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는 길 : http://www.sbook.co.kr/info_02.html
합정역 2번 출구 하차 -> 크라운 베이커리(로즈버드)와 마포만두 사잇길로 5-10분정도 쭉 걸어내려가시면 큰 길(차도)가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에 보시면 hp 간판 상점 -> 의자 가게 -> 아름다운 가게-> 문턱없는 밥집 2층
작은책 강연은 쭈욱 이어집니다. 올해 이소선어머니 강연으로 바로 다음날 이지상 가수의 강연이 있습니다. 다음은 이지상 선생 홈피에 있는 소개글입니다.
고단한 사람들의 일상에 희망의 언어를 들려주는 노래하는 사람
경기도 포천에서 나고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청년문예운동의 시기를 거쳐 노래마을의 음악감독.민족음악인 협회 연주분과장을 지냈고
드라마.연극.독립영화 음악 몇 편을 만들었으며
98년 1집 "사람이 사는마을"2000년2집"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2002년3집"위로하다.위로받다"2006년 4집 "기억과 상상"등의 앨범을 발표했다
현재 시노래 운동"나팔꽃"의 동인으로 깊이있는 메시지를 통해 삶의 좌표를 만들어가는 음악을 지향하고있으며 성공회대학교에서 "노래로 보는 한국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인권실천 시민연대 운영위원.
1998년 기독교 방송 사랑의 노래 평화의노래-“노래만큼 좋은세상”진행
2000년 “ 5시엔 쉬어갑시다 - ”시노래 산책“진행
서울방송(sbs) 문인숙의 노래세상 - 러브레터를 씁시다 진행
2000년 8월 진보넷 “퍼주는 음악 퍼가는 노래”진행 2004년 라디오 21 “이지상 손화정의 사람이 사는 마을”진행
2005년 라디오21 “이지상의 발자국 통신”진행
누리코리아 “이지상의 행복한 음악가게”진행
“앗! 춤의 왕이다. 저 익숙한 선율은”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를 외쳤던 91년 5월의 어느 날 저녁, 나는 을지로 인쇄골목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종로에서 시작한 시위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종로는 물론 청계천 을지로까지 진출하였고 명지대 새내기 강경대를 죽인 원흉 노태우를 처단하라는 분노의 함성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박승희가 죽고. 김영균과 천세용이 죽었습니다. 연 이은 분신의 행렬에 격분한 많은 청년들이 얕은 충격에도 곳 터질 것 같은 뇌관이 되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종로에서 백골단의 기세는 무척 무서웠습니다. 흰 헬멧과 청 카바로 상징되는 그들은 종로한복판의 시위대를 낙원상가 쪽 골목으로 몰더니 지랄탄 자욱한 연기 속에서 강경대를 죽였던 몽둥이를 어린 여학생들의 머리에까지 휘둘렀습니다. 백골단에 쫓겨 막다른 골목의 담장을 몇 개쯤 넘은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산동네 판자촌과 다를 바 없는 피맛골 (YMCA뒤편상가골목)의 안살림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시위본대와 합류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신세계백화점과 대한극장을 지나 경찰의 검문을 피할 수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로 포장마차를 택했던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뉴스를 들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시위대와 흩어졌던 대한극장 부근 골목에서 한 여학생이 호흡곤란으로 숨졌다는 내용의 단신이었습니다. “호흡곤란은 무슨, 때려 죽였지. 나쁜 놈들” 나이 지긋한 한 시민의 장탄식에 그만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터졌습니다. 그날 매캐한 최루연기가 가시지 않은 버스 안에서울음을 참으려 속으로 불렀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 내가 베들레헴에 태어날 때에도 하늘의 춤을 추었다”
버스가 빨리 달릴 때는 빨리 불렀지만 집 앞 골목을 눈앞에 두고는 가로등 아래 앉아 한없이 느리게 불렀습니다
“높은 양반들 위해 춤을 추었을때 그들 천하다 흉보고 비웃었지만 어부 위해서 춤
을 추었을 때에는 날 따라 춤을 추었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춤 췄더니 높고 거룩한 양반들 화를 내면서 나를 때리고 옷을 벗겨 매달았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
비 내리는 오월. 성대 불문과 4학년생 김귀정은 내가 도망쳐 나온 서울 중심가 한복판의 후미진 골목에서 쓰러졌습니다. 백골단의 토끼몰이 식 진압과 무차별적 폭력이 죽음의 원인이었음이 확실했지만 경찰과 언론은 도망치던 시위대에 의한 압사라고 발표 했습니다. 그 이후 한동안 벚꽃 지는 저녁이면 그해 오월의 역사 속에 청춘을 묻었던 열사들의 이름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꽃잎에 물든 그이들의 초상을 정의의 하느님이라 여기며 불렀던 “춤의 왕”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높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춤을 계속해 추기란 힘이 들지만 끝내 땅속에 깊이 묻힌 이후에도 난 아직 계속 춤춘다”
글 그림 출처 : www.sbook.co.kr