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호 변 환벽당 바로 위에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취가정醉歌亭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뛰어난 활약으로 1593년 선조로부터 형조좌랑 직함과 충용장 군호를 받았다. 그러나 1595년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 때에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고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옥사한 김덕령이 어느 날 석주 권필(1569~1612)의 꿈에 나타나 한 맺힌 노래를 불렀다.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구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이름 받들고자
그 노래가〈취시가醉時歌〉였다. 그 노래를 들은 권필은 김덕령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지난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天命을 어찌하리,
지하에서 영령이 품었을 끝없는 한
취시가 한 곡조에 분명히 드러나네.”
취가정은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 등이 1890년에 지은 정자로, 정자의 이름은 권필의 꿈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큰 나무들이 서 있는 동그란 언덕에, 자미탄을 뒤로하고 외따로 떨어져 자리 잡았다. 인근에 있는 정자들이 주로 자미탄을 내려다보는 데 비해, 취가정은 널리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고 있다.
김덕령의 말년이 불우했는데, 권필의 말년 역시 비참했다. 광해군 시대에 임숙영(任叔英)이 과거 시험의 「책문(策文)」에서 전란 후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면서, 유희분(柳希奮) 등 권신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공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삭과(削科)된 일이 있었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권필이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이를 풍자(諷刺)하였다. 크게 노한 광해군이 시의 출처를 찾았고, 1612년 김직재의 옥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던 중, 권필이 조수륜과 연관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일로 인해 권필은 전라남도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귀양지로 가던 도중 동대문 밖에서 그를 동정하는 행인들에게 받은 술을 폭음(暴飮)했다가 죽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온 세상 모두가 명철하건만
어이하여 나만 홀로 어리석은가.
자취는 영욕 밖에 벗어났건만
명성은 시비 속에 있다니.
거처할 땐 책 속의 성인을 대하고
외출해서는 호숫가, 산에서 노닌다.
평생에 늘 한 동이 술을 마주하면
나머지 일은 나 모른다.”
권필(1569~1612)이 지은 <자영(自詠>이라는 시 전문이고, 다시 또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 없는 법.
갖은 고생 겪으며 길가에 다니나니
창 잡은 수자리 졸개는 면했으니
표주박 물 마시는 분수를 감내하리.
위태한 때는 은거해야 하나니
부귀를 어찌 바라랴.
성공과 실패는 결국 똑같고
만고의 일은 모두가 허망하니
책 펴고 성현을 대하며
긴 낮 동안 맑은 향을 사르나니,
문을 닫고 이렇게 일생을 마쳐
영고성쇠 따위는 모두 잊으리라.”
권필의 시 <술회> 라는 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김수영 식으로 옹졸하게 반항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다.
김덕령과 권필의 이야기가 서린 취가정에서 술 한 잔 못 마시고 그들을 추억하고 있으니, 이 세상은 난세亂世인가, 성세盛世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