 건축적 구조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그림은 '청색 시대'의 한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 되었는데, 왼쪽 팔의 만곡이 작품의 깊이를 효과 있게 하고 있다. 여인은 매우 피곤 하다. 여인의 눈은 장님과도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만큼 씩씩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피카소의 극과 극의 융합 능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Old Jew and a Boy, 1903 Oil on canvas
어부의 이별
노란색과 푸른색이 아름다운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청색 시대'의 경향인 이 작품은 짙은 모성애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파리의 술집 광경이나 스페인의 어느 바닷가 같은 곳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바르셀로나에서 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과 같은 테마를 그리던 시기에서 이 작품에서도 지나치리만큼 생략된 풍경이 쓸쓸하고 허전하여, 오히려 그것이 짙은 모성을 느끼게 한다. 피카소는 예술이란 고통과 슬픔에서 낳아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별이란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04년 (23세)
봄에 피카소는 파리로 영구 이주할 결심을 했다. 이당시의 작품에는 정신적인 변화, 특히 지적·예술적 환경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유랑 서커스단이나 곡예사라는 주제는 파리에서 새로 사귄 기욤 아폴리네르와 공통된 관심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주하면서 부터는 연애를 하였고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장밋빛 시대로 바뀌면서 색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해 말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났다. 피카소는 여인들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지만, 정식 결혼은 일생에 두번만 했다. 여러 여인들 중 7명은 피카소의 작품에 영감을 준 중요한 인물들이다.
피카소의 첫 여인은 페르낭드 올리비에 (1881-1966)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1904년(23세)에 만났다.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인 올리비에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한 생활을 묘사하던 "청색 시대"에 올리비에를 만난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색 시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백미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피카소는 올리비에에게 등을 돌렸고 덕분에 올리비에는 피카소와의 모든 것을 청산해야 했다.
Woman with a Crow. 1904.
Charcoal, pastel and water-color on paper
The Catalan Sculptor Manolo (Manuel Hugué). 1904. Ink and watercolor
장밋빛 시대 (1904~1906)
이 시기를 장밋빛 시대라고 하는데 황토색과 연한 장밋빛을 많이 사용했다. 그림에는 곡예사나 그 가족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이색적인 구경거리보다는 그들의 일상생활에 훨씬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시기의 작품에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소재로 다루었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책임을 사회의 잘못보다는 개인의 무능이나 운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비참하기보다는 신비스런 기운이 더 강했다. 그러기에 부유층에게 현실의 부조리를 잊게 해 주고 색다른 위안의 세계를 던져 줄 수 있었다.
1905년 (24세)
피카소는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다.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났고 다음 해에는 H.마티스와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세잔의 형태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된다. 과거의 에스파냐 예술, 카탈루냐 지방의 중세 조각, E.그레코, L.F.J.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테마는 작품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Girl Balancing on a Ball〉(1905), 〈광대, The Actor〉(1905), 〈곡예사 가족, Family of Saltimbanques〉(1905) 등에서 처럼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것이었다.
In 'Lapin Agile' or Harlequin with a Glass. 1905. Oil on canvas
Harlequin Sitting on a Red Couch. 1905
Chinese ink and watercolor on paper
Boy with a Pipe 1905 Oil on canvas
Girl Balancing on a Ball, 1905 Oil
자신을 떠돌이 광대와 동일시하려는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 있는데, 피카소는 어릿광대의 모습을 하고 있고 아폴리네르는 건장한 광대의 모습이다.
Tumblers(Mother and Son) 1905 Gouache
Girl in a Chemise. c.1905. Oil
Family of Saltimbanques, 1905 Oil
서커스를 좋아했던 피카소는 그들의 생활을 화폭에 많이 담았는데 이 작품도 그러하다. 여섯명의 등장인물이 저마다 다른 자세로 서 있는데 피카소는 꽃바구니를 든 딸의 손을 잡은 아를캥(광대)을 자신과 일치시키고 있다.
1906년 (25세)
피카소는 회화와 데생뿐만 아니라 조각과 판화에서도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이 당시 미술품 상인 볼라르가 2000프랑을 주고 '장미빛 시대'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그림을 사들였다. 이 일은 미술로 억만장자가 된 피카소 삶의 서막에 불과했다. 조각가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 혼자 세탁선에 살고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 되고 함께 고솔로 여행을 갔다.
