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둥글고 크고, 넉넉한 것이다. 넓은 마음은, 빛의 천사의 인도를 받는다. 언제 어디를 가도 통신을 보내어서, 그 사람을 선도(善導)해 준다. 육체 인간은, 내일의 생명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만큼 방황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황 속에 있더라도, 정도를 지켜 신불을 믿고, 넓은 마음을 잃지 않으면, 반드시 그 사람의 앞길에 희망을 보내준다. 오관(五官)에 사로잡힌 좁은 마음은, 넓고 크고 자유로운 마음을 스스로 폐쇄하는 것이다.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말은, 중국의 천태지의라는 고승이 썼던 말이다. 일념(一念)이란, 상념의 바늘이다. 이렇게 하고 싶다. 저렇게 하고 싶다. 이것이 먹고 싶다. 저것이 갖고 싶다. 등의 상념이다. 인간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할 수 없다. 하나밖에 할 수 없다. 그 하나로서 악(惡)을 생각하면 지옥으로 통하고, 선(善)을 생각하면 천상계로 통하고 만다. 따라서 악(惡)은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삼천이란, 3이란 수는 나눌 수 없는 수이다. 2나 4나 6은 나눌 수 있으나, 3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천(千)이라는 표현은, 큰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3천(三千)이라고 하면 무한대라는 의미가 된다. 일념삼천은 우리의 생각이 무한대의 방향으로 달려간다는 뜻이다. 악을 생각하면 악(惡)의 극(極)으로, 선을 생각하면 선(善)의 극(極)으로 통한다.
일념삼천을 각도를 달리하여 해석하면, 사람의 마음의 무한성, 즉 자유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마음을, 악(惡)에다가 연결시키면 이윽고 자기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결과가 되고 만다.
대체 악(惡)이라든가 선(善)은, 무엇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일까. 보통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나쁜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 물론 도둑질하거나, 살인하는 것은 악(惡)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정법에서 말하는 선(善)과 악(惡)은,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마음'을 문제로 삼는다. 즉, 가지고 싶은 마음, 남을 미워하는 상념은, ‘자기가 소중하다’, 자기만 좋으면, 이라고 하는 자기보존과 자아아욕(我慾)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자아가 없다면, 도둑질하거나 가로채거나 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을 터이다.
일체의 악은, 자기보존인 것이다. 자기보존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보존을 중도로 돌려, 만족함을 안 생활을 해 가면, 이 세상은 조화된 사회가 될 것이다.
신의 심판은, 사람의 행위도 물론이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그 행위를 행위로서 움직인 마음, 자기보존의 상념, 악(惡)의 일념(一念)이, 제일 중요시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선 우리들은 악(惡)을 생각하지 않고, 항상 선념(善念)을 갖고, 정도에 맞는 생활을 해나가도록 해야 한다. 가정의 불화, 질병, 사업상의 문제, 공해 등 온갖 트러블은, 자기보존과 족함을 모르는 욕망이 작용한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5. 지식과 지혜
지식과 지혜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허지만 이 양자를 명확하게 구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디까지가 지식이고, 어디서부터 지혜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지혜란, 내재된 산 경험이다. 지식은 이 세상에서 배운 모든 지식 그것을 말한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실생활에 어느 정도 응용이 가능한가. 아무리 해야 10의 지식 가운데, 한 개나 두개다. 학자나 특수한 직업인이면 몰라도, 사회에 진출한 사람들의 응용범위는, 그야말로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을 응용해서 실생활에 살리려고 하면, 대개는 실패한다. 대학교수나 학자로 하여금, 정치나 사업을 시켜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성공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생활의 터전은, 살아있는 생물과 마찬가지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다. 어제의 지식이 오늘은 소용없는 것이 많다.
오늘날의 의학은 100년 전에 비해서 엄청나게 진보하였다. 그러나 의학의 진보와 함께, 새로운 질병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차례차례로 새로운 신종의 질병이 나타나서, 의학이 거기에 따라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말한다. 의학의 진보가 있으니까, 이제까지의 미발견의 질병이 발견되는 것이다, 원래 그런 질병이 있었는데, 의학이 유치했기 때문에 그것을 몰랐던 것이라고, 또한 지금까지의 의학은 치료의학이었을 뿐 예방의학은 미개척 분야이다. 그런 까닭에 환자가 그칠 날이 없다고도 말한다. 나는 의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의학의 분야에서 고칠 수 있는 질병도 많고, 그런 치료를 하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질병의 80% 가까이는, 물리적 치료만으로써는 낫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 하면 마음이 질병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신종의 질병이 의학의 진보와 병행해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사물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시대와 함께 욕망의 방향도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의학은, 물질과학으로서, 물리적 치료에만 역점을 두고 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물질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진보되어 왔지만, 질병의 영역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넓어져 가기 때문에, 의학과 질병은 끊임없는 경쟁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지식과 현실이다. 의학이라는 소위 과학 지식의 정점을 달리는 학문조차도, 질병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문, 지식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우리의 생활의 터전은, 지식이나 학문에 의해서 지탱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학문, 지식의 필요는 새삼 논할 필요도 없지만, 요는, 우리의 날마다의 경험이, 우리의 실생활을 살려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날마다의 경험에서 우러난 생활의 지혜가, 우리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직업이었건, 혹은 가사였건, 지식만으로는 계산해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엇이란 경험이다. 경험으로 습득한 것이, 비로소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다. 예부터, < 외우기보다는 숙달하라 > 고 하는 속담이 있다. 어떠한 직업이건, 제 몫을 하기까지에는 3년, 5년의 세월을 필요로 한다. 대학을 나와서, 취직을 해도 금방은 힘이 되지 않는다.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지도자적 지위에 앉는 것도 아니다. 초등학교만으로도 훌륭한 사회인으로서, 대회사의 사장을 맡아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예는 그 사람의 경험과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사회에서의 생활의 지혜가, 그렇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도대체 지혜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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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
나무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