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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도(文字圖), 다른 이름은 김태곤 관련 자료,
효제도(孝悌圖)세로 73.9cm, 가로 33.7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문자도(文字圖)는 문자와 그 의미를 형상화하여 표현한 그림을 도안하여 그린 그림. 7폭 편화(片畵) 형태. 지본채색(紙本彩色). 중앙에 도안화된 문자가 묘사되고, 상단에 화제(畵題)가 묵서됨. 1폭에는 ˈ孝ˈ의 획에 잉어, 죽순, 부채 등이 그려짐. 상단에 ˈ大舜彈琴陸績衣橘王祥永鯉孟宗雪筍貢度扇枕ˈ이 묵서됨. 2폭에는 ˈ悌ˈ획에 할미새와 매화가 그려짐. 상단에 ˈ森回栽益並帶檀紅ˈ, ˈ日暖珠原鶺鴒和鳴ˈ이 묵서됨. 3폭에는 ˈ忠ˈ의 획에 용, 조개가 그려짐. 상단에 ˈ比亍諌争龍逄貞卽ˈ, ˈ蛤跱杓賀漁變成龍ˈ가 묵서됨. 4폭에는 ˈ信ˈ의 획에 새, 매화나무가 그려짐. 상단에 ˈ上林秋風白鴈傳書ˈ, ˈ瑤池白桃靑鳥傳信ˈ가 묵서됨. 하단에 ˈ경희대교수ˈ가 적혀있음. 5폭에는 ˈ義ˈ의 획에 복숭아나무와 비둘기가 그려짐. 상단에 ˈ綠荷池塘閑?和鳴ˈ, ˈ桃園結義雲花約約ˈ이 묵서됨. 6폭에는 ˈ廉ˈ의 획에 게가 그려짐. 상단에 ˈ粟里松菊寺林赴石ˈ, ˈ廉溪寒川前退後退ˈ이 묵서됨. 7폭에는 ˈ恥ˈ의 획에 탑 등이 그려짐. 상단에 ˈ首陽梅月夷齊淸卽ˈ, ˈ愡愡庭中辞金不受ˈ가 묵서됨.
국립민속박물관 전경
한국의 미. 서울의 얼굴, 건물
○ 패옥과 후수는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 등의 예복을 입을 때 옆과 뒤에 차는 의례적인 장식으로, 흉배와 더불어 관직의 등급을 나타냈다. 패옥은 관직에 따라 3품 이상은 청옥(靑玉), 4품 이하는 백옥(白玉)을 찼다. 후수는 관직에 따라 색채의 배합과 수의 무늬, 거기에 매단 환(環)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패옥과 후수는 후대로 오면서 품계 구별보다는 예복의 장식물로 의미가 바뀌었다.
후수(後綬, 국가민속문화재 제241호), 19세기, 조선, 장영직(張榮稷, 1861-1944)유품: 예복을 입을 때 뒤에 두르는 띠 장식
패옥(佩玉, 국가민속문화재 제241호), 19세기, 조선, 장영직(張榮稷, 1861-1944)유품: 예복을 입을 때 좌우에 차는 옥 장식
약방 저울
씨앗 주머니
○ 살창고쟁이, 19세기, 경복지역에서 많이 입던 여성용 속옷이다. 삼베로 만들었으며, 허리 아랫부분을 살창 모양으로 만들어 바람이 잘 통하게 했다.
○ 무녀(巫女): 죽은 자의 영혼을 통해 길흉을 예측하며 굿을 하는 여자
○ 부적(符籍): 종이에 글씨 ·그림 ·기호 등을 그린것으로 재앙을 막아주고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주술적 도구.
○ 성황신 위패(城隍神 位牌):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농사일을 돌보는 마을신인 성황신의 위패
○ 국시말(神馬),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마을 제당祭堂에 모신 의례용 말馬이다. 신이 땅과 하늘을 오르내일 때, 말을 타고 다닌다고 여겨 마을 제당에 말을 많이 모셨다. 이 말은 뒷다리가 부러져 잇는데, 각지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을의 수호신과 함께 호랑이와 싸우다 다리를 잃은 것으로 호랑이의 피해[虎患]을 막는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 국시말(神馬), 19세기, 고대 신마전승의 하나로 해석 되는데, 서낭신이나 국사신(國師神)이 타고 다니는 말 또는 그 수호마(守護馬) 또는 사자(使者)로, 서낭당 또는 국사당에서 마을 제사를 지낼 때 당 안에 봉안하였다.
○ 삼신상(三神床): 아기를 점지해 주는 세 신령을 모신 상.