이때 올리비에를 모델로 〈여인과 빵, Woman with Loaves〉을 그렸다. 조각적 형태에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 색채 실험을 한 듯하다( 〈2개의 누드, Two Nudes〉, 〈머리 단장, La Toilette〉),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Portrait of Gertrude Stein〉(1906)과 〈팔레트를 든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alette〉(1906)에는 이같은 노력이 보이며 원시적인 이베리아 조각의 영향도 나타나 있다.
Young Girl with a Goat. 1906. Oil on canvas
The Peasants. Composition. 1906. Oil
Glassware. Still Life with a Porro. 1906
La Toilette. 1906. Oil on canvas
Hairdressing. 1906. Oil on canvas
Self-Portrait with a Palette. 1906
Portrait of Gertrude Stein, 1906 Oil
프랑스와즈 지로는 이 초상화가 티벳의 승려를 닮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표정에서 금욕적이며, 엄격함을 보여 주는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가 누구의 초상이라는 것보다는 그 당시의 피카소의 흑인 조각연구에 연유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06년 봄, 피카소는 이 작품을 그리다가는 지워 버리고,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그녀를 닮겠지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비로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메리카의 여류 작가 스타인이었다. 구도나 표현의 박력에서는 피카소의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나, 과연 스타인 자신이 만족했느냐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 없다.
1907년 (26세)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形態分析)이 비로소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조르쥬 브라크와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공동작업으로 입체주의 미술 양식을 창안하였다. 큐비즘의 발판이 되는 중요한 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제작한다. 그는 동요하던 20세기초 미술의 주역들과 친분을 맺게 되는데, 특히 브라크와는 함께 작업하고 경쟁하면서 우정을 나눈다. 이 해의 늦여름 26세의 피카소는 몇 달에 걸쳐 수 백장의 데생과 습작을 거쳐 거대한 작품을 하나를 완성했다.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을 처음 공개 하던날 많은 사람들은 경악과 분노에 빠져 말을 잃었다. 대 화가였던 마티스는 격분했고 이 후 입체파의 쌍두마차가 될 브라크는 이렇게 외쳤다. "이거 마치 우리들에게 밧줄을 먹게 하거나 불을 들고 석유를 마시게 하는 것 같다" 친한 친구들조차 분노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단 한사람 현대 회화의 저명한 미술 수집상이 될 칸베릴러만이 칭찬을 하였다.
Sketch for The Demoiselles d'Avignon. 1907.
Watercolor on paper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입체파에 들어선 피카소의 대표작이다. 흔히들 이 작품을 두고 20세기 회화 사상 가장 주목할 작품이라고 들 하는 것은 이 그림에는 기하학적 포름으로 환원된 인체와 반추상의 형태가 나타난 까닭이다. 최초의 습작에는 나부들 속에 두 사람의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그것은 창부의 집이었을까. 한 남자는 뱃사람이고, 다른 한 남자는 두게골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다. 두개골이 죽음의 상징인 까닭에 필경 피카소는 남녀의 영원한 육체의 연옥을 그리려고 했을 것이다. 차츰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여자들만이 남았다. 이 작품은 형태상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들의 근원적인 생명력의 강한 호소도 보인다.
Self-Portrait. 1907. Oil on canvas
Nude (Half-Length). 1907. Oil
The Dance of the Veils. 1907. Oil
Composition with a Skull. 1907. Oil
Head of a Woman. 1907. Oil on canvas
Head of a Man. 1907. Oil on canvas
1908년 (27세)
새로 사귄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세잔의 작품을 연구했고 거기서 발견한 요소들로 새로운 기법을 구사했다.
Woman Seated. 1908. Oil on canvas
Friendship. 1908. Oil on canvas
Green Bowl and Black Bottle. 1908. Oil
Pot, Wine-Glass and Book. 1908. Oil
Decanter and Tureens. 1908. Oil
Flowers in a Grey Jug and Wine-Glass with Spoon. 1908. Oil on canvas
La Fermière (half-length). 1908. Oil
La Fermière (full-length). 1908. Oil
House in a Garden. 1908. Oil
Dryad. 1908. Oil on canvas
Three Women. 1908. Oil on canvas
Woman with a Fan. 1908. Oil
Two Naked Figures. 1908. O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