삼신은 포태신(胞胎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아나 산모의 제액(除厄)과 제화(除禍)를 도모하면서 복(福)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차렸다. ≪삼국유사≫에 보면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삼신이라 하였으므로 ‘삼신자손’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이 그 삼신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부른 것으로 여겨진다. 삼신을 부르는 명칭은 삼신(삼시랑)·삼신단지·삼신할머니·삼신바가지·삼신판·삼신할아버지 등으로 부른다. 삼신을 모시는 장소는 안방·마루·부엌이나 고요한 곳 등에 모시나, 주로 안방 윗목 구석에 모셔둔다. 삼신상에는 미역·쌀·정화수를 떠놓는데 한지를 깔고 쌀·미역·가위·실·돈을 놓는 지방도 있다. 며느리의 삼신상은 방 안쪽에 차리고, 출가한 딸이 친정에서 해산할 때는 방문가에 차리며, 출산 직후 삼신상에 놓았던 미역과 쌀로 첫 국밥을 지어 산모에게 먹인다. 출산 후 3일째와 7일째, 14일째, 21일째도 삼신상을 차려 그 상의 밥과 국을 산모가 먹는다. 이 삼신상을 차리는 사람은 대개 시어머니로 해산한 방 머리맡에 짚을 깔고 상의 앞쪽으로 밥, 뒤쪽으로 미역국·물을 각기 세그릇씩 차려놓고 아기가 탈없이 잘 크도록 빈다. 축문의 내용은 “젖 잘 먹고 젖 흥하게 점지해서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긴 명을 서리 담고, 짧은 명은 이어대서 수명 장수하게 점지하고, 장마 때 물 붇듯이 초생달에 달 붇듯이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게 해주십시오.”하고 절을 두 번 한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삼신단지(三神壺, 産神壺): 아기를 점지하는 일과 출산 및 육아를 관장하는 삼신(三神)의 신체(神體). 쌀이나 미역 따위를 넣은 단지로, 지역마다 명칭과 형태가 다르며 대체로 안방의 시렁 위에 모셔 둔다.
○ 선비(선비):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유교용어. 선비는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을 갖는다. 어원적으로 보면 우리 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선’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 바라지문
○ 서당: 조선 시대에 초등 교육을 맡아 했던 사립 학교이다. 오늘날의 초등학교와 비슷하지만 규모는 훨씬 작았고, 주로 유학에 바탕을 둔 한문 교육이 이루어졌다.
○ 돌: 생후 일주년인 아기의 첫 생일: 한자로는 돌을 초도일(初度日)·수(晬)·수일(晬日) 등으로 표기한다. 이와 같이 아이가 출생하여 꼭 1년이 되는 첫 생일날을 돌이라 하여 빈부귀천이나 경향(京鄕)의 지역적 차이 없이 누구나 아이를 위한 돌잔치를 지내준다.
돌날 아침에 삼신상을 차려 아이의 명복(命福)을 빌고, 가족이나 일동이 미역국과 쌀밥으로 조반을 마친 다음 돌잔치를 시작한다. 돌맞이하는 아이는 돌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준비된 돌상 앞에 앉는다. 사내아이는 저고리와 바지에 조끼·마고자·두루마기를 입히고, 그 위에 남색 쾌자를 입힌다.
머리에는 복건을 씌우고 발에는 수를 놓은 타래버선을 신긴다. 가슴에는 돌띠를 두르고 허리에는 돌주머니를 채워준다. 여자아이에게는 색동저고리와 다홍의 긴 치마를 입히는데, 당의를 덧입히기도 한다. 머리에는 조바위나 굴레를 씌우고 발에는 타래버선을 신긴다. 가슴에는 역시 돌띠를 매주고 치마말기에 돌주머니를 채워준다.
돌상은 안방이나 대청에 차리는데 각종의 떡과 과일을 풍부히 올려놓고 그밖에 강정·약과·약밥·고기·생선·전 등도 많이 차려 놓는다. 특히 돌음식으로는 국수·백설기·수수팥떡 등 장수와 무병, 부정을 막는 의미의 음식이 차려진다. 돌맞이 할 아이는 병풍을 쳐놓은 곳을 뒤로 하고 돌상을 향하여 앉게 된다.
앉을 자리에는 흰 무명 한 필을 접어서 방석같이 해놓는다. 아이의 전면에는 부모와 형제자매·일가친척·하객들이 모여서 아이를 바라본다. 돌상 아래 바닥에는 여러 가지 물건을 질서 없이 놓아둔다.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쌀·돈·책·붓·먹·두루마리·활·장도·흰실타래·대추·국수·떡 등을, 여자아이의 경우에는 쌀·돈·책·붓·먹·두루마리·바늘·인두·가위·잣대·흰실타래·대추·국수·떡 등을 놓아둔다.
아이는 이것들을 집는데, 첫번째와 두번째에 집는 것으로써 그 아이의 성격·재질·수명·재복·장래성을 점쳐본다. 이러한 행사를 돌잡히기라고 한다. 책·먹·붓·두루마리를 먼저 집으면 학문에 힘써 과거에 등과하여 벼슬을 할 것이라고 보고, 쌀·돈을 먼저 집으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활·장도를 먼저 집으면 무관이 될 것이라 하고, 실과 국수를 먼저 집으면 장수하리라고 본다. 대추를 먼저 집으면 자손이 많으리라고 보고, 떡을 먼저 집으면 미련하리라고 보고, 바늘·가위·자·인두를 먼저 집으면 바느질을 잘할 것이라고 본다.
부모와 가족들은 아이가 잘 살기를 바라서 쌀과 돈을, 공부 잘하기를 바라서 책·붓 등을, 명이 길기를 원해서 실과 국수를, 바느질을 잘하게 하기 위해서 바늘·인두 등을 가까운 데 놓아두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가 바라는 대로 물건을 집지 않는 수가 많다.
돌날에는 떡을 쟁반이나 대접에 담아서 이웃집에 보낸다. 이것을 돌떡 돌린다고 한다. 돌떡을 받은 집에서는 떡을 가져온 그릇에 돈·쌀·실타래 등을 넣어 답례한다. 돌날에는 일가친척이며 친지들이 많이 와서 축하를 하고 주식과 떡을 대접받는다.
이 때 축하객들은 돈·쌀·실·수저·밥그릇·밥상 등의 축하품을 가지고 온다. 외할머니나 고모 같은 근친자는 옷·반지·수저·포대기·돈 등 다른 축하객보다 값이 나가는 선물을 한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타래버선: 오목버선이라고도 한다. 주로 돌옷과 함께 신는 것으로 장식이 많다. 솜을 두어 부드럽게 직선으로 손누비를 한 버선으로, 발등 위 양볼에는 수를 놓고, 버선코에는 색실로 된 삭모(朔毛)를 달며, 앞부리와 뒤꿈치 위에는 사뜨기를 하여 곱게 만든다. 버선목 위에는 사내아이는 남색 선을 두르고 남색 대님을 달았으며, 계집아이는 붉은색 선에 붉은색 대님을 달았다. 더욱 아름답게 만든 타래버선은 오목버선이라고 하는데, 거죽은 정사각형 3장을 2등분한 삼각형 6조각으로 만든 것으로, 올대로 누비고 발목 밑에 물결무늬·불로초무늬·꽃무늬 등을 수놓은 것이다. 통으로 빨아 신을 수 있으므로 자주 손질할 수 있다.
○ 들풀
○ 말뚝박기[骑马游戏] ‘말 타기놀이’라 부르기도 한다. 말과 마부를 정하거나 편을 나누어 말 편과 말타는 편을 정해서 타기도 하고 말이 되기도 하면서 노는 놀이.
○ 김장 종이인형
○ 장독대
○ 관복 흉배胸背: 조선시대에 왕족과 백관이 입는 상복(常服)의 가슴과 등에 달던 장식. 세종 28년(1446)에 처음 흉배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영의정이었던 황희의 반대로 제정되지 않았다. 단종 2년(1454)에 양성지의 건의에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의 상복에 흉배를 달았다. 당시의 문양은 대군은 기린, 도통사는 사자, 왕자와 군은 백택(白澤), 문신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雲鶴), 3품은 백한(白鷳)이었고, 무신 1 ·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표(熊豹), 대사헌(大司憲)은 해태로 정하였다.
연산군 11년(1505)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흉배를 사용하였는데 사슴, 돼지, 거위, 기러기 등 명나라에는 없는 독특한 문양을 사용하였다. 영조 때에는 이를 간략화하여 문신 당상관은 운학 흉배, 당하관은 백한 흉배로 통일하였다. 고종 8년(1871년)에 이것을 다시 문신당상관은 쌍학(雙鶴), 당하관은 단학(單鶴), 무신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는 단호(單虎)로 정하여 1910년까지 사용하였다.
흉배는 관복과 같은 색의 비단에 다양한 문양의 자수를 놓은 것으로 관복을 장식하는 동시에 품계를 표시해주는 구실을 하였다. 특히 왕족이 사용하는 흉배는 보(補)라고 하였는데 용무늬가 놓인 원형의 보를 가슴과 등, 양 어깨에 달았다. 문무백관의 흉배는 시대에 따라 다른 문양을 사용하였다. 이 흉배는 쌍학 흉배로서 파란색 비단에 불로초를 입에 물고 있는 단정학 두 마리와 구름, 바위, 파도, 불로초 등을 수놓았다.
○ 목기러기: 혼례 때 전안례奠雁禮를 하기 위하여 나무로 목각한 기러기.
○ 전통혼례
◎ 한국의 미 - 조각보
◇ 설경산수화(雪景山水畵), 20세기, 토림 김종현(土林 金鐘賢, 1913-1999), 겨울철 농촌의 일상을 묘사한 그림으로, 땔감을 짊어지고 눈길을 헤치며 걸어가는 남자를 담았다.
○ 포목상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조형뭉 - 반복
○ 해랑당海娘堂 남근목男根木: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바닷가 해랑당에 걸어놓았던 해랑당 남근목(海娘堂 男根木)으로, 해신당 또는 여신당 으로도 불리는 해랑당(海浪堂)에 모신 처녀와 청년의 가슴아픈 한을 풀어주기 위해 바치던 남근목이며, 마을의 풍요와 다산 및 바다에서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 해치, 해태상,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화로불에 군고구마 - 한국의 미
○ 회갑연
○ 박수근〈모자〉
◇ 한국의 미 - 창문
○ 수복 매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